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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광진구 모진동 발굴을 위한 기초자료

  • 2025년 5월 26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조사광진구 역사모진동1912년 서울

내가 살던 그 동네,알고 보니 창덕궁 왕실의 땅이었다

1912년 광진구 모진동 토지대장으로 읽는 잊혀진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자료

지금 광진구 어딘가를 걷고 있다면, 잠깐 멈춰봐.



네 발밑 그 땅이, 조선 왕실 창덕궁의 소유지였을 수도 있거든.



1912년 모진동 토지대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가 몰랐던 이 동네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


목차

  1. 모진동, 우리가 몰랐던 1912년의 민낯

  2.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던 논 이야기

  3. 모진동에서 가장 넓었던 땅 — 밭의 생명력

  4. 사람이 살던 집터, 그 온기의 기록

  5. 무덤과 임야, 자연과 함께 잠든 기억들

  6. 성씨로 읽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7. 국유지와 창덕궁 — 이 땅에 숨은 왕실의 흔적

  8.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이 땅에 주목하는 이유

  9. 과거를 아는 자만이 미래를 걸을 수 있다



01 — 모진동, 우리가 몰랐던 1912년의 민낯

광진구 모진동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파트 단지, 버스 정류장, 편의점 불빛, 익숙한 골목. 지금의 모진동은 도시의 평범한 일상 속에 자리 잡은 동네다. 그런데 바로 그 발밑, 콘크리트 아래에 잠든 1912년의 모진동은 오늘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공개한 기록에 따르면, 1912년의 광진구 모진동(화양동)은 총 222필지, 373,033㎡ 규모의 마을이었다. 지금의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서기 전, 이 땅에는 논과 밭이 넘실대고, 나무 그늘 아래 한옥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절의 흐름에 맞춰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오늘 이 글에서는 그 1912년의 모진동 토지 기록을 통해, 한 마을이 품고 있던 삶의 켜를 한 장 한 장 펼쳐보려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이 오늘날의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왜 여전히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지도 함께 짚어볼 것이다. 자, 그럼 100년 전의 모진동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보자.

총 필지

222필지

1912년 기준

총 면적

373,033㎡

약 11만 3천 평

밭(전)

117필지

184,096㎡

논(답)

51필지

103,246㎡


02 —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던 논 이야기

1912년 모진동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드넓은 논이다. 51필지에 걸쳐 총 103,246㎡의 논이 마을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도심 풍경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이곳에는 여름이면 파릇파릇한 벼가 바람에 물결치고, 가을이면 황금빛 이삭이 고개를 숙이는 장관이 펼쳐졌다.

한강과 가까운 광진 일대는 예로부터 물 공급이 원활해 논농사가 발달했다. 벼를 심고 수확하는 일 년의 리듬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 전체를 지배했다. 못자리를 만들고, 모내기를 하고, 김을 매고, 추수하는 순간마다 이웃이 함께 품앗이로 땀을 나눴다. 그 협동의 기억이 이 51필지의 논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하는 조사 기관들이 논이었던 지역을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논은 수분이 풍부한 환경 덕분에 유기물과 목재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된다. 실제로 서울 강변 일대의 발굴 현장에서는 논 지층 아래에서 조선시대 농기구, 목기, 씨앗류 등이 출토된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 모진동의 이 103,246㎡짜리 논 지대는 그래서 단순한 옛 농경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03 — 모진동에서 가장 넓었던 땅, 밭의 생명력

모진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것은 밭이었다. 무려 117필지, 184,096㎡에 달하는 규모로, 전체 면적의 약 49%가 밭이었다. 논보다도 훨씬 많은 필지와 면적을 차지한 밭은, 그 시절 모진동 사람들의 식탁을 직접 책임지던 공간이었다.

봄이면 감자와 보리가 자라고, 여름이면 참외와 콩이 덩굴을 뻗었으며, 가을이면 고구마와 무가 땅속 깊이 살을 찌웠다. 밭 사이를 걷다 보면 계절마다 달라지는 냄새와 색깔이 있었을 것이다. 흙냄새, 풀냄새, 갓 딴 채소의 싱그러운 향기. 그것이 1912년 모진동의 일상적인 공기였다.

밭은 논과 달리 지형적 제약이 적어 언덕 사면이나 야산 자락에도 조성될 수 있었다. 덕분에 모진동 곳곳에 넓게 퍼진 밭의 분포는 당시 마을의 지형 구조와 사람들의 이동 경로를 역으로 추적하는 단서가 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밭 지대는 다양한 생활 유물이 출토되는 구역으로 분류된다.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은 땅일수록, 그 아래에 남겨진 기억도 다층적이기 때문이다.


04 — 사람이 살던 집터, 그 온기의 기록

논과 밭 사이사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터가 있었다. 1912년 모진동의 대지는 47필지, 15,781㎡였다. 지금처럼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가 아닌, 마당이 있는 한옥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이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립문을 열고 나온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녔을 것이다.

47필지의 집터 안에서 수십 가구의 삶이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아버지는 들판으로 나가 일을 하고, 어머니는 우물가에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은 툇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일구고 가꾸었던 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아래에 있다.



집터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는 지점 중 하나다. 온돌 아궁이 흔적, 분청사기와 백자 조각, 철제 부뚜막 도구, 기와 편, 나무 기둥 구멍까지.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발굴 기관들의 보고서를 보면, 서울 구도심 집터 지대에서 조선 중기 이전의 생활 유물이 꾸준히 출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진동의 47필지 집터 또한 그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다.


05 — 무덤과 임야, 자연과 함께 잠든 기억들

마을에는 살아있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12년 모진동에는 1필지, 604㎡의 분묘지가 있었다. 작은 규모이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의 마지막 이야기가 고요하게 잠들어 있다. 조상의 무덤은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단순한 매장 공간이 아니었다. 봄이면 성묘를 오고, 제삿날이면 온 가족이 모이는 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

그리고 모진동에는 5필지, 68,955㎡에 달하는 임야도 있었다. 전체 면적의 약 18%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숲이다. 이 임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땔감을 제공하고, 약초를 캐는 생활 터전이었으며, 더위를 피해 쉬어가는 그늘막이었다. 계절마다 새소리가 달라지고, 나뭇잎 색깔이 바뀌며, 풀향기가 변했던 그 숲의 기억이 여전히 이 땅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분묘지

1필지

604㎡

임야

5필지

68,955㎡

잡종지

1필지

347㎡

대지

47필지

15,781㎡

분묘지 구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별한 관리 대상이 된다. 묘비 파편, 도자기 제기류, 청동 제사 용구 등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 여러 발굴 현장에서 1910년대 지적도의 '분묘' 표시 구역과 실제 출토 유물의 위치가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결과가 확인된 바 있다.


06 — 성씨로 읽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토지대장에 남겨진 성씨들은, 그 마을이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1912년 모진동의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이씨가 11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갖고 있었고, 김씨·박씨·신씨가 각각 6필지씩, 안씨가 5필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흔한 성씨들이지만, 그 한 글자 한 글자 뒤에 각각의 삶이 있었다.

이씨 집안은 어떤 이유로 가장 많은 논밭을 갖게 되었을까. 신씨와 안씨는 어떻게 이 마을에 뿌리를 내렸을까.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함께 농사를 짓고, 이웃끼리 제삿날을 챙기고,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만들어간 공동체의 기억은 이 땅에 층층이 쌓여 있다. 성씨별 토지 분포를 분석하는 일은 문화재 조사 기관들이 지역의 씨족 역사와 고문서를 함께 검토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된다.



07 — 국유지와 창덕궁, 이 땅에 숨은 왕실의 흔적

모진동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국유지와 창덕궁 소유 토지의 존재다. 전체 222필지 중 무려 162필지가 국유지였다. 전체의 73%에 달하는 압도적인 비율이다. 이 땅들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까지 국가가 직접 관리하거나 주민에게 경작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창덕궁 소유 토지 4필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실의 이궁, 창덕궁. 그 왕실이 광진구 모진동 땅에까지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단순히 평범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왕실 소유지는 일반 민간 토지와 달리 특별한 용도로 관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창덕궁의 토지가 먼 광진구에까지 뻗어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 왕실의 경제 기반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서울 일대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일제강점기에 창덕궁 소유지는 조선총독부의 국유지로 편입되거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이관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구체적인 경위는 지역별로 달랐고, 모진동의 경우 어떤 과정을 밟았는지는 더 정밀한 기록 추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4필지의 왕실 토지가 모진동의 역사적 가치를 한 단계 높여주는 특별한 흔적이라는 점이다.


08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이 땅에 주목하는 이유

지금 광진구 모진동 어딘가에서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새로 내는 공사가 시작된다면, 그 전에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표조사란 공사 예정지를 대상으로 문헌 기록과 현장 답사를 통해 매장 문화재가 있을 가능성을 사전에 확인하는 절차다. 단순히 형식적인 과정이 아니다.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의 역사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행위다.

국가유산청의 규정에 따르면 지표조사를 통해 유존 가능성이 확인되면 표본조사(조사 면적의 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각 단계마다 국가유산청 및 관할 지방자치단체의 허가와 협의가 필요하며, 조사는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전문 기관만이 수행할 수 있다.

문화재 매장유산 조사 단계 요약

지표조사문헌·현장 답사로 매장유산 유존 여부 사전 확인

표본조사유존지역 면적의 2% 이내를 표본적으로 조사

시굴조사유존지역의 10% 이내를 부분 조사, 유적 범위·성격 파악

정밀발굴확인된 유적 범위를 전면적·정밀하게 조사

모진동처럼 국유지 비율이 높고 왕실 소유지가 포함된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유존 가능성이 높은 구역'으로 분류된다. 분묘지와 임야, 왕실 관련 토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지역일수록, 땅 아래에 다층적인 역사의 흔적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들이 1910년대 토지 기록을 꾸준히 데이터화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성공적인 사례로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일대의 발굴조사를 꼽을 수 있다. 이곳에서 2021년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 점과 천문시계 일성정시의가 출토되었다. 이 발굴이 가능했던 것은 1910년대 지적 기록이 가리킨 집터와 관청 터의 위치가 정확하게 조사 구역 설정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1912년의 토지대장이 100년 후의 발굴 성과를 낳은 것이다.


09 — 과거를 아는 자만이 미래를 걸을 수 있다

이렇게 1912년의 모진동을 한 바퀴 돌아왔다. 222필지, 373,033㎡의 숫자 속에서 우리는 논과 밭을 가꾸던 농부들을 만났고, 아담한 한옥에서 삶을 일구던 가족들을 만났다. 분묘에서 조상을 기억하던 사람들, 임야에서 나무를 하던 사람들, 그리고 창덕궁의 이름이 새겨진 왕실의 특별한 땅까지.

그 모든 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그 골목, 그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 한때 논물이 찰랑거렸고, 아이들이 뛰어놀았으며, 왕실의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바로 그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건물을 짓기 전에, 도로를 내기 전에 먼저 그 땅에게 묻는 것. 너의 과거가 무엇이냐고. 그 질문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회만이 자신의 역사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만약 지금 개발 공사를 앞두고 있다면, 혹은 내 땅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궁금하다면,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문화재 발굴 기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하는 것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2023년부터는 소규모 발굴조사에 대한 국비 지원도 가능해졌다. 역사를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1912년의 모진동 사람들은 이름도 남기지 않고 떠났지만,


그들이 갈고 닦은 땅은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있다.



오늘 광진구 어딘가를 걷는 당신에게,


이 땅이 품은 100년의 기억이 조용히 닿기를 바란다.



과거를 기억하는 발걸음이


이 도시를 살아있는 역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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