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광진구 화양동, 당신이 알고 있던 그곳이 아닐지도 몰라요.
- 2025년 5월 8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 기관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건대입구 앞,100년 전엔 논이었다
1912년 화양동 — 밭 437,856㎡, 논 114,436㎡, 임야 75,431㎡. 치킨 골목 아래 잠든 100년 전의 광활한 농촌, 문화재 발굴 기관이 꺼내다
지금 건대입구에서 치킨을 뜯고 있다면,잠깐 발 아래를 생각해봐라.100년 전, 그 자리에서김씨 농부가 벼를 심고 있었다.
광진구 화양동. 건대입구역 2번 출구를 나서면 펼쳐지는 그 거리. 닭갈비 골목, 맥줏집, 카페, 노래방이 빼곡한 서울 동부의 대표 청년 상권이다. 그런데 1912년 이 땅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모든 것이 뒤집힌다. 밭 75필지 437,856㎡. 논 21필지 114,436㎡. 임야 9필지 75,431㎡. 지금 이 도시의 소음이 들리지 않을 만큼 광활한 농촌이 이 자리에 있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꺼낸 화양동의 100년 전 민낯, 지금부터 펼쳐진다.
목 차
프롤로그 — 건대 앞에서 시간을 거슬러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1912년 화양동
논 21필지 114,436㎡ — 여의도 절반의 벼 이야기
대지 66필지 — 66개의 삶이 있던 자리
임야 75,431㎡ — 도심 속에 숨어있던 숲
잡종지 41,325㎡ — 마을의 공유 공간
밭 75필지 437,856㎡ — 화양동을 먹여 살린 거대한 땅
성씨로 읽는 화양동 사람들
지금의 건대 앞과 100년 전 화양동 사이
문화재 지표조사, 지금 화양동에서 왜 필요한가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에필로그 — 치킨 골목 아래 흐르는 시간

SECTION 01
1. 프롤로그 — 건대 앞에서 시간을 거슬러
건대입구역은 서울 지하철 2호선과 7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이다. 유동 인구가 많은 서울 동부의 핵심 상권 중 하나로, 광진구에서 가장 활기차게 돌아가는 동네가 화양동이다. 주말 저녁이면 건대 앞 골목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대학생, 직장인, 관광객이 뒤섞여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웃는 그 장면이 지금 화양동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생기기 110년 전, 이 자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건물도, 역도, 골목도 없었다. 대신 논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사람들이 땅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화양동 토지 기록은 이 사실을 숫자로 증명한다. 총 면적이 얼마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면적이 지금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쓰이고 있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는 것이다.
SECTION 02
2.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1912년 화양동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그 역사를 읽는 작업이다. 과거 문헌, 지적도, 고지도를 교차 분석하고 지표면에서 확인 가능한 흔적을 수집하여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판단한다. 이 조사가 선행되어야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다.
1912년 화양동의 데이터를 한눈에 보면, 이 지역의 성격이 즉시 드러난다.
밭 75필지437,856㎡
논 21필지114,436㎡
임야 9필지75,431㎡
잡종지 4필지41,325㎡
대지 66필지21,504㎡
김·이·윤·정·박씨주요 토지 소유 성씨
밭과 논을 합산하면 552,292㎡. 여의도 전체 면적(약 290만㎡ 중 공원·업무·주거를 포함한 섬 면적)의 19%에 해당하는, 서울 한 동네 안에 있기에는 믿기 어려운 규모의 농지다. 거기에 임야 75,431㎡가 더해지면, 화양동 전체가 사실상 농촌과 산림으로 뒤덮인 마을이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SECTION 03
3. 논 21필지 114,436㎡ — 여의도 절반의 벼 이야기
21필지, 114,436㎡의 논. 여의도공원 면적(229,539㎡)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가 건대입구역 인근에 논으로 펼쳐져 있었다. 지금 건대입구역 7번 출구 앞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논 한 포기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
화양동에 논이 이렇게 넓게 형성됐던 배경이 있다. 광진구 일대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충적 저지대를 포함하고 있어, 물이 풍부하고 토질이 비옥한 논농사 최적지였다. 지금도 건대입구에서 뚝섬 방향으로 걸어가면 한강이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지형적 특성이 1912년에는 광활한 논으로 표현됐다.
21개의 논 필지에서 매년 반복되던 농사의 리듬. 봄이면 물을 채우고 모내기를 하고, 여름이면 초록 벼가 자라고,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익어 수확하고, 겨울이면 논이 쉬었다. 그 리듬이 마을 전체의 시간 감각이었다. 지금 건대입구에서 깊은 밤까지 이어지는 그 불야성과는 전혀 다른 리듬이었다.
"건대 앞 닭갈비 골목이 활활 타오르는 그 자리에서, 1912년 가을에는 황금빛 벼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같은 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SECTION 04
4. 대지 66필지 — 66개의 삶이 있던 자리
대지 66필지, 21,504㎡. 논과 밭, 임야의 규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지만, 이 66필지가 화양동의 심장이었다. 사람이 실제로 살았던 공간. 집이 있었던 자리.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326㎡, 약 99평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리 크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 농가로서는 충분히 넉넉한 규모다. 작은 마당, 텃밭, 광, 우물을 갖춘 전통 주거가 들어서기에 적당한 크기다. 66채의 집, 66개의 가족, 66개의 이야기가 이 21,504㎡ 위에서 펼쳐졌다.
아침마다 밭으로 나가는 농부의 발소리, 저녁이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아이들이 뛰어노는 흙마당의 소리. 66필지 위에서 매일 반복되던 그 평범한 하루들이, 지금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의 진짜 내용이다. 문화재 발굴의 관점에서 이 대지들은 온돌 구조, 우물, 부뚜막, 생활 도자기 등 당시 주거 문화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주요 조사 대상이다.
SECTION 05
5. 임야 75,431㎡ — 도심 속에 숨어있던 숲
9필지, 75,431㎡의 임야. 지금의 화양동에서 숲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1912년, 이 마을의 상당 부분은 숲이었다. 75,431㎡는 서울숲 전체 면적의 약 11%에 해당하는 규모다.
임야 75,431㎡가 마을에서 했던 역할
조선시대와 근대 초기 마을에서 임야는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었다. 땔감을 구하는 생존의 자원이었고, 약초를 캐는 치유의 공간이었으며, 무덤이 들어서는 기억의 공간이었다. 또한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물을 조절하는 마을의 방풍림이자 수원(水源)이었다. 75,431㎡라는 규모는 화양동 마을 전체가 이 숲에 기대어 살아갔음을 의미한다.
9필지에 걸쳐 분포한 임야는 아마도 마을 북쪽이나 동쪽 언덕 자락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광진구 일대는 아차산, 용마산 같은 야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이다. 그 산자락의 일부가 화양동 임야로 기록됐을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그 숲에서 나무를 하고 약초를 캐며 생활했을 것이다.
지금 그 임야 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지는 알 수 없다. 아파트일 수도 있고, 도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임야 경계에는 조선시대 이후 축적된 역사적 층위가 있을 수 있고, 특히 무덤이 조성됐던 임야라면 그 안에서 중요한 문화재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SECTION 06
6. 잡종지 41,325㎡ — 마을의 공유 공간
4필지, 41,325㎡의 잡종지. 화양동의 지목 중 규모 면에서 임야보다는 작고, 대지보다는 두 배 가까이 큰 이 잡종지는 여러 의미에서 흥미로운 존재다.
잡종지란 특정 용도로 분류하기 어려운, 혹은 다양한 용도로 혼용되던 땅이다. 41,325㎡를 4필지가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각 필지마다 서로 다른 성격의 잡종지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 필지는 마을 공동 창고나 장터 자리였을 수 있고, 다른 필지는 관개용 수로 인근의 완충지였을 수 있으며, 또 다른 필지는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열거나 공동 작업을 하던 마당이었을 수 있다.
41,325㎡라는 규모는 대지(21,504㎡)보다 훨씬 크다. 이 말은 화양동에서 공식적으로 집터로 분류된 땅보다 용도 불명의 공유 공간이 더 넓었다는 뜻이다. 마을의 공식적인 집들 사이사이에 그보다 더 넓은 비공식 공간들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도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유로운 공간 구조였다.
잡종지와 문화재 지표조사
잡종지는 다양한 용도로 혼용됐기 때문에 오히려 다채로운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임시 장터였다면 도자기 파편과 생활용품 잔해가, 공동 작업 공간이었다면 농기구 파편과 목재 잔재가, 수로 인근이었다면 수리 시설 유구가 남아 있을 수 있다. 화양동의 잡종지 4필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흥미로운 다양성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SECTION 07
7. 밭 75필지 437,856㎡ — 화양동을 먹여 살린 거대한 땅
이제 화양동의 진짜 주인공을 만나야 할 시간이다. 밭 75필지, 437,856㎡. 전체 지목 중 압도적 1위다. 화양동 전체에서 가장 넓은 땅이 밭이었고, 가장 많은 필지가 밭이었다.
437,856㎡가 얼마나 넓은지 감을 잡기 어렵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건대입구역에서 반경 약 370미터 안에 들어오는 원형 면적이 약 430,000㎡다. 즉, 건대입구역 반경 370미터 안 땅 대부분이 밭이었다는 뜻이다. 지금 그 안에 있는 모든 건물, 도로, 골목 아래에 밭의 흔적이 있다.
75개의 서로 다른 밭에서 서로 다른 작물이 자랐다. 감자, 고구마, 콩, 팥, 조, 기장, 보리. 계절에 따라 배추, 무, 고추, 호박, 오이. 지금 화양동에서 파는 닭갈비 재료인 양배추와 고추도 어쩌면 이 밭의 후계자들이다. 화양동의 농업 전통이 음식 문화로 이어져 지금의 먹자골목을 만들었다는 상상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75개의 밭 필지에는 75개의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땅을 처음 일군 사람의 이야기, 씨앗을 심은 사람의 이야기, 수확을 나눈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이 437,856㎡의 흙 속에 새겨져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경작층은 씨앗, 화분, 농기구 파편, 도기 조각 등을 보존하는 특수한 지층이다. 지금 화양동 어딘가를 파면 그 경작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SECTION 08
8. 성씨로 읽는 화양동 사람들
이 광활한 논과 밭, 숲과 집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 1912년 토지조사 기록에 남아 있는 성씨 분포가 화양동 공동체의 구조를 보여준다.
성씨 | 소유 필지 수 | 특이 사항 |
김씨(金) | 18필지 | 1위, 마을 중심 가문 |
이씨(李) | 12필지 | 2위 |
윤씨(尹) | 8필지 | 3위, 광진 일대 역사적 연고 |
정씨(鄭) | 6필지 | 4위 |
박씨(朴) | 5필지 | 5위 |
김씨 18필지, 이씨 12필지. 한국에서 가장 흔한 두 성씨가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필지 수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화양동이 특정 성씨의 집성촌이라기보다는 여러 성씨가 고르게 어우러진 혼합 마을이었음을 시사한다.
윤씨 8필지가 3위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윤씨는 파평 윤씨, 해평 윤씨 등 조선시대부터 서울 경기 지역에 강한 기반을 가진 성씨 집안들이 많다. 광진구 일대에 윤씨 가문이 8필지라는 상당한 규모의 땅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가문이 단순한 농민이 아닌 어느 정도 사회적 기반을 갖춘 집안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씨, 이씨, 윤씨, 정씨, 박씨 다섯 성씨의 합산 필지는 49필지다. 이들이 화양동의 핵심 구성원이었고, 그들이 일군 논과 밭이 437,856㎡ 위에 펼쳐져 있었다. 지금 건대입구 골목을 걷는 누군가가 이 성씨들의 후손일 수 있다. 그 사람은 자기 조상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전혀 모른 채 걷고 있을 것이다.
SECTION 09
9. 지금의 건대 앞과 100년 전 화양동 사이
같은 땅이 100년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 어렵다. 437,856㎡의 밭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수백 개의 음식점과 주점, 편의점이 들어서 있다. 114,436㎡의 논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솟아 있다. 75,431㎡의 숲이 있던 자리에는 도로와 건물이 빽빽하다.
이 변화의 속도와 규모가 서울 도시화의 극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1912년에서 현재까지 110년 동안 화양동이 겪은 변화는 그 이전 수백 년의 변화를 훨씬 능가한다. 그리고 그 변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적 층위가 파괴됐는지, 혹은 얼마나 잘 보존됐는지는 아직 제대로 평가된 적이 없다.
건대입구역이 들어선 것은 1980년이다. 그 이전에도 이미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됐을 테지만, 1980년 이후 급격한 개발이 이루어진 것은 확실하다. 그 개발 과정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미지수다. 만약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김씨 농부의 밭 흔적이, 윤씨 집안의 집터가, 어딘가에 여전히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SECTION 10
10. 문화재 지표조사, 지금 화양동에서 왜 필요한가
화양동과 광진구 일대는 지금도 꾸준히 재개발과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노후 주거지가 현대식 아파트로 바뀌고, 상업 시설이 확장되고, 지하 인프라가 확충된다. 각각의 공사는 반드시 땅을 파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미리 파악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다. 1912년 기록에 따르면 화양동에는 논, 밭, 임야, 잡종지, 대지가 복잡하게 분포해 있었다. 특히 임야 9필지의 위치를 현재 지도와 대조하면, 지금도 일부 지역이 개발 대상이 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지역들이 재개발될 경우, 사전 지표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대지 66필지의 위치를 추적하면, 조선 후기와 근대 초기 화양동 주거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온돌 구조, 우물, 부뚜막의 흔적은 당시 생활상을 재현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구역이 남아 있다면, 그 땅을 파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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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11
11.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는지, 광진구 인근과 서울 내 유사 지역의 사례들이 잘 보여준다.
성공 사례 1
광진구 자양동 — 한강변 조선시대 주거지 발굴
자양동 일대 재개발 공사 전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한강 충적지 인근에 조선 후기 주거 유구가 분포할 가능성이 확인됐다. 정밀 발굴조사 결과 17~18세기 생활 도자기와 온돌 구조 흔적이 발견됐다. 사전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한강 인근 조선 후기 생활사의 중요 단서가 사라질 뻔했다. 화양동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이 사례는 화양동에서의 발굴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시사한다.
성공 사례 2
서울 성동구 행당동 — 경작층에서 농업 유물 발굴
행당동 주거지 재개발 과정에서 1912년 토지조사 기록과 현재 지도를 교차 분석한 지표조사 결과, 조선시대 경작층이 확인됐다. 발굴조사에서 18세기 농기구 파편과 씨앗 잔재, 소형 토기류가 다량 출토됐다. 경작층이 유기물을 보존하는 특수한 지층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437,856㎡의 밭을 보유했던 화양동도 유사한 경작층 발굴을 기대할 수 있다.
성공 사례 3
경기 구리시 — 임야 개발 전 사전 조사로 묘역 보존
구리시 갈매동 일대 택지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임야 구역 내 조선시대 묘역이 사전에 확인됐다. 개발 업체는 해당 묘역 구역을 발굴 대상으로 지정하고 공사 일정을 조정해 17세기 분청사기와 묘역 석물을 온전히 수습했다. 사전 조사가 공사 지연을 최소화하면서도 중요 유물을 보존한 모범 사례다. 화양동 임야 9필지 역시 이런 방식의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이 세 사례가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사전에 아는 것이 전부라는 것. 알고 나면 지킬 수 있고, 모르고 파면 영원히 사라진다. 화양동의 437,856㎡ 밭, 114,436㎡ 논, 75,431㎡ 임야가 품고 있을 기억을 지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SECTION 12
12. 에필로그 — 치킨 골목 아래 흐르는 시간
오늘 밤 건대입구에서 치킨을 먹는다면, 잠깐 멈춰보자. 기름진 냄새가 가득한 그 골목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그 자리에서. 발 아래를 생각해보자.
아스팔트 아래, 콘크리트 기초 아래, 지하 파이프 아래. 그 가장 깊은 곳에 1912년 화양동이 잠들어 있다. 김씨 농부가 모내기를 하던 논의 진흙. 윤씨 집안이 가꾸던 밭의 흙. 이씨 아이가 뛰어놀던 임야의 솔잎. 그것들이 지금도 거기 있다.
우리는 그 위에 도시를 지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도시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모여 사는 것이 도시다. 다만 그 도시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땅 아래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을 통해 우리는 건대 앞 치킨 골목이 단순한 먹자골목이 아니라, 100년의 농부들이 땀 흘린 땅 위에 지어진 공간임을 알게 된다. 그것을 아는 것이, 이 도시를 조금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화양동은 오늘도 빠르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 속도 아래에서, 김씨와 이씨와 윤씨와 정씨와 박씨가 남긴 흔적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로, 조용히.
밭 437,856㎡.논 114,436㎡.숲 75,431㎡.
지금 치킨 골목에서 웃고 있는 당신의 발 아래,1912년 김씨 농부의 손때가 밴 흙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땅 위에서 살고 있다.그들의 땀 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그것을 안다면,이 도시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화양동을 걸을 때마다,잠깐 발 아래 귀를 기울여보자.거기서 100년 전의 목소리가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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