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노원구 월계동 국유 논과 임야의 이야기
- 5월 28일
- 7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사적 초안산 분묘군의 땅
동네 뒷산에 조선 내시 1,000명이 잠들어 있다
1912년 월계동 국유 논과 임야의 이야기
2필지 3,094㎡ — 중랑천과 우이천 사이 반달 마을 월계동. 국가 사적 제440호 초안산 분묘군 바로 옆, 논 1필지·임야 1필지에 담긴 조선 왕실의 비밀과 문화재 발굴조사 완전 해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2026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 기초분석
2필지
월계동 국유지
총 필지 수 (1912)
3,094㎡
전체 면적
(약 936평)
1,000기+
초안산 분묘군
조선 시대 무덤 수
1필지
논
1,381㎡ (약 418평)
1필지
임야
1,712㎡ (약 518평)
사적 440호
초안산 분묘군
2002년 국가 지정
목 차
1.월계(月溪) — 달빛 비치는 시냇가, 반달 마을의 이름
2.1912년 월계동 국유지 2종 토지 완전 통계 해설
3.국유 임야 1필지 1,712㎡ — 초안산 분묘군 자락의 땅
4.조선 내시 1,000명이 잠든 산 — 초안산 분묘군의 비밀
5.국유 논 1필지 1,381㎡ — 중랑천 옆 반달 마을의 물길
6.문화재 지표조사·시굴·표본·발굴조사, 월계동에서 어떻게 하나
7.월계동 발굴 성공 사례 — 이미 지정된 국가 사적의 이야기
8.달빛 아래 잠든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이유

동네 뒷산에 올라가 봐. 등산로 바로 옆에 무덤이 있어. 봉분 위로 등산로가 지나가는 곳도 있어. 그리고 그 무덤 중 상당수가 조선 왕궁에서 왕을 모시던 내시들의 것이야.
노원구 월계동 북쪽에 있는 초안산(楚安山). 높이 100m가 조금 넘는 평범한 동네 뒷산이야. 근처 주민들이 아침 산책을 즐기고, 배드민턴을 치는 그 산에, 1,000기가 넘는 조선 시대 무덤이 있어. 2002년 국가 사적 제440호로 지정된 '서울 초안산 분묘군'이야.
그리고 이 분묘군의 주소 중 하나가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야. 바로 1912년 국유 임야로 기록된 그 땅 근처야. 국유 임야 1필지 1,712㎡는 조선 시대 내시들이 잠들어 있는 바로 그 산자락의 땅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거야.
월계동. 달빛이 시냇물에 비치는 반달 마을. 중랑천과 우이천이 감싸는 이 아름다운 동네 위에, 조선 왕궁의 그늘진 이야기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어. 오늘 그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볼게. 끝까지 읽으면 초안산 산책길을 걸을 때 절대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보지 못할 거야.
1월계(月溪) — 달빛 비치는 시냇가, 반달 마을의 이름
🌙
월계동 이름의 유래
밤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맑은 시냇물에 달이 비치고, 중랑천과 우이천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의 모습이 마치 반달 모양이므로 달 월(月)에 시내 계(溪)자를 붙여 '월계(月溪)'라고 이름 붙였다. 동쪽으로는 중랑천, 서쪽으로는 우이천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그 반달 모양의 땅이, 바로 지금의 월계동이야.
1912년 기준 월계동은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월계리였어. 서울이 아니었어. 조선 초부터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에 속했고, 1963년에야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됐어. 이후 1973년 도봉구, 1988년 노원구로 이어졌어.
중랑천과 우이천이 만들어내는 이 반달 지형은 풍수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초안산은 이 반달 지형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야산이야. 두 하천이 흘러 만들어지는 지형 특성상, 산 아래엔 충적 토양이 쌓여 농사에 유리하고, 산 위는 배수가 잘돼 묘지로 좋은 환경이 됐어. 국유 논과 임야가 각각 하나씩 기록된 것도 이 지형 특성과 정확히 맞아떨어져.
21912년 월계동 국유지 2종 토지 완전 통계 해설
토지 종류 | 필지 수 | 면적 | 전체 비율 | 성격 |
논 | 1필지 | 1,381㎡ | 44.6% | 중랑천·우이천 인접 저지대 |
임야 | 1필지 | 1,712㎡ | 55.4% | 초안산 자락 국유 산림 |
합계 | 2필지 | 3,093㎡ | 100% | — |
임야
55.4% · 1,712㎡
논
44.6% · 1,381㎡
논과 임야 딱 하나씩. 이 완벽한 대칭이 월계동의 지형을 그대로 반영해. 낮은 곳엔 논, 높은 곳엔 산림. 중랑천과 우이천이 만들어낸 충적 저지대에 논이 있고, 그 북쪽 초안산 자락에 임야가 있어.
이번 시리즈에서 소개한 지역 중 가장 적은 2필지지만, 이 두 필지가 각각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 위에 놓여 있어. 논 1필지는 중랑천 옆 농경 지대의 흔적이고, 임야 1필지는 조선 시대 1,000기 분묘를 품은 초안산과 연결되는 국유 산림의 흔적이야.

3국유 임야 1필지 1,712㎡ — 초안산 분묘군 자락의 땅
임야 1필지 1,712㎡. 약 518평짜리 국유 산림이 하나. 이 작은 숫자 뒤에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있어.
서울 초안산 분묘군의 공식 주소 중 하나가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야. 1912년 국유 임야로 기록된 필지가 초안산 자락이었다면, 이 임야는 조선 시대 무덤 1,000기가 자리 잡은 그 산의 일부 구역이었을 가능성이 있어. 국유 임야라는 분류는 그 산림이 개인 소유가 아닌 국가 관리 하에 있었다는 뜻이거든.
초안산이 왜 국유 임야로 관리됐는지 생각해봐. 이 산에는 내시·상궁 등 왕실 인물들의 무덤이 집중돼 있어. 15세기 이후 조선 내관들이 이 산을 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왕실과 연결된 내관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면 국가가 직접 관리할 이유가 충분했어. 국유 임야로 등록된 건 그 관리의 흔적이야.
1,000기 이상
초안산 분묘군에 남아있는 조선 시대 무덤 수.
상석·문인석·비석·동자상 등 수백여 기의 석물도 함께 있어.
15세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500년에 걸쳐 조성된 묘군이야.
4조선 내시 1,000명이 잠든 산 — 초안산 분묘군의 비밀
초안산 분묘군. 이 이름을 처음 들으면 그냥 오래된 공동묘지처럼 들릴 수 있어. 근데 진짜 이야기를 알면 완전히 달라져.
조선 시대 내시(내관)는 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궁궐 사람들이었어. 왕의 일상을 보조하고, 왕실의 비밀을 알고, 궁궐 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야. 그들은 후손이 없었어. 왕실의 비밀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살다가, 죽은 후엔 이 초안산에 잠들었어. 조선 왕궁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들이 이 산 아래에 묻혀있는 거야.
내관 (내시)
왕을 모신 왕의 남자
17세기 내시부 상세 승극철 부부 묘 확인. 통훈대부(정3품) 품계 내관. 묘비 현전 유일. 500년 궁궐 비밀의 증인들이 이 산에 잠들어 있어.
상궁 (궁녀)
궁궐을 지킨 여인들
상궁 개성 박씨 묘 확인. 왕실 여인들의 삶이 이 산에 새겨져 있어.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궁녀들도 이 산에 묻혔어.
사대부 양반
조선 지배층의 묘역
태안 이씨 묘역, 밀양 박씨 묘역 등 확인. 문인석·비석·상석을 갖춘 격식 있는 묘역들이 산 곳곳에 있어.
서민 민묘
이름 없는 사람들의 땅
신분을 초월한 공동묘지. 양반부터 서민까지 다양한 계층이 함께 잠든 이 산은, 조선 사회 계층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야.
초안산이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묻힌 곳이 된 데는 이유가 있어. 이 산은 마사토(화강암이 풍화된 모래 흙) 지질이어서 배수가 잘돼. 야트막하고 험하지 않아서 묘 조성이 쉬워. 왼쪽엔 중랑천, 오른쪽엔 우이천이 흘러서 풍수지리적으로도 최적의 조건을 갖췄어. 이 조건들이 15세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500년에 걸쳐 이 산을 공동 묘지로 만든 거야.
초안산 마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까지도 매년 가을 이곳에서 내시들의 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어. 그 전통이 2013년부터 노원구의 '초안 문화제'로 이어지고 있어. 수백 년 된 기억을 이어가는 이 마을의 의지가 초안산 분묘군을 살아있는 역사로 만들고 있어.
5국유 논 1필지 1,381㎡ — 중랑천 옆 반달 마을의 물길

논 1필지 1,381㎡. 약 418평짜리 국유 논 하나가 중랑천 옆 저지대에 있었어.
월계동은 중랑천과 우이천이 만들어내는 저지대에 위치해서, 논농사에 유리한 환경이었어. 1912년 기록에 국유 논이 하나뿐이라는 건, 이 마을 논의 대부분이 사유지였고 국가 소유는 일부에 불과했다는 의미야. 이 국유 논은 조선 시대 역토(驛土)나 위토(位土)의 일부였거나, 인근 초안산 분묘군 관리에 쓰이는 제전(祭田)이었을 가능성이 있어.
1,381㎡는 약 418평. 이 규모의 논에서 연간 수확할 수 있는 쌀은 약 200~300kg. 가족 두세 명이 1년 먹을 양이야. 국가 소유 논이 이 정도 규모라는 건, 특정 시설의 운영을 위한 소규모 제공 전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월계동 논·임야에서 기대되는 문화재 발굴 가능성
초안산 분묘군 연장 구역 유구 — 임야 구역에 추가 분묘나 석물이 매장돼 있을 수 있어
15~19세기 조선 도자기·생활 유물 — 내관·상궁 제향 관련 제기류 가능성
논 하부 조선 시대 수리 시설 — 중랑천 인접 국유 논의 관개 시스템 유구
봉분 관련 석재·목재 잔재 — 이미 발굴된 분묘군과 연결되는 매장 문화재
묘비·문인석 미확인 개체 — 임야 구역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석물이 있을 수 있어
6문화재 지표조사·시굴·표본·발굴조사, 월계동에서 어떻게 하나

월계동처럼 국가 사적이 인접한 지역에서의 발굴조사는 일반 지역과 다른 특별한 접근이 필요해.
지표조사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1912년 임야 필지의 정확한 위치를 초안산 분묘군 범위와 대조하는 거야. 분묘군의 공식 주소가 '월계동 산8-3번지'인데, 1912년 지적도의 임야 필지 번호와 위치가 겹치는지 확인하면 그 임야가 분묘군의 일부였는지 아닌지가 밝혀져. 또한 논 필지와 중랑천·우이천의 수계 관계를 분석해서 이 논이 어떤 수리 시스템의 일부였는지 파악해.
시굴조사는 임야 구역에서 특히 섬세하게 진행돼야 해. 분묘군 내에서 조사가 이루어질 경우, 기존에 확인된 1,000여 기의 분묘 외에 아직 파악되지 않은 추가 분묘가 있을 수 있어. 국유 임야 구역에서 트렌치를 파면 석물의 기저부, 분묘 관련 매납 유물, 비석의 파편 등이 나올 수 있어. 특히 기록에는 없지만 산 속 깊은 곳에 있어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내관·상궁 묘가 더 있을 가능성이 있어.
논 구역 시굴에서는 지하 수리 시설 관련 유구가 핵심이야. 중랑천과 우이천이 인접한 이 논에는 조선 시대 제방이나 수로 관련 유구가 남아있을 수 있어. 또한 분묘군 내 제향에 쓰이던 제전이었다면, 논 하부에서 제향 관련 유물이 나올 수도 있어.
7월계동 발굴 성공 사례 — 이미 지정된 국가 사적의 이야기

성공 사례 ①
초안산 분묘군 사적 지정 — 1,000기 무덤의 재발견
서울 초안산 분묘군은 2002년 3월 사적 제440호(현 국가유산)로 지정됐어. 1,000기가 넘는 무덤, 수백 기의 석물, 내관 승극철 부부 묘비 등이 공식 확인됐어. 이 지정을 통해 초안산이 단순한 동네 뒷산이 아니라 조선 왕실 역사의 중요한 현장임이 증명됐어. 조선 사회 각 계층의 묘제 변천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학술 자료이기도 해.
성공 사례 ②
비석골 근린공원 석물 전시 — 발굴 성과의 시민 공유
월계동 비석골 근린공원에는 초안산 주변에서 발굴된 조선 시대 묘 석물 30여 기가 전시돼 있어. 복두공복·금관조복 차림의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 상석, 비석 등이 실물 그대로 전시되고 있어. 발굴된 유물을 시민이 직접 볼 수 있게 한 이 공간은 문화재 발굴이 단순히 학술 활동을 넘어 지역 문화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야.
성공 사례 ③
초안 문화제 — 500년 전통의 현대적 계승
노원구는 2013년부터 매년 '초안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어. 일제강점기까지도 마을 주민들이 지내던 내시들의 제사를 현대 문화 축제로 계승한 거야. 발굴과 문화재 지정이 단순히 땅속 유물을 꺼내는 일로 끝나지 않고, 살아있는 지역 문화로 이어지는 모범 사례야.
8달빛 아래 잠든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이유
월계동에서 개발이나 건설을 계획 중인 사람에게, 이건 가장 현실적인 정보야. 국가 사적 제440호 초안산 분묘군이 인접한 이 지역에서는 모든 건설 공사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가 의무야. 특히 임야 구역은 분묘군 범위와 겹칠 수 있어서 시굴조사 없이는 공사를 진행할 수 없어. 사전 조사가 법적 보호와 개발 일정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하는 유일한 방법이야.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오래된 무덤 이야기'가 아니야. 조선 왕궁에서 왕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내관들, 평생 궁궐을 벗어나지 못했던 상궁들,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서민들이 모두 이 산에 함께 잠들어 있어. 신분 사회의 엄격한 위계가 죽은 후에는 하나의 산에 나란히 묻히는 것으로 무너진 거야.
1912년 국유 임야 기록은 그 산이 당시 국가의 관리 하에 있었다는 증거야. 조선 왕실과 연결된 내관의 묘가 있는 땅은 함부로 사유화될 수 없었던 거야. 그 국가적 보호의 흔적이 지금도 사적 지정으로 이어지고 있어.
달빛 시냇가 월계동의 이야기, 이제 함께 열어봐
논 1필지·임야 1필지 3,094㎡ 아래엔
조선 내시 1,000명과 이름 없는 사람들의 500년 이야기가 잠들어 있어.
서울 전 지역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 자료가 궁금하다면 아래를 확인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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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초안산 등산로를 걸을 때, 발 앞에 봉분이 있어. 등산로가 봉분 위로 지나가는 곳도 있어.
그 무덤에 잠든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봐. 왕 옆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후손도 없고, 역사책에 이름도 남기지 못했어. 하지만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 봉분을 밟으며 지나가고, 해마다 문화제에서 그 혼을 달래고 있어.
달빛이 시냇물에 비치는 이 반달 마을에서, 그들은 여전히 기억되고 있어.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야. 이름 없이 잠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더 정확하게 꺼내는 작업이야.
그 이야기가 온전히 밝혀지는 날, 월계동은 더 깊은 동네가 될 거야.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 자료 분석 · seoulheritage.or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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