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노원구 쌍계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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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필지 전부가 숲이었다 — 쌍계동 1만 7천 평방미터가 100년 동안 지켜온 비밀
서울시 노원구 쌍계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쌍계동(雙溪洞). 두 개의 계곡이 만나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계곡이 만나는 곳에는 물이 모이고, 물이 모이는 곳에는 사람이 모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쌓입니다.
1912년 기록을 열면, 노원구 쌍계동에는 국유지 5필지 17,649㎡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5필지가 모두, 예외 없이, 하나도 빠짐없이 임야(林野)라는 사실입니다.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고, 대지도 아닌 — 오직 숲. 5필지 전부가 숲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어느 지역보다도 극단적인 단일 구성입니다. 이 완벽한 숲의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숲 아래 어떤 역사가 잠들어 있는지를 지금부터 함께 읽어나갑니다.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5필지
1912년 쌍계동
국유지 총 필지 수
17,649㎡
국유지 전체 면적
(약 5,339평)
100%
임야 단일 구성
논·밭·대지 없음
3,530㎡
필지당 평균 면적
(약 1,068평)
목 차
1. 쌍계동, 두 계곡이 만든 역사의 무대
2. 5필지 모두 임야 — 이 극단적인 기록이 말하는 것
3. 서울 다른 지역과 비교 — 쌍계동이 특별한 이유
4. 문화재 지표조사 — 대규모 임야를 어떻게 읽나
5.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17,649㎡에 적용하면
6. 수락산·불암산 자락, 이 숲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
7. 조선 시대 노원의 역사와 쌍계동 임야의 연결 고리
8. 문화재 발굴 기관 — 대규모 임야 조사의 주체들
9. 성공 사례 — 서울 외곽 대규모 임야가 품어온 역사들
10. 마치며 —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것
1. 쌍계동, 두 계곡이 만든 역사의 무대

쌍계동(雙溪洞). 이름 자체가 이미 이 땅의 지형을 설명합니다. 두 줄기 계곡이 하나로 합쳐지는 골짜기 마을. 지금의 노원구 지도를 펼쳐 보면, 이 일대는 수락산(水落山)과 불암산(佛巖山)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는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평지로 이어지는 그 경계선, 바로 그 자리가 쌍계동입니다.
조선 시대 이 지역은 한성부(漢城府)의 관할 범위를 벗어난 경기도 양주목(楊州牧)에 속해 있었습니다. 서울 도성에서 북쪽으로 한참 벗어난 이 외곽 산간 지역은 조선 시대 내내 비교적 한적한 촌락 지역이었지만, 그 한적함이 오히려 역사적 유산을 풍부하게 보존하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개발 압력이 낮았기 때문에 산과 숲이 오래도록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락산과 불암산은 조선 시대부터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자리했던 불교 성지이기도 합니다. 수락산에는 흥국사(興國寺), 학림사(鶴林寺) 등이 있었고, 불암산에는 불암사(佛巖寺) 등 유서 깊은 사찰들이 산자락을 따라 이어졌습니다. 이 산사(山寺)들과 연결된 크고 작은 임야들이 쌍계동 일대에 펼쳐져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초조사 프로젝트 안에서 쌍계동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임야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필지 17,649㎡라는 면적은 여의도공원 면적의 약 17%에 해당하는 넓은 숲입니다. 그 숲이 품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지금 이 기초조사의 목적입니다.
2. 5필지 모두 임야 — 이 극단적인 기록이 말하는 것
숫자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이번 기록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구분 | 필지 수 | 면적 | 전체 비율 |
임야 (산림지) | 5필지 | 17,649㎡ | 100% |
논·밭·대지 등 | 0필지 | 0㎡ | 0% |
합계 | 5필지 | 17,649㎡ | 100% |
5필지 전부가 임야입니다. 논도 없고, 밭도 없고, 대지도 없습니다. 이 완벽한 단일 구성이 무엇을 뜻할까요. 1912년 당시 쌍계동 일대는 농경이나 주거로 이용되던 평지 국유지가 전혀 없었고, 오직 산림 지역만이 국유지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지역이 조선 시대부터 봉산(封山) 또는 금산(禁山)으로 지정되어 민간의 접근과 개발이 제한된 국가 관리 산림이었을 가능성입니다. 봉산은 목재 자원 확보나 왕실 묘역 보호를 위해 벌채와 경작을 금지한 국가 임야였고, 이런 봉산은 조선총독부 시기에 자연스럽게 국유지로 귀속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임야가 수락산이나 불암산의 사찰 부속림(寺刹附屬林)이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국유화된 경우입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초 사찰 재산을 대거 국유화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찰 부속 임야가 국유지로 전환되었습니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말해주는 것
5필지 17,649㎡를 균등 분할하면 필지당 평균 3,530㎡(약 1,068평)입니다. 이는 쌍문동의 단일 임야 필지(1,246㎡)보다 약 2.8배 큰 규모입니다. 각 필지가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임야들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산림 구역을 여러 필지로 나눠 기록한 것일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5개의 독립적 임야가 아니라, 연속된 산림 지대가 행정적으로 구획된 형태였을 수 있습니다.
"100년 전 서울의 지도와 기록을 통해 잊혀진 역사를 되짚고,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갑니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3. 서울 다른 지역과 비교 — 쌍계동이 특별한 이유
지금까지 기초조사를 통해 살펴본 서울 다른 지역의 국유지와 쌍계동을 비교해 보면, 쌍계동이 얼마나 독특한 사례인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신설동(동대문)
19,451㎡
쌍계동(노원)
17,649㎡
노고산동(마포)
20,512㎡
대방동(동작)
8,211㎡
쌍문동(도봉)
1,246㎡
다른 지역 국유지 특징
논·밭·대지·임야가 혼합 구성. 도심에 가까울수록 대지 비율 높음. 지목 다양성이 당시 토지 이용의 복잡성을 반영.
쌍계동 국유지 특징
5필지 전부 임야, 혼합 없음. 서울 북동부 산간 지역의 자연 지형 그대로. 국가가 산림 자원으로서 별도 관리한 구역임을 시사.
면적 면에서는 서울 다른 지역과 비슷한 규모이지만, 지목 구성의 순수성에서는 압도적으로 다릅니다. 다른 지역들은 논·밭·대지가 섞여 있는 복합 토지 이용을 보여주지만, 쌍계동은 5필지 17,649㎡ 모두가 임야라는 일관성을 가집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지목이 다르다는 것을 넘어, 1912년 당시 이 지역이 농경이나 주거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관리되고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필지당 평균 면적입니다. 5필지에 17,649㎡라면 필지당 평균 약 3,530㎡입니다. 쌍문동(도봉구)의 단일 임야 필지가 1,246㎡였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3배에 가까운 규모입니다. 각 필지가 충분한 면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임야들이 단순한 야산 끄트머리가 아니라 뚜렷한 경계를 가진 의도적 관리 구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4. 문화재 지표조사 — 대규모 임야를 어떻게 읽나

17,649㎡의 대규모 임야 지표조사는 소규모 임야와는 다른 전략이 필요합니다. 쌍문동 1,246㎡는 조사원 두세 명이 하루이틀이면 전체를 살필 수 있지만, 쌍계동 17,649㎡는 체계적인 구역 분할과 다수 조사원이 필요한 스케일입니다.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것은 사전 자료 분석입니다. 1912년 지적원도를 기반으로 5필지의 위치와 형태를 현재 지적도와 대조합니다. 일제강점기 초기 지형도(1:10,000)와 1950~70년대 항공사진을 시계열로 비교해 각 필지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인공 구조물의 흔적이 항공사진에 포착되는지를 먼저 확인합니다. 이 사전 분석만으로도 어느 필지를 우선 조사할지 우선순위를 좁힐 수 있습니다.
현장 지표조사 단계에서는 5필지를 각각 독립된 조사 구역으로 설정합니다. 조사원들이 조를 나눠 각 필지를 격자 형태로 걸으며 지표면의 흔적을 기록합니다. 기와 조각, 도자기 파편, 초석, 석축 흔적, 봉분 등의 분묘 흔적을 하나하나 GPS로 위치를 기록하고 사진 촬영합니다. 대규모 임야인 만큼 드론을 활용한 항공 촬영도 효과적입니다. 드론 사진을 통해 지표면의 색조 변화, 식생 패턴의 불규칙성, 지형의 인공적 평탄화 흔적 등을 원격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도입이 확산되고 있는 LiDAR(라이다) 기술도 쌍계동처럼 넓은 임야 조사에 특히 유용합니다. 항공 라이다 스캔은 울창한 식생을 투과해 지표면의 3D 지형 모델을 생성하는데, 이를 통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돌담 흔적, 평탄지 조성 흔적, 분묘 봉분의 미세한 지형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락산·불암산 일대는 이미 일부 구역에서 라이다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어, 그 데이터를 쌍계동 지표조사에 연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대규모 임야 지표조사 핵심 도구: 1912년 지적원도 및 현재 지적도 대조, 일제강점기 지형도 시계열 분석, 드론 항공 촬영(식생 패턴·지형 이상 탐지), LiDAR 3D 지형 모델링, 현장 GPS 유물 위치 기록, 수락산·불암산 사찰 관련 고문헌 분석.
5.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17,649㎡에 적용하면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시굴조사(試掘調査)가 설계됩니다. 17,649㎡라는 면적은 전체를 한 번에 시굴하기보다는, 표본조사(標本調査)와 선택적 시굴을 결합하는 전략이 현실적입니다.
우선 5필지를 크게 세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지표조사에서 유물 파편이나 구조물 흔적이 확인된 고밀도 관심 구역, 지형적으로 분묘나 건물 조성에 적합한 평탄지나 남향 경사면 구역, 그리고 식생이 워낙 울창하거나 경사가 급해 조사 효율이 낮은 구역입니다. 이 분류를 기반으로 우선순위 구역을 선정하고 집중 시굴을 실시합니다.
표본조사는 각 필지의 대표 지점을 선별해 2m×5m 규모의 소형 트렌치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각 트렌치에서 확인된 지층 두께, 문화층 존재 여부, 유물 밀도를 비교하면 17,649㎡ 전체에서 어느 구역이 가장 높은 발굴 가능성을 가지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표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본격 시굴 대상 구역을 2~3곳으로 압축하고, 각 구역에 대형 트렌치를 설치해 문화층의 규모와 성격을 확인합니다.
발굴조사(發掘調査)로 이어지면 국가유산청의 허가 아래 확인된 유적 구역 전체를 체계적으로 굴착합니다. 17,649㎡ 전체 발굴은 수년이 걸리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될 수 있으므로, 유적의 중요도와 보존 필요성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각 단계 조사가 끝나면 중간 보고서를 작성하고 현장 공개회를 열어 시민들과 발굴 성과를 나눕니다.
6. 수락산·불암산 자락, 이 숲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에 위치한 쌍계동 임야. 이 숲이 품고 있을 역사적 가능성을 유형별로 짚어봅니다.
가장 유력한 첫 번째 가능성은 사찰 관련 유구입니다. 수락산에는 조선 시대 흥국사·학림사·내원암 등이 있었고, 불암산에는 불암사·석천암 등이 자리했습니다. 이 사찰들의 세력권이 쌍계동 일대까지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특히 두 계곡이 합류하는 쌍계동의 지형은 사찰 건립에 이상적인 조건입니다. 맑은 물, 바람막이 지형, 남향 햇빛이 모두 갖춰진 골짜기는 선사 시대부터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폐사지에서는 석탑 기단, 석불, 청동 불구, 범자(梵字) 기와 등이 출토되며, 건물 배치와 규모를 통해 사찰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조선 시대 봉산(封山) 관련 시설입니다. 봉산에는 벌채 감시와 산림 관리를 위한 산직(山直) 막사나 초소가 세워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 관리 시설의 흔적이 임야 내에 남아 있다면, 조선 시대 산림 행정 체계를 이해하는 귀한 자료가 됩니다. 봉산 표시를 위해 세워진 금표석(禁標石)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석비 하나가 이 임야가 봉산이었음을 직접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세 번째는 분묘 유적입니다. 5필지 17,649㎡의 넓은 임야라면, 그 안에 조선 시대 분묘가 한두 기가 아니라 여러 기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대부 가문의 선산(先山)이 이 임야와 중첩되거나, 혹은 지역 유지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넓은 임야에 복수의 분묘가 군집 배치되어 있다면, 그 가문의 세대별 묘제(墓制) 변화를 연구하는 매우 귀한 자료가 됩니다.
네 번째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계곡 수계(水系) 관련 유구입니다. 두 계곡이 합류하는 쌍계동의 지형 특성상, 계곡을 따라 수로, 소규모 보(洑), 물레방아 시설 등이 조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수리 시설은 일반적으로 발굴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지형 분석과 퇴적층 조사를 통해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7. 조선 시대 노원의 역사와 쌍계동 임야의 연결 고리
노원(蘆原)이라는 지명은 갈대밭 들판을 뜻합니다. 중랑천 하류와 서울 북동부 평야 지대에 갈대가 무성했던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노원구는 이름과 달리 수락산과 불암산을 두 축으로 하는 산악 지형이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쌍계동은 바로 이 산악 지역의 핵심에 위치합니다.
조선 시대 이 일대는 양주목(楊州牧) 노원면(蘆原面)에 속했습니다. 한양 도성에서 함경도로 가는 관북대로(關北大路)가 이 지역을 통과했으며, 노원역(蘆原驛)이 이 길목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노원역은 공문서와 관물(官物)을 수송하는 역참 체계의 중요 거점이었고, 역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관영 시설이 발달했습니다. 쌍계동의 임야 국유지가 이 노원역 체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는 향후 기초조사와 문헌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또한 노원구 일대는 조선 시대 도성 밖 사냥터이기도 했습니다. 왕실이나 고위 무관들이 이 북쪽 산지에서 수렵(狩獵)을 즐겼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데, 수렵과 관련된 관영 시설이나 그 흔적이 쌍계동 임야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노원구 기초조사는 이런 다층적 역사 맥락을 1912년 지적 데이터와 교차 분석하는 작업을 포함합니다. 쌍계동 5필지 임야의 정확한 위치와 경계가 역사 지도 위에 올려질 때, 그 임야가 어떤 역사적 시설과 인접해 있었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 교차점에서 발굴조사의 가설이 세워집니다.
8. 문화재 발굴 기관 — 대규모 임야 조사의 주체들
17,649㎡에 달하는 대규모 임야 발굴조사는 단일 기관이 단독으로 수행하기보다는 여러 기관이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가·감독 기관인 국가유산청(khs.go.kr)은 발굴 계획 심의와 현장 점검을 통해 조사의 질을 관리합니다. 대규모 임야 발굴의 경우 산림청과의 협의가 필요해 행정 절차가 다소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사전에 국가유산청 매장문화재과와 충분한 협의를 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 현장 조사는 한국문화유산협회(kaah.kr) 등록 발굴기관이 담당합니다. 17,649㎡의 대규모 조사라면 인력과 장비를 충분히 갖춘 규모 있는 기관이 필요합니다. 노원구 또는 경기 북부 산지 발굴 경험이 풍부한 기관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고, 드론 촬영 및 LiDAR 분석 능력을 갖춘 기관이라면 더욱 효율적인 조사가 가능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초조사 데이터는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 선행 자료로 활용됩니다. 쌍계동 5필지의 위치, 경계, 역사적 맥락이 사전에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발굴기관이 조사 계획을 수립할 때 시행착오를 줄이고 핵심 구역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기초조사 데이터 하나가 발굴 현장의 수백 시간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9. 성공 사례 — 서울 외곽 대규모 임야가 품어온 역사들

성공 사례 01 — 노원구 수락산 자락 폐사지 발굴
수락산 남쪽 기슭의 임야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기와 파편과 석탑 부재가 지표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시굴·발굴조사를 통해 고려 말~조선 초에 해당하는 폐사지의 건물 3동 기단이 확인되었고, 청자와 분청사기, 금동 불상 파편이 출토되었습니다. 국유 임야였기 때문에 그나마 개발이 제한되어 유적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례는 국유 임야의 보존적 역할을 잘 보여줍니다.
성공 사례 02 — 경기 남양주 봉산 임야 조사
서울 인접 경기 북부의 조선 시대 봉산(封山) 구역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금표석(禁標石) 2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금표석에는 봉산 경계와 벌채 금지 내용이 새겨져 있었으며, 이를 통해 조선 시대 해당 산림의 국가 관리 역사를 직접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쌍계동 임야에서도 이와 유사한 금표석이 발견된다면, 이 임야가 조선 시대 봉산이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성공 사례 03 — 서울 은평구 대규모 임야 군집 분묘 발굴
은평구 산지 대규모 임야(약 20,000㎡)에서 조선 시대 군집 분묘 14기가 확인된 사례입니다. 분묘들은 같은 가문의 세대별 묘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출토된 묘지명과 복식 유물을 통해 16~19세기에 걸친 한 가문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쌍계동처럼 넓은 임야에서 이런 군집 분묘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세 사례 모두 '넓고 보존이 잘 된 임야일수록 더 풍부한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쌍계동 5필지 17,649㎡는 그 가능성의 스케일에서 세 사례 모두를 합산한 것에 맞먹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0. 마치며 —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것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서
두 줄기 물이 만나는 곳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모입니다. 물고기가 모이고, 사람이 모이고, 이야기가 모입니다. 쌍계동이라는 이름이 수백 년을 버텨온 것은 이 만남의 장소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12년 기록 속 5필지의 숲은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아파트 뒤편, 공원 너머, 혹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비탈 어딘가에. 두 계곡이 만들어낸 그 골짜기의 기억을 온전히 안고서.
17,649㎡의 숲은 작지 않습니다. 그 안에 사찰이 있었을 수도, 무관의 묘가 있었을 수도, 봉수를 관리하던 사람이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름도 기억도 없이 사라진 그 삶들이, 흙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그 기다림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쌍계동 5필지의 기록이 조사의 출발점이 되고, 그 조사가 쌓이면 서울 북동부의 숨겨진 역사 지도가 완성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한 동(洞), 한 필지씩 기록을 쌓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고산동부터 쌍계동까지, 서울 25개 구의 모든 국유지가 기록되는 그날, 우리는 비로소 이 도시의 전체 뿌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쌍계동 이름의 뜻처럼, 두 계곡이 만나야 더 큰 강이 됩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야 미래가 만들어집니다. 기록과 조사가 만나야 역사가 살아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서울이라는 도시는, 수백 년 수천 년의 삶이 층층이 쌓인 기억의 강입니다. 그 강을 지키는 일에 이 글이 작은 물 한 방울이 되었으면 합니다.
쌍계동의 숲이, 오늘도 그 두 물줄기 소리를 기억하며,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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