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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 5월 25일
  • 8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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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필지의 침묵 — 신설동 땅속에 새겨진 근대 서울의 첫 번째 주름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신설동(新設洞). 이름 그대로 '새롭게 설치된 동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새로운 이름 아래에는 꽤 오래된 기억이 묻혀 있습니다.



1912년 기록을 펼치면 신설동에는 국유지 16필지, 19,451㎡가 존재했습니다. 논, 대지, 밭이 뒤섞인 그 땅의 구성은 당시 도성 외곽에서 막 변화를 시작하던 서울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밭이 무려 10필지, 11,973㎡라고요? 지금의 번화한 신설동 로터리 일대에 그 넓은 밭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으실 겁니다. 바로 그 놀라운 이야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이 글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신설동의 땅이 당신에게 직접 말을 건넬 겁니다.

16필지

1912년 신설동


국유지 총 필지 수

19,451㎡

국유지 전체 면적


(약 5,884평)

10필지

밭 (전, 田)


11,973㎡

5필지

대지 (집터)


6,760㎡

1필지

논 (수전)


717㎡


목 차

1. 신설동, '새로 생긴 동네'에 쌓인 오래된 시간

2. 1912년 국유지 기초조사 — 밭·대지·논이 그리는 지형도

3. 문화재 지표조사 — 밭과 대지가 혼재한 땅을 어떻게 읽나

4.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신설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5. 밭에서 역사가 나온다 — 전(田) 지목의 발굴 가능성

6. 대지와 논이 품은 도시 고고학의 세계

7. 문화재 발굴 기관 — 누가 어떻게 이 땅을 조사하나

8. 성공 사례 — 도심 속 밭터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들

9. 내 땅, 내 사업 부지에 조사가 필요하다면

10. 마치며 — 신설동의 밭이 우리에게 남긴 것


1. 신설동, '새로 생긴 동네'에 쌓인 오래된 시간



신설동(新設洞)이라는 이름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초입, 이 일대에 새로운 행정 구역이 '신설'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새롭다고 해서 그 땅의 역사가 짧은 것은 아닙니다. 동대문 바로 바깥에 위치한 이 지역은 조선 시대부터 도성 외곽의 중요한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한성부(漢城府)의 성저십리(城底十里) — 즉 도성 성벽에서 10리 안쪽 지역 — 에 해당하는 신설동 일대는,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자 동대문 시장과 연결되는 상업 통로였습니다. 사람들이 드나들고, 물자가 오가고, 채소를 키우던 땅이었습니다. 지금의 동묘앞역과 신설동역 사이를 가득 채운 상점들 아래에는, 그 오랜 삶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이 동네는 아직 완전한 시가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총 16필지, 19,451㎡에 달하는 국유지에는 밭, 대지, 논이 각각 다른 비율로 섞여 있었습니다. 이 구성 자체가 당시 신설동이 '도시화 직전의 경계 지점'에 놓여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처럼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동네일수록, 1912년 지적 기록이 문화재 발굴의 핵심 나침반이 된다고 강조합니다. 땅의 표면은 이미 바뀌었지만, 지하에는 여전히 100년 전의 지형과 생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 1912년 국유지 기초조사 — 밭·대지·논이 그리는 지형도


숫자를 정면으로 마주해봅니다. 이 데이터는 단순한 면적 통계가 아니라, 1912년 신설동이라는 공간을 읽는 지도입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전체 비율

밭 (전, 田)

10필지

11,973㎡

약 61.6%

대지 (집터)

5필지

6,760㎡

약 34.8%

논 (수전, 水田)

1필지

717㎡

약 3.7%

합계

16필지

19,451㎡

100%

밭 (田)

61.6%

대지

34.8%

논 (水田)

3.7%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밭이 전체의 61.6%를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10필지, 11,973㎡. 평으로 환산하면 약 3,622평에 달하는 광대한 농경지입니다. 도성 바로 외곽에 이렇게 넓은 밭이 국유지로 존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이 밭들은 관청이나 군영에서 관리하는 채소밭, 약초밭, 혹은 역둔토(驛屯土) 성격의 경작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도성 안 관료들과 군인들의 먹을거리를 공급하던 도심 근교 농업의 흔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대지 5필지, 6,760㎡는 전체의 34.8%입니다. 이 대지들에는 어떤 건물이 들어서 있었을까요. 국유 대지라는 점에서 관아 부속 건물, 군사 시설, 창고, 혹은 역(驛) 관련 시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대문 인근은 조선 시대 군사 방어 체계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대지들이 그 군사 인프라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논 1필지, 717㎡는 전체의 3.7%로 가장 작은 비중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약 217평 규모의 이 논은 도성 외곽에 특수하게 조성된 소규모 수전(水田)으로, 주변 수계(水系)와 연결된 수리 시설이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논 한 뙈기가 때로는 수백 년의 물길 역사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100년 전 서울의 지도와 기록을 통해 잊혀진 역사를 되짚고,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갑니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3. 문화재 지표조사 — 밭과 대지가 혼재한 땅을 어떻게 읽나



문화재 지표조사(地表調査)는 개발 전 땅의 역사를 가장 먼저 점검하는 절차입니다. 굴착 없이 지표면과 역사 기록을 종합 분석해 지하 문화재 매장 가능성을 평가합니다. 신설동처럼 밭과 대지가 혼재했던 지역에서 지표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밭(전, 田) 지역은 지표조사 시 의외로 많은 단서를 제공합니다. 오랜 경작 과정에서 쟁기나 농기구에 의해 지층이 교란되기는 하지만, 그 교란층 아래에는 원형의 문화층이 비교적 잘 보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표면에 기와 조각, 도자기 파편, 잡석이 노출되어 있다면 그것이 첫 번째 신호입니다. 신설동의 경우, 10필지에 걸친 밭 지역은 그 규모만으로도 체계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 구역입니다.

대지(垈地) 지역은 지표조사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유형입니다. 건물이 철거되고 나면 기초 석렬, 온돌 흔적, 배수구, 우물 등이 지표 가까이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5필지, 6,760㎡에 달하는 신설동의 국유 대지는 조선 시대 관영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품고 있어, 지표조사 단계에서 구 지적도 및 고지도와의 비교 분석이 필수적입니다.

논(수전) 구역은 비록 717㎡로 작지만, 주변 지형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논은 반드시 물을 대야 하므로, 인근에 수로나 저수 시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수리 인프라의 흔적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추적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조사입니다.

지표조사 핵심 참고 자료: 1912년 지적원도, 조선 시대 한성부 지도, 일제강점기 초기 지형도(1:10,000), 항공사진 시계열 비교, 인근 발굴조사 보고서. 동대문구의 경우 조선 시대 군사 시설 관련 기록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됩니다.


4.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신설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지표조사에서 문화재 매장 가능성이 확인되면 시굴조사(試掘調査)가 시작됩니다. 시굴은 본격적인 발굴 전에 '이 땅이 얼마나 풍요로운 역사를 품고 있는가'를 미리 확인하는 정밀 탐색 단계입니다. 가로세로 방향으로 일정 간격의 트렌치(좁고 긴 구덩이)를 파서 지층 단면을 드러내고, 문화층의 존재와 깊이, 분포 범위를 파악합니다.

신설동처럼 밭이 61.6%를 차지하는 지역에서 시굴조사를 설계한다면, 10필지의 분포와 각 필지 간의 경계를 기준으로 트렌치를 배치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밭 지역은 경작층 아래에 문화층이 있을 경우 그 두께와 상태가 비교적 균일한 편이어서, 트렌치 결과를 토대로 전체 구역의 문화재 분포를 예측하기 좋습니다.

표본조사(標本調査)는 19,451㎡라는 넓은 면적을 가진 신설동 국유지 전체를 한 번에 시굴하기 어려울 때 활용합니다. 밭 구역, 대지 구역, 논 구역을 각각 대표할 수 있는 위치에서 소규모 굴착을 먼저 실시해 전체적인 문화재 현황을 파악합니다. 이 표본 결과가 이후 본격 발굴조사의 우선순위와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발굴조사(發掘調査)로 넘어가면 국가유산청의 허가 아래 체계적인 전면 굴착이 이루어집니다. 층위별로 흙을 걷어내면서 유구(遺構)와 유물을 수습하고, 모든 과정을 도면과 사진으로 기록합니다. 발굴이 끝나면 상세한 보고서가 작성되고 공개되며, 중요한 유적 발견 시에는 시민에게 공개하는 현장 공개회도 열립니다. 이 긴 여정의 출발점이 바로 1912년 기초조사 데이터입니다.


5. 밭에서 역사가 나온다 — 전(田) 지목의 발굴 가능성


많은 사람들이 '밭에서 무슨 문화재가 나오겠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고학의 세계에서 밭만큼 흥미로운 발굴지도 드뭅니다. 경작지는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이 닿은 땅입니다. 씨를 뿌리고, 작물을 키우고, 수확을 반복하는 동안 그 땅 위에서는 다양한 인간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은 농경 관련 유물입니다. 조선 시대 농기구, 씨앗 저장용 토기, 수확 도구의 파편이 밭 지층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밭 경계를 구분하던 석열(石列, 돌로 쌓은 낮은 담장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당시의 토지 경영 방식과 농지 구획 체계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더 나아가 조선 시대 밭에서는 가끔 예상치 못한 유구가 나타납니다. 밭 아래에 고려 시대나 그 이전의 생활 유구가 겹쳐 있는 경우가 있고, 밭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건물이 있었던 자리라면 건물지가 보존되어 있기도 합니다. 신설동의 10필지 밭 지역은 도성 인근의 관영 경작지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반 농촌 밭과는 다른 종류의 유적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신설동이 동대문 인근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특성입니다. 조선 시대 동대문 주변에는 훈련원(訓鍊院, 군사 훈련 기관), 약령시(藥令市, 약재 시장), 전의감(典醫監, 의료 기관) 관련 시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국유지 밭이 이들 기관과 연관된 약초밭이나 관영 채소밭이었다면, 그 경작의 흔적 자체가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6. 대지와 논이 품은 도시 고고학의 세계




신설동 국유지의 대지 5필지, 6,760㎡는 발굴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구역입니다. 국유 대지란 개인이 아닌 국가(혹은 조선총독부가 승계한 조선 왕조)가 소유한 건물 터를 의미합니다. 1912년 당시 이 대지 위에는 어떤 구조물이 있었을까요. 관아의 부속 건물, 군사 창고, 역참(驛站) 관련 시설 등이 후보군에 들어갑니다.

대지 발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유구는 건물지(建物址)입니다. 온돌 구조(아궁이·고래·굴뚝의 흔적), 기단 석렬, 초석(礎石, 기둥 받침돌), 배수구, 우물 등이 층위 별로 드러납니다. 도성 인근 국유 대지의 경우 목조 건물의 규모가 크고 구조가 정형화되어 있어, 발굴 시 비교적 명확한 건물 평면도를 복원할 수 있습니다.

논 1필지, 717㎡는 작지만 독특한 발굴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전(水田)은 물을 가두기 위해 독특한 토양 관리가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산소가 차단되어 유기물이 잘 보존됩니다. 나무 농기구, 볏짚, 씨앗, 꽃가루 등 일반 건조 지층에서는 부식되어 사라지는 유기 유물이 수전층에서는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717㎡라는 작은 면적이 가진 잠재력이 결코 작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처럼 밭·대지·논이라는 세 가지 지목이 한 구역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은 신설동 국유지를 고고학적으로 매우 입체적인 조사 대상으로 만듭니다. 각 지목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유적과 유물이 출토된다면, 1912년 신설동의 풍경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7. 문화재 발굴 기관 — 누가 어떻게 이 땅을 조사하나


신설동 국유지에 대한 문화재 조사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어떤 기관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까요. 한국의 문화재 발굴 체계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최상위 기관은 국가유산청(khs.go.kr)입니다. 발굴조사 허가권을 가지고 있으며, 조사의 전 과정을 감독합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nrich.go.kr)은 학술 자문과 특수 분석(과학적 연대측정, 보존 처리 등)을 담당합니다. 서울 지역 발굴의 경우 서울시 문화재과가 행정 협의 창구 역할을 합니다.

실제 현장 발굴은 한국문화유산협회(kaah.kr)에 등록된 민간 발굴기관이 수행합니다. 이들은 지표조사부터 시굴·표본·발굴조사까지 전 단계를 담당하며, 국가유산청 허가 아래 조사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합니다. 발굴기관 선택 시에는 등록 여부와 함께 동대문구·종로구 등 도심 지역 발굴 경험을 가진 기관인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 생태계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1912년 지적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서울 각 구별 기초조사 데이터를 공개함으로써, 발굴기관들이 더 정밀하고 효율적인 조사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돕습니다. 동대문구 신설동의 16필지 데이터 역시 이 기초조사의 일환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작은 데이터 하나가 쌓여 서울 전체의 역사 지도가 완성됩니다.


8. 성공 사례 — 도심 속 밭터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들



성공 사례 01 — 종로구 세운지구 밭터 발굴

종로구 세운상가 인근 재개발 부지는 1912년 기록 상 밭으로 등록된 국유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지표조사에서 조선 시대 기와 파편이 다량 발견되어 시굴조사로 이어졌고, 결국 조선 중기 관청 부속 건물지와 우물이 발굴되었습니다. 경작지 아래에 600년 역사의 도시 인프라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공 사례 02 — 동대문구 용두동 대지 발굴

동대문구 용두동 재개발 구역에서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온돌 시설과 생활 용기들이 층위별로 출토되었습니다. 국유 대지였던 이 구역에서 확인된 건물 평면은 당시 동대문 인근 군사 관련 시설의 형태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습니다. 1912년 기초조사 데이터와 실제 발굴 결과가 일치한 모범 사례입니다.

성공 사례 03 — 서울 도심 소규모 논(수전) 발굴

서울 도심 재개발 부지 내 소규모 수전(논) 구역 발굴에서 14세기 목제 농기구와 볍씨 유체가 무산소 지층에 완벽히 보존된 채 출토된 사례가 있습니다. 작은 논 하나가 600년 전 서울 농경 생태를 복원하는 핵심 자료가 된 것입니다. 신설동의 717㎡ 논도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습니다.

이 사례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발굴 이전 단계의 기초 기록 검토가 결과의 질을 결정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1912년 지적 데이터가 시굴 트렌치의 위치를 결정하고, 그 결정이 발굴의 성패를 좌우했습니다. 기초조사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9. 내 땅, 내 사업 부지에 조사가 필요하다면


동대문구 일대에서 개발이나 건축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 절차를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시간과 비용 모두를 아끼는 길입니다. 당황하지 않고 단계별로 대응하면 됩니다.

첫째로 국가유산청(khs.go.kr) 또는 동대문구청 문화체육과에 사전 문의를 합니다. 해당 부지가 지표조사 대상인지, 매장문화재 보호구역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확인합니다. 동대문구는 조선 시대 군사·의료·상업 시설이 밀집한 지역이어서 역사적 민감도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사전 확인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가 문화재를 훼손하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므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입니다.

둘째로 한국문화유산협회(kaah.kr) 등록 발굴기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합니다. 이때 seoulheritage.org의 기초조사 데이터를 미리 확인하면 어떤 조사가 예상되는지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발굴조사 비용·예산 FAQ와 공사 일정 FAQ를 seoulheritage.org에서 확인해 사업 전체 일정에 반영해 두는 것도 좋습니다.

셋째, 만약 시굴조사 결과 유적이 발견된다면 당황하지 마세요. 국가유산청과 협의해 보존 방안과 개발 계획을 조율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이 때로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해당 부지의 역사적 가치가 높아지고 지역 브랜드 강화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사례가 많습니다. 문화재는 개발의 장벽이 아니라, 그 땅이 가진 또 다른 자산입니다.


10. 마치며 — 신설동의 밭이 우리에게 남긴 것



밭이랑 하나가 기억하는 것

10필지, 11,973㎡의 밭. 지금 그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미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놓이고, 주차장이 깔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밭이랑을 갈던 사람의 손이 닿은 흙은, 지금도 땅 어딘가에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던 동작이 굳어진 흔적이, 켜켜이 쌓인 흙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1912년 기록 속 신설동의 국유지 16필지는 단순한 행정 데이터가 아닙니다. 그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고, 이름 없이 사라진 노동의 기록이며, 우리가 아직 꺼내지 못한 서울의 이야기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그 이야기를 꺼내는 도구입니다. 복잡하고 낯선 절차처럼 느껴지지만, 그 본질은 단순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동대문구 신설동의 기록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6필지의 데이터가 쌓이고, 동작구 대방동이 더해지고, 마포구 노고산동이 이어지면, 언젠가는 서울 전체의 땅 아래 역사가 하나의 거대한 지도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부탁 하나 드립니다.



다음에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칠 때,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발 아래를 한번 내려다봐 주세요. 콘크리트 아래, 아스팔트 아래, 그보다 더 깊은 흙 속에 — 누군가의 밭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집이 있었습니다. 논물 소리가 들렸던 작은 땅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기억해주는 것.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일입니다.



신설동의 땅이, 조용히, 고맙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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