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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 5월 25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2일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이름부터 새것이었던 동네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6필지

전체 국유지 필지

19,451㎡

전체 국유지 면적

61.6%

밭이 차지한 면적 비중

717㎡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국유 논

서울에는 이름 자체가 역사 기록인 동네가 있습니다. 신설동. 새로 설치된 동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대체 언제, 무엇이 새로 설치되었길래 그 사건이 통째로 이름이 되었을까요. 1912년의 국유지 장부 열여섯 줄이, 그 답의 조각들을 쥐고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지금은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우이신설선까지 세 개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고, 서울풍물시장의 왁자한 흥정 소리가 골목을 채우는 동네입니다. 그런데 이 동네의 이름은 조선시대의 행정 기록에서 왔습니다. 도성 밖 숭신방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 신설계. 사람이 불어나 성문 밖으로 삶이 넘쳐흐르던 시절, 새 동네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이름으로 남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설동은 조선판 신도시였던 셈입니다. 1912년의 토지조사사업 측량원이 이 신도시를 걸으며 국유지 항목에 남긴 것은 16필지, 19,451㎡. 오늘은 이 열여섯 줄이 들려주는 동대문 밖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목차

  1. 핵심 요약, 1912년 신설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 지목별 현황표와 그래프로 보는 신설동 국유지

  3. 밭 10필지, 성문 밖 신도시를 먹여 살린 땅

  4. 대지 5필지 6,760㎡, 동대문 밖의 나라 건물들

  5. 717㎡,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국유 논의 사연

  6.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7.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절차 한눈에 보기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땅이 돌려준 역사

  9.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1핵심 요약, 1912년 신설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는 국유지 16필지, 총 19,451㎡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이 10필지 11,973㎡, 대지가 5필지 6,760㎡, 논이 1필지 717㎡였습니다.

즉, 신설동 국유지는 면적의 61.6%가 밭인 밭 중심형 국유지였으며, 대지 비중이 34.8%로 높은 편이고, 논은 717㎡ 한 필지로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가장 작은 국유 논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숫자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밭이 주인공, 대지가 든든한 조연, 논은 아주 작은 단역. 이 배역 구성은 시리즈가 지금까지 만나온 어떤 동네와도 조금씩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다름의 이유는, 신설동이라는 동네가 태어난 방식과 자리에 숨어 있습니다.



2지목별 현황표와 그래프로 보는 신설동 국유지

먼저 전체 구조를 표로 정리합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기록을 기준으로 한 신설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입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필지당 평균

10필지

11,973㎡

61.6%

약 1,197㎡

대지

5필지

6,760㎡

34.8%

약 1,352㎡

1필지

717㎡

3.7%

717㎡

전체 국유지

16필지

19,451㎡

100%

약 1,216㎡

지목별 면적 합계는 19,450㎡로, 전체 면적 19,451㎡와 1㎡ 차이가 있습니다. 원자료 집계 과정의 반올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통계의 신뢰를 위해 그대로 밝혀 둡니다.

신설동 국유지 지목별 면적 비중

밭11,973㎡

61.6%

대지6,760㎡

34.8%

논717㎡

3.7%

그래프의 인상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읽힙니다. 밭이 절반을 훌쩍 넘고, 대지가 3분의 1을 받치고, 논이 가늘게 바닥을 지킵니다. 눈여겨볼 것은 두 번째 막대입니다. 대지 34.8%. 이 시리즈에서 대지가 국유지의 3분의 1을 넘긴 동네는 시설 중심형이라 이름 붙였던 마포구 노고산동(68.2%)뿐이었습니다. 신설동은 그다음 자리에 섭니다. 성문 밖의 신도시에, 나라의 건물이 적지 않게 서 있었다는 신호입니다.


3밭 10필지, 성문 밖 신도시를 먹여 살린 땅

왜 논이 아니라 밭이었을까

밭 10필지에 11,973㎡, 국유지의 61.6%. 신설동 국유지의 몸통입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서초동이나 염곡동에서는 국유지의 주인공이 논이었습니다. 왜 신설동에서는 밭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까요.

답은 물과 사람에 있습니다. 신설동 일대는 청계천 하류로 이어지는 완만한 들이지만, 도성 밖 동쪽의 이 땅은 큰 물을 끌어들여 대규모 논을 만들기보다, 도성이라는 거대한 소비 시장을 곁에 둔 근교 농업지로 자라났습니다. 성안 수십만 인구의 밥상에 올릴 채소, 시장에 내다 팔 푸성귀와 잡곡. 매일 아침 지게에 실려 동대문 안으로 들어가던 먹거리들이 바로 이 밭들에서 나왔습니다. 필지당 평균 1,197㎡, 약 362평이라는 아담한 크기도 그런 근교 채마밭의 얼굴과 잘 맞습니다.

도성 밖 신도시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성문이 열리면 밭의 소출을 지고 들어가고, 성문이 닫히기 전에 돌아와 다시 흙을 만지는 하루. 국유지 열 필지의 밭은, 그 순환의 일부가 나라의 장부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1912년, 장부의 주인이 바뀌다

그리고 이 밭들에도 1912년의 그림자는 어김없이 드리웁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전국의 소유권을 확정해 나갔고, 관에 딸려 있던 땅과 소유를 증명하지 못한 땅은 총독부가 관리하는 국유지로 편입되었습니다. 동대문 밖 채마밭에서 거둬들이는 소작료가 흘러가는 방향이, 그해를 기점으로 소리 없이 바뀌었습니다. 밭을 매는 손은 그대로인데 장부의 주인만 바뀌는 것. 식민지의 일상이란 그렇게 조용한 얼굴로 왔습니다.



4대지 5필지 6,760㎡, 동대문 밖의 나라 건물들

이제 두 번째 막대, 대지 이야기입니다. 5필지에 6,760㎡, 한 필지 평균 1,352㎡, 약 409평입니다.

시리즈의 국유 대지들과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염곡동의 국유 대지는 평균 639㎡의 농가 규모였고, 노고산동은 1,997㎡, 마장동은 2,084㎡의 관영시설급, 서초동은 3,533㎡의 대형 부지였습니다. 신설동의 1,352㎡는 그 중간쯤, 농가보다는 확실히 크고 대형 관영시설보다는 작은 크기입니다. 여러 채의 건물과 마당이 들어서는 시설 부지로 읽기에 알맞은 규모입니다.

위치가 상상을 도와줍니다. 신설동은 동대문 밖, 도성을 나서 함경도와 강원도로 향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조선은 도성의 주요 성문 밖에 여행자와 병자를 구호하던 시설인 원을 두었는데, 동대문 밖에는 보제원이 있어 오가는 이들에게 숙식과 의료를 베풀었다고 전해집니다. 성문 밖의 관영 시설이란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길 떠나는 이를 재우고, 병든 이를 돌보고, 물자를 쟁여두는 건물들. 신설동의 국유 대지 다섯 필지가 정확히 어떤 건물의 터였는지 장부는 말해주지 않지만, 성문 밖 신도시에 나라의 손길이 닿는 건물들이 서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34.8%라는 비중이 또렷하게 증언합니다.



5717㎡,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국유 논의 사연

장부의 마지막 줄에는 아주 작은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논 1필지, 717㎡. 약 217평입니다.

이 시리즈가 만나온 국유 논들의 계보에서 이 논의 자리는 특별합니다. 서초동의 국유 논은 필지당 평균 12,144㎡의 초대형이었고, 염곡동은 5,067㎡, 대방동의 외논 한 배미도 1,884㎡였습니다. 신설동의 717㎡는 그 모두의 아래, 시리즈에서 확인된 가장 작은 국유 논입니다. 큰 관유 농장의 위용과는 거리가 먼, 손바닥만 한 논 한 배미.

이렇게 작은 논이 홀로 국유로 남은 사연은 무엇이었을까요. 청계천 하류 쪽 물기 있는 땅의 한 조각이 관유지의 잔편으로 남았을 수도 있고, 주인이 끊긴 논이 조사 과정에서 국유로 정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217평은, 밭의 동네 신설동에서 벼가 자라던 몇 안 되는 자리였다는 점만으로도 기록될 가치가 있습니다. 온 동네가 채소를 기르는 사이, 어느 물가 한 뙈기에서만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던 풍경. 작은 숫자일수록 그림은 선명해집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국유지는 총 16필지 19,451㎡였으며, 밭 10필지 11,973㎡가 면적의 61.6%를 차지하고, 대지 5필지와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국유 논 1필지 717㎡가 더해진 성문 밖 근교 농업형 국유지였습니다.


6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설동은 지금 재개발과 정비사업의 한복판에 있는 동네입니다. 세 개 노선이 교차하는 역세권, 낡은 시장과 새 주상복합이 공존하는 거리. 이런 곳에서 114년 전 장부의 숫자는 뜻밖의 실무 가치를 지닙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법률 제2074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합니다. 3만㎡ 이상의 사업 면적은 지표조사가 의무이고, 그보다 작은 사업이라도 유존 지역 여부나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따라 조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2026년 1월부터는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른 조사 기준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신설동의 기록이 문화재발굴기관 조사원들에게 건네는 힌트는 특히 풍부합니다. 이곳은 성저십리, 도성 코앞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국유 대지 다섯 필지가 있던 일대에서는 관영 건물의 기단과 주춧돌, 온돌 유구, 기와 조각이 확인될 수 있습니다. 성문 밖 구호 시설이나 관영 건물의 흔적이라면 학술 가치는 더욱 큽니다. 밭 열 필지가 펼쳐져 있던 근교 농업지의 경작층 아래에는 더 오래된 시대의 생활 유구가 봉인되어 있을 수 있고, 동대문 밖이라는 위치상 조선시대 도성 밖 마을의 집터와 우물, 무덤이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실제로 동대문 일대는 서울에서 발굴 성과가 가장 극적으로 터져 나온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 다음 장에서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요컨대 이 글의 숫자들은 신설동 로터리의 아스팔트 아래를 비추는 확률 지도입니다. 개발을 준비하는 쪽에는 공사 지연과 비용의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안전장치가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성문 밖 신도시의 첫 페이지를 건져 올릴 그물이 됩니다.



7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절차 한눈에 보기

문화유산 조사는 법이 정한 단계를 밟아 점점 깊이 들어가는 절차입니다. 신설동에서 조사가 진행된다면 다음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문헌조사와 지표조사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옛 기록을 분석하고, 조사원이 지표면을 직접 걸으며 유물 산포 여부와 지형을 확인합니다. 땅을 파지 않는 단계로, 개발 사업의 첫 관문입니다.

표본조사

지표조사 결과 유존 가능성이 있는 구역에서, 사업 면적의 2% 이내를 선별해 굴착하여 문화층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시굴조사

유구의 분포 범위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사업 면적의 10% 이내에서 트렌치를 넣어 확인합니다. 신설동이라면 옛 국유 대지 5필지 일대가 핵심 구역이 됩니다.

발굴조사

유구가 확인되면 전면 발굴로 전환합니다. 유구와 유물을 기록하고 수습하며, 조사 결과에 따라 보존 조치나 이전 복원이 결정됩니다.

보고서 작성과 활용

조사 성과는 보고서로 남아 학계와 시민에게 공유되고, 지역의 역사 콘텐츠로 다시 태어납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글도 그 활용의 한 형태입니다.


8실제 발굴 성공 사례, 땅이 돌려준 역사

이 절차가 실제로 만들어낸 발견을, 서울 도심의 세 장면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신설동에서 걸어서 닿는 거리에 있습니다.

사례 1 · 동대문

야구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사시설

동대문운동장 부지를 공원으로 재개발하던 중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서울성곽의 일부와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하도감 터, 물길을 다스리던 이간수문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함성이 울리던 그라운드 아래에 조선의 국방 시스템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신설동과 같은 성문 생활권에서 나온 이 발견은, 동대문 밖 땅의 잠재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본보기이며,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옆 유구전시장으로 살아남아 지금도 시민을 맞고 있습니다.

사례 2 ·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깨어난 백제의 왕성

송파구 풍납동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실시된 조사는 한국 고고학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흙벽 둔덕으로만 여겨지던 풍납토성이 조사 결과 한성백제의 도읍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대한 왕성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개발 직전의 땅에서 한 나라의 수도가 통째로 돌아온, 조사 제도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례 3 · 인사동

공사장 항아리에서 나온 세종시대의 금속활자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는 항아리 하나가 출토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고,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한글 활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발굴조사가 없었다면 흩어져 사라졌을 인쇄 문명의 보물이, 절차 하나 덕분에 온전히 우리 앞에 도착한 것입니다.

동대문도, 풍납동도, 인사동도,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공사 예정지였습니다. 신설동의 밭 열 필지와 대지 다섯 필지, 그리고 217평 논 한 배미 아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기록은 이미 어디를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9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6필지였으며, 전체 면적은 19,451㎡였습니다.

1912년 신설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10필지, 11,973㎡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약 61.6%를 차지하는 신설동 국유지의 중심 지목이었습니다.

1912년 신설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5필지, 6,760㎡였습니다. 전체의 약 34.8%로, 이 시리즈에서 마포구 노고산동에 이어 대지 비중이 높은 편에 속하는 기록입니다.

1912년 신설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논은 1필지, 717㎡였습니다. 약 217평으로,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국유 논 가운데 가장 작은 규모입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1912년의 지목과 필지 기록은 땅속 매장유산의 위치와 성격을 예측하는 기초자료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지표조사가 의무이며, 도성 밖 성저십리에 속했던 신설동은 관영 시설과 옛 마을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입니다.

1912년 동대문구 신설동 국유지 16필지 19,451㎡는 성문 밖 신도시의 채마밭과 나라 건물, 그리고 가장 작은 논 한 배미를 품은 기록이었고, 그 열여섯 줄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되는 살아 있는 지도입니다.

새로 지은 동네

성문 밖에 새 동네가 생기던 날


그 설렘이 통째로 이름이 되었다



새벽 지게마다 실리던 푸성귀와


성안으로 이어지던 부지런한 발걸음



나라의 건물 다섯 채가 길손을 재우고


물가 한 뙈기 논이 홀로 벼를 키우던 동네



장부의 주인이 바뀌던 해에도


호미질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지금 그 위로 전철 세 갈래가 달리고


풍물시장의 흥정이 골목을 채우지만



땅은 기억한다, 이 동네가


누군가에게는 새 출발의 이름이었음을



그리고 기다린다, 열여섯 줄의 장부를


다시 펼쳐 읽어줄 손길을

신설동 일대 개발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00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함께합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밭·대지·논),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미지 설명: 본문 표는 1912년 신설동 국유지 현황으로, 밭 10필지 11,973㎡, 대지 5필지 6,760㎡, 논 1필지 717㎡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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