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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 5월 25일
  • 8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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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필지, 1,246㎡ — 가장 작은 기록이 들려주는 가장 큰 이야기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노고산동의 20,512㎡, 신설동의 19,451㎡, 대방동의 8,211㎡. 그 넓은 땅들과 비교하면 오늘 이야기할 쌍문동의 국유지는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단 1필지. 단 1,246㎡. 평으로 따지면 377평 남짓.



그런데 바로 그 '작음'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작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단 하나의 필지만이 국유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장한 단서입니다. 더구나 그 하나가 임야(林野)라는 점은, 쌍문동의 지형적 특성과 역사적 쓰임새를 동시에 말해줍니다.



작은 땅 하나가 어떻게 100년의 침묵을 깨는지, 지금부터 함께 파헤쳐 봅니다.

1필지

1912년 쌍문동


국유지 총 필지 수

1,246㎡

국유지 전체 면적


(약 377평)

임야

지목 전체 100%


산림지 (林野)

100%

단일 지목 구성


임야 단독 필지


목 차

1. 쌍문동, 두 개의 문이 열어준 역사의 입구

2. 단 한 필지의 기록 — 1,246㎡가 말하는 것

3. 임야(林野)란 무엇인가 — 숲이 품은 문화재의 세계

4. 문화재 지표조사 — 숲에서 역사를 읽는 방법

5.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임야에 적용하면

6. 도봉산 자락 임야에서 무엇이 나올 수 있을까

7. 문화재 발굴 기관 — 임야 조사의 전문 주체들

8. 성공 사례 — 작은 임야 하나가 뒤바꾼 역사 지도

9. 소규모 국유지라면 조사가 필요 없을까 — 오해와 진실

10. 마치며 — 1,246㎡의 숲이 남긴 말


1. 쌍문동, 두 개의 문이 열어준 역사의 입구



쌍문동(雙門洞). 두 개의 문(雙門)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옛 기록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두 개의 마을 어귀 문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그 문들이 지금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름만이 그 시절 풍경을 간신히 붙잡고 있습니다.

도봉구 쌍문동은 서울 북쪽 끝자락, 도봉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 도성에서 의정부, 동두천, 그리고 함경도로 이어지는 관북대로(關北大路)가 이 지역을 통과했습니다. 사람과 물자, 관리들이 끊임없이 오가던 길목이었습니다. 길목이라는 특성 때문에 이 일대에는 역참(驛站), 주막, 소규모 관영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봉산이라는 존재도 이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조선 시대 도봉산에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을 비롯한 여러 불교 사찰과 유교 관련 시설이 자리했습니다. 산 자락을 따라 형성된 임야들은 이런 종교·교육 기관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일부 임야는 그 부속 토지로 관리되었습니다. 1912년 기록에 국유지로 분류된 쌍문동의 임야 1필지 역시,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처럼 하나의 필지라도 그 지역의 지리적·역사적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1,246㎡라는 면적이 작아 보여도, 도봉산 자락이라는 위치와 임야라는 지목이 결합될 때 이 땅이 품고 있을 역사적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2. 단 한 필지의 기록 — 1,246㎡가 말하는 것


숫자를 마주합니다.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숫자입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전체 비율

임야 (산림지)

1필지

1,246㎡

100%

합계

1필지

1,246㎡

100%

지금까지 살펴본 서울 다른 지역의 국유지와 비교하면 쌍문동의 사례는 매우 독특합니다. 노고산동(12필지·20,512㎡), 신설동(16필지·19,451㎡), 대방동(3필지·8,211㎡)과 달리, 쌍문동에는 단 1필지, 1,246㎡의 임야 하나만이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 국유지

여러 지목(논·밭·대지·임야)이 혼재하는 경우가 많고, 필지 수와 면적이 상대적으로 큰 편.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된 지역일수록 대지 비율이 높음.

쌍문동 국유지

단 1필지, 임야 100%. 단일 지목, 최소 필지 구성. 도봉산 자락이라는 지형적 특성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기록. 도시화 이전 자연 지형이 그대로 보존된 증거.

이 단순함 속에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1912년 당시 쌍문동 일대의 대부분 토지는 민간 소유이거나 마을 공유지로 분류되었을 것이고, 국유지로 특별히 분류된 것은 오직 이 임야 하나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특정 임야만 국유지였을까요. 과거 사찰 부속림이었다가 조선총독부에 귀속된 것인지, 아니면 역참이나 봉수대(烽燧臺) 관련 관영 시설의 부속 임야였는지, 혹은 왕실 묘역과 연관된 금산(禁山)이었는지 — 이 물음 하나가 발굴조사의 시작점이 됩니다.

왜 단 하나의 필지만 국유지였을까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국유지로 분류된 임야는 대체로 세 가지 출처를 가집니다. 첫째, 폐사(廢寺)된 사찰의 부속 토지. 둘째, 역참·봉수·관영 시설의 직속 임야. 셋째, 조선 왕실 직계 묘역의 금산(禁山). 쌍문동의 임야 1필지 1,246㎡는 이 중 하나 이상의 성격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며, 이를 밝혀내는 것이 기초조사와 지표조사의 첫 번째 과제입니다.


3. 임야(林野)란 무엇인가 — 숲이 품은 문화재의 세계



임야(林野)는 산림(山林)과 원야(原野), 즉 나무가 우거진 산지와 그 주변 황무지를 함께 이르는 지목입니다. 농사를 짓거나 건물을 세운 땅이 아니라, 자연 식생이 그대로 유지되어 온 땅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의 손이 덜 탄 땅'이라는 특성이 문화재 발굴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큰 장점이 됩니다.

임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유적은 분묘(墳墓)입니다. 한국의 전통 장묘 문화에서 묘지는 대개 양지바른 야산 경사면에 조성되었습니다. 국유 임야에는 폐묘(廢墓)나 무연분묘(無緣墳墓, 후손이 없어 방치된 묘)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조선 시대 사대부나 무관의 묘라면 석물(石物, 묘비·상석·문인석 등)이 함께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런 분묘 관련 유적은 당시의 신분 제도, 가족 구조, 장례 풍습을 연구하는 데 핵심 자료가 됩니다.

임야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유적은 종교·교육 시설의 흔적입니다. 도봉산 자락의 쌍문동처럼 산지에 인접한 임야에는 폐사지(廢寺址, 사라진 사찰 터), 암자 터, 석탑 기단, 석불(石佛) 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많은 사찰이 폐사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는데, 그 흔적이 임야 지층에 고스란히 보존된 경우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군사 시설의 흔적입니다. 도봉구는 서울 북쪽 방어선의 일부로, 조선 시대 봉수대(烽燧臺)나 군사 초소, 차단 시설 등이 산지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군사 유구는 지표면 위에 돌 구조물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지표조사 단계에서 비교적 쉽게 확인됩니다.


4. 문화재 지표조사 — 숲에서 역사를 읽는 방법



임야에서의 문화재 지표조사(地表調査)는 평지나 경작지와는 방법이 다릅니다. 식생이 우거져 있어 지표면을 직접 관찰하기 어렵고, 경사지형으로 인해 안전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임야 지표조사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 풍성한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첫 번째 조사 방법은 현장 답사와 육안 관찰입니다. 조사원들이 직접 임야를 걸으며 지표면에 노출된 석재, 기와 조각, 도자기 파편, 초석(礎石) 등을 찾습니다. 묘지가 있다면 봉분(封墳)이나 상석(床石)이 지표 위에 드러나 있는 경우가 많아 비교적 쉽게 확인됩니다. 쌍문동의 1,246㎡는 규모가 작아 조사원 두세 명이 하루 이틀이면 전체 지표를 꼼꼼히 살필 수 있는 면적입니다.

두 번째는 고지도 및 항공사진 분석입니다. 1912년 지적원도와 함께 일제강점기 초기 지형도(1:10,000 축척), 1950~60년대 항공사진을 시계열로 비교하면 해당 임야에 과거 어떤 구조물이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항공사진에서 지표의 색조 차이나 식생 패턴의 불규칙성이 나타난다면, 그 아래에 인공 구조물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세 번째는 LiDAR(라이다) 등 원격 탐사 기술의 활용입니다. 최근 한국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도 항공 라이다 스캔을 활용해 울창한 식생 아래 지형 모델을 3D로 재현하는 기술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1,246㎡ 규모라면 라이다 스캔보다 전통 답사 방식이 더 효율적이지만, 주변 도봉산 일대와 함께 넓은 범위로 라이다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쌍문동 임야도 그 데이터 안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임야 지표조사 시 주요 확인 사항: 지표 노출 석재 및 기와·도자기 파편 분포, 봉분·상석·묘비 등 분묘 관련 석물, 단지형·평탄지형 등 인공 조성 지형 흔적, 주변 수계와의 연결성, 도봉서원·봉수대·역참 관련 역사 문헌과의 연계 분석.


5.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임야에 적용하면


지표조사에서 문화재 매장 가능성이 확인되면 다음 단계인 시굴조사(試掘調査)로 이어집니다. 임야에서의 시굴은 평지 발굴과 몇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임야 시굴에서 트렌치(조사 구덩이)의 방향과 위치 설정이 특히 중요합니다. 경사면이 있는 임야에서는 등고선과 직각 방향으로 트렌치를 배치하는 것이 지층 단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분묘가 예상되는 구역이라면 봉분 중심부에서 방사형으로 트렌치를 파서 분묘의 구조와 범위를 확인합니다. 건물지가 예상된다면 추정 건물 평면에 맞춰 격자형 트렌치를 설치합니다.

쌍문동 임야 1,246㎡의 경우, 면적이 작기 때문에 표본조사(標本調査)보다는 집중 시굴조사가 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전체 면적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눠 순차적으로 시굴하면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이 임야의 역사적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때 1912년 기초조사 데이터와 지표조사 결과를 종합해 어느 구역을 먼저 시굴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발굴조사(發掘調査)는 시굴에서 유적이 확인된 뒤 국가유산청 허가를 받아 진행됩니다. 임야 발굴은 식생 제거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 만큼 평지 발굴보다 준비 기간이 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지표가 정리되면 층위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유구의 형태와 구조를 명확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발굴 후에는 상세 보고서를 작성하고, 중요 유적의 경우 보존 조치와 함께 복원·정비 계획이 수립됩니다.


6. 도봉산 자락 임야에서 무엇이 나올 수 있을까



도봉산 자락에 위치한 쌍문동 임야가 품고 있을 역사적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지역의 역사·지리적 맥락을 종합하면 몇 가지 유력한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조선 시대 사찰 관련 유구입니다. 도봉산에는 조선 시대 천축사(天竺寺), 망월사(望月寺) 등 여러 사찰이 있었고, 이 사찰들의 부속 암자나 소규모 불당이 산 아래 쌍문동 자락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폐사지에서는 석탑 기단부, 석불 좌대, 기와, 청동 불구(佛具) 등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도봉서원(道峯書院)과의 연관성입니다. 도봉서원은 조선 선조 대에 창건된 서원으로, 도봉산 입구에 자리했습니다. 이 서원의 부속 임야나 서원 관련 인물들의 묘역이 쌍문동 일대에 걸쳐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원 관련 유구에서는 각종 제기(祭器), 서적 관련 유물, 건물지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 가능성은 봉수대(烽燧臺) 관련 시설입니다. 도봉구 일대는 조선 시대 봉수 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산봉우리나 능선에 설치된 봉수대는 그보다 낮은 산 자락에 관련 관리 시설을 두는 경우가 있었는데, 쌍문동의 임야가 그런 부속 시설 자리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네 번째는 가장 흔하지만 가장 귀한 가능성, 조선 시대 분묘입니다. 1,246㎡의 임야에 하나 혹은 두세 기의 분묘가 조성되어 있었다면, 그 규모는 소규모이지만 출토되는 부장품과 석물이 당시 해당 인물의 신분과 생활을 생생하게 전해줄 것입니다. 이름 없이 묻혀 있는 사람을 다시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는 일, 그것이 발굴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7. 문화재 발굴 기관 — 임야 조사의 전문 주체들


임야에서의 문화재 조사는 평지 발굴과 다른 전문성을 요구합니다. 경사지 안전 관리, 산림 훼손 최소화 원칙, 식생 복원 계획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쌍문동 임야 조사를 위해 필요한 기관과 절차를 정리합니다.

국가유산청(khs.go.kr)은 임야 발굴 허가의 최상위 기관입니다. 임야 발굴은 산림청과의 협의도 필요할 수 있어, 일반 평지 발굴보다 행정 절차가 다소 복잡합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nrich.go.kr)은 특수 분석 지원과 함께 임야 유적 보존 처리 자문을 담당합니다.

민간 발굴기관은 한국문화유산협회(kaah.k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임야 발굴 경험이 있는 기관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데, 도봉구·북한산·도봉산 인근 임야 조사 이력이 있는 기관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경사지 굴착 장비와 안전 장비를 갖춘 기관인지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도봉구 지역의 기초조사 데이터를 축적하면서 쌍문동 임야의 역사적 맥락을 정리해왔습니다. 이 기초 데이터는 실제 발굴기관이 조사 계획을 수립할 때 중복 조사를 피하고 핵심 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소중한 선행 자료입니다.


8. 성공 사례 — 작은 임야 하나가 뒤바꾼 역사 지도



성공 사례 01 — 노원구 소규모 임야 폐사지 발굴

노원구 산지 인근 소규모 임야(약 1,500㎡)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기와 파편과 초석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시굴조사에서 고려 말 조선 초에 해당하는 폐사지(廢寺址)의 건물 기단이 확인되었고, 청자 잔편과 동제 향로 파편이 출토되었습니다. 1,246㎡와 비슷한 규모의 작은 임야였지만, 700년 전 절터의 흔적을 온전히 품고 있었습니다.

성공 사례 02 — 도봉구 방학동 임야 분묘 발굴

도봉구 방학동 인근 임야에서 조선 중기 사대부 분묘가 발굴된 사례입니다. 봉분이 이미 유실된 상태였지만, 지하에 회곽묘(灰槨墓) 구조가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출토된 의복 유물과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해당 인물의 신원과 생애를 복원할 수 있었으며, 조선 시대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소규모 임야 발굴이 역사 연구를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성공 사례 03 — 은평구 봉수대 관련 임야 시굴

은평구 산지 임야에서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 봉수대 관련 관리 시설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석축 흔적이 확인되어 시굴로 이어졌고, 봉수 관련 기와와 철제 도구가 출토되었습니다.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봉수 체계의 보조 시설이 새롭게 규명된 것으로, 서울 북쪽 방어 인프라 연구에 새 장을 열었습니다.

세 사례 모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규모가 작아도, 임야라는 조건이 오히려 유적의 보존 상태를 높였다는 점입니다. 개발 손길이 덜 닿은 땅일수록 역사는 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쌍문동 임야 1,246㎡도 바로 그런 땅일 수 있습니다.


9. 소규모 국유지라면 조사가 필요 없을까 — 오해와 진실


"겨우 1필지, 1,246㎡인데 뭘 그리 대단히 조사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 발굴의 세계에서 면적과 중요성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규모 임야일수록 고밀도로 의미 있는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유산기본법상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 기준은 사업 면적과 관련 있지만, 국유지이거나 역사적으로 민감한 구역에 해당하면 소규모라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임야는 개발 행위 자체가 산림 훼손을 수반하기 때문에 산림청·국가유산청 양쪽의 허가 절차를 모두 거쳐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또한 소규모 국유 임야가 주변 사유지 개발과 맞물려 있는 경우, 그 소규모 임야 한 필지가 더 넓은 구역의 문화재 분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쌍문동 1,246㎡ 임야가 주변 민간 토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함께 검토하면, 이 지역 전체의 역사 지형도를 더 넓게 그릴 수 있습니다.

소규모 임야 조사가 중요한 세 가지 이유

첫째, 개발 손길이 적어 유적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주변 대규모 유적과 연결된 '잃어버린 고리'일 수 있습니다. 셋째, 조사 비용과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효율적인 역사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1,246㎡라는 작은 면적이 가진 잠재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10. 마치며 — 1,246㎡의 숲이 남긴 말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오래 기억된다

역사는 언제나 큰 것만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큰 왕조, 큰 사건, 큰 인물들. 그런데 실제 역사의 결을 만들어낸 것은, 이름도 없이 숲에 묻힌 작은 것들이었습니다.



1,246㎡. 다른 지역의 거대한 국유지들과 비교하면 초라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임야 하나가 쌍문동이라는 동네의 100년 전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증인입니다.



그 숲이, 지금도 거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아파트 담장 뒤에, 공원 한쪽 구석에, 혹은 아무도 찾지 않는 비탈 어딘가에. 잊혀진 채로, 그러나 기억을 품은 채로.

문화재 발굴조사는 거대한 것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잊혀진 것을 되찾는 일입니다. 국유지 1필지, 임야 1,246㎡라는 기록이 그 되찾기의 출발점이 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를 한 동(洞)씩 기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고산동의 12필지도, 신설동의 16필지도, 대방동의 3필지도, 그리고 쌍문동의 단 1필지도 — 모두 같은 무게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쌍문동 로터리를 지나다 문득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면 도봉산이 보입니다. 그 산이 이 동네를 굽어보며 수백 년을 지켜왔습니다.



그 산 자락 어딘가, 377평짜리 작은 숲 하나가 조용히 무언가를 품고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제대로 물어보지 않은 이야기를.



언젠가 그 숲이 말을 시작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작은 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모여야 큰 역사가 보존됩니다. 이 글을 읽은 당신도, 그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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