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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도봉동 국유지의 숨겨진 진실,지금 파헤쳐 드립니다

  • 5월 30일
  • 5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시굴조사

1912년 서울 도봉동 국유지의 숨겨진 진실,지금 파헤쳐 드립니다

땅 한 뙈기에도 역사가 있다. 110년 전 도봉구 도봉동, 그 흙 속에 묻힌 이야기를 꺼냅니다.

당신이 밟고 있는 땅 아래,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도봉산 자락 아래, 조용히 흘러가는 도봉동 골목길. 오늘도 사람들은 그 위를 무심코 걷습니다. 그런데 그 발밑에는 무려 110년 전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912년, 일제 강점기 초기에 작성된 토지 대장 속에서,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의 국유지는 4필지 총 6,099㎡의 규모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단순한 숫자처럼 보이지만, 이 수치 하나하나에는 당시 시대의 흔적과 문화재 발굴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목 차

1.1912년 도봉동 국유지 — 데이터로 보는 역사

2.논밭과 사사지(寺社地) — 땅의 용도가 말해주는 것

3.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4.시굴조사와 발굴조사 — 어떻게 다를까?

5.도봉동 국유지와 문화재 발굴 가능성

6.실제 성공 사례 — 서울에서 발굴된 역사


4필지총 국유지 필지 수

6,099㎡총 면적

1912년지적 등록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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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도봉동 국유지 — 데이터로 보는 역사

1912년은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 시기, 조선총독부는 전국 토지에 대한 대대적인 지적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서울 도봉구 도봉동의 국유지 기록입니다. 도봉동에는 당시 국유지가 4필지, 합계 6,099㎡ 규모로 존재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약 1,850평에 해당하는 넓이입니다. 이 작은 숫자들이 왜 중요할까요? 국유지라는 특성상, 이 토지는 당시 국가나 지방관청, 혹은 사찰 등 공공기관과 밀접히 연결된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장소일수록 과거의 유물이나 건축 유구(遺構)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화재 발굴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토지 유형

필지 수

면적 (㎡)

비율

2필지

4,380㎡

71.8%

사사지 (寺社地)

1필지

1,090㎡

17.9%

1필지

628㎡

10.3%

합계

4필지

6,099㎡

100%

4,380㎡

사사지

1,090㎡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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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과 사사지(寺社地) — 땅의 용도가 말해주는 것

110년 전 도봉동 국유지의 71.8%, 즉 압도적인 대부분은 '논'이었습니다. 단 2필지에 4,380㎡라는 넓은 면적. 도봉산 아래 골짜기를 흐르던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논이었을 것입니다. 조선 시대부터 이 일대는 농업이 가능한 충적 평야 지대였고, 국가 소유의 수전(水田), 즉 물 대는 논이 자리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사사지(寺社地)'입니다. 전체의 17.9%, 1필지 1,090㎡. 사사지란 절이나 신사(神社)가 소유하거나 관련된 토지를 가리킵니다. 도봉동 일대에는 실제로 오랜 역사를 가진 천축사(天竺寺), 망월사(望月寺) 등 사찰들이 현재도 남아 있습니다. 1912년 당시 국유지 중 사사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 토지가 특정 사찰과 깊은 연관이 있거나, 혹은 사찰의 부속 토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사찰 관련 토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항상 최우선 검토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찰 주변에는 부도(浮屠), 석탑, 비석, 건물 기초 유구 등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높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628㎡의 밭. 밭은 단순한 농경지처럼 보이지만, 조선 시대 국유 밭은 군량미 조달, 관청 운영, 혹은 특수 작물 재배와 연결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도봉동 4필지는 겉으로는 조용한 농지이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얽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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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여기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뭔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먼저 지표면, 즉 땅 위와 표면을 살펴보는 사전 조사입니다. 고고학자나 문화재 전문가들이 해당 부지를 걸어다니며 유물 파편, 건물 기초 흔적, 지형 변화 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공식적으로는 '문화재 지표조사'라는 명칭으로, 건설 공사나 개발 사업을 앞두고 법적으로 반드시 시행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화재보호법」 및 현재의 「국가유산기본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 부지에서는 착공 전 반드시 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는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문헌 조사입니다. 옛 지도, 지적 원도, 조선총독부 토지 대장 같은 역사 기록을 통해 해당 토지의 과거 용도와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단계입니다. 바로 1912년 도봉동 국유지 기록이 이 단계에서 활용됩니다. 두 번째는 현장 답사입니다. 전문가들이 직접 부지를 돌아다니며 지형, 토색(土色), 유물 산포 여부 등을 꼼꼼히 살핍니다. 세 번째는 보고서 작성입니다. 조사 결과를 종합해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시굴조사나 발굴조사 여부가 결정됩니다.

"지표조사는 단순히 법적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첫 번째 순간입니다. 땅 위에 새로운 것을 짓기 전에, 먼저 그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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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굴조사와 발굴조사 — 어떻게 다를까?

지표조사를 마쳤다고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지표조사에서 문화재 존재 가능성이 확인되면, 다음 단계로 시굴조사(試掘調査)가 진행됩니다. 시굴조사는 말 그대로 '시험 삼아 파보는 조사'입니다. 전체 부지를 모두 파는 것이 아니라, 일정 비율의 면적에 트렌치(Trench, 좁고 긴 구덩이)를 파서 지하에 유물이나 유구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보통 전체 면적의 5~10% 정도를 표본으로 조사하는 방식입니다. 시굴조사는 발굴의 필요성을 판단하는 '게이트키퍼'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발굴조사(發掘調査)는 무엇일까요? 시굴조사에서 중요한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면, 비로소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됩니다. 발굴조사는 해당 부지의 땅속을 체계적으로 발굴해, 과거의 생활 흔적과 문화재를 기록하고 수습하는 작업입니다. 조선 시대 건물 기초, 고려 시대 청자 조각, 심지어 삼국 시대의 토기까지, 서울 곳곳에서 이런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출발점은 바로 지적 원도와 역사 기록에서 시작됩니다. 1912년 도봉동 국유지 기록처럼 말입니다.

표본조사(標本調査)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시굴조사와 비슷하지만, 더 넓은 범위에서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조사하는 방식입니다. 대규모 개발 부지에서 전체를 시굴하기 어려울 때 활용되는 조사 방법으로, 효율성과 정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현대적 발굴 접근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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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동 국유지와 문화재 발굴 가능성

이제 본론으로 돌아옵니다. 1912년 도봉동 국유지 4필지, 6,099㎡. 이 땅에서 과연 어떤 문화재가 나올 수 있을까요? 먼저 지형적 조건을 보겠습니다. 도봉동은 도봉산 자락의 계곡부와 완만한 경사지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합니다. 이런 지형은 조선 시대 사찰이나 사전(私田), 관둔전(官屯田) 같은 관청 소유 농지가 자리잡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일대에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이어진 불교 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사사지 1,090㎡는 특히 주목 대상입니다. 도봉동 천축사 주변 일대에는 조선 전기 이전부터의 불교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찰 담장 기초, 석조 부재, 기와 조각, 자기(磁器) 파편 같은 유물들이 지하 30~80cm 깊이에 매장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4,380㎡의 논 지역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논 지역은 습지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목재나 씨앗 같은 유기질 유물이 보존되기 좋은 환경입니다. 실제로 서울 여러 지역의 옛 논 자리에서 고려·조선 시대의 목제 유물이 발굴된 사례가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이 부지가 '국유지'였다는 사실은 조선 시대에도 국가 혹은 공공 기관이 관리한 땅일 가능성을 높입니다. 국가 관리 토지에는 경계석(境界石), 비석(碑石), 관청 관련 유구 등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모두 종합되면, 도봉동 국유지는 문화재 발굴 기초조사, 즉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의 최우선 검토 대상이 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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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성공 사례 — 서울에서 발굴된 역사

이야기가 너무 이론적으로만 흘렀다면, 이제 실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서울 한복판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역사가 땅 위로 올라온 사례들입니다.

성공 사례 01

광진구 군자동 — 서울 역사상 최대 국유지 발굴 기초조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 따르면, 광진구 군자동에는 1912년 기준 무려 130필지, 1,189,235㎡의 국유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잡종지가 78.7%, 밭이 12.3%, 논이 8.7%를 차지했습니다. 여의도 면적의 40.9%에 달하는 이 광활한 국유지는 '뚝섬'으로 불리던 한강 변 일대와 겹치며, 현재도 문화재 지표조사의 중요 검토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록 하나가 한 도시의 역사 전체를 다시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성공 사례 02

마포구 공덕동 — 19필지 104,007㎡, 도시 개발과 문화재의 공존

공덕동의 경우 1912년 기록에 19필지 104,007㎡의 국유지가 확인됩니다. 현재 대규모 도심 개발이 이루어진 이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 관련 유구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개발과 보존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조사가 진행된 모범 사례로 꼽힙니다.

이처럼 단순한 지적 기록 하나가, 도시 전체의 역사를 다시 쓰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도봉동 4필지 6,099㎡도 예외가 아닙니다. 규모는 작아 보여도, 사사지와 국유 논밭이 결합된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역사적 퍼즐의 중요한 조각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서울 어딘가의 땅은 말을 걸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에 대해 더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당신이 사는 동네, 당신이 걷는 골목 아래에 어떤 역사가 잠들어 있는지, 함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동네 문화재도 궁금해요 ↗

역사는 박물관 유리 케이스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그것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발밑에서조용히 숨 쉬고 있습니다.언젠가 그 땅이 다시 열리는 날,우리는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이 도시가 얼마나 긴 꿈을 꿔왔는지를.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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