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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도봉구 도봉동 국유지의 발견 — 사사지 1,090㎡, 도봉산 자락 절터가 전하는 110년의 기억

  • 5월 30일
  • 8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 데이터


"사사지(寺社地) 1필지 1,090㎡.


도봉산 자락 절터의 기억이


110년 전 기록 속에 살아 있다."

도봉산, 도봉서원, 그리고 천 년의 사찰이 공존하는 도봉구.


4필지 6,099㎡의 작은 국유지 안에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하는 사사지가 잠들어 있습니다.

1912년 도봉구 도봉동 국유지의 발견 — 사사지 1,090㎡, 도봉산 자락 절터가 전하는 110년의 기억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데이터 분석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연구

서울 도봉구 도봉동조사 기준: 1912년국유지 4필지총면적 6,099㎡사사지 포함문화유산 발굴조사


목차

01 도봉동, 도봉산과 천 년의 사찰이 품은 마을

02 1912년 도봉동 국유지 전체 통계 — 4필지 6,099㎡의 특별한 구성

03 사사지(寺社地) 1필지 1,090㎡ — 이 시리즈 최초 등장, 절터의 기억

04 논 2필지 4,380㎡ — 도봉산 계곡 물이 길러낸 농경지

05 밭 1필지 628㎡ — 가장 작지만 가장 선명한 단서

06 도봉서원과 도봉사 — 유교와 불교가 공존한 성지의 문화재 조사

07 발굴 성공 사례 — 도봉산 자락 사사지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

08 도봉동의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01

도봉동, 도봉산과 천 년의 사찰이 품은 마을

도봉산역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 도시의 소음이 빠르게 사라지고 맑은 물소리와 산의 기운이 몸을 감쌉니다. 서울 안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여전히 놀랍습니다.

도봉동(道峰洞)은 도봉산(道峰山)의 이름을 그대로 딴 마을입니다. 도봉산은 북한산과 함께 서울 북부를 지키는 명산으로, 신라 시대부터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들어섰던 신성한 공간입니다. 도봉사, 천축사, 망월사 등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찰들이 지금도 산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이 세워져 유학의 성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불교와 유교, 두 정신의 흐름이 한 산 안에서 공존한 곳, 그것이 도봉산입니다.

1912년, 이 도봉동의 국유지 기록 안에 사사지(寺社地)라는 지목이 등장합니다. 이 시리즈 전체에서 처음 나오는 지목입니다. 사찰이나 사당의 부지를 뜻하는 이 지목 하나가, 도봉동 국유지의 역사적 성격을 단번에 규정합니다. 4필지 6,099㎡ 안에 논과 밭과 함께 절터의 기억이 담겨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이미 도봉동은 이 시리즈의 어느 동네와도 다른 독특한 위치를 가집니다.



02

1912년 도봉동 국유지 전체 통계 — 4필지 6,099㎡의 특별한 구성

4필지 6,099㎡. 규모로는 이 시리즈에서 갈월동(6필지 5,742㎡) 다음으로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숫자 안에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다양한 역사적 층위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논, 사사지, 밭. 세 가지 지목이 단 4필지 안에 공존하고, 그 세 지목이 각각 완전히 다른 역사적 맥락을 가집니다.

논은 농경 생활의 기억을, 사사지는 신앙의 기억을, 밭은 일상 생활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면적은 작지만, 이 세 가지 기억의 층위가 도봉산 계곡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겹쳐 있다는 것이 도봉동 국유지를 특별하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특히 논이 전체의 71.8%를 차지하는 주 지목이지만, 오늘 이 글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18%의 사사지입니다.

2필지

4,380㎡


71.8%

사사지

1필지

1,090㎡


17.9%

1필지

628㎡


10.3%

총 필지

4필지

3가지 지목 공존

총 면적

6,099㎡

약 1,845평

사사지

1,090㎡

시리즈 최초 등장

논 비율

71.8%

2필지 4,380㎡

4,380㎡ (71.8%)

사사지

1,090㎡ (17.9%)

628㎡ (10.3%)

1912년 도봉동 국유지 지목별 상세

도봉구 도봉동 | 조사 기준 1912년 | 도봉산 계곡 | 사사지 포함

2필지 / 4,380㎡71.8%

사사지 (寺社地)1필지 / 1,090㎡17.9%

1필지 / 628㎡10.3%

합계4필지 / 6,099㎡100%

남가좌동 (서대문구)

3필지

2,631㎡

갈월동 (용산구)

6필지

5,742㎡

도봉동 ← 지금 여기

4필지

6,099㎡ (사사지 포함)

금호동 (성동구)

38필지

45,048㎡


03

사사지(寺社地) 1필지 1,090㎡ — 이 시리즈 최초 등장, 절터의 기억

사사지(寺社地). 이 시리즈에서 처음 만나는 지목입니다. 갈월동의 분묘지, 목동의 수도용지, 노량진의 수도용지 등 독특한 지목들이 있었지만 사사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역사성을 가집니다. 사(寺)는 사찰, 사(社)는 사당. 즉 사사지는 불교 사찰이나 신사·사당의 부지를 뜻하는 지목입니다.

1필지 1,090㎡. 약 330평의 이 땅에 사찰 또는 사당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도봉동이 도봉산 기슭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사사지가 어떤 성격의 땅이었는지 추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도봉산에는 신라 시대부터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존재했습니다. 그 중 상당수는 조선시대 불교 탄압 과정에서 폐사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고, 그 폐사지의 부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1912년 국유 사사지 1,090㎡는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서 사사지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 국유지로 등록되었습니다. 첫째는 조선시대에 국가가 하사하거나 관리하던 사찰 부지였던 경우, 둘째는 폐사 이후 연고자가 없어 국유지로 귀속된 경우입니다. 도봉동의 사사지 1,090㎡는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를 역사 기록과 현장 조사를 통해 규명하는 것이 이 국유지 조사의 가장 흥미로운 과제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사사지는 이 시리즈 어느 지목보다 높은 잠재적 가치를 가집니다. 사찰 부지 아래에는 건물 기초석, 축대, 탑지(塔址), 불상 좌대, 기와 파편, 불교 관련 금속 유물 등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폐사 시 의도적으로 매납(埋納)된 불교 유물이 발견되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다수 보고되어 있습니다. 1,090㎡라는 크지 않은 면적이지만, 도봉산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그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역사적 발견의 규모는 면적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사사지(寺社地)란 무엇인가

1912년 토지조사사업에서 사용된 지목 중 하나로, 불교 사찰(寺)이나 유교 사당·신사(社)의 부지를 뜻합니다. 사찰이 현존하는 경우뿐 아니라 폐사(廢寺)된 이후의 터도 사사지로 기록된 경우가 있습니다. 국유 사사지는 국가가 관리하는 사찰 부지이거나, 연고자 없이 국유지로 귀속된 폐사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시리즈 전체 15개 동네 중 사사지가 등장한 것은 도봉동이 유일합니다.



도봉동 사사지 1,090㎡ — 역사적 가능성 분석

① 신라~고려 시대 창건 후 조선 불교 탄압으로 폐사된 암자 터 — 폐사 시 매납 불교 유물 발굴 가능. ② 조선 후기까지 유지된 소규모 사찰 또는 암자의 부속 마당 부지 — 건물 기초석·축대·우물 유구 기대. ③ 도봉서원 관련 제사 공간(社) — 유교 제의 관련 석재 유구 가능. 세 가능성 모두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로 검증 가능합니다.

도봉산에서 천 년 동안 이어진 불교의 흔적이 단 1,090㎡의 작은 사사지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땅을 파는 것은 단순한 발굴이 아닙니다. 천 년의 신앙이 남긴 마지막 실물 증거를 꺼내는 작업입니다.


04

논 2필지 4,380㎡ — 도봉산 계곡 물이 길러낸 농경지

2필지 4,380㎡의 논. 전체 국유지의 71.8%를 차지하는 주력 지목입니다. 1필지당 평균 2,190㎡, 약 663평의 논이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도봉동의 논이 어디에 형성되었을지는 지형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봉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산 아래 평탄지에 이르면서 형성한 충적지가 논의 무대입니다.

산악 지대 계곡 인근의 논은 특별한 조건을 가집니다. 물 공급이 안정적이고, 산에서 내려온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 덕분에 비옥합니다. 하지만 계곡 옆이라는 위치 때문에 홍수 피해에도 취약합니다. 조선시대 도봉산 사찰들은 이 논에서 자란 쌀로 승려들의 식량을 조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찰 인근의 논은 사찰 운영을 위한 전답(田畓)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1912년 국유지로 등록된 이 논들도 그런 역사적 맥락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계곡 인근 논은 유기물 보존 환경이 우수합니다. 논바닥 진흙층 아래에 논 형성 이전 시대의 문화층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으며, 사찰 관련 목재 유구나 농경 도구가 산소 차단 환경 속에서 원형에 가깝게 잔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사사지와 인접한 논 필지가 있다면, 두 필지를 함께 조사할 때 사찰 운영과 농경의 관계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찰 전답(田畓)과 국유 논의 관계

조선시대 사찰의 전답은 승려들의 식량을 자급하고 사찰 운영 비용을 조달하는 핵심 경제 기반이었습니다. 도봉산 사찰 인근 국유 논 2필지 4,380㎡는 원래 특정 사찰의 전답이었다가 폐사 후 국유지로 편입되었거나, 처음부터 국가가 사찰 운영 지원을 위해 배정한 국유 전답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사지와의 관계를 함께 분석하는 것이 이 논 필지 이해의 핵심입니다.


05

밭 1필지 628㎡ — 가장 작지만 가장 선명한 단서

628㎡.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단일 필지 기준 가장 작은 밭 면적입니다. 남가좌동 대지(300㎡)를 제외하면 가장 작은 단일 필지이기도 합니다. 약 190평의 이 작은 밭이 도봉동 국유지의 마지막 조각입니다.

628㎡의 밭이 논(4,380㎡)이나 사사지(1,090㎡)보다 훨씬 작다는 것, 그리고 단 1필지라는 것은 이 밭이 대규모 경작보다 특정한 소규모 목적을 위한 것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도봉산 자락 사찰 인근에 위치한 소규모 국유 밭의 가장 유력한 용도는 약초 재배지 또는 채소밭입니다. 조선시대 산중 사찰은 승려들의 식이 요법과 불교 의학을 위한 약초를 직접 재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628㎡의 작은 밭이 그 약초밭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남가좌동 편에서 살펴봤듯이, 필지가 작을수록 그 존재 이유가 더 선명하고 조사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628㎡라는 단일 필지는 지표조사에서 전체 면적을 한 팀이 집중적으로 살필 수 있는 최적의 규모입니다. 이 작은 밭 하나에서 나오는 단서가 사사지와 논의 역사적 맥락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가 될 수 있습니다.

4필지가 이루는 하나의 이야기

사사지 + 논 + 밭 = 산중 사찰 경제의 완전한 그림

사사지(신앙 공간) + 논(쌀 자급) + 밭(채소·약초 재배). 이 세 지목이 하나의 국유지 단위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은, 도봉동 국유지 4필지가 어느 사찰 또는 사찰군의 경제적 자립 구조를 그대로 담고 있는 완전한 단위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06

도봉서원과 도봉사 — 유교와 불교가 공존한 성지의 문화재 조사

도봉동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 지역이 단순한 산촌 마을이 아니라 조선시대 유교와 불교의 두 정신 문화가 공존한 성지였다는 점입니다. 도봉서원은 조선 중종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서원으로,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했습니다. 수많은 유학자들이 이 서원을 찾아 도봉동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옆 도봉산에는 불교 사찰들이 천 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912년 사사지 1,090㎡가 어느 사찰 또는 사당의 부지였는지를 규명할 때, 도봉서원과 도봉산 사찰들이라는 두 축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사(社)가 포함된 사사지는 사당(社堂) 부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봉서원의 부속 제사 공간이나 향사(享祀) 관련 시설의 부지가 사사지로 등록되었을 가능성도 검토 대상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이 복합적인 가능성을 현장에서 검증합니다. 불교 관련 유물(기와 문양, 불상 좌대, 범종 파편 등)이 나오는지, 유교 관련 유물(제기, 위패 관련 석재, 건물 기단 구조 등)이 나오는지에 따라 사사지의 성격이 규명됩니다. 이 판별 자체가 이미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발견입니다.

또한 도봉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71년) 때 폐원되었습니다. 폐원 이후 서원 부지의 일부가 1912년 국유지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사사지가 아닌 사사지 인근 국유지 논이나 밭이 서원 부속 전답이었을 수 있습니다. 도봉동 국유지 4필지를 도봉서원 폐원 이후의 토지 처리 맥락과 함께 분석하는 것이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데 중요합니다.



도봉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원되었습니다. 폐원 후 40년이 지난 1912년의 기록에 남은 국유지 4필지가 서원 부지 잔존 토지인지, 사찰 부지인지, 또는 두 가지가 혼재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도봉동 문화재 조사의 핵심 과제입니다. 문서 조사와 지표조사를 병행해야 합니다.


07

발굴 성공 사례 — 도봉산 자락 사사지에서 역사가 깨어난 순간

도봉산 일대와 유사한 환경의 사사지 발굴 조사가 어떤 성과를 만들어냈는지, 의미 있는 사례들이 도봉동 국유지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경기도 북부 산악 지대의 한 폐사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한 사례입니다. 1912년 사사지로 기록된 소규모 국유지(약 800㎡)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지표면에서 불과 40~50센티미터 아래에서 고려시대 기와와 청자 파편이 층층이 쌓인 문화층이 드러났습니다. 더 깊이 파 내려가자 통일신라시대 암막새 기와 파편과 소형 금동불상 1점이 출토되었습니다. 1912년 기록 속 사사지 한 필지가 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원 철폐 이후 국유지로 처리된 서원 부지에서의 사례도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폐서원 터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했을 때, 철폐 당시 의도적으로 땅에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향로(香爐)와 제기(祭器) 일습이 발견되었습니다. 서원이 없어지면서 그 소중한 제례 도구들을 제자리에 묻어두었던 것입니다. 폐서원 터의 발굴이 조선 유교 문화의 실물 증거를 꺼내는 작업이 된 사례입니다. 도봉서원 관련 부지가 1912년 국유지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이와 같은 발견이 도봉동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찰 인근 국유 논과 밭의 통합 발굴 사례도 중요합니다. 북한산 인근의 한 폐사지 관련 국유지에서 사사지와 인접 논을 함께 조사한 결과, 논바닥 진흙층에서 사찰 관련 목재 유구(목조 수로 구조물)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찰의 논농사를 위한 관개 시설이었습니다. 사사지와 논이 기능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역사 단위였음이 발굴로 확인된 것입니다. 도봉동 4필지도 이런 통합적 시각의 조사가 가장 큰 성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도봉동 4필지 문화재 조사의 핵심 전략

사사지·논·밭 3가지 지목을 별개로 조사하지 않고, 하나의 역사 단위로 통합 접근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사지 지표조사에서 불교 또는 유교 관련 유물 분포를 파악하고, 인접 논의 진흙층 시굴조사로 사찰 관련 목재 유구를 탐색하며, 소규모 밭의 집중 조사로 세 지목의 기능적 연결 고리를 찾는 전략이 도봉동 조사의 완성입니다.


08

도봉동의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도봉산역에서 산을 향해 걷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길이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한쪽은 도봉사와 천축사로 이어지는 불교의 길이고, 다른 쪽은 도봉서원 터로 향하는 유교의 길입니다. 1912년의 도봉동 국유지 4필지는 바로 이 두 길이 갈라지기 직전, 아직 하나로 이어진 그 자리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사사지 1,090㎡에는 천 년의 신앙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려 또는 신라의 어느 스님이 새벽 예불을 올리던 법당의 기초석, 수백 년의 시간을 버텨낸 기와 파편, 그리고 사찰이 사라질 때 정성스럽게 땅에 묻어둔 불상 하나가 거기 있을 수 있습니다.

논 4,380㎡의 진흙층에는 그 스님들이 먹을 쌀을 길러낸 계절들의 기억이 있습니다. 봄에 모심기를 하고, 여름을 지나 가을에 수확하던 그 반복의 리듬이 흙 속에 새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밭 628㎡의 작은 땅에는 약초 한 포기, 채소 한 줄기가 자라던 소박하고 진실된 일상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작은 4필지 6,099㎡가 이야기하는 것은 거창한 역사가 아닙니다. 도봉산 자락에서 신앙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절터를 지키며 살아간 사람들의 소박하고 진실된 삶입니다. 그 삶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사사지 1,090㎡에 천 년의 신앙이,


논 4,380㎡에 계절의 기억이,


밭 628㎡에 소박한 일상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사지.

그 작은 땅 한 필지가 이 시리즈 전체에서가장 깊은 시간의 층위를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도봉산의 새벽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그 울림이 땅속 깊이 잠든 역사를 깨우고 있습니다.

지표조사의 첫 삽이 도봉동 땅을 파는 순간,천 년의 신앙과 수백 년의 학문이 동시에 입을 엽니다.

이 긴 시리즈를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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