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용산구 도동1가·동자동
- 5월 25일
- 6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용산구 도동1가·동자동
복숭아꽃 피던 마을에절이 있었고, 숲이 있었다 —1912년 도동1가·동자동 국유지의 세 가지 이야기
4필지, 11,857㎡. 대지·사사지·임야. 지금은 서울역 옆 고층 빌딩 숲이 된 이 땅에, 1912년에는 관청 건물과 절 터, 그리고 남산 자락의 숲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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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복숭아꽃 마을, 도동(桃洞)의 기억
4필지 11,857㎡ — 세 가지 지목이 그리는 풍경
대지 2,052㎡ — 국가 관청이 서 있던 자리
사사지 4,175㎡ — 절이 있었거나, 신사가 있었거나
임야 5,629㎡ — 남산 자락이 품은 숲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기록이 갖는 의미
성공 사례 — 용산구 땅이 꺼낸 역사들
지금 이 기록이 우리에게 묻는 것
서울역 바로 옆, 지금은 고층 빌딩과 쪽방촌이 공존하는 이 동네가 1912년에는 복숭아꽃 피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 한켠에 절 터가, 다른 한켠에 관청 건물이, 또 다른 곳에 남산 자락 숲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용산구 도동1가(桃洞一街)와 동자동(東子洞). 지금은 도동1가가 1985년에 동자동으로 편입되어 하나의 동이 되었지만, 1912년 토지대장에는 별개의 주소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서울역에서 불과 몇 블록, 남산 북쪽 자락 아래 자리한 이 땅. 4필지 11,857㎡의 국유지가 담은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드립니다.

1. 복숭아꽃 마을, 도동(桃洞)의 기억
도동(桃洞). 복숭아나무 골짜기. 이 이름이 단순한 행정 명칭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이 일대에 실제로 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라던 동네였다는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도동1가(桃洞一街)와 도동2가(桃洞二街)로 나뉘어 있던 이 지역은, 남산 북쪽 기슭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었습니다.
이 동네의 행정 변천사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912년 당시 도동1가는 경성부 남부 둔지방(屯芝坊) 권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일제가 1914년 경성부 구역과 명칭을 변경하면서 고시정(古市町)이 되었고,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경성부 서대문구 고시정이 됩니다. 1946년 해방 이후 중구 동자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75년 용산구 동자동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1985년, 도동1가는 마침내 동자동으로 완전히 통합됩니다.
조선
한성부 남부 둔지방 — 복숭아나무 많은 마을 '도동'
1912년
토지대장 작성 기준 — 국유지 4필지 11,857㎡ 기록
1914년
일제 행정 개편 — 고시정(古市町)으로 개칭
1946년
해방 후 중구 동자동으로 개칭
1975년
용산구 동자동으로 편입
1985년
도동1가가 동자동에 통합 — 현재의 행정 구역 완성
지금의 동자동은 서울역 바로 동쪽, 남산 북사면 아래에 자리합니다. 트윈시티 남산 같은 고층 복합 빌딩이 들어서 있고, 서울역과 가장 가까운 쪽방촌이 아직 남아 있는 이 동네. 그 땅 아래에 복숭아꽃 피던 마을의 기억이 잠들어 있습니다.

2. 4필지 11,857㎡ — 세 가지 지목이 그리는 풍경
1912년 도동1가·동자동의 국유지는 4필지 11,857㎡입니다. 앞서 살펴본 다른 동네들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세 가지 지목의 구성이 그 어느 곳보다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습니다.
도동1가·동자동 국유지 전체11,857㎡4필지 · 3가지 지목 · 대지 + 사사지 + 임야
임야5,629㎡1필지 · 47.5%
사사지4,175㎡1필지 · 35.2%
대지2,052㎡2필지 · 17.3%
임야
5,629㎡ (47.5%)
사사지
4,175㎡ (35.2%)
대지
2,052㎡ (17.3%)
이 세 가지 지목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상상해보겠습니다. 남산 북쪽 사면의 숲(임야)이 가장 넓게 자리하고, 그 아래 어딘가에 종교 시설(사사지)이 있었고, 평지나 사면 초입에 관청 건물(대지)이 서 있었습니다. 복숭아꽃 피는 마을 위로 이 세 가지 공간이 층층이 쌓여 있던 것입니다.
3. 대지 2,052㎡ — 국가 관청이 서 있던 자리
2필지 2,052㎡의 국유 대지. 전체의 17.3%입니다. 국유 대지는 국가 소유의 건물 부지를 의미합니다. 관아, 관청 건물, 국가 시설의 부속 건물이 실제로 세워져 있거나 세울 목적으로 확보된 땅입니다.
1912년 도동1가·동자동 일대는 서울역(당시 경성역) 인근이었습니다. 1900년 경인선이 완전 개통되고 서울역이 그 시발역이 된 이후, 이 지역은 빠르게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가 됩니다. 국유 대지 2필지 2,052㎡는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국가가 확보한 건물 부지였을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국유 대지는 특히 주목합니다. 건물 유구(기단부, 초석, 기와편, 생활 도기류)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특히 관청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공문서 관련 유물이나 관용 도기 등 조선시대 관아 생활을 보여주는 유물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4. 사사지 4,175㎡ — 절이 있었거나, 신사가 있었거나
이번 기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지목입니다. 1필지 4,175㎡의 사사지(寺社地). 전체의 35.2%를 차지하는 이 땅은 무엇일까요.
사사지(寺社地)란 무엇인가
사사지는 사찰(寺)이나 신사(社)의 부지를 뜻하는 지목입니다. 현행 지목 체계에서는 '종교용지'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12년 토지대장 작성 당시 사사지로 분류된 토지는 사찰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신사(神社) 등 종교 시설의 부지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국유 사사지라는 점에서,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사찰 또는 신사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912년 도동1가·동자동의 국유 사사지는 두 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첫째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사찰 부지였을 가능성입니다. 남산 북쪽 기슭은 조선시대에 여러 사찰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용산구 일대에는 조선시대부터 다양한 불교 사찰이 있었고, 이 사사지가 그런 전통적인 사찰 터였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일제강점기 초반에 설치된 신사(神社) 부지였을 가능성입니다. 일제는 한국 강점 직후부터 전국 각지에 신사를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1912년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지 불과 2년 후입니다. 서울 남산 일대는 일제가 신사를 집중적으로 설치한 지역이었는데, 도동1가 사사지가 그 초기 신사 부지 중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사사지 4,175㎡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풍부한 유물 출토 가능성을 가진 구역입니다. 사찰 터라면 불교 관련 유물(불상, 범종, 기와, 도자기)이, 신사 터라면 일제 신사 관련 유구와 그 이전 시대 유물이 중첩되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 아래 지층에는 복숭아꽃 피던 마을 도동의 더 오래된 기억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사지는 단순한 종교 부지가 아닙니다. 사찰이나 신사 부지 아래에는 그 이전 시대의 생활유적, 심지어 선사시대 유물까지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 시설의 신성한 공간은 오랜 세월 동안 외부 교란을 막는 보호막 역할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5. 임야 5,629㎡ — 남산 자락이 품은 숲
가장 넓은 지목은 임야입니다. 1필지 5,629㎡, 전체의 47.5%를 차지하는 이 숲은 분명 남산 북쪽 기슭의 연장선에 있었을 것입니다. 남산(南山, 목멱산)은 한양의 안산(案山)으로 조선시대 도성의 풍수적 핵심이었습니다. 그 북쪽 사면이 바로 도동·동자동 일대입니다.
남산 자락의 임야가 1912년에도 국유지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습니다. 조선시대부터 남산은 도성의 중요한 산림으로 벌목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국유 임야로 유지된 구역이 많았습니다. 5,629㎡의 임야는 그 연장선에 있는 땅입니다.
남산 자락 임야의 문화재 가치는 매우 높습니다. 한양 도성의 성곽이 남산을 따라 이어지며, 그 성곽 주변에는 조선시대 관련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남산 일대는 조선시대 연산군 시절 이후 왕족 별장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임야 지층 아래에는 이러한 역사적 흔적들이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남산 자락의 임야는 조선 도성의 역사와 직결됩니다. 성곽 유구, 봉수대 흔적, 왕실 관련 시설의 기초, 그리고 훨씬 오래된 선사시대 흔적까지 발견 가능성이 열려 있는 땅입니다.

6.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기록이 갖는 의미
1912년 도동1가·동자동 국유지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갖는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세 가지 지목이 각각 다른 조사 방향을 제시합니다.
대지(2필지 2,052㎡)는 건물 유구 중심의 조사가 필요합니다. 조선시대 관청 건물의 기단부, 초석, 기와편이 주요 발견 대상이 됩니다. 남산 기슭에 위치한 만큼 경사면의 축대 구조물도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사사지(1필지 4,175㎡)는 종교 유구 조사와 함께, 그 이전 시대 지층에 대한 정밀 시굴조사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사찰 터라면 불교 유물층이, 신사 터라면 그 이전 한국 전통 문화층이 깊은 지층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임야(1필지 5,629㎡)는 남산 성곽과의 연계를 고려한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며, 항공사진 분석과 지형 측량을 통해 지하 유구의 분포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seoulheritage.org가 용산구 후암동, 효창동에 이어 이 지역의 조사 자료를 축적하는 것은, 남산 북사면을 따라 형성된 용산구 역사 지층 전체를 완성하는 작업입니다. 특히 사사지라는 희귀한 지목이 포함된 이 기록은, 용산구 지역조사에서 가장 고고학적 주목도가 높은 자료 중 하나입니다.
7. 성공 사례 — 용산구 땅이 꺼낸 역사들
성공 사례 1
용산구 후암동 토지 기록 — 문화재 지표조사 길잡이
seoulheritage.org가 공개한 용산구 후암동 1912년 토지 기록 분석은 "오늘의 문화재 지표조사 길잡이"라는 제목을 달 만큼 실용적인 기초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남산 남사면에 위치한 후암동의 역사 지층 분석이 도동1가·동자동이라는 북사면 인접 지역 조사와 연계될 때, 남산 전체 기슭의 역사 지층 지도가 완성됩니다.
성공 사례 2
용산구 효창동 토지 기록 — 역사가 현재로 이어지는 이야기
seoulheritage.org의 용산구 효창동 기초조사는 "땅이 말해준 것, 오늘의 발굴과 지표조사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주제로 진행됐습니다. 효창공원 일대의 역사적 무게와 현재 문화재 조사의 연결고리를 제시한 이 사례는, 도동1가·동자동 사사지 조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중요한 참고가 됩니다.
성공 사례 3
용산구 용문동 기초조사 — 사사지의 또 다른 발견
seoulheritage.org의 용산구 용문동 1912년 조사에서도 사사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용문동의 사사지는 "마을 공동체의 이동 경로나 사적인 통행 공간이었을 것"으로 분석됐는데, 이 맥락을 도동1가·동자동 사사지와 비교 분석하면 용산구 전체에서 사사지의 분포 패턴과 역사적 의미를 더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8. 지금 이 기록이 우리에게 묻는 것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복숭아꽃 피던 도동(桃洞), 지금의 동자동. 4필지 11,857㎡, 세 가지 지목. 이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제는 선명하게 들립니다.
첫째, 사사지 4,175㎡의 존재는 이 동네 땅 아래에 종교 유구와 그 이전 시대의 역사 지층이 겹쳐 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현재 동자동에서 진행되는 재개발 사업과 고층 건물 신축 공사가 이 지층을 건드리기 전에,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둘째, 임야 5,629㎡가 남산 자락에 있었다는 사실은 서울 성곽 및 조선시대 왕실 시설과의 연관성을 열어줍니다. 서울 성곽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습니다. 그 성곽과 연결되는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발은, 문화재보호법 테두리 안에서 신중하게 접근되어야 합니다.
셋째, 이 기록은 단순한 토지 통계가 아닙니다. 복숭아꽃 피는 조용한 마을이 근대 도시 서울의 한복판으로 변해가던 그 격동의 시기, 그 땅 위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어떤 신앙을 가졌고, 어떤 건물을 세웠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역사의 단서입니다.

복숭아꽃이 지고 절이 남았고,절이 사라지고 빌딩이 들어섰습니다.그러나 땅은 기억합니다.4필지 11,857㎡ — 그 기억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사사지의 비밀, 대지의 기억, 임야의 침묵.이 세 가지 지목이 이루는 이야기는복숭아꽃 마을 도동의 마지막 목소리입니다.기록을 읽는 것이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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