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송파구 거여동
- 3일 전
- 6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송파구 거여동
백제 위례성의 품 안,1912년 거여동 산자락에 잠든 숲 이야기
2필지, 3,008㎡, 그리고 오직 임야. 거여동의 국유지는 단순합니다. 하지만 이 숲이 서 있는 땅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백제의 수도가 있던 바로 그 땅, 남한산성 아래 자락이니까요.
문화재 발굴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 기관송파구 거여동 역사시굴조사 표본조사임야 발굴조사백제 위례성1912년 토지대장
목 차
거여동, 이름 속에 숨은 2,000년의 역사
1912년 국유 임야 2필지 3,008㎡ — 두 개의 숲이 말하는 것
백제 위례성의 품 안 — 이 땅이 특별한 이유
남한산성에서 거여동까지 — 역사의 지층
임야 문화재 지표조사, 왜 이 기록이 핵심인가
성공 사례 — 송파구 땅이 꺼낸 역사들
지금 이 임야 기록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
이 땅에는 뭔가 있습니다. 그냥 느낌이 아닙니다. 백제의 왕성이 있던 곳, 고려와 조선의 군사 요충지였던 곳,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도 온전히 개발되지 않고 자연부락의 흔적을 지켜온 곳. 거여동은 처음부터 뭔가를 품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1912년, 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국가 소유 임야 2필지, 3,008㎡가 기록되었습니다. 잡목과 소나무가 뒤덮인 그 숲 아래로, 얼마나 긴 시간이 쌓여 있을지.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1. 거여동, 이름 속에 숨은 2,000년의 역사
거여동(巨餘洞). 낯선 이름이지만 그 안에는 2,000년 가까운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이름의 유래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거암(巨岩)'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마을이라 '거암리'라 부르던 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김이', '겜리', '잔버드리', '개롱리' 등으로 변하다가 결국 '거여리', '거여동'이 됐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영조 시대의 문헌에는 '거여미동'이라는 이름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이 서 있는 위치입니다. 거여동 일대는 백제가 처음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정했던 위례성(慰禮城) 권역에 해당합니다. 송파구 전체가 백제의 도읍지였고, 신라 시대에는 신주·한주, 고려 시대에는 광주, 조선 시대에는 광주부 중대면으로 이어진 역사의 땅입니다. 거여동은 그 한복판에 있습니다.
기원전 18년~
백제 온조왕 건국 — 위례성 도읍. 거여동 일대 백제 핵심 영역
신라
신주·한주로 개칭. 삼국통일 후 한강 유역 편입
고려
광주(廣州)로 개칭. 성종 때 광주목 설치
1577년 조선
광주부 승격 — 광주부 중대면 거여리로 행정 편제
1912년
토지대장 기준 — 국유 임야 2필지 3,008㎡ 기록.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여리
1914년
일제 행정 개편 — 인근 자연부락 병합해 거여리로 명명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편입 → 이후 강남구·강동구를 거쳐 1988년 송파구 확정
특히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송파구 일대가 전면 개발될 때, 거여동과 마천동 일부만은 자연부락이 전면 철거되지 않고 남았습니다. 개발의 물결이 상대적으로 늦게 닿은 이 동네. 그 덕분에 땅 아래 지층이 다른 곳보다 더 잘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1912년 국유 임야 2필지 3,008㎡ — 두 개의 숲이 말하는 것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912년 기준 거여동의 국유지는 2필지, 3,008㎡. 지목은 임야(林野) 하나뿐입니다. 상월곡동처럼 1필지가 전부인 경우와 달리, 거여동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임야 필지가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여동 국유지 전체3,008㎡임야 2필지 · 전체의 100%
필지 수
2필지
임야 2 / 기타 0
총 면적
3,008㎡
약 910평 · 축구 절반 크기
3,008㎡는 약 910평. 농구코트 15개를 합쳐놓은 크기입니다. 두 필지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 임야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큰 숲이 아니라, 지형적으로 분리된 두 곳의 산자락에 각각 국유지가 지정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경우 두 필지가 어느 방향, 어느 사면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그 아래 지층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이 자리하고, 성내천이 흐르며, 구릉과 완만한 경사면이 이어지는 거여동의 지형. 이런 지형에서 임야 2필지는 어느 구릉의 사면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구릉지 임야는 문화재 조사에서 가장 주목하는 지형 중 하나입니다. 고분, 토성, 선사시대 취락지가 바로 이런 구릉 위와 사면에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필지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국유 임야가 단순한 산림 관리 구역이 아니라 지형적으로 의미 있는 두 지점을 각각 보호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두 필지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됩니다.
3. 백제 위례성의 품 안 — 이 땅이 특별한 이유
거여동 임야가 고고학적으로 특별한 이유는 단 하나의 사실로 설명됩니다. 이 땅이 백제의 첫 번째 수도, 위례성(慰禮城) 권역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세운 백제는 한강 이남 지역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 수도가 바로 위례성이고, 그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됩니다. 풍납토성, 몽촌토성, 남한산성 등 여러 후보가 있지만, 거여동이 속한 광주군 중대면 일대도 중요한 비정 후보 지역에 포함됩니다. 남한산성 안에는 온조왕이 세운 궁궐의 구전이 전해지고, 산성 아래에는 온조왕이 사용한 '어용샘'도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송파구 일대는 이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라는 백제 시대 유적지로 유명합니다. 풍납토성은 한성 백제 시기의 왕성으로 추정되며, 1997년 아파트 공사 중 대규모 유물이 발견되어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곳입니다. 그 풍납토성과 같은 송파구 권역 안에 거여동의 국유 임야가 존재했다는 사실. 이것이 이 기록의 무게를 결정합니다.
역사적 맥락
송파구 = 백제 한성기의 핵심 영역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이 모두 송파구 안에 있습니다. 거여동은 이 유적들과 같은 행정 권역, 같은 역사 지층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1912년 국유 임야로 기록된 거여동의 3,008㎡가 이 맥락 안에서 가지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4. 남한산성에서 거여동까지 — 역사의 지층
거여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남한산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거여동은 남한산성 주변에 위치한 동네로, 성내천이 흐르고 녹지 비율이 높은 지역입니다.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온조왕 시절의 성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남한산성을 품고 있는 이 산줄기가 거여동 북쪽까지 이어집니다. 그 산줄기의 낮은 사면과 구릉 지대가 바로 거여동의 지형을 형성합니다. 산성과 연결된 이 구릉지에 1912년 국유 임야가 지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 땅이 단순한 산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관리되어온 공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송파구 대부분의 농촌 지역과 자연부락이 전면 철거되고 새로운 도시계획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거여동과 마천동 일부만은 이 전면 개발을 비켜갔습니다. 오랫동안 개발의 손길이 늦었던 이 구역에는, 다른 곳에서는 이미 사라진 역사의 흔적이 땅속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습니다.
개발되지 않은 땅이 문화재 조사에서는 오히려 보물입니다.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서지 않은 구릉지 임야는, 수천 년의 지층이 교란되지 않고 쌓여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입니다. 거여동 국유 임야 3,008㎡는 바로 그런 가능성을 품은 땅입니다.

5. 임야 문화재 지표조사, 왜 이 기록이 핵심인가
1912년 토지대장에 임야로 기록된 거여동 국유지 2필지 3,008㎡.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임야라는 지목 자체의 의미입니다. 임야는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지층 교란이 적고, 깊은 층위의 유물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구릉지 임야는 고분군, 제사 유적, 선사시대 취락의 주요 입지가 됩니다. 거여동의 지형적 특성상 이런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습니다.
둘째, 국유지라는 점입니다. 국유 임야는 일반 민유지와 달리 개인의 경작이나 묘지 조성이 제한됩니다. 그만큼 외부 교란이 적고, 오래된 지층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시대에 국가가 특별히 관리한 임야에는 봉산(封山)처럼 벌목을 금지하고 산림을 보호하던 곳이 있었는데, 이런 국유 임야는 그 역사가 더욱 오래됩니다.
셋째, 이 기록이 실제 발굴조사에 앞서 진행되는 지표조사의 우선순위 판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개발 이전에 반드시 실시하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1912년 토지대장 기록은 조사 구역과 방법을 결정하는 핵심 근거 자료가 됩니다. seoulheritage.org를 비롯한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이 기초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목임야100% 산림 지역
필지 수2필지분리된 두 구역
면적3,008㎡약 910평
6. 성공 사례 — 송파구 땅이 꺼낸 역사들
성공 사례 1
풍납토성 — 아파트 공사 중 드러난 백제 왕성
1997년 송파구 풍납동에서 아파트 재건축 공사 중 대규모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토기, 기와, 주거 유구 등 백제 한성기의 생생한 흔적들이었습니다. 이 발견을 계기로 풍납토성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해당 부지의 개발이 전면 중단됐습니다. 사전 지표조사 없이 진행된 공사가 얼마나 큰 역사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이며, 동시에 송파구 땅 아래에 얼마나 중요한 유산이 잠들어 있는지를 세상에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성공 사례 2
석촌동 고분군 — 백제 왕실의 무덤이 남긴 기록
송파구 석촌동에는 백제 한성기 왕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적석총(돌무지무덤)이 여러 기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 계통의 적석총 양식이 한강 이남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 연관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가 됐습니다. 이 고분군 발굴 역시 기초자료 축적과 지표조사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거여동과 같은 권역의 땅이 이런 유산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거여동 임야 조사의 중요성을 더욱 높여줍니다.
성공 사례 3
seoulheritage.org 송파구 지역조사 — 풍납동·장지동에서 시작된 기록
seoulheritage.org는 송파구 풍납동과 장지동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먼저 분석하고 공개했습니다. 특히 장지동은 "지금은 아파트 숲이지만 1912년에는 논밭이 끝없이 펼쳐진 고요한 농촌이었다"는 기록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거여동 임야 기록은 이 연구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송파구 전체 역사 지층 지도를 완성해가는 중요한 퍼즐 조각입니다.

7. 지금 이 임야 기록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1912년 거여동 국유지. 2필지, 3,008㎡, 임야. 이 세 가지 정보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제는 선명하게 들립니다.
첫째, 이 땅은 백제의 도읍지였던 위례성 권역 안에 있습니다.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과 같은 역사 지층 위에 서 있습니다. 1912년에 임야로 기록된 이 두 필지 아래에는, 어쩌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백제 시대의 유구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둘째, 거여동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발 바람이 상대적으로 늦게 닿은 곳입니다. 개발이 늦었다는 것은 지층이 그만큼 덜 교란됐다는 뜻입니다. 1912년 국유 임야의 두 필지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특정하고, 그곳에 대한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는 것. 그것이 이 기록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일입니다.
셋째, 이 기록은 거여동에서 어떤 개발이나 토목 공사가 계획될 때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근거가 됩니다. 풍납토성의 사례가 보여주듯, 사전 조사 없는 개발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백제 온조왕이 처음 나라를 세우던 땅의 한 자락에,1912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두 개의 숲이 있었습니다.그 숲은 지금도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우리가 그것을 묻기만 한다면.
2,000년의 역사가 쌓인 땅에서 진행되는 문화재 지표조사.그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이 기록 한 장에서 시작됩니다.1912년의 기록을 읽는 것이 곧 2,000년의 역사를 여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거여동의 숲이 품은 이야기, 이제 당신도 알게 됐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