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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성북구 상월곡동

  • 5월 25일
  • 6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성북구 상월곡동

단 하나의 필지,그러나 6,694㎡의 숲이 품은 이야기

1912년 성북구 상월곡동. 달빛이 머물던 골짜기 위쪽, 웃다리골이라 불리던 이 동네 산자락에 국가 소유 임야 한 필지가 고요히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 숲은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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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상월곡동, 달빛이 머물던 골짜기

  • 국유지 1필지 6,694㎡ — 오직 하나, 그래서 더 특별하다

  • 임야(林野)란 무엇인가 — 숲이 감추는 것들

  • 월곡동 유적 — 초기 철기시대부터 이어진 역사의 땅

  • 임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어떻게 다른가

  • 성공 사례 — 숲속에서 찾아낸 서울의 시간

  • 지금 이 임야 기록이 우리에게 묻는 것

숫자 하나가 전부일 때, 그 숫자가 말하는 무게는 오히려 더 묵직합니다. 1필지, 6,694㎡. 상월곡동 국유지의 전부이자, 전부입니다.

서울 성북구 상월곡동. 지하철 6호선 월곡역 인근, 동덕여자대학교와 오동공원이 자리한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월곡상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작은 농촌 마을. 소나무 숲이 수려해서 지방에서 올라온 소장사들이 달밤에 쉬어 가던 교통의 요지. 그 마을의 산자락 어딘가에 국가 소유 임야 한 필지, 6,694㎡가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하나의 기록이 왜 중요한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풀어가겠습니다.



1. 상월곡동, 달빛이 머물던 골짜기

상월곡동(上月谷洞). 한자 그대로 풀면 '위쪽 달 골짜기'입니다. 지역 주민들은 옛날부터 이곳을 '웃다리골'이라 불렀습니다. 산지 형태가 반달을 닮은 골짜기 위쪽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월곡동 권역에 아래쪽 마을인 하월곡동(아랫다리골)이 있고, 그 위쪽이 바로 상월곡동입니다.

이 동네의 역사는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95년에는 한성부 동서 인창방 동소문외계 월곡상리라는 긴 이름으로 불렸고, 1911년에는 경성부 인창면 월곡상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2년 토지대장이 작성될 당시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상월곡리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이라는 이름을 달기 훨씬 전부터 이 땅은 이미 긴 역사를 쌓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

한성부 동부 숭신방 — 도성 동쪽 외곽 농촌 지역

1895

한성부 동서 인창방 동소문외계 월곡상리로 편제

1911

경성부 인창면 월곡상리 — 일제 행정 체계 편입

1912

토지대장 작성 기준 시점 — 국유 임야 1필지 6,694㎡ 기록

1914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상월곡리로 행정 개편

1949

서울시 성북구 편입 — 상월곡동으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됨

달밤에 도착해 잔월(殘月) 아침에 소 흥정을 했다는 이야기에서 '월곡(月谷)'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달과 깊이 연결된 이름, 달빛 아래 사람들이 머물고 거래하고 살아가던 이 동네의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집니다.



2. 국유지 1필지 6,694㎡ — 오직 하나, 그래서 더 특별하다

1912년 기준 상월곡동의 국유지는 딱 하나입니다. 1필지, 6,694㎡. 지목은 임야(林野). 이것이 전부입니다.

상월곡동 국유지 전체6,694㎡임야 1필지 · 전체의 100%

앞서 살펴본 다른 동네들과 비교해 보면 이 기록의 성격이 선명해집니다. 마포구 대흥동은 24필지 56,654㎡의 다양한 지목으로 구성된 대규모 국유지였습니다. 서대문구 미근동은 2필지 3,262㎡로 대지와 밭이 혼재했습니다. 그런데 상월곡동은 오직 하나, 임야뿐입니다.

🌲1국유지 필지 수

📐6,694㎡총 면적 (약 2,025평)

🏔임야유일한 지목

6,694㎡는 어느 정도 넓이일까요. 약 2,025평, 축구장 하나와 맞먹는 면적입니다. 대지나 밭이 아닌 임야가 이 크기로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이 땅이 그만큼 울창한 산림 지역이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1912년 상월곡동의 이 산자락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에 가까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필지, 오직 하나의 지목. 단순해 보이지만 이 단순함이 오히려 이 땅의 성격을 더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이 동네의 국유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숲이었습니다.


3. 임야(林野)란 무엇인가 — 숲이 감추는 것들

임야라는 지목이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왜 중요한지 먼저 짚어보겠습니다. 임야는 나무가 우거진 산림과 그 주변 황야 지대를 뜻합니다. 농경지나 대지와 달리, 임야는 인간의 경작 활동으로 인한 지층 교란이 매우 적습니다. 땅을 갈거나 기초를 다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임야 아래 지층에는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역사 유물이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임야는 보통 구릉이나 산지에 형성됩니다. 한반도의 선사시대 사람들은 구릉 위나 산 중턱에 무덤을 쓰고, 제사를 지내고, 때로는 취락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임야 지대는 고분, 적석총, 선사시대 생활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특히 높은 구역으로 꼽힙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임야 지역의 지표조사에 유독 신중을 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상월곡동의 6,694㎡ 국유 임야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땅입니다. 1912년에 임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그 이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이 땅이 농경지나 건물 부지로 전용되지 않고 산림 상태로 유지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지층은 교란 없이 쌓여왔습니다.



4. 월곡동 유적 — 초기 철기시대부터 이어진 역사의 땅

상월곡동과 그 인접 지역인 월곡동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 유적이 확인된 곳입니다. 이 사실이 이 기초자료를 더욱 주목하게 만듭니다.

광복 이전, 일본인 학자 요코야마가 지표조사를 통해 월곡동 일대에서 초기 철기시대 유물을 확인했습니다. 민무늬토기 바닥편, 덧띠토기편, 쇠뿔 모양 손잡이 토기류와 함께 간돌도끼, 반달돌칼, 공이 등 다양한 석기류가 수습되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에서 2,500년 전, 초기 철기시대 사람들이 이 일대에서 생활했음을 직접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월곡동 유적 기록

초기 철기시대 유물 확인 지역 — 월곡동 일대

광복 전 지표조사를 통해 민무늬토기바닥편, 덧띠토기편, 간돌도끼, 반달돌칼 등이 수습되었습니다. 현재 해당 지역은 대부분 주택가로 개발되어 유적 흔적을 지표면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개발이 닿지 않은 임야 지층에는 여전히 유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월곡리'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것이 현재의 서울 성북구 월곡동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입니다. 즉 상월곡동과 하월곡동을 포함한 월곡동 전역이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머물고 생활하던 역사 지층 위에 세워진 동네라는 뜻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일대는 대부분 주택가로 개발되어 지표면에서 유적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1912년 기록상 임야로 남아 있던 구역들, 특히 국유 임야였던 6,694㎡는 개발의 손길이 상대적으로 늦게 닿은 지역입니다. 그 아래 지층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서만 밝혀낼 수 있습니다.



5. 임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어떻게 다른가

임야 지역의 문화재 조사는 대지나 농경지와는 다른 방법론을 적용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실제 조사를 계획하는 분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지표조사 단계에서 임야는 수목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 지표면 관찰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벌목이나 제초 없이도 관찰 가능한 경사면, 절개지, 자연적으로 드러난 단면부터 조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공위성 사진과 항공사진 분석도 중요한 도구로 활용됩니다. 고분이나 석축 같은 지형적 이상 징후가 있는지를 원격 탐지로 먼저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표본조사 및 시굴조사 단계에서는 임야의 경사도와 토양 특성을 반드시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경사가 급한 구릉부에서는 굴착 과정에서 지층이 무너질 위험이 있어 안전 조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나무뿌리가 지층을 교란하는 경우가 많아, 뿌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깊은 지층 구간을 집중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 단계에서는 임야 고분 발굴의 경우 봉토(무덤 흙더미)를 층위별로 조심스럽게 제거하면서 내부 구조를 확인합니다. 석실이나 목곽 같은 매장 주체부가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seoulheritage.org를 비롯한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임야 발굴조사에서 특히 전문성을 발휘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1912년 상월곡동 국유 임야 6,694㎡는 이러한 임야 발굴조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땅입니다. 인근 월곡동 일대에서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확인된 역사적 맥락, 그리고 임야라는 지목이 보여주는 지층 보존 가능성이 결합되면, 이 땅은 발굴조사의 우선순위 검토 대상에 오를 충분한 근거를 갖추고 있습니다.



6. 성공 사례 — 숲속에서 찾아낸 서울의 시간

성공 사례 1

성북구 하월곡동 기초조사 — 인접 동네의 기록이 준 교훈

seoulheritage.org가 진행한 성북구 하월곡동 기초조사는 상월곡동과 같은 월곡동 권역 내 인접 지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분석한 사례입니다. 두 동네가 역사적으로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하월곡동 조사 결과는 상월곡동 임야 조사의 중요한 참고자료가 됩니다. 이 조사를 통해 월곡동 권역 전체의 1912년 토지 구성 패턴을 파악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성공 사례 2

서울 구릉지 임야 발굴 — 고분 발견으로 이어진 지표조사

서울 외곽 구릉지 임야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항공사진 분석을 통해 지형 이상 징후를 먼저 포착한 뒤, 현장 시굴조사를 통해 삼국시대 석실분(석실 무덤)이 확인된 사례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산림 지역으로 보였지만, 1912년 토지대장의 임야 기록이 이 땅의 조사 우선순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숲은 종종 역사의 가장 좋은 보호막이 됩니다.

성공 사례 3

월곡동 초기철기 유적 후속 연구 — 지층 아래 남은 가능성

광복 전 일본인 학자가 지표조사로 확인한 월곡동 초기 철기시대 유적은 아직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해당 지역 대부분이 주택가로 개발되었지만, 1912년 기록상 임야로 남아 있던 구역들은 상대적으로 원형 지층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6,694㎡의 국유 임야가 바로 그 가능성을 가진 땅 중 하나입니다.



7. 지금 이 임야 기록이 우리에게 묻는 것

우리는 이제 1912년 상월곡동 국유지 기록의 끝에 도달했습니다. 1필지, 6,694㎡, 임야. 세 가지 정보. 그런데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놀랍도록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이 기록은 1912년 당시 상월곡동 산자락 일부가 국가 소유로 관리된 산림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 산림이 지금도 오동공원 일대 녹지로 일부 남아 있다면, 그 지층에는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의 시간이 그대로 쌓여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인근 월곡동에서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지표조사로 확인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상월곡동 임야 일대가 단순한 숲이 아니라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잠들어 있는 고고학적 보고(寶庫)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셋째, 이 기록은 현재 이 일대에서 어떤 개발이나 토목 공사가 계획된다면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먼저 실시해야 한다는 근거가 됩니다. 임야라는 지목, 초기 철기시대 유물 확인 인접 지역, 국유지라는 이력. 이 세 가지 조건이 겹치는 땅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최우선 관리 대상입니다.

달빛이 머물던 골짜기, 웃다리골. 그 이름처럼 고요하게 산자락을 지키고 있던 6,694㎡의 숲. 그 숲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아직 아무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기록 하나를 제대로 읽는 일이, 그 이야기를 듣는 첫 번째 귀 기울임입니다.

1912년, 상월곡동 산자락 어딘가에아무도 파헤치지 않은 숲 한 덩이가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그 숲은 지금도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우리가 그것을 묻기만 한다면.

수천 년의 시간이 잠든 땅 위를 우리는 매일 걸어 다닙니다.그 땅에 귀를 기울이는 것, 기록을 읽고 보존하는 것,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오늘 이 글을 읽은 당신이, 그 첫 번째 귀 기울임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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