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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마포구 대흥동

  • 5월 25일
  • 5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마포구 대흥동

지금 당신이 걷는 그 땅 아래,1912년의 서울이 잠들어 있다

마포구 대흥동 56,654㎡ — 국유지 24필지가 품은 이야기.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된 그 기록을 지금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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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1912년 대흥동, 그 땅의 비밀

  • 국유지 24필지, 숫자가 말하는 진실

  • 밭 · 분묘 · 대지 — 세 개의 얼굴

  •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발굴조사 기관과 절차 이야기

  • 성공 사례 — 땅 속에서 꺼낸 역사

  • 지금, 우리가 이 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

혹시 여러분은 지금 걷고 있는 서울의 골목이, 백 년 전에는 누군가의 무덤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요?


마포구 대흥동. 지하철 2호선이 지나고, 카페와 식당이 줄지어 늘어선 이 평범한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국가 소유 땅 24필지가 이 동네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총 면적은 56,654㎡에 달했습니다. 축구장 여덟 개를 합쳐놓은 것과 맞먹는 넓이입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토지대장 기록이 아닙니다. 문화재 시굴조사, 지표조사,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되는 핵심 기초자료입니다. 100년 전 이 땅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지금 땅을 파기 전에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1912년 대흥동, 그 땅의 비밀

1912년은 일제강점기 초반입니다.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토지 기록은 당시 조선의 땅이 어떻게 분류되고 관리되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 문서입니다.

마포구 대흥동에는 이 시기 국유지로 분류된 땅이 24필지, 총 56,654㎡ 존재했습니다. '필지'란 토지 등록의 기본 단위 하나하나를 말합니다. 24개의 서로 다른 땅 덩어리가 국가 명의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땅들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사람들이 살고 건물이 들어선 '대지', 조상을 모신 '분묘지', 그리고 농사를 짓던 '밭'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지목(地目)의 조합이 당시 대흥동의 풍경을 그대로 그려냅니다.



2. 국유지 24필지, 숫자가 말하는 진실

통계를 먼저 한눈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 종류의 국유지 데이터를 비교해보면, 이 동네가 어떤 곳이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대지 (건물·거주지)6필지 / 12,386㎡

분묘지 (묘지)4필지 / 11,127㎡

밭 (농경지)14필지 / 33,140㎡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밭입니다. 14필지에 33,140㎡. 전체 국유지 면적의 절반이 넘는 58.5%가 농경지였습니다. 지금의 대흥동이 주택가와 상업지구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낯선 풍경입니다.

33,140㎡ (58.5%)

대지

12,386㎡ (21.9%)

분묘지

11,127㎡ (19.6%)

분묘지가 4필지, 11,127㎡라는 사실도 눈길을 끕니다. 전체 면적의 19.6%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의 대흥동 어딘가에, 100년 전만 해도 약 1만 1천 제곱미터 규모의 국가 소유 묘지가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에서 옛 분묘지 위치는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구역이 됩니다. 유골과 부장품, 묘비 같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3. 밭 · 분묘 · 대지 — 세 개의 얼굴

각 지목별로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대지 6필지(12,386㎡)는 조선시대 이래 사람들이 실제로 살았거나 관아·관유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입니다. 국유 대지라는 점에서 일반 민간 가옥이 아니라 관청 건물이나 공공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분묘지 4필지(11,127㎡)는 특히 민감한 구역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성 밖 구릉지에 묘지가 많았습니다. 마포 일대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국유 분묘지라는 분류는 왕실이나 국가가 관리하던 무덤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지역 일대에서 나중에 어떤 개발이 이루어지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밭 14필지(33,140㎡)는 수량으로도, 면적으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국유 농경지는 종종 궁방전(宮房田), 즉 왕실 직속 농지였던 경우가 많습니다. 1912년 당시 이 땅이 농경지로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 아래층에 조선시대 생활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땅이 경작지로만 사용되었다면 깊은 지층까지 훼손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지 지목 하나하나는 그냥 행정 분류가 아닙니다. 그 아래에 어떤 역사 유물이 잠들어 있는지를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옛 지목 정보는 조사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핵심 근거 중 하나입니다.


4.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여기서 잠깐, 문화재 지표조사가 뭔지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표조사란 땅을 실제로 파기 전에, 지표면(땅의 표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흔적을 수집·분석하는 작업입니다. 쉽게 말하면 '땅을 파기 전에 먼저 꼼꼼하게 살피는 과정'입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건축이나 토목 공사를 하기 위해 일정 면적 이상의 땅을 개발할 때는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이 조사에서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다음 단계인 시굴조사(試掘調査)로 넘어갑니다. 시굴조사는 실제로 작은 구멍을 파서 유물 유적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시굴에서 유적이 확인되면, 본격적인 발굴조사(發掘調査)가 시작됩니다.

이 세 단계의 조사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표조사로 현장을 눈으로 살핍니다. 둘째, 표본조사 및 시굴조사로 땅 속을 확인합니다. 셋째, 발굴조사로 유적을 전면 조사합니다. 각 단계마다 전문 자격을 갖춘 문화재 발굴 기관이 참여하게 됩니다.

1912년 대흥동 국유지 기록은 바로 이 모든 조사 단계의 '기초자료'로 활용됩니다. 100년 전 이 땅이 묘지였는지, 밭이었는지, 건물이 있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조사 범위와 방법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5. 발굴조사 기관과 절차 이야기

문화재 발굴조사를 누가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 발굴조사는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이 허가한 전문 조사기관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문화재 발굴 기관으로는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을 비롯해, 한국고고학회,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등이 있습니다.

서울 지역, 특히 마포구 같은 도심 지역은 조사 난이도가 높은 편입니다. 이미 수십 년간 개발이 이루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지층이 여러 차례 교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교란되지 않은 깊은 지층에서 오히려 원형에 가까운 유적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인 seoulheritage.org에서는 서울 25개 자치구 전체에 걸쳐 1912년 토지대장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종로구, 중구, 용산구부터 마포구까지, 각 동별로 당시 토지 기록을 정리해 발굴조사의 기초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이는 국유지뿐 아니라 민유지, 일본인 소유지 등 다양한 소유형태를 아우르는 방대한 작업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를 의뢰하거나 진행하려는 분이라면, 먼저 해당 지역의 1912년 토지대장 기록을 확인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기록이 조사 비용 예산과 기간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성공 사례 1

마포·은평구 일대 발굴조사 — 조선시대 도기와 백자 출토

서울 마포구와 은평구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도기, 백자, 청자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지층 깊은 곳에서 당시 사람들의 일상 흔적이 온전하게 발견된 사례입니다. 이 조사는 1912년 토지대장의 지목 정보를 기반으로 조사 구역을 설정함으로써 발굴 효율을 크게 높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성공 사례 2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도심 재개발에서 건진 600년 역사

서울 동대문 일대 재개발 과정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조선시대 훈련도감 터와 이간수문 등 중요 유구가 발견되었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단순한 재개발 부지가 세계적인 역사문화 명소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 사례는 사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의 중요성을 웅변합니다.

성공 사례 3

종로구 훈정동 기초조사 — 1912년 기록이 열어준 문

seoulheritage.org가 진행한 종로구 훈정동 기초조사는 1912년 토지 기록이 얼마나 실질적인 조사 도구가 되는지를 보여준 사례입니다. 당시 사사지(寺社地) 한 필지의 기록을 추적해 해당 지역의 도시 변천사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토지 한 필지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다는 것을 잘 보여준 조사였습니다.

7. 지금, 우리가 이 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

마포구 대흥동의 1912년 국유지 기록으로 돌아와 봅시다. 총 24필지, 56,654㎡. 그 안에는 6필지의 대지, 4필지의 분묘지, 14필지의 밭이 있었습니다. 이 숫자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이 기록은 현재 대흥동에서 어떤 개발이나 건축 공사가 이루어질 때 문화재 지표조사의 근거 자료가 됩니다. 분묘지 11,127㎡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일대 지하에 조선시대 유골과 석물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둘째, 이 기록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지금의 번화한 마포구 거리 아래에 백 년 전의 밭과 무덤이 층층이 쌓여 있다는 사실, 그 사실 자체가 서울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품은 도시인지를 실감하게 해줍니다.

셋째, 문화재 발굴조사를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 기록은 실용적인 출발점이 됩니다. 어느 필지가 분묘지였는지, 어느 필지가 관유 대지였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조사 범위와 비용을 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지금의 풍경만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서울의 땅은 수백 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그 시간을 건드리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1912년처럼 먼 과거의 기록 한 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백 년 전 누군가가 가꾸었던 밭, 누군가의 가족이 묻힌 무덤, 누군가가 살았던 집터.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대흥동 땅 아래에서조용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기록 하나를 제대로 읽는 것이 곧 역사를 되살리는 일입니다.오늘 이 글을 읽은 당신도, 이제 서울의 땅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그 시선이 쌓일 때, 우리의 문화유산은 비로소 지켜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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