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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망원동 역사, 비를 기뻐한 정자 아래 밭 두 자락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23시간 전
9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1912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망원동 역사, 비를 기뻐한 정자 아래 밭 두 자락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2국유지 필지

11,008㎡국유지 총면적

100%밭 비율 (필지·면적)

5,504㎡1필지 평균 면적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는 국유지 2필지, 총 11,008㎡가 있었습니다.

이 국유지 2필지는 모두 밭이었으며, 밭 면적 역시 11,008㎡로 전체 국유지의 100%를 차지했습니다.

한 필지 평균 면적은 5,504㎡(약 1,665평)로, 한강과 홍제천 사이 넓은 강변 경작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마포구 망원동의 테마

  1. 1912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밭 2필지 11,008㎡ 정리

  2. 망원동 역사: 1912년 망원동 국유지 현황, 밭 2필지 11,008㎡

  3. 1912년 망원동 국유지는 왜 전부 밭이었을까? 한강변 경작지의 기록

  4. 희우정 아래 밭 두 자락, 1912년 마포구 망원동 토지조사 기록

  5.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1912년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 통계


비가 와서 기뻤던 동네가, 비 때문에 울었던 동네이기도 하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망원동, 요즘 정말 핫하죠.

망원시장에서 고로케 하나 사 들고. 망리단길 카페 골목을 지나. 해 질 녘 망원한강공원에서 노을을 보는 코스.

주말마다 수많은 2030이 이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 이름이 '비'에서 시작됐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육백 년 전, 극심한 가뭄 속에 한 임금이 이곳 정자에 올랐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단비가 쏟아졌습니다. 임금은 너무 기뻐 정자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쁜 비를 만난 정자, 희우정(喜雨亭).

그리고 꼭 오백 년 뒤. 이번엔 거대한 물이 그 정자를 통째로 삼켜 버렸습니다.

기쁨의 비와 슬픔의 물 사이. 그 한가운데인 1912년, 이 동네에는 나라 땅이 딱 두 필지 있었습니다.

둘 다 밭이었습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요.

왜 하필 밭뿐이었을까요? 그 두 자락의 땅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끝까지 읽고 나면, 다음에 망원한강공원으로 걸어가는 길이 조금 다르게 보일 거예요.



목차

  1. 1912년 망원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나 있었나요?

  2. 망원동 역사,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3. 1912년의 망원동은 서울이 아니었다고요?

  4. 국유지가 전부 밭이었다고요? 밭 2필지의 정체

  5. 한 필지 평균 5,504㎡, 왜 이렇게 넓었을까요?

  6. 비를 기뻐한 땅, 물에 잠긴 땅

  7. 한눈에 보는 망원동 국유지 통계

  8.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9. 땅속 흔적이 정자를 다시 세운 성공 사례

  10. 오늘의 망원동에서 1912년을 읽는 법


011912년 망원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나 있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912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는 국유지가 2필지, 총 11,008㎡ 있었습니다.

11,008㎡. 숫자로만 보면 감이 잘 안 오죠.

평으로 바꾸면 약 3,330평입니다. 국제 규격 축구장 하나가 약 7,140㎡니까, 축구장 한 개 반쯤 되는 넓이예요.

필지 수는 단 두 개. 그런데 면적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록의 진짜 포인트는 따로 있습니다.

이 2필지가 모두 밭이었다는 점입니다. 대지도, 논도, 임야도 없었습니다. 망원동 국유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밭 하나의 얼굴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시리즈를 이어오면서 여러 동네의 국유지를 들여다봤지만, 이렇게 지목이 단 하나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이 단순함 안에 오히려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는 2필지 11,008㎡였고, 2필지 모두 밭이었습니다.


02망원동 역사,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왕의 형이 지은 강가의 별장

이야기는 1424년, 세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이 한강 북쪽 언덕에 정자를 하나 세웠습니다. 강바람 맞으며 쉬어 가는 별장 같은 곳이었죠.

이듬해 가뭄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농사가 걱정된 세종은 직접 들판 형편을 살피러 이곳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형의 정자에 올랐습니다.

바로 그때 비가 내렸습니다. 메마른 들판을 흠뻑 적시는 단비였습니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정자에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기쁜 비를 만난 정자라는 뜻입니다.

희우정에서 망원정으로

세월이 흘러 정자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월산대군은 정자를 손보고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멀리까지 경치가 내다보이는 정자, 망원정(望遠亭).

실제로 이곳에 서면 한강 물줄기와 강 건너 산들이 시원하게 펼쳐졌다고 합니다. 조선 왕실은 이 정자를 농사 형편을 살피는 곳으로도, 명나라 사신을 맞는 연회 장소로도 썼습니다.

그리고 이 정자의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습니다. 망원동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꽤 낭만적입니다. 요즘 감성 카페가 가득한 동네 이름 안에, 오백 년 전 한 임금의 안도의 한숨이 담겨 있으니까요.



031912년의 망원동은 서울이 아니었다고요?

여기서 많은 분들이 놀라는 사실 하나.

1912년의 망원동은 지금처럼 서울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망원동 일대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에 속했고, '망원정계'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정자 이름이 행정 단위의 이름이 되어 있었던 거죠.

그러다 1911년, 이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망원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12년 토지조사 당시 망원동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고양군의 한 마을이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름은 망원리로 바뀌었습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일본식 이름인 망원정(望遠町)이 되었고, 해방 뒤 지금의 망원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왜 이게 중요할까요?

도성 바깥 교외 마을이었다는 건, 땅의 쓰임이 도시보다 농촌에 가까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집이 빽빽한 도심이 아니라, 강가를 따라 밭과 논이 펼쳐진 들판. 1912년 국유지가 모두 밭이었다는 기록은 바로 이 교외 마을의 모습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본 글은 검색과 활용의 편의를 위해 현재 행정구역인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을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04국유지가 전부 밭이었다고요? 밭 2필지의 정체

1912년 망원동 국유지 중 밭은 2필지, 11,008㎡였습니다.

필지 기준으로 100%. 면적 기준으로도 100%. 국유지 전체가 그대로 밭이었습니다.

강가 모래흙이 만든 풍경

망원동은 남쪽으로 한강, 서쪽으로 홍제천을 끼고 있습니다. 두 물길이 만나는 강변 저지대죠.

이런 땅은 오랜 세월 강물이 실어 온 모래와 흙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물빠짐이 좋고 부드러운 흙. 이런 땅은 물을 가둬야 하는 논보다 채소나 잡곡을 기르는 밭으로 쓰이기 쉽습니다.

그러니 상상해 보세요.

한강 쪽으로 낮게 펼쳐진 넓은 밭. 이랑마다 푸성귀가 자라고, 멀리 양화나루 쪽에서 배가 오가는 풍경. 밭 가장자리에 서면 강바람이 흙냄새를 실어 왔을 겁니다.

왜 '나라 땅'이었을까

물론 장부는 밭의 위치와 면적만 적을 뿐, 그 밭이 왜 나라 소유가 되었는지까지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단서는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일대는 조선 왕실의 정자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왕족이 머물고, 임금이 농사를 살피러 오던 자리였죠.

왕실이나 관청과 얽힌 땅이 근대 토지조사 과정에서 국유지로 정리되는 경우는 적지 않았습니다. 망원동 국유 밭 2필지가 그런 역사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앞으로 지번과 옛 지적도를 맞춰 보며 확인해야 할 과제입니다.

중요한 건 이 두 필지가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입니다. 기초조사는 그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no text, no letters, only Korean people.


05한 필지 평균 5,504㎡, 왜 이렇게 넓었을까요?

망원동 국유지 2필지를 평균 내면 한 필지당 5,504㎡가 나옵니다. 평으로는 약 1,665평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숫자인지, 비교해 보면 바로 느낌이 옵니다.

같은 시리즈에서 정리한 동대문구 회기동의 경우, 국유 밭 22필지의 한 필지 평균은 약 545㎡였습니다. 망원동 국유 밭 한 필지는 그보다 약 열 배 넓습니다.

필지가 잘게 쪼개지지 않고 크게 남아 있었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첫째, 집이 많지 않은 들판이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몰려 살면 땅은 자연스럽게 잘게 나뉩니다. 집터마다, 텃밭마다 경계가 생기니까요. 큰 필지는 그만큼 넓고 탁 트인 경작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강변 땅의 특성입니다. 큰물이 지나가면 경계가 흐트러지기 쉬운 저지대에서는, 땅을 작게 쪼개 관리하기보다 넓게 묶어 경작하는 편이 현실적이었을 수 있습니다.

셋째, 소유 관계의 단순함입니다. 한 주체가 넓은 땅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필지가 나뉠 일이 적습니다. 국유지라는 성격 자체가 큰 필지를 유지시킨 이유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비슷합니다. 1912년 망원동의 나라 땅은 넓고 고요한 강변 밭이었습니다.

한 줄 정리: 망원동 국유 밭 한 필지 평균 5,504㎡는 회기동 국유 밭 평균(약 545㎡)의 약 10배로, 넓게 트인 강변 경작지였음을 보여줍니다.


06비를 기뻐한 땅, 물에 잠긴 땅

이제 이 글 첫머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25년, 정자가 사라진 해

1925년 여름. 한강 유역을 덮친 을축년 대홍수가 서울을 휩쓸었습니다.

그 거센 물길에 망원정도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세종의 기쁨이 깃든 정자가, 하필 물 때문에 사라진 겁니다. 희우정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참 얄궂은 운명이죠.

1912년 장부에 오른 밭 2필지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 밭들은 홍수를 불과 13년 앞둔 시점의 모습입니다. 대홍수가 이 강변 들판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지, 장부 속 숫자는 그 직전의 마지막 정지 화면인 셈입니다.

오랫동안 '물의 동네'였던 망원동

망원동의 물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강과 맞닿은 낮은 땅이었기에, 망원동은 1990년대 초까지 서울에서 손꼽히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1984년 가을의 큰 침수는 지금도 이 동네 어르신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망원동의 역사는 물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비를 반긴 정자에서 시작해, 물과 싸우며 살아온 마을.

지금 우리가 망원한강공원에서 여유롭게 노을을 볼 수 있는 건, 그 긴 시간 동안 이 땅을 지키고 다시 일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07한눈에 보는 망원동 국유지 통계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표 하나로 정리했습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평, 환산)

필지 비율

면적 비율

밭

2

11,008

약 3,330

100%

100%

논

0

0

0

0%

0%

대지

0

0

0

0%

0%

임야

0

0

0

0%

0%

합계

2

11,008

약 3,330

100%

100%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1912년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망원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1필지 평균 5,504㎡. 평 환산은 1평=3.3058㎡ 기준 반올림 값입니다.

국유 밭 1필지 평균 면적 비교 (시리즈 내)

마포 망원동

5,504㎡

동대문 회기동

545㎡

이미지 설명: 1912년 망원동 국유지 통계를 정리한 표와 막대그래프로, 국유지 2필지 11,008㎡가 모두 밭이며 한 필지 평균 5,504㎡로 회기동 국유 밭 평균 545㎡보다 약 10배 넓다는 내용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망원동 국유지는 밭 2필지 11,008㎡로, 필지와 면적 모두 100%가 밭이었습니다.


08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밭 두 필지가 백 년 뒤에 무슨 의미가 있지?"

당연히 드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지금 망원동에서 땅을 파기 전에 아주 현실적인 역할을 합니다.

문화유산 조사는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을 하려면, 먼저 땅속에 문화유산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가 그 절차를 정하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토지 기록, 현장 답사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살핍니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가장 먼저 쓰이는 단계가 바로 여기입니다.

두 번째는 표본조사입니다. 유적 가능성이 있는 곳에 작은 구덩이를 몇 군데 파서 땅속 층위를 확인합니다.

세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일정 간격으로 길쭉한 구덩이를 파서 유적이 어디까지, 어떤 성격으로 남아 있는지 가늠합니다.

마지막은 발굴조사입니다. 유적이 확인되면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한 뒤 보존 여부를 판단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법이 정한 요건을 갖춘 문화재 발굴 기관이 맡아 진행합니다.

망원동 기록에서 읽어낼 수 있는 조사 포인트

첫째, 넓은 밭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랫동안 갈아엎은 경작지에는 경작층이 남습니다. 그 아래에는 더 이른 시기의 생활 흔적이 덮여 있을 수 있습니다. 표본조사로 경작층 아래 층위를 확인할 가치가 있습니다.

둘째, 강변 충적지라는 점입니다. 한강과 홍제천이 실어 온 퇴적층은 과거의 흔적을 두껍게 덮어 보존하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보여도, 깊은 곳에 다른 시대의 지표면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셋째, 왕실 정자가 있던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망원정은 조선 왕실이 즐겨 찾던 장소였습니다. 정자 자체는 지금 합정동 쪽에 복원되어 있지만, 그 주변에는 부속 시설이나 사람들이 오가던 길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넷째, 1925년 대홍수라는 사건층입니다. 큰 홍수는 땅속에 뚜렷한 퇴적층을 남깁니다. 이 층은 그 위아래 유물의 시기를 가르는 기준선이 되어, 조사자에게 귀한 시계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1912년 장부 한 장은 "어디를, 왜, 얼마나 깊이 봐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지도가 됩니다. 덕분에 조사 범위를 합리적으로 잡을 수 있고, 공사 일정과 비용을 예측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09땅속 흔적이 정자를 다시 세운 성공 사례

"그래서 실제로 땅속 조사가 뭔가를 바꾼 적이 있나요?"

있습니다. 그것도 망원동 이름의 주인공, 바로 망원정 이야기입니다.

60여 년 만에 돌아온 망원정

1925년 홍수로 사라진 뒤, 망원정은 오랫동안 터만 남아 있었습니다. 정자는 동네 이름 속에만 살아 있었죠.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서울시가 한강변 문화유적을 되살리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문헌 기록을 꼼꼼히 확인하고, 정자가 있던 자리를 실제로 발굴해 조사했습니다.

땅속에서 확인한 흔적과 옛 기록을 맞춰 본 끝에, 1989년 망원정은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지금 망원정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바깥에는 망원정, 안쪽에는 희우정. 정자가 거쳐 온 두 시대의 이름을 함께 품고 있는 겁니다.

기록과 발굴조사가 만나지 않았다면, 이 정자는 영영 이름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빌딩 지하에 조선의 골목을 남기다

종로 공평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건물터와 골목이 층층이 드러났습니다.

이 유적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새 건물 지하에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은 시민 누구나 걸어 다니며 볼 수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되었습니다.

두 사례가 말해주는 건 하나입니다. 땅의 이력을 먼저 알고 다가가면, 유적은 공사의 걸림돌이 아니라 동네의 자랑이 된다는 것. 망원동 밭 2필지의 1912년 기록도 그런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0오늘의 망원동에서 1912년을 읽는 법

오늘의 망원동은 서울에서 가장 젊은 동네 중 하나입니다.

시장 골목엔 떡볶이와 고로케 냄새가 번지고, 작은 카페와 소품숍이 골목마다 숨어 있습니다. 해가 지면 사람들은 한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갑니다.

그 길 아래, 강 쪽으로 넓게 펼쳐졌던 밭 두 자락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 밭에서 이랑을 고르고, 비를 기다리고, 비가 오면 안도했을 겁니다. 육백 년 전 희우정에 올랐던 임금처럼요.

다음에 망원한강공원으로 걸어가실 때, 잠깐 이 숫자를 떠올려 보세요. 2필지, 11,008㎡.

그건 그냥 면적이 아닙니다. 비를 기다리며 땅을 일구던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쌓인 크기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밟고 있는 그 길도,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기록이 될 겁니다.


  • 필지 수 검증: 원자료의 국유지 총 필지 수 2필지와 밭 필지 수 2필지가 일치하여, 국유지 전체가 밭으로 확인됩니다.

  • 면적 검증: 국유지 총면적 11,008㎡와 밭 면적 11,008㎡가 일치합니다. 미기재 지목은 없습니다.

  • 파생 수치: 1필지 평균 11,008 ÷ 2 = 5,504㎡. 평 환산 11,008 ÷ 3.3058 ≈ 3,330평, 5,504 ÷ 3.3058 ≈ 1,665평(반올림).

  • 비교 수치: 회기동 국유 밭 평균 545㎡(11,993㎡ ÷ 22필지)는 본 시리즈 동대문구 회기동 편 자료를 인용했으며, 5,504 ÷ 545 ≈ 10.1배입니다.

  • 원자료 표기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에 국유지중"은 본문에서 "서울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 중"으로 띄어 써 정리했습니다.

  • 관할 연혁: 망원동 일대는 조선 후기 한성부 북부 연희방(망원정계)에 속했고,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망원동, 1914년 고양군 연희면 망원리, 1936년 경성부 망원정을 거쳐 현재의 마포구 망원동이 되었습니다. 1912년 당시 관할은 경기도 고양군입니다.

  • 망원정 복원 연도는 자료에 따라 1989년 또는 1991년으로 달리 적혀 있어, 서울시 기념물 지정(1990년) 정보와 함께 1989년 복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복원된 망원정의 현재 법정동은 합정동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망원동은 국유지 전체가 단일 지목(밭)으로 구성된 동네로 기록합니다. 국유 밭 1필지 평균 5,504㎡는 동대문구 회기동 국유 밭 평균(약 545㎡)의 약 10배로, 시리즈 안에서 필지가 잘게 나뉘지 않은 대형 강변 경작지 사례로 분류합니다.


FAQ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2필지, 면적은 11,008㎡였습니다.

1912년 망원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망원동 국유지에 논이나 대지는 없었나요?


망원동 국유지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얼마인가요?


1912년 당시 망원동은 어느 행정구역에 속했나요?


망원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에 왜 필요한가요?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는 밭 2필지 11,008㎡로 전체가 밭이었으며, 한 필지 평균 5,504㎡의 넓은 한강변 경작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우리 땅의 1912년이 궁금하다면

개발 예정지의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준비하고 계신가요? 1912년 토지 기록에서 출발하는 기초조사가 첫걸음입니다.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중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1912년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망원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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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끝 정자에 오른 임금은비를 만나 웃었다

오백 년 뒤 그 정자는물을 만나 떠났다

그 사이 어딘가강가에 밭 두 자락누군가 이랑을 고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망원동 골목을 걷는 너의 발끝에백 년 전 그 밭의 흙이 있다

비가 오면 기억해 주길이 땅은 늘 비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것이었다고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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