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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상수동 역사, 강 언덕의 무덤 열 자리와 집터 세 곳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1월 1일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11월 1일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1912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상수동 역사, 강 언덕의 무덤 열 자리와 집터 세 곳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3국유지 필지

59,544㎡국유지 총면적

10필지분묘지 (41,924㎡)

70.4%분묘지 면적 비율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는 국유지 13필지, 총 59,544㎡가 있었습니다.

이 중 대지는 3필지 17,619㎡, 분묘지는 10필지 41,924㎡였습니다.

즉, 상수동 국유지는 필지 기준 76.9%, 면적 기준 70.4%가 분묘지였으며, 한강변 언덕의 옛 무덤 터를 보여주는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마포구 상수동의 테마

  1. 1912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대지와 분묘지 면적 정리

  2. 상수동 역사: 1912년 상수동 국유지 13필지 59,544㎡ 현황

  3. 1912년 상수동 국유지 10필지가 무덤 땅이었다? 분묘지 41,924㎡의 기록

  4. 상수동 카페거리 아래 잠든 땅, 1912년 마포구 상수동 토지조사 기록

  5.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1912년 마포구 상수동 국유지 통계

지금 당신이 커피를 마시는 그 골목. 백 년 전에는 무덤이 내려다보던 자리였을지도 모릅니다.

상수동, 다들 한 번쯤 가보셨죠.

상수역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서면. 낮은 주택을 개조한 카페가 줄지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걸으면 강변북로 너머로 한강이 보입니다. 해 질 녘엔 밤섬 위로 노을이 번지죠.

홍대의 시끌벅적함에서 한 발짝 비켜난 동네. 그래서 2030이 더 아끼는 곳입니다.

그런데 1912년의 장부를 펼치면, 전혀 다른 상수동이 나타납니다.

이 동네에 있던 나라 땅은 모두 13필지.

그중 10필지가 무덤 땅이었습니다.

열에 일곱 이상. 면적으로 따져도 70%가 넘습니다.

왜 하필 이 강가 언덕에 무덤이 그렇게 많았을까요? 그리고 나머지 세 필지의 넓은 대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끝까지 읽고 나면, 상수동 골목의 오르막길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목차

  1. 1912년 상수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나 있었나요?

  2. 상수동 역사, '윗물 마을'이라는 이름의 비밀

  3. 1912년의 상수동은 어느 행정구역이었나요?

  4. 국유지 대지 3필지는 얼마나 넓었나요?

  5. 국유지 열에 일곱이 무덤 땅? 분묘지 10필지의 정체

  6. 1912년, 무덤의 규칙이 바뀐 해

  7. 한눈에 보는 상수동 국유지 통계

  8.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9. 무덤 터를 지우지 않고 기록한 성공 사례

  10. 오늘의 상수동에서 1912년을 읽는 법


011912년 상수동 국유지는 모두 얼마나 있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912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는 국유지가 13필지, 총 59,544㎡ 있었습니다.

59,544㎡. 평으로 바꾸면 약 18,012평입니다.

국제 규격 축구장 하나가 약 7,140㎡니까, 축구장 8개를 조금 넘는 넓이예요. 작은 동네 하나에 이 정도 나라 땅이 있었다는 건 꽤 큰 규모입니다.

같은 마포구 시리즈의 망원동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더 선명해집니다. 망원동 국유지는 2필지 11,008㎡였습니다. 상수동은 그보다 필지는 6.5배, 면적은 약 5.4배 많습니다.

그런데 숫자보다 더 놀라운 건 구성입니다.

상수동 국유지는 단 두 가지 지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땅인 대지, 그리고 죽은 이가 잠든 땅인 분묘지.

논도, 밭도, 임야도 없었습니다. 삶의 땅과 죽음의 땅만 장부에 남아 있었던 겁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마포구 상수동 국유지는 13필지 59,544㎡였고, 대지 3필지와 분묘지 10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02상수동 역사, '윗물 마을'이라는 이름의 비밀

서강의 가장 윗자락

상수동(上水洞). 한자를 풀면 '윗물'입니다.

조선 시대 한강은 구간마다 이름이 달랐습니다. 용산 앞은 용산강, 마포 앞은 마포강. 그리고 지금의 서강대교와 양화대교 사이쯤은 서강이라 불렀습니다.

이 서강 물가를 따라 여러 마을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중 물줄기의 위쪽에 자리한 마을이 바로 상수동입니다. 강가 마을들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있다는 뜻이 이름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조선 후기 이 일대는 한성부 서부 서강방에 속했고, '상수일리계'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나라의 곳간이 가까웠던 동네

서강은 그냥 강가가 아니었습니다.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이 배에 실려 이 물길로 올라왔습니다. 바로 옆 창전동에는 관리들의 녹봉을 보관하던 나라 창고, 광흥창이 있었죠.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이름이 여기서 왔습니다.

재미있는 건, 2007년 상수동과 창전동이 하나의 행정동인 서강동으로 묶였다는 사실입니다. 나라 곳간이 있던 동네와 윗물 마을이 다시 한 이름 아래 모인 셈이죠.

배가 드나들고, 곡식이 쌓이고, 사람이 모이던 강가. 그 언덕 위에 1912년의 국유지 13필지가 있었습니다.


031912년의 상수동은 어느 행정구역이었나요?

지금은 당연히 서울특별시 마포구입니다. 하지만 1912년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1911년 행정구역이 정비되면서 이 일대는 경기도 경성부 서강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12년 토지조사 당시 상수동은 경성부 서강면의 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인 1914년. 큰 개편이 있었습니다. 경성부가 도심 중심으로 크게 줄어들면서, 서강면은 용산면과 합쳐져 고양군 용강면이 되었습니다. 용산의 '용'과 서강의 '강'을 한 글자씩 따온 이름입니다.

상수동이 다시 경성부 안으로 돌아온 건 1936년입니다. 이후 해방을 거쳐 마포구 상수동이 되었습니다.

이 연혁이 왜 중요할까요?

1912년의 상수동은 도성의 바깥, 강가의 교외 마을이었습니다. 도성 안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교외 언덕은 오래전부터 묘지 자리로 쓰였습니다. 상수동 국유지에 분묘지가 많았던 배경도 여기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 글은 검색과 활용의 편의를 위해 현재 행정구역인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을 기준으로 정리했습니다.


04국유지 대지 3필지는 얼마나 넓었나요?

1912년 상수동 국유지 중 대지는 3필지, 17,619㎡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29.6%입니다. 평으로는 약 5,330평이죠.

한 필지 평균 5,873㎡의 의미

여기서 주목할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대지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이 약 5,873㎡라는 점입니다.

평범한 집 한 채의 터는 보통 수백㎡ 안팎입니다. 그런데 상수동 국유 대지는 한 필지가 그 열 배를 훌쩍 넘습니다. 1,700평이 넘는 집터가 세 곳이나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넓은 대지는 보통 일반 살림집보다는 다른 용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관청이나 창고, 공공시설, 혹은 여러 채의 건물이 모여 있던 묶음 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일대는 조운선이 오가고 나라 창고가 가까웠던 곳입니다. 강가 언덕의 넓은 국유 대지가 그런 역사와 이어져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장부는 면적과 지목만 알려줄 뿐, 그 위에 무엇이 서 있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정확한 성격은 지번과 옛 지적도를 맞춰 봐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확인 작업이 문화유산 기초조사의 시작입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상수동 국유 대지는 3필지 17,619㎡로, 한 필지 평균 약 5,873㎡의 매우 넓은 터였습니다.


05국유지 열에 일곱이 무덤 땅? 분묘지 10필지의 정체

이제 이번 기록의 주인공입니다.

1912년 상수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10필지, 41,924㎡였습니다.

필지 기준으로 76.9%. 면적 기준으로 70.4%. 평으로 바꾸면 약 12,682평입니다.

축구장 다섯 개 반이 넘는 땅이 무덤 자리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강가 언덕이었을까

옛사람들은 무덤 자리를 고를 때 산과 물을 함께 봤습니다. 뒤로는 언덕이 감싸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는 자리. 풍수에서 좋은 땅이라 여긴 배산임수의 형태입니다.

상수동이 딱 그랬습니다. 와우산에서 흘러내린 언덕이 한강을 향해 낮아지고, 그 앞으로 서강이 넓게 흘렀습니다. 강 건너로는 밤섬과 여의도 모래벌판이 펼쳐졌죠.

게다가 도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한양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고 성묘를 다니기에 알맞은 거리였습니다.

한 필지 평균 4,192㎡의 무덤 땅

분묘지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4,192㎡입니다. 무덤 한 기가 차지하는 면적을 생각하면, 한 필지 안에 여러 기의 무덤이 모여 있던 묘역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무덤들은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장부에 '국유'로 올라 있다고 해서 나라가 만든 무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인이 분명하지 않은 오래된 무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던 묘지, 연고가 끊긴 묘역 같은 땅이 토지조사 과정에서 국유지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 10필지 안에는 이름 없이 잠든 수많은 서강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배를 부리던 사공, 곡식 가마니를 나르던 일꾼, 강가에서 평생을 산 누군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한 줄 정리: 1912년 상수동 국유 분묘지는 10필지 41,924㎡로, 국유지 면적의 70.4%를 차지했습니다.


061912년, 무덤의 규칙이 바뀐 해

여기서 소름 돋는 우연이 하나 있습니다.

상수동의 무덤 땅 10필지가 장부에 오른 1912년. 바로 그해 6월, 조선총독부는 묘지와 매장에 관한 새 규칙을 공포했습니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가문의 선산이나 마을 뒷산 등 원하는 곳에 무덤을 썼습니다. 하지만 새 규칙은 정해진 공동묘지에만 매장하도록 크게 제한했습니다. 개인이 마음대로 묘를 쓰는 일이 어려워진 겁니다.

이 변화는 수백 년 이어온 장례 풍습을 흔들었습니다. 조상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마음과 새로운 행정 규칙이 정면으로 부딪친 시기였죠.

그렇게 보면 1912년 상수동 장부 속 분묘지 10필지는 아주 특별한 장면입니다. 옛 방식의 무덤 풍경이 근대의 규칙 앞에서 바뀌기 직전, 마지막으로 기록된 모습이니까요.

이후 서울이 커지면서 도시 안의 묘지들은 하나둘 밀려나거나 옮겨졌습니다. 오늘날 상수동 골목 어디에서도 그 시절 무덤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장부는 기억합니다. 41,924㎡라는 숫자로요.



07한눈에 보는 상수동 국유지 통계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표 하나로 정리했습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평, 환산)

필지 비율

면적 비율

1필지 평균(㎡)

분묘지

10

41,924

약 12,682

76.9%

70.4%

약 4,192

대지

3

17,619

약 5,330

23.1%

29.6%

약 5,873

합계

13

59,544

약 18,012

100%

100%

약 4,580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1912년 당시 경기도 경성부 서강면)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지목별 합계는 59,543㎡로 총면적과 1㎡ 차이가 있으며, 평→㎡ 환산 반올림 차이로 판단됩니다. 평 환산은 1평=3.3058㎡ 기준입니다.

지목별 면적 비교

분묘지

41,924㎡

대지

17,619㎡

마포구 시리즈 국유지 총면적 비교

마포 상수동

59,544㎡

마포 망원동

11,008㎡

이미지 설명: 1912년 상수동 국유지 통계를 정리한 표와 막대그래프로, 국유지 13필지 59,544㎡ 가운데 분묘지가 10필지 41,924㎡(70.4%), 대지가 3필지 17,619㎡(29.6%)이며, 같은 마포구 망원동 국유지 11,008㎡보다 약 5.4배 넓다는 내용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분묘지 면적은 대지 면적의 약 2.4배입니다. 산 사람의 땅보다 잠든 이의 땅이 두 배 넘게 넓었던 동네. 그게 1912년 상수동의 나라 땅이었습니다.

한 줄 정리: 1912년 상수동 국유지는 분묘지 10필지 41,924㎡와 대지 3필지 17,619㎡로, 분묘지가 대지의 약 2.4배였습니다.


08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백 년 전 무덤 기록이 지금 무슨 상관이죠?"

충분히 드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상수동처럼 분묘지 비율이 높은 동네에서는, 이 기록이 공사 전 단계에서 아주 현실적인 역할을 합니다.

문화유산 조사는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을 하려면 먼저 땅속에 문화유산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가 그 절차를 정하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토지 기록, 현장 답사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살핍니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가장 먼저 쓰이는 단계가 바로 여기입니다.

두 번째는 표본조사입니다. 유적 가능성이 있는 곳에 작은 구덩이를 몇 군데 파서 땅속 층위를 확인합니다.

세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일정 간격으로 길쭉한 구덩이를 파서 유적의 범위와 성격을 가늠합니다.

마지막은 발굴조사입니다. 유적이 확인되면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한 뒤 보존 방법을 정합니다. 이 과정은 법이 정한 요건을 갖춘 문화재 발굴 기관이 맡아 진행합니다.

상수동 기록에서 읽어낼 수 있는 조사 포인트

첫째, 분묘지 10필지 41,924㎡라는 넓은 무덤 터입니다. 묘가 옮겨졌더라도 땅속에는 무덤 구덩이, 관을 묻은 흔적, 함께 묻은 그릇 같은 부장품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무덤은 당시 사람들의 장례 문화와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매장유산입니다.

둘째, 한 필지에 여러 기가 모인 묘역일 가능성입니다. 묘역은 한 기만 확인되면 주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굴조사로 범위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넓은 국유 대지 3필지입니다. 한 필지 평균 5,873㎡의 큰 터에는 건물 기초, 담장, 우물 같은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서강 조운과 연결된 시설이었다면 그 가치는 더 커집니다.

넷째, 강가 언덕이라는 지형입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구릉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즐겨 머물던 곳입니다. 조선 시대 무덤 아래에 더 오래된 시대의 흔적이 겹쳐 있을 가능성도 열어 둬야 합니다.

이처럼 1912년 장부 한 장은 "어디를, 왜, 얼마나 조심해서 봐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지도가 됩니다. 조사 범위를 합리적으로 정하고, 공사 일정과 비용을 미리 예측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09무덤 터를 지우지 않고 기록한 성공 사례

"그래서 실제로 무덤 터 조사가 의미 있었던 적이 있나요?"

있습니다. 서울 안에서, 그것도 아주 큰 규모로요.

은평뉴타운 아래 잠들어 있던 조선

2000년대 중반, 은평구 진관동 일대에 대규모 뉴타운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공사 전 조사에서 땅속에 엄청난 것이 확인됐습니다. 조선 시대 무덤이 수천 기나 모여 있었던 겁니다. 서울 도성 밖 교외 언덕이 오랜 세월 묘지로 쓰였다는 사실이 실제 유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무덤의 구조와 함께 묻힌 그릇, 생활 도구 같은 유물이 하나하나 기록됐습니다. 덕분에 조선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장례를 치르고,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성과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그 발굴의 이야기를 누구나 만날 수 있습니다. 공사는 공사대로 진행되었고, 땅의 기억은 박물관으로 남았습니다.

상수동이 배울 수 있는 것

은평의 사례가 말해주는 건 분명합니다.

도성 밖 언덕의 무덤 땅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리 알고 다가가면, 유적은 공사의 걸림돌이 아니라 동네의 자랑이 됩니다.

상수동 국유 분묘지 10필지의 1912년 기록도 같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숫자 하나가 조사의 방향을 정하고, 그 조사가 동네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는 거죠.


10오늘의 상수동에서 1912년을 읽는 법

오늘의 상수동은 서울에서 가장 감각적인 동네 중 하나입니다.

오래된 주택이 카페가 되고, 작은 공방과 책방이 골목에 숨어 있습니다. 밤이 되면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강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갑니다.

그 길은 대부분 오르막과 내리막입니다. 상수동이 원래 강을 향해 흘러내린 언덕이기 때문이죠.

백 년 전 그 언덕 위에는 둥근 봉분들이 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엔 넓은 터 세 곳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 언덕에 부모를 묻고, 해마다 성묘를 오며 밤섬 위로 지는 노을을 봤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카페 창가에서 보는 바로 그 노을을요.

다음에 상수동 골목을 걸으실 때, 잠깐 이 숫자를 떠올려 보세요. 13필지, 59,544㎡. 그리고 그 안의 무덤 땅 10필지.

그건 그냥 면적이 아닙니다. 이 강가에서 살다 간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자리의 크기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를 기억하는 한,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검증 노트

  • 필지 수 검증: 대지 3필지 + 분묘지 10필지 = 13필지로, 원자료의 국유지 총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 면적 검증: 대지 17,619㎡ + 분묘지 41,924㎡ = 59,543㎡로, 원자료 총면적 59,544㎡와 1㎡ 차이가 있습니다. 평 단위 원기록을 ㎡로 환산하는 과정의 반올림 차이로 판단되며, 본문에는 원자료 총면적 59,544㎡를 그대로 썼습니다. 미기재 지목은 없는 것으로 봅니다.

  • 비율: 면적 비율은 총면적 59,544㎡ 기준으로 분묘지 70.4%, 대지 29.6%입니다. 필지 비율은 분묘지 76.9%(10/13), 대지 23.1%(3/13)입니다.

  • 파생 수치: 1필지 평균 전체 약 4,580㎡, 대지 약 5,873㎡, 분묘지 약 4,192㎡. 평 환산(1평=3.3058㎡) 총 약 18,012평, 대지 약 5,330평, 분묘지 약 12,682평. 분묘지/대지 면적비 약 2.38배.

  • 비교 수치: 망원동 국유지 2필지 11,008㎡는 본 시리즈 마포구 망원동 편 자료를 인용했으며, 59,544 ÷ 11,008 ≈ 5.4배입니다.

  • 원자료 표기 "국유지중"은 본문에서 "국유지 중"으로 띄어 써 정리했습니다.

  • 관할 연혁: 조선 후기 한성부 서부 서강방(상수일리계) →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서강면 → 1914년 고양군 용강면 → 1936년 경성부 편입 →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 1912년 당시 관할은 경성부 서강면으로 표기했습니다. 상수동은 2007년 창전동과 함께 행정동 서강동으로 통합되었습니다(법정동 상수동은 유지).

  • 1912년 묘지 관련 규칙은 1912년 6월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을 가리키며, 본문은 그 취지만 요약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상수동은 국유지가 대지와 분묘지 두 지목만으로 구성된 동네로, 분묘지가 필지 76.9%, 면적 70.4%를 차지하는 분묘지 우세형 사례로 기록합니다. 마포구 시리즈 안에서는 전부 밭이었던 망원동(2필지 11,008㎡)과 정반대의 구성을 보이며, 국유지 총면적은 망원동의 약 5.4배입니다.


FAQ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3필지, 면적은 59,544㎡였습니다.

1912년 상수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상수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상수동 국유지에 논이나 밭은 없었나요?


1912년 당시 상수동은 어느 행정구역에 속했나요?


상수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분묘지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왜 필요한가요?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국유지는 13필지 59,544㎡로, 대지 3필지 17,619㎡와 분묘지 10필지 41,924㎡로 구성되었으며, 분묘지가 면적의 70.4%를 차지한 한강변 언덕의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우리 땅의 1912년이 궁금하다면

개발 예정지의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준비하고 계신가요? 1912년 토지 기록에서 출발하는 기초조사가 첫걸음입니다.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중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1912년 당시 경기도 경성부 서강면)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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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물 마을 언덕에둥근 봉분 열 자리

그 아래 넓은 터 세 곳에서사람들은 배를 기다리고 곡식을 날랐다

살아서는 강을 보며 일했고잠들어서도 강을 보며 누웠다

오늘 상수동 골목을 걷는 너의 발끝에그들이 바라보던 노을이 있다

밤섬 위로 해가 질 때 기억해 주길이 언덕은 먼저 살다 간 이들의 자리였다고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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