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초동의 숫자는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식민지 도시 서울의 민낯이 그대로 들어 있다. 골목 하나, 필지 하나가 권력이고 삶이었다.
- 2025년 12월 24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중구 역사
171필지 중 124필지가 이미 넘어가 있었다— 1912년 중구 초동 토지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의 교차점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초동, 중구 역사
초동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
지금은 인쇄 골목, 좁은 상권으로만 기억되는 곳.
근데 1912년 기록을 보는 순간 손이 멈춰.
171필지 중 124필지가 일본인 소유였어. 72.5퍼센트. 충무로1가(81%), 충무로2가(98%)와 이어지는 중구 도심의 식민지 공간 재편이 초동에서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어. 그런데 초동은 거기서 끝이 아니야. 종교 공간이었던 사사지 6,327제곱미터가 있었고, 생활 골목을 이어주던 도로 흔적이 있었어.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 초동 골목이 왜 지금도 그렇게 좁고 복잡한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돼.
목차
1장. 초동이라는 공간의 성격
2장. 1912년 토지조사로 본 초동의 전체 윤곽
3장. 집과 사사지가 말해주는 도시의 층위
4장. 도로라는 최소 단위의 도시 장치
5장. 성씨 분포로 읽는 토지 주도권
6장. 일본인 소유 124필지가 의미하는 것
7장.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로서의 초동
8장. 초동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1초동이라는 공간의 성격
중구 초동은 지금도 인쇄소와 골목 상권으로 기억되는 곳이야. 충무로와 명동 사이, 사람들이 주로 스쳐 지나가는 동네. 특별히 유명한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간판이 눈에 띄는 곳도 아니야. 그냥 서울 도심 어딘가의 오래된 골목처럼 느껴지지.
하지만 1912년의 초동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날것의 도시였어. 권력과 자본, 종교와 생활이 한 골목 안에서 겹쳐 있던 공간. 그래서 초동은 작아 보여도 도시사적으로는 굉장히 무거운 동네야. 지금 이 동네가 왜 이렇게 생겼는지, 왜 골목이 좁고 구조가 불규칙한지, 1912년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하나씩 풀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체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며, 중구 지역조사를 통해 초동 같은 동네가 문화재 조사 대상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데이터로 쌓아가고 있어. 충무로1가, 충무로2가에 이어 초동까지, 중구의 식민지 공간 재편 흔적이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어.
21912년 토지조사로 본 초동의 전체 윤곽
1912년 중구 초동의 전체 면적은 50,691제곱미터. 필지는 총 171필지였어. 이 수치는 초동이 단순한 변두리가 아니라 이미 도시로 완전히 편입된 지역이었다는 걸 보여줘.
171
총 필지 수
50,691㎡
총 면적
166
대지 필지
6,327㎡
사사지 면적
124
일본인 소유 필지
3
법인 소유 필지
특히 중요한 건 토지 이용의 구성이야. 대지, 사사지, 도로가 명확하게 구분돼 있었다는 점. 이건 초동이 계획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마을이 아니라, 이미 행정과 관리의 대상이 된 도시 공간이었다는 뜻이야. 누군가가 이 땅을 측량하고, 분류하고, 기록했어. 그리고 그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문화재 발굴의 출발점이 되고 있어.
3집과 사사지가 말해주는 도시의 층위
1912년 초동의 대지는 166필지, 면적은 44,178제곱미터였어. 거의 대부분이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거나 생활하던 공간이었지.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게 바로 사사지야.
🏛
초동에는 2필지, 6,327제곱미터의 사사지가 존재했어.
사사지는 단순한 빈 땅이 아니야. 종교 시설이 있었거나, 의례와 공동체 기능을 담당하던 공간일 가능성이 커. 절터, 사당, 혹은 공동 의례 공간. 이런 곳은 생활 유물과 의례 유물이 겹쳐서 나올 가능성이 높아.
6,327제곱미터. 전체 면적의 약 12.5퍼센트야. 이 비율 하나가 초동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이 있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줘.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관점에서 사사지는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야. 종교 공간 주변에는 제기, 향로, 청동 유물, 도자기 등 생활 유물과 다른 성격의 유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 생활층과 의례층이 함께 쌓여 있는 복합 층위가 나올 가능성이 높거든. 서울 도심 발굴에서 사사지 인근 지역이 항상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4도로라는 최소 단위의 도시 장치
초동에는 도로부지도 분명히 존재했어. 3필지, 총 185제곱미터. 면적은 작지만 의미는 커.
185㎡
초동 전체에서 도로에 해당하는 면적. 3필지. 대형 도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며 오가던 생활형 골목 도로였어. 50,691제곱미터 중 0.36퍼센트. 공공의 공간이 이만큼밖에 없었다는 건, 나머지 전부가 누군가의 소유였다는 뜻이야.
이 3필지의 도로가 초동의 생활 동선을 결정했어.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그 좁은 길을 따라 사람이 오가고, 물건이 이동하고, 소문이 퍼졌어. 지금도 초동 골목이 좁고 복잡한 이유가 여기 있어. 1912년에 이미 그 구조가 완성돼 있었고, 그 위에 시간이 겹쳐왔을 뿐이야.
발굴조사에서 도로 흔적은 굉장히 중요해. 배수로, 도로 포장 흔적, 경계석 같은 유구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도로의 방향이 확인되면 건물 배치 방향이 추론되고, 그걸 기준으로 어느 구역을 파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거든. 185제곱미터의 도로 기록이 초동 전체 발굴 방향을 설정하는 핵심 기준이 될 수 있어.
5성씨 분포로 읽는 토지 주도권
1912년 초동에서 확인되는 조선인 성씨 소유는 많지 않아. 기록상 김씨가 11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대표적이야. 법인 소유 토지도 3필지가 있었어.
김씨 11필지. 이 숫자가 의미하는 건 명확해. 초동에서는 이미 조선인 개인 소유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 전체 171필지 중 11필지만이 대표적인 조선인 성씨 소유로 확인된다는 건, 토지의 주도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있었던 시점이라는 뜻이야.
법인 소유 토지 3필지는 근대적 자본 구조가 초동에도 들어왔다는 증거야. 개인이 아닌 조직이 땅을 소유하기 시작했다는 건, 토지가 생활 공간에서 수익 자산으로 전환되고 있었다는 신호야. 1912년의 초동은 그 전환의 한가운데에 있었어.
6일본인 소유 124필지가 의미하는 것
초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무거운 숫자가 바로 이거야.
1912년 초동 전체 171필지 중 무려 124필지가 일본인 소유였어. 비율로 환산하면 72.5퍼센트야.
일본인
124필지 · 72.5%
조선인(김씨)
11필지 · 6.4%
법인
3필지 · 1.8%
기타
33필지 · 19.3%
172필지 중 124필지. 경술국치 2년 만에 초동 토지의 72.5퍼센트가 일본인 명의였어. 충무로1가(81%), 충무로2가(98%)와 함께 중구 도심 전체가 이미 식민지 경제 구조로 재편된 상태였다는 걸 보여줘. 이건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한 동네가 통째로 점령된 기록이야.
왜 초동이었을까. 중구 중심부, 상업과 인쇄, 유통이 가능한 위치. 임대 수익이 안정적인 주거 밀집 지역. 사사지라는 공동체 공간까지 있어서 지역 구심점 역할도 가능한 곳. 일본인 입장에서는 놓칠 이유가 없는 땅이었어.
이런 지역은 발굴조사를 하면 조선식 생활 유물과 일본식 근대 생활 유물이 같은 층위에서 동시에 출토되는 경우가 많아. 조선 후기 도자기 바로 위에 일본식 건축 기초가 올라가 있는 구조. 두 시대가 한 땅 위에서 충돌하고 겹쳐있는 그 단면이 발굴 트렌치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야. 초동은 그런 복합 도시의 전형적인 사례야.

7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로서의 초동
초동 같은 지역은 개발 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거의 필수라고 봐야 해. 주거지, 사사지, 도로, 일본인 소유 토지가 한 공간에 겹쳐 있기 때문이야. 이 네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는 지역은 서울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큼 발굴 잠재력이 높아.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지표 위의 흔적, 지형 특성, 문헌 기록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과정이야. 사업 면적 3만 제곱미터 이상이면 법적으로 의무이고, 초동 규모(50,691제곱미터)는 그 기준을 훌쩍 넘어. 지표조사 결과를 국가유산청에 보고하면, 심의를 거쳐 시굴조사나 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어.
실제 서울 도심에서도 이런 구조를 가진 지역은 지표조사 이후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어. 조사 결과에 따라 도시 개발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그 동네의 역사적 가치가 처음으로 재조명되기도 하지. 초동은 그 가능성이 충분한 동네야.
166필지 대지 + 사사지 6,327제곱미터 + 도로 흔적 3필지 + 일본인 소유 72.5퍼센트. 이 네 가지가 겹치는 초동은 한 번의 발굴 조사만으로도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복층 역사가 한꺼번에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이야.

8초동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1912년 초동의 숫자들은 말이 없어.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 도시는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 땅의 주인이 바뀌면, 삶의 방식도 함께 바뀐다는 것.
124필지의 일본인 소유 토지는 그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줘. 조선인 김씨 가문이 11필지를 간신히 지키고 있던 자리 옆에서, 124필지가 다른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어.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아. 하지만 땅은 기억해. 그 기억이 지금도 초동 지하에 켜켜이 쌓여 있어.
지금 초동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봐. 법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땅을 지나간 모든 시간에 대한 예의야.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야.
다음에 중구 초동 골목을 지날 때, 길이 유난히 좁고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야. 1912년의 시간이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야.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171필지 중 124필지가 넘어간 그 골목을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어.
그 땅 아래에는 밀려난 사람들의 흔적이 있고,
공동체가 모이던 사사지의 기억이 있어.

그걸 아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날수록,이 골목은 조금 더 깊어지고 따뜻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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