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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시 중구 광희동2가 국유지 2필지 961㎡ 완전 해설

  • 5일 전
  • 7분 분량

문화재 발굴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 중구 광희동2가

단 2필지, 961㎡ — 한양 성벽 아래 가장 작고 가장 묵직한 땅

1912년 서울시 중구 광희동2가 국유지 2필지 961㎡ 완전 해설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기초 분석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지역 중 가장 작습니다.



단 2필지, 961㎡. 아파트 한 동 주차장보다 작은 이 땅이 서울 한복판 중구에 있습니다. 광희문(光熙門), 즉 수구문 바로 옆. 조선 시대 시신이 나가던 문 옆의 작은 국유지. 이 961㎡ 안에 도성 600년의 가장 어두운 기억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작다고 얕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차

  1. 광희(光熙) — 빛나고 기쁘다는 이름 뒤에 숨은 이야기

  2. 1912년 광희동2가 국유지 전체 통계 완전 해설

  3. 임야 1필지 842㎡ — 도성 안의 숲, 그 극단적 희소성

  4. 대지 1필지 119㎡ — 한양 도성 안 최소 국유 대지의 의미

  5. 임야 87.6% vs 대지 12.4% — 이 비율이 말하는 것

  6. 광희문과 수구문 — 이 땅이 놓인 역사적 맥락

  7.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광희동2가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나

  8. 일곱 지역 종합 비교 — 크기보다 밀도가 중요하다

  9. 광희동2가의 땅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2필지광희동2가 국유지 총 필지

961㎡전체 면적 (약 291평)

87.6%임야가 차지한 면적 비율

119㎡대지 1필지 — 역대 최소


1. 광희(光熙) — 빛나고 기쁘다는 이름 뒤에 숨은 이야기

광희동(光熙洞). 빛날 광(光), 기쁠 희(熙). 이름은 밝고 경쾌합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붙은 문, 광희문(光熙門)의 별칭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었습니다. 시구문 — 시신이 나가는 문. 조선 시대 한양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은 성문 밖으로 내보내야 했고 그 통로가 바로 광희문이었습니다. 가장 낮고 가장 좁으며 가장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문. 그 문 이름이 이 동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4소문(小門) 중 하나로, 도성 동남쪽 청계천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는 수구(水口) 옆에 자리합니다. 지금도 중구 광희동 주변에는 광희문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이 일대는 한양 도성의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간직한 구역 중 하나입니다. 조선 시대 이 문 주변에는 도성 내 가장 하층민들이 모여 살았고, 물길과 시신의 이동이 교차하는 음습하고 어두운 공간이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광희동2가 국유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역사적 맥락 때문입니다. 단 2필지 961㎡라는 면적은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지역 중 가장 작습니다. 그러나 한양 도성의 성문 바로 옆, 도성의 안과 밖이 교차하는 경계 지점에 위치한 이 작은 땅은 규모와는 무관하게 문화재 발굴조사의 핵심 대상입니다. 작을수록 더 정밀하게, 더 집중적으로 조사해야 하는 땅입니다.



2. 1912년 광희동2가 국유지 전체 통계 완전 해설

1912년 기록에 남은 광희동2가 국유지는 총 2필지, 961㎡입니다.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291평, 테니스 코트 4개를 합친 크기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지역 중 단연 가장 작은 면적입니다. 두 번째로 작은 수유동(6,393㎡)과 비교해도 6.6배 이상 작습니다.

전체 필지 수

2필지

전체 면적

961㎡

필지당 평균 면적

480.5㎡

환산 평수

약 291평

광희동2가 국유지는 단 두 종류의 토지로 구성됩니다. 임야 1필지 842㎡, 대지 1필지 119㎡. 이 단순함 속에 이 땅의 모든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논도 없고 밭도 없습니다. 두 종류의 토지 구성은 수유동(밭·대지)과 같은 패턴이지만, 수유동이 밭 중심이었다면 광희동2가는 임야 중심입니다. 한양 도성 안의 국유 임야 — 이것 자체가 이미 매우 특별한 사실입니다.

면적 비율 분포

임야

87.6%

대지

12.4%

광희동2가 국유지의 핵심 — 도성 안 국유 임야 87.6%라는 수치는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지역과도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도성 밖이 아닌 도성 안의 임야. 농사를 짓는 땅도, 건물을 세우는 땅도 아닌 숲. 이 숲이 도성 한복판에 왜 있었는지가 발굴조사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3. 임야 1필지 842㎡ — 도성 안의 숲, 그 극단적 희소성

임야 1필지, 842㎡. 약 255평의 작은 숲입니다. 그런데 이 숲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양 도성 안, 중구 광희동2가. 조선 시대 도성 안은 궁궐, 관청, 민가, 시장이 빼곡히 들어선 공간입니다. 이 공간 안에 842㎡의 숲이 국유지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임야 데이터

1필지필지 수

842㎡총 면적

842㎡필지 면적

87.6%전체 대비 비율

도성 안 국유 임야의 존재 가능성은 몇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성벽 기슭의 금지 구역 수림입니다. 한양 도성 성벽 바로 안쪽은 성벽 관리를 위해 건축이 금지된 구역이었습니다. 이 금지 구역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수림이 임야로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광희문은 성벽 위에 세워진 문이기 때문에, 문 주변의 성벽 내측 기슭에 이런 금지 구역 수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청계천 수구 주변의 제방 수림입니다. 광희문 옆으로는 청계천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구가 있었습니다. 이 수구 주변에는 제방을 보호하기 위한 수목이 심어졌고, 그 수목 지대가 임야로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가능성은 역병 사망자 처리 관련 특수 수림입니다. 광희문이 시구문으로 불리며 시신이 오가던 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연결하면, 이 임야는 역병(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임시 처리 공간이나 제례 공간 주변의 수림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역병 사망자를 도성 밖으로 신속히 옮기는 과정에서 광희문 일대가 핵심 통로 역할을 했으며, 그 주변에 특수 목적의 시설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도성 안의 임야 1필지는 그 어떤 일반 임야보다 높은 조사 가치를 가집니다. 조선 도성 내부의 임야는 외부 교란이 적고, 수백 년간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덕에 지표 아래의 유구가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표본조사(842㎡의 2%, 약 16.8㎡)만으로도 성벽 기초 구조, 수구 관련 시설 흔적, 또는 역사적 의례 공간의 단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성 안에 숲이 있다는 것은 그 자리에 건물을 세울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세울 수 없었던 이유가 곧 이 땅의 역사입니다. 광희동2가 임야 842㎡는 금지된 땅이 남긴 침묵의 기록입니다.



4. 대지 1필지 119㎡ — 한양 도성 안 최소 국유 대지의 의미

대지 1필지, 119㎡. 약 36평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지역 전체의 대지 중 가장 작은 면적입니다. 이전 최소였던 수유동 대지 필지당 평균(320.5㎡)의 3분의 1에 불과합니다. 36평의 국유 대지 위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36평이면 작은 한옥 한 채가 들어서거나, 창고 하나가 들어설 수 있는 크기입니다. 큰 관청이나 복합 시설은 불가능합니다.

대지 데이터

1필지필지 수

119㎡총 면적

119㎡필지 면적

12.4%전체 대비 비율

119㎡의 국유 대지가 광희문 인근에 있었다는 사실은 몇 가지 구체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첫 번째로 문지기 또는 수문장 초소입니다. 광희문은 도성 4소문 중 하나로, 이 문을 지키는 수문군(守門軍) 또는 수문장(守門將)이 상주했습니다. 119㎡는 1~2명의 군인이 상주하며 근무하는 초소 또는 막사로 적당한 규모입니다. 두 번째로 광희문 관리 창고입니다. 성문 관리에 필요한 물자 — 등불, 자물쇠, 무기류, 기록 문서 — 를 보관하는 창고가 이 규모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수구 관리 시설입니다. 청계천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구의 수문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소규모 시설이 이 대지 위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19㎡의 대지는 전체 면적의 100%를 조사할 수 있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 발굴조사는 전체 면적의 일부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119㎡는 조사 비용과 시간 면에서 전체 굴착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규모입니다. 이 작은 땅 안에서 건물 기초 구조, 사용된 유물의 종류, 소토층이나 폐기층의 특성을 전면적으로 파악한다면 이 대지의 성격과 역사를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습니다.


5. 임야 87.6% vs 대지 12.4% — 이 비율이 말하는 것

임야 87.6%, 대지 12.4%. 광희동2가 국유지의 이 비율은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지역 중 임야 비율이 가장 높습니다. 신림동(17.5%)과 망우동(30.0%)을 훌쩍 뛰어넘는 87.6%입니다. 전체 961㎡의 대부분이 숲이고, 그 숲 끝에 작은 건물 하나가 달려 있는 구조입니다.

광희동2가 토지 구성의 의미

임야 87.6% —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지역 임야 비율 중 최고

대지 12.4% — 119㎡, 지금까지 살펴본 가장 작은 국유 대지 필지

논·밭·잡종지 0% — 도성 안 특수 공간, 농경과 무관

해석 — 숲이 주(主)이고 건물이 종(從)인 특수 목적 공간

임야가 주(主)이고 대지가 종(從)인 이 구조는 이 땅이 생산이나 거주보다는 특정 기능을 위해 유지·보존되던 공간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숲 안에 작은 시설 하나가 딸려 있는 형태 — 이것은 조선 시대 제당(祭堂), 봉화대, 군사 초소, 또는 금지 구역 관리 막사에서 자주 나타나는 패턴입니다. 842㎡의 임야가 목적이고, 119㎡의 대지는 그 목적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인 셈입니다.


6. 광희문과 수구문 — 이 땅이 놓인 역사적 맥락

광희동2가 국유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광희문이 조선 시대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광희문은 도성 4소문 중 동남쪽에 위치한 문으로, 도성 안의 오수와 청계천 물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수구 옆에 자리했습니다. 이 때문에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 문에 시구문(屍口門)이라는 무서운 별칭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한양에서 사람이 사망하면, 시신은 동·서·남 방향의 대문(大門)이 아닌 소문(小門)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광희문은 도성 동남쪽 주민들이 시신을 내보내는 주요 통로였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란 때에는 수많은 시신이 이 문을 통해 나갔고, 역병이 유행할 때에는 하루에도 수십 구의 시신이 이 문을 통과했습니다.

이 맥락에서 광희문 바로 옆의 임야 842㎡를 다시 봅니다. 이 숲은 혹시 시신을 임시로 안치하거나 제례를 올리던 공간이었을까요? 조선 시대에 도성 문 안쪽에 이런 용도의 공간이 있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시신이 빈번하게 오가는 문 옆의 국유 임야는 그 자체로 깊은 역사적 침묵을 품고 있습니다. 이 침묵을 땅이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고, 그 기억을 꺼내는 것이 문화재 발굴조사의 역할입니다.



7.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 광희동2가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나

광희동2가 국유지 961㎡에 대한 문화재 조사는 면적이 작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정밀하고 가장 집중적인 접근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지역 중 이 지역만이 전체 면적에 대한 완전 발굴조사가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규모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이 2필지가 광희문 성벽과 정확히 어떤 위치 관계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벽 바로 내측인지, 수구 옆인지, 성벽 외측에 붙어 있는지에 따라 임야와 대지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조선 시대 한양 도성 지도, 1912년 지적도, 현재 지형 데이터를 겹쳐 분석하는 GIS 작업이 이 단계의 핵심입니다. 광희문 성벽의 기초 구조와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 발굴 설계의 출발점이 됩니다.

표본조사(961㎡의 2%, 약 19.2㎡) 단계에서는 임야와 대지 각각에 탐색 트렌치를 배치합니다. 임야에서는 성벽 관련 석재, 수구 시설 구조물, 또는 역사적 의례 공간의 흔적을 탐색합니다. 대지에서는 119㎡ 전체에 대해 격자형으로 2~3개의 탐색 트렌치를 배치해 건물 기초의 방향과 구조를 초기에 파악합니다.

정밀 발굴조사 단계에서는 961㎡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중구 광희동이라는 위치는 조선 시대 도성의 핵심 구역이기 때문에 유물의 밀도와 다양성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 높을 수 있습니다. 도성 내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물로는 조선 전기 관청 사용 도기류, 성벽 관리 관련 금속 유물, 수구 수문 관련 석재 및 목재 구조물, 광희문 수문장 관련 유물(무기류, 관복 부속품), 그리고 역사적 제례 공간이라면 청동 제기류와 향로 파편 등이 있습니다.

특히 광희동2가는 한양 도성 성벽 유적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위치입니다. 성벽의 기초 구조, 즉 성벽을 받치는 기단석과 그 아래의 지정층이 이 구역에서 확인된다면, 광희문 일대 성벽 복원과 보존 계획에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961㎡의 발굴이 서울 도성 전체의 역사 복원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땅의 가치는 면적과 무관하게 절대적입니다.



8. 일곱 지역 종합 비교 — 크기보다 밀도가 중요하다

이제 일곱 지역 전체의 비교를 통해 각 지역이 서울의 역사 지층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크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단 961㎡의 광희동2가가 177,104㎡의 논현동보다 단위 면적당 발굴 가치가 높을 수 있습니다.

일곱 지역 국유지 종합 비교

지역

면적

필지

대지

임야

핵심

신림동

183,752㎡

31

28.5%

2필지

17.5%

밭 우세

개화동

9,358㎡

6

70.9%

0필지

0%

논 압도

수유동

6,393㎡

5

0%

2필지

0%

밭 극단

고덕동

66,264㎡

24

47.4%

3필지

0%

논밭 균형

논현동

177,104㎡

56

58.1%

0필지

0.4%

논 대형화

망우동

44,251㎡

28

0%

13필지

30.0%

대지 최다

광희동2가

961㎡

2

0%

1필지

87.6%

임야 최고

이 비교표에서 광희동2가는 세 가지 항목에서 절대적 기록을 가집니다. 면적 최소(961㎡), 필지 수 최소(2필지), 임야 비율 최고(87.6%)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기록이 한 지역에 동시에 적용된다는 것은, 광희동2가가 규모와 관계없이 서울 도성의 역사에서 가장 특수한 성격의 국유지였음을 말해줍니다. 도성 안에서 경작과 거주보다 보존과 관리를 위해 유지된 땅 — 그것이 광희동2가입니다.


9. 광희동2가의 땅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지금 광희동2가 일대는 동대문 패션 상가와 주거 지역이 뒤섞인 서울 중구의 복잡한 도심입니다. 광희문은 도로 한가운데 섬처럼 남아 있고, 그 주변은 자동차와 사람으로 늘 가득합니다. 110년 전 이 자리에 있던 842㎡의 숲과 119㎡의 작은 건물 —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광희문의 돌 하나하나가 600년을 버텼습니다. 그 돌 아래의 기초 구조물도, 성벽 내측 기슭의 수목이 남긴 뿌리 흔적도, 119㎡ 위에 서 있던 건물의 초석도 —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구문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문을 통과했던 수많은 생명의 기억도, 땅은 침묵 속에서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2필지 961㎡. 서울 7개 지역 국유지 중 가장 작습니다. 그러나 한양 도성 안, 조선 600년의 생사가 교차하던 문 옆에 자리한 이 땅의 밀도는 어떤 넓은 땅보다 짙습니다. seoulheritage.org가 이 땅을 기록하는 것은, 크기와 관계없이 모든 땅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작은 땅이 큰 역사를 품을 수 있습니다. 광희동2가가 그 증거입니다.



842㎡의 숲이 도성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119㎡의 건물이 그 숲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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