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중림동 토지조사, 서울 서쪽 관문에 쌓인 삶의 층위
- 202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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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중구 역사
집 옆에 밭이 있었고, 밭 옆에 미국인의 땅이 있었다— 1912년 중구 중림동 토지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의 접점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중림동, 중구 역사
339필지, 111,461제곱미터.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이상하게 따뜻했어.
왜냐면 이 안에 집도 있고, 밭도 있고, 미국인의 땅도 있었거든.
집 314필지 옆에 밭 25필지가 있었어. 도시인데 농경지가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틈에 미국인 소유 1필지, 일본인 소유 16필지가 끼어 있었어. 충무로 시리즈에서 봤던 일본인 압도 구조가 아니라,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인 공간이었어. 서울 도성 서쪽, 아직 완전히 도시가 되지 않았던 그 경계에서 중림동은 묘하게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어.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지금 중림동 골목이 왜 그렇게 독특한지 이해가 될 거야.
목차
1장. 중림동이라는 공간이 가진 도시적 의미
2장. 1912년 중림동의 면적과 필지 구성
3장. 집 314필지, 중림동이 주거 중심지였던 이유
4장. 밭 25필지가 보여주는 도시와 농경의 경계
5장. 김씨·이씨·박씨, 성씨 분포로 본 중림동의 사회 구조
6장. 미국인 1필지, 일본인 16필지가 말해주는 국제성
7장.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중림동의 가치
8장. 발굴조사가 바꾼 도시 인식, 실제 사례
9장. 중림동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지금의 이유

1중림동이라는 공간이 가진 도시적 의미
중림동은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어. 한양 도성의 서쪽 관문과 맞닿아 있고, 상업과 주거, 외래 문화가 동시에 스며들던 지역이야. 지금도 약현성당, 서울역, 만리동 고개가 가까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얼마나 교통과 교류의 요지였는지 느껴지지.
그래서 중림동은 순수한 주거지이면서도 완전한 농촌은 아니었어. 이 이중적인 성격이 1912년 토지 구성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한양 도성 안쪽의 종로·충무로가 이미 완전한 도시로 재편되고 있을 때, 중림동은 아직 도시와 농경의 경계에 서 있었어. 그 경계가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얼마나 흥미로운 단서를 품고 있는지, 숫자를 따라가며 이야기해볼게.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전체 토지 기록을 분석하면서, 중구 중림동 같은 도시 경계 지역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완전한 도심도, 완전한 외곽도 아닌 이 경계 공간들이 발굴 잠재력 면에서 가장 풍부한 케이스가 되는 경우가 많거든.
21912년 중림동의 면적과 필지 구성
1912년 중구 중림동의 전체 면적은 111,461제곱미터. 필지 수는 339필지였어. 지금까지 살펴봤던 동네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큰 규모야. 종로1가(13,104제곱미터)의 8.5배, 충무로2가(56,033제곱미터)의 약 2배야.
339
총 필지 수
111,461㎡
총 면적
314
대지 필지
25
밭(전) 필지
75
김씨 소유 필지
1
미국인 소유 필지
대지
314필지 · 97,921㎡
밭(전)
25필지 · 13,540㎡
일본인 소유
16필지
미국인 소유
1필지
이 수치만 봐도 알 수 있어. 중림동은 넓고, 촘촘했어. 재동이나 적선동 같은 핵심 도심 주거지보다 훨씬 큰 규모이고, 생활 단위도 훨씬 다양했지. 그리고 이 큰 면적 안에 집과 밭, 조선인과 외국인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어.
3집 314필지, 중림동이 주거 중심지였던 이유
중림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역시 집이었어. 대지 314필지, 면적 97,921제곱미터. 전체 면적의 87.9퍼센트가 사람이 사는 공간이었어. 이 말은 곧 중림동이 이미 1912년 기준으로 주거지로서 상당히 완성된 형태였다는 뜻이야.
골목은 길었고, 마당은 넓거나 아주 작았고, 집의 형태도 단층부터 복합 구조까지 다양했을 가능성이 커. 지금 중림동 골목이 복잡하고 불규칙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 314필지가 각각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만들어진 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야.
이런 밀집 주거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늘 주의 대상이 돼. 생활 유적이 연속층으로 남아 있을 확률이 높거든. 우물, 배수로, 담장 기초, 온돌 흔적, 생활 도자기. 314필지의 집터는 그만큼의 이야기를 땅속에 품고 있어.

4밭 25필지가 보여주는 도시와 농경의 경계
중림동에는 밭이 있었어. 25필지, 13,540제곱미터. 이 수치가 왜 중요하냐면, 지금까지 살펴봤던 종로·충무로 시리즈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요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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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25필지, 13,540제곱미터. 이 숫자는 중림동이 완전히 도시로 흡수되기 직전, 도시와 농경이 맞닿아 있던 경계 공간이었다는 증거야. 집 옆에 밭이 있고, 밭 뒤로 다시 골목이 이어지는 구조. 서울 도성 안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야.
완전히 도시로 재편된 충무로나 종로와 달리, 중림동에는 아직 흙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 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그 채소를 골목 건너 가게에 팔았을 거야. 집과 밭이 이웃한 이 풍경은 발굴 현장에서도 독특한 층위를 만들어내. 농경 흔적과 생활 유적이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고, 두 활동 사이의 경계를 알려주는 배수 시설이나 담장 흔적이 중요한 단서가 돼.
이런 도시-농경 경계 지역은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특히 흥미롭게 보는 유형이야. 농촌의 흔적과 도시의 흔적이 한 트렌치 안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 그 지역이 어떤 속도로 도시화됐는지를 타임라인으로 복원할 수 있거든.
5김씨·이씨·박씨, 성씨 분포로 본 중림동의 사회 구조
중림동의 성씨 분포는 꽤 뚜렷해. 오래 정착한 대가문과 새로 유입된 가구가 공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게 보여.
김씨
75필지
이씨
51필지
박씨
23필지
최씨
20필지
임씨
10필지
김씨 75필지, 이씨 51필지, 박씨 23필지, 최씨 20필지, 임씨 10필지. 상위 5개 성씨가 전체 339필지의 52.5퍼센트를 차지했어. 특히 김씨와 이씨의 비중이 높다는 건 이 지역이 일시적인 거주지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 살아온 공간이었음을 보여줘.
적선동과 달리 중림동에는 5개 이상의 성씨가 골고루 분포돼 있어. 이건 단일 가문이 장악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던 더 개방적인 동네였다는 뜻이야. 이런 구조는 발굴조사에서 담장 경계, 공동 우물, 골목 단위 유구가 잘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여러 가문이 서로의 경계를 명확히 하면서 만들어낸 공간 구조가 땅속에 기록돼 있거든.

6미국인 1필지, 일본인 16필지가 말해주는 국제성
1912년 중림동에는 미국인 소유 토지가 1필지 있었어. 그리고 일본인 소유 토지는 16필지였어. 이 조합이 중림동의 성격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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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소유 1필지. 중림동에 미국인의 땅이 있었어.
약현성당과 인접한 이 지역은 조선 말기부터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 무대였어. 가톨릭, 개신교 선교사들이 서울 도성 서쪽에 터를 잡았고, 그 흔적이 토지 기록으로 남은 거야. 발굴 시 서양식 건축 자재나 종교 관련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필지야.
미국인 1필지 + 일본인 16필지. 종로1가의 프랑스인 1필지에 이어, 중림동은 미국인 토지가 기록된 드문 케이스야. 충무로의 일본인 압도 구조와 달리, 중림동의 외국인 소유는 선교·문화적 성격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
일본인 소유 토지 16필지는 비율로 보면 4.7퍼센트야. 충무로2가(98%), 충무로1가(81%), 초동(72.5%)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낮아. 하지만 이게 오히려 흥미로운 이유는, 중림동이 아직 일본인 자본의 전면 침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뜻이기도 하거든. 전통 주거지 옆에 근대식 건물, 창고, 사무 공간이 막 들어서기 시작하던 시점이었을 거야.
7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중림동의 가치
중림동은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굉장히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지역이야. 주거지와 밭이 공존하고, 성씨 분포가 다양하며, 외국인 소유 토지까지 확인되는 구조. 이건 조사자 입장에서 굉장히 많은 정보를 품은 땅이라는 뜻이야.
111,461제곱미터라는 넓은 면적은 지표조사 의무 기준(3만 제곱미터 이상)을 훌쩍 넘어. 지표조사 단계에서만 해도 유물 산포, 지형 변화, 생활 흔적이 동시에 확인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밭 25필지가 대지와 맞닿아 있었던 경계 구역에서는 농경층과 생활층이 겹치는 복합 유구가 나올 수 있어. 이건 중림동만이 가진 고유한 발굴 환경이야.
주거지 + 농경지 + 조선인 대가문 + 미국인·일본인 소유 토지. 이 네 가지가 111,461제곱미터 안에 공존하는 중림동은 한 번의 발굴 조사만으로도 조선 후기 생활사, 도시화 과정, 근대 외래 문화 유입까지 동시에 읽어낼 수 있는 공간이야.

8발굴조사가 바꾼 도시 인식, 실제 사례
중림동과 유사한 서울 서부 지역에서는 사전 문화재 조사로 조선 후기 주거 유구가 확인된 뒤 공간 활용 방향이 완전히 바뀐 사례가 있어.
한 재개발 구역에서 지표조사를 먼저 진행했더니 밭과 주거지의 경계에서 조선 후기 배수로와 담장 흔적이 연속적으로 확인됐어. 단순한 개발 예정지가 아니라 역사와 이야기를 가진 동네로 재해석된 거야. 그 결과 발굴된 구조물 일부가 보존됐고, 이후 지역 커뮤니티가 이 유적을 활용한 동네 역사 콘텐츠를 만들었어. 발굴이 그 동네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 거야.
또 다른 사례. 서양 선교사 활동 지역 인근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했더니 서양식 벽돌 건축 기초와 조선식 온돌 구조가 같은 층위에서 나왔어. 두 문화가 충돌하고 공존했던 흔적이 물리적으로 확인된 거야. 중림동의 미국인 1필지는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어. 아직 아무도 그 땅 아래를 들여다본 적 없어.

9중림동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지금의 이유
1912년 중림동은 집과 밭, 전통과 근대, 한국인과 외국인이 겹쳐 있던 공간이었어. 이 복합성은 우연이 아니야. 서울이라는 도시가 커지는 과정에서 중림동은 늘 경계이자 통로였어.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이 경계를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야. 충무로처럼 일본인이 80~90퍼센트를 장악한 동네와는 다른 층위의 이야기가 중림동에 있어. 조선의 가문들이 75필지, 51필지를 지키고 있었고, 그 옆에서 미국 선교사의 땅이 있었고, 일본인 자본이 막 발을 들이밀기 시작했어. 그 세 힘의 교차점이 지금도 중림동 땅속에 기록돼 있어.
지금 중림동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먼저 그 땅이 어떤 경계 위에 서 있었는지 물어봐. 문화재 발굴 기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하는 것이 법적 의무이기도 하고, 이 동네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중림동은 아직도 그 이야기를 꺼내기 충분한 깊이를 가지고 있어.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집 옆에 밭이 있었고,
밭 옆에 미국인의 땅이 있었고,
그 모든 게 한 골목 안에 있었어.
중림동은 그 경계 위에서 자라난 동네야.
그 경계를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이 골목은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제대로 기억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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