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주자동, 49필지로 드러난 식민지 도심의 실체
- 202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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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종로구 역사
49필지 중 46필지. 이미 전면 점령이었다— 1912년 종로 주자동 토지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가 만나는 지점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주자동, 종로구 역사
주자동이라는 이름, 낯설지?
49필지짜리 작은 동네.
근데 그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공기가 달라져.
49필지 중 46필지가 일본인 소유야. 93.9퍼센트. 충무로2가(98%), 충무로1가(81%), 초동(72.5%)… 이 시리즈에서 계속 봐왔던 식민지 공간 재편이 주자동에서 거의 완성 형태로 나타나.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이 작은 동네에 국유지가 3필지나 있었다는 거야. 49필지 중 6.1퍼센트. 행정이 개입한 자리에 일본인 자본이 들어찬 구조.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작은 동네일수록 역사가 더 선명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될 거야.
목차
1장. 필지 수보다 강렬한 인상
2장. 전 필지가 집터였다는 의미
3장. 국유지 3필지가 숨기고 있는 장면
4장. 일본인 46필지가 말하는 현실
5장. 주자동이 문화재 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6장. 주자동의 땅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질문

1필지 수보다 강렬한 인상
1912년 주자동은 49필지, 26,122제곱미터. 숫자만 보면 작은 동네야. 지금까지 살펴봤던 중림동(339필지), 적선동(214필지), 재동(112필지)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작아. 그런데 이 동네는 면적보다 소유 구조가 훨씬 강렬해.
주자동은 1912년 기준으로 이미 완전히 도시화된 공간이었어. 논도 없고, 밭도 없고, 빈 땅도 없어. 49필지 전부가 사람이 살거나 시설이 들어선 집터였어. 이건 사람이 살기 위해 철저히 쪼개진 땅이라는 뜻이야. 근데 그 쪼개진 땅이 누구 손에 있었는지를 보는 순간,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져.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의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면서, 주자동 같은 소규모 동네들도 중요한 조사 케이스로 기록하고 있어. 작은 동네일수록 소유 구조가 압축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발굴 잠재력과 역사적 의미를 판단하는 데 오히려 더 선명한 단서가 돼.
49
총 필지 수
26,122㎡
총 면적
49
대지 필지 (전부)
3
국유지 필지
46
일본인 소유 필지
93.9%
일본인 소유 비율
2전 필지가 집터였다는 의미
49필지 전부가 대지, 26,122제곱미터. 이건 굉장히 드문 구조야. 주자동은 처음부터 주거와 시설을 전제로 설계된 공간이었어. 마당이 넓은 집보다는 건물이 밀착된 구조였을 거야. 골목은 짧고, 건물은 빽빽하고, 담장은 촘촘해.
이런 지역은 지하에 생활층이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 우물, 기초석, 배수로, 건물 하부 구조.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기 쉬운 구조야. 그래서 주자동 같은 곳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항상 주의 구간으로 분류돼.
중림동(100%), 적선동(100%), 재동(100%)처럼 주자동도 전 필지가 대지야. 근데 주자동은 그 전 필지의 소유자가 누구였는지가 핵심이야. 100퍼센트 대지 구조라는 게 여기서는 다른 의미를 가져. 조선인의 생활 공간이 아니라, 일본인 자본이 빽빽하게 채운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그게 발굴 결과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식 기와 대신 일본식 기와, 조선식 기단 대신 일본식 기초 방식이 나올 수 있거든.

3국유지 3필지가 숨기고 있는 장면
국유지 3필지. 숫자는 작지만 의미는 무거워. 주자동 같은 소규모 동네에서 국유지 3필지는 결코 우연이 아니야. 49필지 중 6.1퍼센트. 전체 비율로 보면 재동(2.7%)보다 높아.
이 국유지들은 관청 부지, 군 관련 시설, 행정용 토지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아. 주자동이 위치한 종로 일대는 조선 후기 내내 왕실 관련 기관과 관료 조직의 밀집 지역이었어. 그 공적 기능의 마지막 흔적이 국유지 3필지로 남아 있는 거야.
실제 발굴 현장에서도 이런 국유지 인접 구역에서 도로 유구나 기반 시설 흔적이 자주 발견돼. 일반 주거지와는 다른 규격화된 건축 양식, 더 정교한 배수 시스템, 표준화된 기단 구조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 주자동에서 이 3필지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된다면, 그 주변부가 발굴 우선 대상지가 될 수 있어.
재개발이나 지하 공사가 예정된 지역이라면, 주자동은 반드시 사전 문화재 조사가 들어가야 하는 동네야. 국유지 인접 구역 + 일본인 소유 집중 지역이 겹치는 지점에서 두 시대의 건축 층위가 함께 나올 가능성이 높거든.
4일본인 46필지가 말하는 현실
이 숫자에서 공기가 달라져.
일본인 소유 46필지. 49필지 중 46필지. 93.9퍼센트.
93.9%
1912년 주자동 일본인 소유 비율
49필지 중 46필지 · 충무로2가(98%)에 이어 이 시리즈 최고 수준
일본인
46필지 · 93.9%
국유지
3필지 · 6.1%
조선인 등
0필지 · 0%
49필지 중 46필지. 조선인 개인 소유 필지는 사실상 0이야. 국유지 3필지를 제외하면 주자동 전체가 일본인 명의였어. 이건 부분 점유가 아니야. 전면 점령이야. 1912년 주자동은 이미 일본인 거주지이자 행정·경제 거점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아.
이런 지역의 건물은 조선식 한옥이 아니라 일본식 가옥 또는 혼합 구조일 확률이 커. 그래서 발굴조사에서는 기와 형태, 기초 방식, 배수 구조, 건물 배치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 충무로2가에서 봤던 그 층위가 주자동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그 아래에 조선의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가 발굴의 핵심 질문이 될 거야.

5주자동이 문화재 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주자동은 면적이 작아도 조사 우선순위는 높아. 이유는 단순해. 도시형 구조, 국유지 존재, 외국인 대규모 소유. 이 세 가지가 모두 겹쳐.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미 고위험 구간으로 분류될 조건을 갖추고 있어. 시굴조사로 넘어가면 생활 유구가 나올 가능성도 높고, 식민지 도시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어. 26,122제곱미터는 법적 지표조사 의무 기준(3만 제곱미터)에 약간 못 미치지만, 인접 필지와 함께 사업 범위가 확대되면 의무 대상이 될 수 있어.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어. 93.9퍼센트 일본인 소유 구조는, 역설적으로 조선인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을 가능성을 뜻하기도 해. 하지만 그 아래층, 일본인이 집을 짓기 이전 조선의 층위가 얼마나 교란되지 않고 남아 있는지가 발굴의 진짜 핵심이야. 주자동은 발굴이 없더라도 조사 자체가 의미 있는 동네야.

6주자동의 땅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질문
주자동은 말이 없어. 하지만 숫자는 분명히 말해. 누가 이 땅을 가졌는지, 누가 살았는지, 누가 밀려났는지.
1912년의 토지조사는 지배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증언이야. 그리고 그 증언은 지금도 땅 아래에 남아 있어. 우리가 걷는 도심 한복판에 이미 다른 질서가 있었음을 주자동은 조용히 보여줘. 49필지. 46필지가 일본인 것이었던 그 작은 동네. 조선인의 이름이 단 하나도 남지 않았던 그 기록.
지금 주자동이 포함된 구역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봐. 법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땅이 어떤 시간을 품고 있었는지 아는 것이 먼저야.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파헤치는 일이 아니야. 지금의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야.
땅은 편을 들지 않아. 그저 기억할 뿐이야.
작은 동네일수록
역사는 더 선명하다.
주자동 49필지가 남긴 말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49필지. 46필지가 일본인 것이었던 그 동네.
조선인의 이름이 단 하나도 기록에 없었어.
그 땅 아래에는 그래도 무언가가 남아 있을 거야.
땅은 소유자를 따르지 않거든.

그 기억을 꺼내려는 사람이 하나씩 늘어날수록,지워진 이름들이 조금씩 돌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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