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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주자동, 49필지로 드러난 식민지 도심의 실체

목차


  1. 필지 수보다 강렬한 인상

  2. 전 필지가 집터였다는 의미

  3. 국유지 3필지가 숨기고 있는 장면

  4. 일본인 46필지가 말하는 현실

  5. 주자동이 문화재 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6. 주자동의 땅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질문


1장 필지 수보다 강렬한 인상


1912년 주자동은

49필지

26,122㎡.


숫자만 보면

작은 동네다.


하지만 이 동네는

면적보다

소유 구조가 훨씬 강렬하다.


주자동은

1912년 기준으로

이미 완전히 도시화된 공간이었다.


논도 없고

밭도 없고

빈 땅도 없다.


이건

사람이 살기 위해

철저히 쪼개진 땅이라는 뜻이다.


2장 전 필지가 집터였다는 의미


49필지 전부가

대지

26,122㎡.


이건 굉장히 드문 구조다.


주자동은

처음부터

주거와 시설을 전제로 설계된 공간이다.


마당이 넓은 집보다는

건물이 밀착된 구조.


골목은 짧고

건물은 빽빽하다.


이런 지역은

지하에

생활층이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주자동 같은 곳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항상 ‘주의 구간’으로 분류된다.


우물

기초석

배수로

건물 하부 구조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기 쉬운 구조다.


3장 국유지 3필지가 있는 장면


국유지

3필지.


숫자는 작지만

의미는 무겁다.


주자동 같은 소규모 동네에서

국유지 3필지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관청 부지

군 관련 시설

행정용 토지


이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발굴 현장에서도

이런 국유지 인접 구역에서

도로 유구나

기반 시설 흔적이

자주 발견된다.


그래서 재개발이나

지하 공사가 예정된 지역이라면

주자동은

반드시 사전 문화재 조사가 들어가야 하는 동네다.


4장 일본인 46필지가 말하는 현실


이 숫자에서

공기가 달라진다.


일본인 소유

46필지.


49필지 중

46필지.


이건

부분 점유가 아니다.


거의 전면 점령이다.


1912년 주자동은

이미 일본인 거주지이자

행정·경제 거점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지역의 건물은

조선식 한옥이 아니라

일본식 가옥

또는 혼합 구조일 확률이 크다.


그래서 발굴조사에서는

기와 형태

기초 방식

배수 구조

건물 배치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주자동은

도심 속 식민지 공간의

전형적인 사례다.


5장 주자동이 문화재 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주자동은

면적이 작아도

조사 우선순위는 높다.


이유는 단순하다.


도시형 구조

국유지 존재

외국인 대규모 소유


이 세 가지가

모두 겹친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미 ‘고위험 구간’으로 분류될 조건이다.


시굴조사로 넘어가면

생활 유구가 나올 가능성도 높고

식민지 도시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래서 주자동은

발굴이 없더라도

조사 자체가 의미 있는 동네다.


6장 주자동의 땅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질문


주자동은 말이 없다.


하지만

숫자는 분명히 말한다.


누가 이 땅을 가졌는지

누가 살았는지

누가 밀려났는지.


1912년의 토지조사는

지배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증언이다.


그리고 그 증언은

지금도

땅 아래에 남아 있다.


우리가 걷는 도심 한복판에

이미 다른 질서가 있었음을

주자동은 조용히 보여준다.


땅은 편을 들지 않는다.

그저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만 남기고 싶다.


작은 동네일수록

역사는 더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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