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주교동, 숫자 뒤에 숨은 사람들의 땅 이야기
- 2025년 12월 22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중구 역사
집보다 밭이 더 넓었다— 1912년 중구 주교동 토지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가 만나는 자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주교동, 중구 역사
주교동 기록을 보다가 멈칫했어.
대지 24,786제곱미터, 밭 33,316제곱미터.
집보다 밭이 더 넓었거든.
도심 한복판에서, 청계천 바로 옆에서, 집보다 밭이 더 넓었어. 이게 1912년 주교동의 얼굴이야. 충무로·종로 시리즈에서 봐왔던 빽빽한 집터 구조와 완전히 달라. 주교동은 아직 도시가 완성되지 않은 경계 공간이었어. 그 경계 위에 김씨 62필지, 이씨 51필지, 그리고 일본인 34필지가 공존하고 있었어.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지금 청계천 주변 땅 아래에 어떤 시간이 쌓여 있는지 느끼게 될 거야.
목차
1장. 주교동이라는 동네는 어떤 곳이었을까
2장. 1912년 주교동의 전체 토지 구조
3장. 집보다 넓었던 밭의 정체
4장. 주교동을 소유했던 사람들
5장. 외국인 토지가 의미하는 변화의 신호
6장.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보는 주교동
7장. 지금 우리가 이 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

1주교동이라는 동네는 어떤 곳이었을까
1912년 중구 주교동은 총 330필지, 58,763제곱미터의 면적을 가진 동네였어. 규모만 보면 중림동(339필지)과 비슷해. 하지만 이 안에 담긴 내용은 완전히 달라. 주거, 농경, 통행, 그리고 국가와 외국 세력의 흔적까지 모두 들어 있었거든.
당시 주교동은 청계천과 가까운 생활형 공간이었어. 상업지로 완전히 변하기 전 단계, 말 그대로 사람들이 먹고 살던 도시 속 마을이었어. 청계천 물을 이용해 채소를 키우고, 집 뒤편 작은 밭에서 먹을 것을 직접 해결하던 그런 동네. 지금 우리가 걷는 청계천 주변의 그 땅이 1912년에는 이런 모습이었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토지 기록을 분석하면서, 주교동은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밭이 대지보다 넓은 케이스로 기록돼. 도시와 농경의 경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동네야.
21912년 주교동의 전체 토지 구조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주교동의 토지 구성은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독특해. 집이 있던 대지는 231필지, 24,786제곱미터. 그런데 밭은 97필지, 33,316제곱미터야. 밭이 대지보다 넓어.
24,786㎡
대지 · 231필지
33,316㎡
밭(전) · 97필지
대지
231필지 · 42.2%
밭(전)
97필지 · 56.7%
잡종지
1필지 · 743㎡
도로
1필지 · 16㎡
일본인
34필지 · 10.3%
도로부지는 단 1필지, 16제곱미터에 불과했어. 길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야. 길이 토지와 토지 사이 자연스럽게 존재했을 뿐, 행정적으로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던 시대였다는 의미야. 잡종지 1필지 743제곱미터는 공터이거나 여러 용도로 섞여 쓰이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커. 국유지 1필지, 법인 소유 토지 1필지도 확인돼. 작지만 이미 개인 소유를 넘어선 땅이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야.
3집보다 넓었던 밭의 정체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밭이야. 도심 한복판에서 밭이 대지보다 넓었다는 사실. 이건 주교동이 아직 도시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증거야.
사람들은 집 뒤에서 채소를 키웠고, 청계천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어. 먹을 것을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였어. 지금으로 치면 슬로우 라이프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엔 생존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어.
중림동 밭 25필지, 장사동 밭 5필지. 이 시리즈에서 밭이 나올 때마다 주목했는데, 주교동은 차원이 달라. 97필지, 33,316제곱미터. 대지보다 넓은 밭. 이건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도시화 이전 서울 생활 방식의 마지막 흔적이야.
이 밭들은 이후 개발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공간이기도 해. 그래서 문화재 조사에서는 이런 옛 밭 자리에서 생활 유구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밭이 있던 자리는 건물 기초가 없었던 곳이라 이전 시대의 토층이 덜 교란된 채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거든. 97필지의 밭터는 주교동 발굴에서 가장 흥미로운 구역이 될 수 있어.

4주교동을 소유했던 사람들
토지를 소유한 성씨를 보면 동네의 성격이 보여. 주교동은 어느 한 가문이 독점한 구조가 아니었어.
김씨
62필지
이씨
51필지
박씨
31필지
망씨
14필지
임·한씨
각 12필지
일본인
34필지
김씨 62필지, 이씨 51필지, 박씨 31필지. 그 뒤로 망씨 14필지, 임씨와 한씨가 각각 12필지, 최씨 11필지. 여러 성씨가 고르게 섞여 있어. 이건 중소 규모 토지를 가진 사람들이 다수 모여 살던 동네였다는 뜻이야. 부자 동네도, 빈민가도 아니었어. 그 사이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공간이었어.
이웃끼리 얼굴을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고, 밭과 집이 섞인 골목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됐을 거야. 이런 다성씨 혼재 구조는 발굴 현장에서도 다양한 생활 양식의 유물이 함께 나오는 결과로 이어져. 한 트렌치 안에서 여러 가문의 생활 방식이 겹쳐 보이는 거야.

5외국인 토지가 의미하는 변화의 신호
1912년 주교동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34필지 있었어. 전체 330필지의 10.3퍼센트야. 주자동(93.9%), 충무로2가(98%)와 비교하면 낮지만, 밭이 넓게 펼쳐진 생활형 동네에 이미 34필지가 들어왔다는 건 결코 가볍지 않아.
청계천 인근 생활 밀집 지역에 이미 일본인 34필지가 자리 잡았어. 이 외국인 소유 토지들은 이후 상점, 창고, 근대식 건물로 변해갔을 가능성이 커. 주교동은 전통적인 생활 공간에서 식민지 도시로 변해가는 경계선 위에 있던 동네였어.
중국인 소유 토지도 1필지 확인돼. 상업 활동이나 거주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 외국인 소유 필지들이 어느 위치에 집중돼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주교동이 어느 방향에서부터 도시화가 진행됐는지 추론할 수 있어. 그 방향이 발굴 트렌치의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돼.
6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보는 주교동
주교동 같은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매우 중요해. 밭, 대지, 잡종지가 혼재된 공간은 토양층이 복잡하게 쌓여 있기 때문이야. 이런 다층 구조에서는 각 토지 유형에 따라 다른 성격의 유물이 나올 수 있어.
대지에서는 건물 기초, 배수로, 생활 도구가 나오고, 밭에서는 농경 도구, 씨앗 흔적, 비교적 교란이 적은 조선 후기 토층이 나올 수 있어. 잡종지에서는 두 용도가 혼재된 복합 층위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 실제로 이런 도심 지역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 기와 조각, 생활 도구, 배수로 흔적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58,763제곱미터라는 면적은 법적 지표조사 의무 기준(3만 제곱미터 이상)을 훌쩍 넘어. 재개발이나 지하 공사가 예정될 경우 이 지역은 반드시 문화재 조사를 거쳐야 해. 이건 개발을 막기 위한 절차가 아니야. 도시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야.
밭 97필지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많은 농경지 필지 수야. 이 밭터들은 건물 기초가 없었던 곳이라 이전 시대 토층이 덜 교란된 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발굴 잠재력이 가장 높은 구역은 오히려 집터가 아닌 밭터일 수 있어.

7지금 우리가 이 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
1912년 주교동은 사라졌어. 하지만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야. 골목의 방향, 이상하게 꺾인 필지 경계, 지하에서 발견되는 유구 속에 그 시절의 주교동은 아직 남아 있어.
이 기록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게 아니야.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야. 도시는 계속 바뀌지만, 기억은 땅에 남아. 집보다 밭이 더 넓었던 그 동네, 청계천 물로 채소를 키우던 사람들, 그리고 그 옆에서 조용히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 34필지. 이 모든 게 겹쳐 있는 땅이 지금의 주교동이야.
지금 주교동 주변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물어봐. 1912년 토지조사의 숫자들은 그 기억을 깨우는 열쇠야. 그리고 그 열쇠를 손에 쥔 순간, 청계천 주변은 더 이상 그냥 지나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살았던 살아 있는 이야기의 무대가 돼.
도시는 계속 바뀌지만,
기억은 땅에 남는다.
1912년 주교동 97필지의 밭이 남긴 말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집보다 밭이 더 넓었던 그 동네.
청계천 물로 채소를 키우던 사람들의 자리에
지금 우리가 서 있어.
그 기억이 아직 땅속에 있어.

그걸 아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날수록,이 도시는 조금 더 깊어지고 따뜻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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