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정동, 외국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조선의 심장부
- 2025년 12월 21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중구 역사
34필지에 독일·미국·일본·중국이 다 있었다— 1912년 정동 토지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가 만나는 자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정동, 중구 역사
정동 기록을 처음 봤을 때
필지 수에서 멈췄어.
34필지. 근데 면적이 282,331제곱미터야.
주자동(49필지)보다도 적은 필지 수인데, 면적은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넓어. 필지 하나당 평균 8,304제곱미터. 그 34필지 안에 독일인 5필지, 미국인 4필지, 일본인 6필지, 중국인 3필지, 국유지 3필지가 담겨 있어. 조선의 골목 동네들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야. 정동은 '사는 동네'가 아니라 '세계가 만나는 동네'였어.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 덕수궁 돌담길이 왜 그렇게 무게감 있게 느껴지는지 이해하게 될 거야.
목차
1장. 처음 이 숫자를 봤을 때, 정동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2장. 1912년 정동의 전체 토지 규모가 말해주는 것
3장. 정동에 집은 몇 채였을까, 숫자 속에 숨은 풍경
4장. 국유지 3필지가 의미하는 국가의 시선
5장. 독일인 소유 토지 5필지, 왜 하필 정동이었을까
6장. 미국인 소유 토지 4필지와 선교사들의 흔적
7장. 일본인 소유 토지 6필지, 식민지 권력의 그림자
8장. 중국인 소유 토지 3필지, 국제도시 정동의 완성
9장. 정동 토지 구조가 오늘날 문화재 발굴에 주는 힌트
10장. 정동을 다시 걷는다는 것, 숫자가 기억으로 바뀌는 순간

1처음 이 숫자를 봤을 때, 정동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1912년 정동의 토지 숫자를 보는 순간, 이 동네는 단순한 옛 동네가 아니라 조선의 외교 무대였다는 게 느껴졌어. 정동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고풍스러운 건물과 돌담길이야. 그런데 그 분위기의 뿌리를 숫자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훨씬 더 입체적인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해.
1912년 중구 정동은 고작 34필지였어. 하지만 면적은 무려 282,331제곱미터. 이 숫자 하나만으로도 정동이 얼마나 넓고 여유 있는 공간이었는지 단번에 체감돼. 이 시리즈에서 봐왔던 종로·충무로의 촘촘한 골목 동네들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토지 기록을 분석하면서, 정동은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독특한 케이스로 기록돼. 필지 수는 가장 적고, 면적은 가장 넓고, 외국인 소유 국가 수는 가장 많아. 이 세 가지 극단이 한 동네에 모여 있는 건 정동이 유일해.
21912년 정동의 전체 토지 규모가 말해주는 것
34필지라는 숫자는 굉장히 적어. 같은 시기 장사동(251필지), 중림동(339필지), 주교동(330필지)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작아. 그런데 정동은 달랐어. 한 필지, 한 필지가 어마어마하게 컸어.
282,331㎡
1912년 정동 총 면적 · 34필지
필지당 평균 8,304㎡ · 이 시리즈 전체 최대 면적
34
총 필지 수 (시리즈 최소)
282,331㎡
총 면적 (시리즈 최대)
6
일본인 소유 필지
5
독일인 소유 필지
4
미국인 소유 필지
3
중국인 소유 필지
이 말은 곧 정동이 주거 밀집지가 아니라 계획된 공간이었다는 뜻이야. 외교 공관, 선교 시설, 공공 성격의 대형 건물이 들어설 수밖에 없는 구조였어. 이 점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매우 중요해. 필지가 크다는 건 지표 조사 단계에서 유구 분포 가능성도 넓다는 뜻이거든. 정동은 한 번 삽을 대면 작은 생활 유물이 아니라, 대규모 시설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동네야.
3정동에 집은 몇 채였을까, 숫자 속에 숨은 풍경
1912년 정동의 집은 몇 채였을까. 집이 들어선 대지는 34필지 전부, 282,331제곱미터였어. 이 말은 곧 정동의 토지 대부분이 이미 건축된 상태였다는 의미야. 텅 빈 땅이 아니라, 이미 기능을 가진 공간이었어.
외국 공사관, 학교, 병원, 종교 시설. 정동은 사는 동네라기보다는 일이 벌어지는 동네였어. 이 구조는 지금도 이어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생활 소음보다는 공간의 무게감이 먼저 느껴져. 그 무게감의 뿌리가 바로 1912년 이 34필지의 구조에 있어.
이 시리즈에서 봐온 종로·충무로의 촘촘한 주거지들과 정동은 완전히 다른 발굴 환경이야. 생활 유물 대신 건축 유구, 도자기 파편 대신 벽돌 기초와 배수 시스템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정동은 발굴 접근 방식 자체가 달라야 하는 동네야.

4국유지 3필지가 의미하는 국가의 시선
1912년 정동에는 국유지가 3필지 있었어.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위치와 성격이 중요해. 국유지는 대부분 핵심 시설 주변에 자리 잡아.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할 공간이라는 뜻이야.
이 국유지들은 행정, 외교, 군사적 성격과 맞닿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덕수궁이 바로 옆에 있는 정동에서 국유지 3필지는 단순한 행정 편의 시설이 아니었을 거야. 왕실과 관련된 부속 공간이었거나, 외교 활동을 지원하는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그래서 정동은 단순한 민간 공간이 아니라 국가의 시선이 집중된 장소였어. 문화재 시굴 조사 단계에서 국유지 인접 지역은 지하 구조물이 나올 확률이 특히 높아.
5독일인 소유 토지 5필지, 왜 하필 정동이었을까
1912년 정동에는 독일인 소유 토지가 5필지나 있었어. 이건 우연이 아니야. 당시 독일은 조선에서 외교와 의료, 교육 분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어. 정동은 그 활동의 중심 무대였어.
독일인 소유 토지는 대부분 대형 필지였을 가능성이 커. 외교 시설이나 병원, 선교 관련 건물이 들어섰을 확률이 높아. 이 시리즈에서 중림동, 인의동에서 각각 미국인 1필지를 봐왔는데, 정동의 독일인 5필지는 그것과 차원이 달라.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독일의 외교·문화 활동 전체가 정동에 집중돼 있었다는 뜻이야. 그래서 정동은 발굴 조사 시 서양식 건축 기초, 벽돌 구조, 배수 시설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야.
6미국인 소유 토지 4필지와 선교사들의 흔적
미국인 소유 토지는 4필지였어. 중림동과 인의동에서 각각 1필지씩 확인됐던 미국인 소유 토지가 정동에서는 4필지로 집중돼. 이 차이가 정동의 성격을 잘 보여줘. 정동은 미국 선교사들의 핵심 거점이었어.
미국 선교사들은 정동을 중심으로 학교와 병원을 세웠어. 배재학당, 이화학당, 세브란스병원의 전신들이 이 일대에서 시작됐어. 이 시설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조선 사회 변화를 이끈 거점이었어. 그래서 정동의 땅 아래에는 교육 시설, 의료 시설과 관련된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이건 실제 문화재 발굴 성공 사례에서도 자주 확인되는 패턴이야.

7일본인 소유 토지 6필지, 식민지 권력의 그림자
1912년 정동에 일본인 소유 토지는 6필지였어. 34필지 중 17.6퍼센트야. 충무로2가(98%)나 주자동(93.9%)처럼 압도하는 수치가 아니야. 그런데 이 6필지가 오히려 더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어.
미국·독일·중국 공관이 자리한 국제 외교 공간에 일본인 소유 6필지가 끼어 있었어. 이건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야. 조선의 외교 무대 한복판에 식민 권력이 조용히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거야. 그 긴장이 공간 구조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외교 공간 옆에 식민 권력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 발굴 조사에서는 종종 시기별로 다른 건축 흔적이 겹쳐 나타나. 조선식 구조물 위에 서양식 건물이, 그 위에 다시 일본식 근대 건물이 층층이 올라가는 구조. 정동이 바로 그런 장소야.
8중국인 소유 토지 3필지, 국제도시 정동의 완성
중국인 소유 토지는 3필지였어. 정동은 단순한 서양 외교 공간이 아니었어.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한 골목 안에 모여 있던 곳이야.
1912년 정동 외국인·국유지 소유 분포
🇯🇵 일본인
6필지
🇩🇪 독일인
5필지
🇺🇸 미국인
4필지
🏛 국유지
3필지
🇨🇳 중국인
3필지
독일, 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국유지. 34필지 안에 다섯 가지 권력이 공존하고 있었어. 정동은 조선의 작은 세계지도 같은 동네였어. 이 다양성은 문화재 발굴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결과를 만들어. 같은 층위에서도 서로 다른 문화 요소가 동시에 출토될 수 있거든. 독일제 벽돌 옆에 미국식 배수관, 그 아래에 조선식 기단석이 나오는 거야.
9정동 토지 구조가 오늘날 문화재 발굴에 주는 힌트
정동은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항상 주의 깊게 봐야 할 지역이야. 필지는 적지만 한 필지의 정보 밀도는 압도적이야. 외국 공관, 국유지, 식민지 권력, 선교 시설. 이 모든 게 한 공간에 겹쳐 있어.
그래서 정동은 조사 단계부터 접근 방식이 달라야 해. 단순한 주거 유적이 아니라 국제 정치와 문화가 교차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필요해. 지표조사 단계에서 건축 재료의 종류, 기초 방식, 배수 구조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나라의 시설이었는지 추론할 수 있어. 정동에서의 발굴은 단순한 유물 수집이 아니라 국제 외교사를 물리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이야.
282,331제곱미터. 이 면적은 법적 지표조사 의무 기준(3만 제곱미터)의 9.4배야. 정동 전체 또는 일부에서 개발이나 공사가 진행될 경우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해. 이건 의무이기 이전에, 이 공간이 가진 국제 역사적 가치를 지키는 최소한의 책임이야.

10정동을 다시 걷는다는 것, 숫자가 기억으로 바뀌는 순간
정동을 걸을 때, 그냥 예쁜 길이라고만 느꼈다면 이제는 다르게 보일 거야. 34필지라는 숫자, 282,331제곱미터라는 면적, 그리고 그 안에 얽힌 수많은 나라의 발자국. 이건 과거 이야기가 아니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 아래에 그대로 남아 있는 현재진행형 역사야.
정동은 말없이 버텨왔어. 독립문이 세워질 때도, 일제강점기가 지나갈 때도, 현대 빌딩이 올라올 때도.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다음 발굴을 기다리고 있어. 이 공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문화재 발굴 기관에 정동의 토지 이력을 물어봐. 34필지의 숫자가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발굴이 시작되는 순간 비로소 드러날 거야.
34필지 안에
독일·미국·일본·중국이 다 있었다.
정동은 조선의 세계지도였다.
1912년 토지조사가 남긴 가장 국제적인 기록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34필지. 그 작은 숫자 안에
독일이 있었고, 미국이 있었고, 일본이 있었고, 중국이 있었어.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조선이 있었어.
그 땅이 지금도 거기 있어.

정동을 걸을 때 발걸음이 조금 더 무거워졌으면 해.그 무게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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