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장충동3가 토지로 읽는 서울의 숨은 역사
- 서울 HI
- 2025년 12월 19일
- 3분 분량
목차
숫자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 1912년 장충동3가
집과 삶의 흔적, 대지 48필지가 말해주는 것
사사지와 임야, 도시 속 신성한 공간과 자연
밭과 잡종지, 장충동3가의 생계 풍경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 토지, 식민지 도시의 단면
장충동3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1912년의 장충동3가는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서울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도 한 장, 숫자 몇 줄로만 보던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그곳에는 분명 사람의 숨결과 삶의 리듬이 있었다.
이 글은 단순한 통계 정리가 아니다.
문화재 발굴 조사와 문화재 지표 조사를 검색하다가 이 기록을 마주한 사람이라면, 분명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땅에서는 어떤 하루가 흘러갔을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1912년 중구 장충동3가의 토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1장 숫자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 1912년 장충동3가
1912년 중구 장충동3가는 총 74필지, 면적은 70,535㎡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크지 않은 동네 같지만, 당시로서는 충분히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이 수치는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남겨진 기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토지 이용 형태다.
왜냐하면, 땅의 쓰임은 곧 사람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장 집과 삶의 흔적, 대지 48필지가 말해주는 것
장충동3가에는 집이 있었던 대지가 48필지, 면적은 21,133㎡였다.
전체 필지 중 절반이 넘는 수치다.
이는 이 지역이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분명 사람들이 모여 살던 주거 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
골목을 따라 낮은 기와집과 초가가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이 뛰놀고, 저녁이면 연기가 피어오르던 풍경.
이런 대지 분포는 실제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주거지가 밀집된 곳일수록 생활유물, 기초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 도심 재개발 지역에서 이런 패턴을 보인 곳들은 발굴 과정에서 옹기, 도기, 생활용 철물이 다수 확인되었다.

3장 사사지와 임야, 도시 속 신성한 공간과 자연
장충동3가에는 사사지가 2필지, 1,917㎡ 존재했다.
사사지는 절이나 종교시설과 관련된 토지다.
도시 한가운데, 신성한 공간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런 곳은 지표 조사 단계에서 특히 주의 깊게 살펴본다.
단순한 건물 흔적이 아니라, 의례와 관련된 유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임야도 3필지, 4,175㎡나 있었다.
도시와 자연이 맞닿아 있던 경계.
나무가 울창한 언덕과 주거지가 공존하던 장충동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4장 밭과 잡종지, 장충동3가의 생계 풍경
밭은 무려 20필지, 면적은 27,742㎡였다.
전체 면적 중 상당 부분이 농경지였다.
이 말은 곧, 이곳 사람들이 직접 먹을 것을 기르며 살았다는 뜻이다.
도시이면서 동시에 농촌의 성격을 지닌 공간.
잡종지는 1필지였지만 면적이 15,567㎡로 상당히 넓었다.
잡종지는 도로, 공터, 공동 사용 공간일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이런 잡종지는 종종 생활 흔적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장소가 된다.

5장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 토지, 식민지 도시의 단면
국유지는 8필지였다.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토지로, 행정이나 군사, 기반 시설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일본인 소유 토지가 31필지나 되었다는 점이다.
전체 필지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식민지 시기 서울 도심에서 토지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실제로 많은 문화재 발굴 성공 사례를 보면, 일본인 소유 토지였던 곳에서 근대 건축 유구와 함께 조선 후기 유물이 중첩되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6장 장충동3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1912년 장충동3가는 단순한 과거의 동네가 아니다.
이곳은 주거, 농경, 종교, 행정, 식민지 지배 구조가 동시에 존재했던 복합 공간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일대를 개발하거나 공사를 계획할 때, 문화재 발굴 조사와 문화재 지표 조사가 필수로 거론된다.
과거를 존중하는 도시만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땅 아래에는 아직도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 다시 묻는 일이다.
장충동3가의 기록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시간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도시의 풍경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숫자로만 남아 있던 1912년 장충동3가는, 이렇게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다시 숨을 쉰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끝까지 읽은 당신도, 이미 이 도시의 기억을 함께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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