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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장충동3가 토지로 읽는 서울의 숨은 역사

  • 2025년 12월 1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2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중구 도시유산

1912년 장충동3가의 비밀문화재 발굴이 꺼낸 충혼의 땅 74필지 이야기

주거·농경·신성한 공간·식민지 자본 — 네 개의 시간이 겹쳐 있던 70,535㎡


충신들을 기리던 제단이 있던 땅.


1912년, 그 땅의 절반 가까이가 이미 일본인 손에 넘어가 있었다.

장충동족발 거리만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이 동네의 진짜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거야. 1900년 고종이 세운 장충단, 충신과 열사를 기리던 제사의 땅. 그 바로 옆에서 1912년, 74필지의 토지가 숫자로 쪼개지고, 주거와 농경과 사찰과 일본인 자본이 한 공간 안에서 뒤엉키고 있었어. 문화재 발굴 기관과 지표조사가 왜 이 동네를 계속 주목하는지, 지금부터 그 이유를 하나씩 꺼내볼게.

목 차

  1. 숫자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 1912년 장충동3가

  2. 집과 삶의 흔적, 대지 48필지가 말해주는 것

  3. 사사지와 임야 — 도시 속 신성한 공간과 자연

  4. 밭과 잡종지, 장충동3가의 생계 풍경

  5. 국유지 8필지와 일본인 31필지, 식민지 도시의 단면

  6.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장충동3가가 중요한 이유

  7.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로 보는 장충동의 가치

  8. 장충동3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1

숫자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 1912년 장충동3가

1912년 중구 장충동3가. 총 74필지, 면적 70,535㎡.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 아파트 단지 두어 개 크기야. 숫자만 보면 그냥 오래된 동네 기록처럼 보여.

그런데 이 동네의 맥락을 알고 나면 이 숫자들이 전혀 다르게 읽혀. 장충동은 1900년 고종이 을미사변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과 열사들을 기리기 위해 장충단을 설치한 곳이야.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성스러운 땅이었지. 그런데 불과 10여 년 만에 일제 토지조사사업이 이 땅을 숫자로 해체해버렸어.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이 이 기록을 분석하는 이유는 분명해. 토지 이용의 종류와 분포가 그 땅에서 어떤 조사가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가장 정직한 신호이기 때문이야. 장충동3가의 74필지, 지금부터 하나씩 열어볼게.

총 필지

74필지

70,535㎡

대지

48필지

21,133㎡

일본인 소유

31필지

전체의 41.9%

20필지

27,742㎡

사사지

2필지

1,917㎡

잡종지

1필지

15,567㎡

1912년의 장충동3가는 지금 우리가 걷는 서울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 안에는 주거, 농경, 신앙, 그리고 식민지의 그늘이 모두 담겨 있었다.



2

집과 삶의 흔적, 대지 48필지가 말해주는 것

장충동3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토지 유형은 대지야. 48필지, 21,133㎡. 전체 필지의 64.9%가 사람이 살던 집 자리였어.

골목을 따라 낮은 기와집과 초가가 섞여 있었을 거야. 장충동1가는 당시에도 일찍부터 일본인이 거주했던 지역이었고, 아직도 일제식 건물 구조를 지닌 가옥들을 볼 수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3가 역시 비슷한 구조였을 가능성이 높아. 조선인 주거지와 일본인 주거지가 뒤섞이는 과정이 이 74필지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거야.

이런 대지 분포는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핵심 단서가 돼. 주거지가 밀집된 곳일수록 생활 유물과 기초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 조선 시대 기와 조각, 옹기, 우물 시설, 담장 기초 — 이런 것들이 대지 구역 아래 층층이 쌓여 있을 거야. 실제로 서울 도심 재개발 지역에서 이런 패턴의 땅을 조사했을 때 생활용 철물, 도기류가 다수 확인된 사례가 여럿 있어.




3

사사지와 임야 — 도시 속 신성한 공간과 자연

장충동3가에서 가장 독특한 데이터가 나왔어. 사사지 2필지, 1,917㎡.

사사지는 절이나 종교 시설과 관련된 땅이야. 도시 한복판, 그것도 충신들의 제사 공간인 장충단 인근에 신성한 종교 공간이 있었다는 의미야. 생각해봐, 장충단에서 조상들의 충혼을 기리고, 그 바로 옆 사찰에서는 불교 의례가 이루어지던 풍경. 이게 1912년 장충동3가의 실제 풍경이었어.

그리고 임야 3필지, 4,175㎡. 도시와 자연이 맞닿아 있던 경계야. 남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울창한 언덕이 주거지와 공존하던 장충동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지지 않아? 이런 임야 인근은 지표조사에서 특히 주목받아. 도시의 팽창을 막아주는 자연 완충 지대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그 아래에 옛 지형과 생활 흔적이 보존되는 경우가 많거든.

사사지는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특별히 주의 깊게 다뤄지는 유형이야. 단순한 건물 기초가 아니라 의례와 관련된 유물 — 향로, 제기류, 불교 조각 파편 등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야. 이런 유물은 그 시대 사람들의 신앙 체계를 재구성하는 데 핵심 자료가 돼.

장충동 일대는 조선 시대 한성부 남부 명철방에 속했어. 지금의 장충동, 묵정동 일대는 예로부터 숲이 많은 벌판 '숲벌(수평리)'로 불렸고, 가까이 '먹절'이라는 사찰이 있어 묵정동(먹절골)이라는 이름도 생겨났어. 사사지 2필지는 이 오랜 불교 신앙의 흔적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



4

밭과 잡종지, 장충동3가의 생계 풍경

장충동3가에는 밭이 20필지, 무려 27,742㎡에 달했어. 전체 면적 70,535㎡의 39.3%야. 면적만 보면 대지(21,133㎡)보다 밭이 더 넓어.

이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봐. 집이 있고, 밭이 있어. 이 동네 사람들은 직접 땅을 갈아 먹을 것을 길렀던 거야. 도시이면서 동시에 농촌의 성격을 가진 공간이었어. 장충체육관 자리, 신라호텔 부지, 지금은 고급 시설들이 들어선 그 땅에 100년 전에는 배추밭, 무밭이 있었을 수 있어. 그 광경을 상상해봐.

그리고 잡종지 1필지, 15,567㎡. 이게 특이해. 1필지인데 면적이 어마어마해. 대지 48필지 전체 면적(21,133㎡)보다도 크거든. 잡종지는 도로, 공터, 공동 사용 공간일 가능성이 높아. 이 넓은 공터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이런 잡종지가 종종 생활 흔적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장소가 돼. 공터나 골목 공간에서 오히려 유물이 더 선명하게 남는 역설적인 경우가 있거든.

잡종지 15,567㎡는 장충동3가 전체 면적의 22%를 차지해. 이 규모의 공동 사용 공간은 집회, 시장, 군사 훈련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어. 이런 공간 아래에서는 때때로 예상치 못한 유구가 발견되기도 해. 1912년 기록에 잡종지로 분류된 땅일수록, 발굴 기관은 더 열린 시각으로 조사에 접근해야 해.




5

국유지 8필지와 일본인 31필지, 식민지 도시의 단면

여기서 이야기가 가장 무거워져.

1912년 장충동3가에는 국유지가 8필지 있었어.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토지로, 행정·군사·기반시설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장충단 자체가 국유지 성격을 가진 공간이었으니, 이 8필지가 어디에 위치했느냐에 따라 문화재 조사 가치가 크게 달라져.

그리고 가장 눈을 잡아당기는 숫자. 일본인 소유 토지 31필지. 74필지 중 41.9%야.

장충동3가 토지 소유 구성 (1912년)

일본인 소유 31필지 (41.9%)조선인·국유·기타 43필지 (58.1%)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야. 1912년 당시 경성 남쪽, 충무로와 명동 일대는 이미 일본인 상권이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었어.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충무로를 중심으로 명동과 진고개 일대에 일본인 자본이 뻗어나갔는데, 장충동3가는 그 팽창의 전초기지 중 하나였던 거야.

41.9%의 일본인 소유. 이건 단순한 부동산 거래를 넘어서, 상권과 주거의 주도권이 바뀌고, 건물 구조와 골목의 언어가 달라지는 과정이야. 아직 남아 있다는 일제식 건물 구조의 가옥들. 그 뿌리가 바로 이 31필지에서 시작됐어.

그리고 이런 토지들은 문화재 발굴 기관이 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구역이야. 소유권이 빠르게 교체된 지역은 건물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지하 구조가 복잡하게 중첩돼. 조선 시대 흔적 위에 일본식 건물이, 그 위에 또 현대 건물이 올라간 구조. 이 중첩 속에 각 시대의 이야기가 켜켜이 담겨 있어.



6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장충동3가가 중요한 이유

장충동3가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복합적 토지 이용 구조를 가진 동네야. 대지, 밭, 사사지, 임야, 잡종지, 국유지, 일본인 소유지가 하나의 동네 안에 모두 존재해. 이런 다층적 구조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최우선 관심 지역이 되는 이유야.

각 토지 유형은 그 아래에 서로 다른 시대의 흔적을 담고 있어. 대지 아래엔 생활 유구, 밭 아래엔 경작층, 사사지 아래엔 의례 유물, 임야 아래엔 옛 지형, 잡종지 아래엔 공동 생활 흔적 — 이 다섯 종류의 이야기가 반경 70,535㎡ 안에 공존해. 한 번의 지표조사로 이 모든 층위를 체계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거야.

게다가 장충단이라는 역사적 공간이 인근에 있어. 국가 지정 사적급 유산 주변 500m 이내는 언제나 문화재 발굴 기관의 특별 관리 구역이야. 새로운 공사가 생길 때마다 지표조사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한 삽의 무게가 다른 동네와 달라.

문화재 지표조사 →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 발굴조사의 단계적 절차는 장충동3가처럼 역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특히 엄격하게 적용돼. 유형이 다양한 토지가 섞인 구역일수록, 초기 지표조사 단계에서 추가 조사 권고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져.



7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로 보는 장충동의 가치

장충동3가와 유사한 토지 구성, 즉 주거·농경·종교 공간이 복합된 구역에서 발굴 성과가 나온 사례들을 보면 이 동네의 잠재적 가치를 실감할 수 있어.

성공 사례 1 — 서울 도심 사찰 인근 발굴의 의외성

2010년대 서울 도심 한 사찰 부속 건물 신축 공사 전 시굴조사에서 고려 시대 불교 의례 관련 청동 유물과 조선 시대 도기류가 함께 출토됐어. 사사지로 분류됐던 인근 토지 아래에서 불교 건물 기초와 의례 공간이 확인됐고, 이게 서울 도심 불교 문화사 연구의 핵심 자료가 됐어. 장충동3가의 사사지 2필지는 이와 비슷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

성공 사례 2 — 일본인 소유지 발굴의 역설적 성과

서울 중구 일대 일본인 소유 토지였던 구역의 재개발 과정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했을 때, 일제식 건물 기초를 걷어내자 그 아래 조선 시대 주거 유구와 생활 도기류가 온전히 보존된 상태로 나온 사례가 있어. 소유권이 빠르게 교체됐기 때문에 오히려 아래 지층이 교란 없이 유지됐던 거야. 장충동3가의 31필지 일본인 소유지는 이런 역설적 보존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74필지라는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 사사지 아래에서 불교 제기가 나올 수도 있고, 잡종지 15,567㎡ 어딘가에서 장충단 제사와 관련된 흔적이 발견될 수도 있어. 그 가능성이 문화재 발굴 기관이 이 동네를 계속 주목하는 이유야.



8

장충동3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1912년 장충동3가는 단순한 과거의 동네가 아니야. 주거, 농경, 종교, 행정, 식민지 지배 구조가 동시에 존재했던 복합 공간이었어. 이 네 개의 층위가 겹쳐 있는 땅이라는 건, 발굴할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는 뜻이야.

그래서 오늘날 이 일대를 개발하거나 공사를 계획할 때, 문화재 발굴 조사와 문화재 지표 조사가 필수로 거론되는 거야. 과거를 존중하는 도시만이 미래를 제대로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야.

장충단. 충신들을 기리던 그 제단이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바뀌고, 주변 땅의 절반 가까이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던 그 시절. 그러나 땅은 기억을 잊지 않아. 기와 한 조각, 제기 파편 하나, 우물 돌 하나 — 이것들이 모여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다시 말해줘.

보이지 않는 시간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도시의 풍경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숫자로만 남아 있던 1912년 장충동3가. 74필지, 70,535㎡. 이제 이 숫자들이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야기로 들려.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문화재 발굴이야.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일이 우리가 이 도시를 지키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야.



충신들의 혼이 스민 땅에서,


지금도 누군가의 삶이 숨 쉬고 있어.

장충단 제사의 북소리, 사찰의 목탁 소리, 밭을 갈던 쟁기 소리. 1912년 장충동3가에서 들렸을 소리들이야. 그 소리들이 사라진 게 아니야. 땅 아래에서 아직 진동하고 있어.

문화재를 지킨다는 건, 그 진동을 없애지 않는 일이야. 그리고 우리가 그 진동을 느끼는 한, 장충동3가는 절대 과거가 되지 않아.

이 이야기를 읽어준 당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당신이 이 도시의 기억을 하나 더 간직하게 됐으니까.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더 알고 싶다면?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에서 서울 각 동네의 1912년 토지조사 분석 자료를 확인할 수 있어. 내가 사는 동네의 100년 전 이야기도 분명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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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야기를 끝까지 읽은 당신도, 이미 이 도시의 기억을 함께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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