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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장충동1가, 지금의 남산 자락에 숨겨진 땅의 기억

  • 2025년 12월 1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2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중구 남산 권역

1912년 장충동1가의 비밀남산 자락 63필지, 집보다 밭이 더 많았던동네의 진짜 이야기

이 시리즈 최대 면적 101,706㎡ — 농경지가 주거지를 압도했던 남산 아래


남산 아래, 지금 우리가 공원으로 걷는 그 땅.


1912년에는 밭이 있었다. 집보다 더 넓게.

장충단공원, 신라호텔, 국립극장. 지금의 장충동1가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지역이야. 근데 1912년 이 땅이 집보다 밭이 더 넓었던 동네였다는 사실,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밭 51,745㎡ vs 집 36,525㎡. 이 충격적인 숫자가 말해주는 게 뭔지, 일본인 24필지가 전략적으로 이 땅을 점령한 이유가 뭔지, 남산 자락 임야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 지금부터 완전히 파헤쳐볼게.

목 차

  1. 한 장의 숫자가 말을 걸어왔다

  2. 1912년 장충동1가의 전체 풍경 — 이 시리즈 최대 면적

  3. 집보다 밭이 더 넓었던 동네의 충격

  4. 산과 임야, 남산의 시작점

  5. 국유지 5필지와 일본인 24필지가 말해주는 것

  6. 성씨로 읽는 장충동1가의 사람들

  7. 문화재 지표조사로 이어지는 이유

  8. 성공 사례로 본 남산 권역 발굴의 가능성

  9. 흔들리는 땅, 선택의 순간

  10. 남산 아래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1

한 장의 숫자가 말을 걸어왔다

1912년의 장충동1가를 숫자로만 보면 그냥 오래된 통계처럼 보일 수도 있어. 63필지, 101,706㎡. 근데 이 숫자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순간, 지금 우리가 걷는 장충단공원과 남산 자락이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해.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이 이 기록을 분석하는 이유는 분명해. 1912년 토지대장은 단순한 행정 문서가 아니야. 도시의 기억이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도야. 그리고 문화재 발굴 기관이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출발점이 되는 자료야.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장충동을 지날 때 발걸음이 조금 느려질 거야. 그리고 땅이 말을 건네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몰라.

총 필지

63필지

101,706㎡

30필지

51,745㎡

일본인 소유

24필지

전체의 38.1%



2

1912년 장충동1가의 전체 풍경 — 이 시리즈 최대 면적

이 시리즈에서 분석한 동네들 중 장충동1가가 가장 넓어. 101,706㎡. 익선동(41,299㎡)의 2.5배, 저동1가(2,386㎡)의 40배가 넘는 면적이야. 근데 이 넓은 땅이 집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어. 오히려 그 반대였어.

이 동네에는 집만 있지 않았어. 집보다 밭이 더 많았고, 산과 임야도 분명히 존재했어. 대지 29필지 36,525㎡, 임야 4필지 13,434㎡, 밭 30필지 51,745㎡. 숫자만 봐도 알 수 있지. 이곳은 아직 완전한 도시가 아니라, 생활과 농업이 공존하던 공간이었어.

101,706㎡의 땅. 그 절반이 밭이었고, 산자락이었어. 지금 우리가 걷는 장충단공원과 남산 입구가 100년 전에는 밭과 임야였다는 뜻이야.

이 구조는 문화재 발굴 기관에게 굉장히 중요한 신호야. 대지, 밭, 임야가 복합적으로 섞인 지역은 각 토지 유형마다 서로 다른 시대의 흔적이 다층적으로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단순한 주거지보다, 생활과 생산이 함께 이루어진 공간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



3

집보다 밭이 더 넓었던 동네의 충격

이게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데이터야.

대지 (집터)

36,525㎡

29필지

VS

밭 (농경지)

51,745㎡

30필지

밭이 집터보다 15,220㎡ 더 넓어. 비율로 보면 밭(50.9%)이 대지(35.9%)보다 15%포인트 이상 높아. 이화동(이화동도 밭이 대지보다 넓었어)처럼 농경지가 주거지를 압도하는 구조가 장충동1가에서도 나타나는 거야.

지금의 장충동1가를 생각해봐. 신라호텔, 장충체육관, 국립극장, 장충단공원. 이 화려한 시설들이 들어서기 전, 이 땅에서 사람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렸어. 남산 아래 비탈진 땅에 배추가 자라고, 무밭이 펼쳐져 있었을 장면을 상상해봐.

이런 토지 구조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아주 중요한 단서야. 밭이 많았던 지역일수록 생활 유구나 매장 문화재가 나올 가능성이 높거든. 경작층이 생활층과 함께 보존되면서, 씨앗 흔적, 농기구 파편, 경계 시설이 한 번에 나오는 경우도 있어. 장충동1가의 30필지 밭 구역은 바로 그런 가능성의 땅이야.



4

산과 임야, 남산의 시작점

임야 4필지, 13,434㎡.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일 수도 있어. 근데 이 임야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봐. 장충동1가는 남산과 직접 맞닿는 동네야. 이 임야는 지금의 남산으로 이어지는 자연 경관의 일부였어. 도시 개발 이전, 장충동1가는 남산의 끝자락이자 시작점이었지.

남산은 조선 태조가 1394년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부터 풍수지리상 안산(案山)으로 중요했던 곳이야.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던 목멱신사가 있었고, 조선 시대 내내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어. 그 남산의 자락이 장충동1가까지 이어져 있었던 거야.

이런 지형은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늘 주의 깊게 살펴보는 구간이야. 자연 지형이 유지된 곳일수록 오래된 흔적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아. 특히 임야와 대지의 경계 지점, 즉 자연이 끝나고 인간의 생활이 시작되던 그 경계선에서 종종 중요한 유구가 발견돼. 제사 터, 경계 시설, 혹은 옛 산길의 흔적.

남산은 현재 서울시 최대 공원으로, 크게 장충지구·예장지구·회현지구·한남지구 4개 지구로 나뉘어. 장충동1가는 바로 장충지구에 해당해. 이 일대에서의 공사와 개발은 문화재 보호구역 인접 지역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받아. 임야 4필지의 위치가 공원 내부와 겹친다면, 그 조사 가치는 더욱 높아져.



5

국유지 5필지와 일본인 24필지가 말해주는 것

1912년 장충동1가에 국유지가 5필지 있었어. 그리고 더 충격적인 숫자 —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가 24필지.

장충동1가 토지 소유 구성 (1912년)

일본인 소유 24필지 (38.1%)조선인·국유·기타 39필지 (61.9%)

전체 63필지 중 38.1%가 일본인 소유. 이건 이 시리즈 전체에서 저동1가(53.3%) 다음으로 높은 비율이야. 장충동2가(18.7%)나 원남동(12.7%)보다 훨씬 높아.

이게 우연이 아니야. 일제강점기 초기, 장충동1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공간이었어. 남산과 인접해 있고, 도심과도 가까웠어. 그리고 장충단 — 조선 고종이 을미사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 바로 여기 있었어. 일본 입장에서는 이 상징적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했을 거야. 장충단공원이 일제에 의해 위안 공원으로 바뀌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시설이 들어선 역사가 이 38.1%와 무관하지 않아.

그리고 이런 일본인 소유 토지 구역은 문화재 발굴에서 복잡한 유구 구조를 가질 가능성이 높아. 조선 시대 생활 흔적 위에 일제강점기 건물 기초가 올라가고, 그 위에 또 현대 시설이 세워진 3중 구조. 각 층마다 다른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일본인 24필지의 위치가 장충단 주변이었다면, 이 구역에서 을미사변 이후 조선인들의 제례 관련 흔적과 일제강점기 변형 흔적이 동시에 나올 가능성이 있어. 이런 이중 역사성을 가진 유구는 문화재 발굴에서 가장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유형이야.




6

성씨로 읽는 장충동1가의 사람들

기록에 따르면 장충동1가에서 김씨가 15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어. 이 시리즈에서 분석한 다른 동네들(김씨 26~57필지)에 비하면 적어 보여. 근데 이 숫자의 맥락이 중요해.

63필지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총 필지 중에서 김씨 15필지는 23.8%야. 이건 단일 성씨 기준으로는 상당히 높은 비율이야. 반면 일본인이 24필지(38.1%)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인 개인 중 가장 강한 존재감을 가진 집단이 김씨였던 셈이야.

이런 정보는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도 중요하게 보는 부분이야. 특정 성씨가 집중적으로 토지를 보유한 구역은 문헌 기록과 발굴 유구를 연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돼. 김씨 가문의 15필지에서 어떤 생활 유구가 나오는지, 일본인 24필지 구역과 어떻게 다른 층위를 보이는지 — 이 비교가 장충동1가 문화사 연구의 핵심이 될 수 있어.

문화재 발굴에서 토지 소유자 정보와 유구 특성의 상관관계 분석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 1912년 토지대장의 성씨 데이터가 실제 발굴 전략 수립에 활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거든.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이 이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7

문화재 지표조사로 이어지는 이유

장충동1가는 밭, 임야, 대지가 복합적으로 섞인 동네야. 이런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로서 매우 전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어.

첫 번째, 밭 50.9%. 경작층이 두텁게 쌓인 지역은 지표조사 단계에서 토층 분석으로 이미 역사 층위를 파악할 수 있어. 어떤 식물이 자랐는지, 언제부터 경작이 이루어졌는지, 경작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 이 모든 게 땅 안에 기록돼 있어.

두 번째, 임야 13,434㎡. 남산 자락의 자연 지형은 개발 압력을 덜 받아 원형이 유지됐을 가능성이 높아. 임야와 대지 경계에서의 지표조사는 특히 중요해.

세 번째, 일본인 38.1% 침투. 소유권 복잡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건물이 여러 차례 교체되면서 오히려 아래 지층이 보존되는 역설적 상황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 장충동1가의 38.1%는 바로 이런 역설적 보존 가능성을 품고 있어.

실제로 서울 도심의 많은 발굴 성공 사례가 이런 복합 토지 이용 구조에서 시작됐어. 단순한 주거지보다, 생활과 생산이 함께 이루어진 공간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거든.



8

성공 사례로 본 남산 권역 발굴의 가능성

성공 사례 1 — 남산동3가 발굴이 보여준 가능성

서울문화유산 자료에 따르면, 남산 인근 남산동3가에서 진행된 조사에서 사사지(절터) 흔적과 주거 유구가 함께 확인됐어.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되고 시굴·본 발굴로 이어진 이 사례는, 남산 권역 전체의 발굴 가능성을 높게 보는 근거가 됐어. 장충동1가는 남산동3가와 같은 남산 권역에 속해. 비슷한 지층 패턴을 가질 가능성이 높아.

성공 사례 2 — 밭과 임야 복합 지역 발굴의 교훈

서울 도심의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어. 처음엔 그냥 밭과 임야로 보였던 곳에서 조사 결과 조선 후기 생활 유구가 대거 확인된 경우 말이야. 그 순간, 땅은 개발 대상이 아니라 기록 대상이 돼. 장충단공원 인근에서 매년 새로운 정비 사업이 진행될 때마다 이런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해야 해. 장충동1가의 30필지 밭 구역은 그런 가능성의 핵심 지역이야.

서울 도심의 밭과 임야는 '아무것도 없는 땅'처럼 보이지만, 발굴 기관에게는 오히려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는 땅'이야. 한 번도 건물이 올라간 적 없는 땅은 교란 없이 역사가 보존된 땅이거든.



9

흔들리는 땅, 선택의 순간

도시는 늘 변해. 개발은 필요하고, 변화는 피할 수 없어. 장충동1가도 지금까지 엄청나게 변했고, 앞으로도 변할 거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을 남길지 선택하는 건 우리의 몫이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 조사는 그 선택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야. 땅을 파기 전에 먼저 읽는 일. 개발하기 전에 먼저 기억하는 일. 이 작은 과정이 쌓여서 도시가 더 깊어지는 거야.

장충동1가의 63필지 101,706㎡는 조용히 우리에게 그 선택의 무게를 알려주고 있어. 밭 30필지의 경작 흔적, 임야 4필지의 자연 기억, 대지 29필지의 생활 유구. 이 모든 게 아직 완전히 꺼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



10

남산 아래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1912년 장충동1가는 지금보다 훨씬 느린 호흡으로 살아 숨 쉬던 공간이었어. 밭을 갈던 사람들, 임야를 오르내리던 발자국, 장충단에서 제사를 지내던 조선인들의 마음. 그리고 그 위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온 일본인 38.1%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장충동을 만들었어. 호텔이 들어서고, 체육관이 세워지고, 공원이 조성되는 과정 아래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쌓여 있어.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게 문화재 발굴과 조사의 시작이야.

그 기억이 쌓일수록, 도시는 더 깊어진다. 남산 아래를 지날 때, 한 번쯤 발밑을 생각해보자. 그 땅은, 아직도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발굴은 과거를 파헤치는 게 아니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일이야. 장충동1가의 63필지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가 바로 그거야.



남산 아래, 밭을 갈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보다 밭이 더 넓었던 동네. 밭에서 씨를 뿌리고, 남산 자락을 오르내리고, 장충단에서 제를 올리던 사람들. 그들의 흔적이 101,706㎡의 땅 아래에 아직 있어.

문화재 발굴은 그 흔적을 꺼내는 일이야. 문화재 지표조사는 꺼내기 전에 먼저 읽는 일이야.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당신이 그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일이야.



장충단공원을 다음에 걷게 된다면, 발밑을 한번 생각해줘. 그 아래에 밭을 갈던 손이, 아직 흙 속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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