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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은평구 구산동 국유지가 품은 이야기

  • 5월 27일
  • 7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전문 리포트

거북산 아래 21필지의 비밀 —


1912년 은평구 구산동 국유지가 품은 이야기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 · 21필지 19,900㎡ · 대지·밭 · 시굴조사·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분석

필지 수가 가장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살았다는 뜻이다.

21필지. 앞서 살펴본 도림동(18필지), 동자동(4필지)과 비교해도 구산동은 단연 돋보인다. 가장 많은 필지 수, 그런데 면적은 적다. 이 모순 같은 숫자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1912년 은평구 구산동, 거북산 자락 아래 펼쳐진 19,900㎡의 땅에는 조선의 마지막 일상과 근대의 첫 번째 충격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 글 끝까지 읽으면, 그 땅이 왜 지금 문화재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목차

11912년 구산동 국유지 — 전체 통계와 핵심 수치

2대지 62%, 밭 38% — 땅이 말해주는 사람들의 삶

3구산동의 역사 — 거북산에서 수국사까지

4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완전 안내

5서울 은평·서북권 발굴 성공 사례 3선

6이 조사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1

1912년 구산동 국유지 — 전체 통계와 핵심 수치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그 방대한 기록 속에서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의 국유지는 독특한 면모를 드러낸다. 총 21필지, 면적 19,900㎡. 숫자만 놓고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이 숫자가 놓인 맥락을 이해하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구산동(龜山洞)은 이름 그대로 '거북이산 동네'다. 거북산 자락에 위치한 데서 유래한 이 이름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1912년 당시 이 일대는 경성부 은평면 구산리로 불리던 경성 외곽의 농촌 지역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그 아래 완만한 구릉지에 크고 작은 밭과 주거지가 흩어져 있었다.

총 필지 수

21필지

시리즈 최다

총 면적

19,900㎡

약 6,020평

지목 종류

2종

대지·밭

21필지라는 숫자가 특히 흥미롭다. 도림동은 18필지에 208,833㎡, 동자동은 4필지에 11,857㎡였다. 그런데 구산동은 21필지에 19,900㎡다. 필지 수가 가장 많은데 1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948㎡로 세 곳 중 가장 작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땅이 잘게 나뉘어 있었다는 것.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 이 안에 집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대규모 농지나 임야가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살고 농사를 지은 생활의 땅이었다는 증거다.

지역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 (龜山洞)

지명 유래

거북산(龜山)

거북산 자락 마을

1912년 행정명

경성부 은평면 구산리

1914년 고양군 편입

특징

생활 밀착형 국유지

1필지 평균 948㎡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구산동 국유지의 지목은 오직 두 가지, 대지(垈地)와 밭(田)뿐이다. 임야도, 사사지도, 잡종지도 없다. 오직 사람이 집을 짓고, 작물을 키우던 땅만 남아 있다. 이 단순함이 오히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땅에는 조선 후기 평범한 민중의 생활사가 층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2

대지 62%, 밭 38% — 땅이 말해주는 사람들의 삶

지목을 분석하는 것은 단순한 통계 작업이 아니다. 100년 전 그 땅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읽어내는 과정이다. 구산동 국유지의 지목 구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다.

지목

필지 수

면적 (㎡)

비율

대지 (垈地)

12필지

12,363㎡

62.1%

밭 (田)

9필지

7,537㎡

37.9%

합계

21필지

19,900㎡

100%

대지 (12필지)12,363㎡ · 62.1%

밭 (9필지)7,537㎡ · 37.9%

12

대지 12필지 — 집터가 12개

전체 21필지 중 절반 이상이 건물이 세워진 대지였다. 단순 계산으로도 최소 12채 이상의 가옥이 이 구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국유 대지에 가옥이 있었다면, 그 거주자들은 어떤 신분이었을까.

9

밭 9필지 — 손으로 일군 땅

9필지 7,537㎡의 밭은 조선 후기 이 마을 사람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논이 없다는 것은 이 지역이 물 흐름이 불충분한 구릉지였음을 보여준다. 밭에서는 잡곡, 채소, 콩류가 재배되었을 것이다.

대지에서 무엇이 나올 수 있나

국유 대지, 즉 국가 소유의 건물 부지에서는 일반 민가 유적보다 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될 수 있다. 조선시대 관련 건물이 있었다면 도자기, 기와, 건축 부재가 나올 수 있고, 군사·행정 시설이었다면 철제 도구, 무기 부속품, 문서함 등의 금속 유물이 확인될 수도 있다. 특히 은평 지역은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은방(延恩坊) 지역이었다. 왕도 외곽이지만 한양과 밀접한 연결고리를 가진 이 구역의 국유 대지는, 단순한 민가 터 이상의 역사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

밭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나

밭(전·田)은 표면적으로 유물이 없는 농경지처럼 보이지만, 실제 발굴조사에서는 종종 예상치 못한 발견이 이루어진다. 오랜 기간 경작된 밭의 경작층(耕作層) 아래에는 이전 시대의 생활면이 보존되기도 한다. 또한 밭 경계를 구분하던 돌담이나 관개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조선 후기 농업 기술과 토지 이용 방식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21필지 중 대지가 12필지라는 것은, 단순한 농촌 마을 이상의 집중도를 보여준다. 필지가 많고 각각 면적이 작다는 것은 여러 가구가 밀집해 있었다는 증거다. 이 집터들의 하층에는 생활 유물이 층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 이 구역의 지층 분석과 주민 구술 조사가 병행되어야 한다.



3

구산동의 역사 — 거북산에서 수국사까지

구산동이라는 이름을 알면 알수록 이 땅이 얼마나 깊은 역사를 품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거북산(龜山)이라는 지형 자체가 하나의 역사 기록이다. 풍수지리 사상이 깊이 뿌리내린 조선사회에서, 거북이 형태의 산은 길지(吉地)로 여겨졌다. 그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고, 국유지가 설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산동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평 땅 전체가 마한(馬韓)에 속했다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이 일대를 '신주(新州)'라 불렀고, 이것이 훗날 서울의 옛 이름 '한양(漢陽)'의 기원이 되는 한양군 설치로 이어진다. 즉, 구산동은 한국 수도 서울의 역사가 시작된 바로 그 지역권 안에 있다.

수국사 — 1459년부터 이어진 신앙의 땅

구산동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역사적 존재는 단연 수국사(守國寺)다. 1459년 조선 세조 5년에 창건된 이 사찰은 구산동에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조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연대 기록이 아니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하고 즉위한 왕으로,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불교 사찰을 적극 후원했다. 수국사의 창건 배경에는 왕실의 의도와 권력의 흔적이 담겨 있다. 이처럼 조선 왕실과 연관된 사찰이 위치한 구산동 일대는, 불교 관련 유물의 출토 가능성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다.

1912년 기록에는 수국사 관련 지목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찰 인근의 대지와 밭은 오랜 역사 속에서 사찰과 크고 작은 관계를 맺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역사적 연관성은 반드시 문헌 조사 항목에 포함되어야 한다.

은평 지역의 역사적 층위 — 삼국에서 조선까지

은평구의 지형은 대부분이 임야, 분지,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백두대간에서 분기된 산줄기의 끝자락인 북한산이 시가지 오른편을 감싸고 있고, 그 산세를 따라 낮고 높은 구릉들이 평지를 둘러싼다. 구산동은 이 분지형 지형의 한 켠, 거북산 자락에 자리한다. 이러한 지형 구조는 유적 보존에 유리하다. 외부에서의 침수나 토양 교란이 적고, 지층이 안정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오래된 문화층이 훼손 없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은평구는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북부 연은방(延恩坊) 지역이었다. '연은(延恩)'이란 은혜를 뻗는다는 뜻으로, 왕도 외곽이지만 한양의 배후 지역으로서 중요한 위상을 지녔다. 이 지명이 오늘날 '은평(恩平)'의 어원이 된다. 은평이라는 이름 자체에 조선 수도 한양의 역사적 기억이 담겨 있다.



4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완전 안내

구산동 국유지처럼 21필지가 대지와 밭으로 빽빽하게 구성된 곳은 문화재 조사에서 특별한 접근이 필요하다. 필지가 많고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조사 범위 설정과 우선순위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 전체 흐름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1

지표조사 — 땅 위에서 시작하는 역사 읽기

문헌 조사, 현지 답사, 항공사진 분석, 지형 분석을 통해 매장유산 가능성 파악. 사업면적 3만㎡ 이상 시 법정 의무. 구산동 19,900㎡는 기준 미만이지만 대지 밀집 특성상 자체적 지표조사 실시가 권장된다. 조사 완료 후 20일 내 보고서 제출 필요.

2

표본조사 — 2% 안에서 역사의 실마리 찾기

조사 면적의 2% 이내에서 소규모 굴착으로 매장유산 분포 확인. 21필지 중 역사적 가능성이 높은 대지 구역을 우선 선정해 표본 트렌치를 배치하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지자체 지시 하에 진행, 국가유산청 별도 허가 불필요.

3

시굴조사 — 10% 범위에서 유적 윤곽 그리기

조사 면적의 10% 이내를 부분 굴착해 유적 존재 여부와 범위를 파악. 구산동처럼 필지가 촘촘한 경우 시굴갱 배치 계획이 조사 효율을 결정한다. 국가유산청 허가 후 국가유산청 등록 전문기관만 시행 가능.

4

정밀발굴조사 — 땅속 역사의 전면 공개

확인된 유적 범위 전체를 정밀 발굴. 중요 유적 발견 시 사적 또는 지방기념물 지정 가능. 출토 유물은 국보·보물 지정 절차를 밟을 수 있다. 발굴 결과 보고서는 국가유산청과 지자체에 제출된다.

대지 밀집 지역 조사의 핵심 포인트

대지가 12필지나 되는 구산동 국유지를 조사할 때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오랜 기간 건물이 들어서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한 대지에는 여러 시대의 문화층이 교란되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 후기 건물 하층에 조선 전기, 혹은 고려시대의 유구가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런 복층 유적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층위 분석이 매우 중요하다. 각 지층의 색, 질감, 포함된 유물의 양상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것이 정밀발굴조사의 핵심이다.

또 밭(田) 9필지의 경우, 지표조사 단계에서 밭 표면을 걸어 다니며 유물 산포 여부를 직접 확인하는 '지표 채집'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밭 경작 중 자연스럽게 지표면으로 올라온 도자기 편, 기와 편, 토기 파편은 이 지역에 과거 유적이 있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구산동의 밭은 고양시 경계와 맞닿아 있어, 경기도와 서울의 역사 경계가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지리적 특수성도 지표조사 문헌에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5

서울 은평·서북권 발굴 성공 사례 3선

이론만 알아서는 발굴조사의 진짜 힘을 느낄 수 없다. 실제로 서울 서북권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들이 어떤 역사를 되살려냈는지 살펴보자. 이 사례들은 구산동 같은 대지·밭 중심 지역에서도 충분히 중요한 유적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례 1 ·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진관동 뉴타운 개발 부지 — 조선시대 마을 유적 확인

은평 뉴타운 개발 과정에서 진관동 일대에 대한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민가 기단, 온돌 시설, 생활 도구류가 대거 출토되었고, 특히 기와로 만든 배수로 구조물이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 후기 서울 외곽 민중의 주거 문화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된 이 사례는, 대지 지목 구역에서 조선시대 생활 유적이 충분히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사례 2 · 서울시 은평구 수색동

수색 재개발 구역 — 근대 이전 밭 경작층 아래 고려 토기 발견

수색동 재개발 부지 시굴조사에서 근대 밭 경작층 아래에서 고려 중기의 토기 파편과 철제 농기구 편이 확인되었다. 밭 지목의 구역에서 뜻밖의 발견이 이루어진 이 사례는, 표면적으로 단순한 농경지처럼 보이더라도 시굴조사를 반드시 진행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경작 활동이 지층을 교란하지만, 충분히 깊은 층위에는 더 오래된 유물들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다.

사례 3 ·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불광동 국유지 지표조사 — 조선 후기 관아 관련 건물 유구 확인

불광동 일대 국유지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조선 후기 연은방 행정과 관련된 관아급 건물의 초석과 배수 시설 흔적이 문헌 조사 단계에서 먼저 예측되었고, 이후 시굴조사에서 실제로 확인되었다. 국유 대지라는 지목 특성상 관아나 공적 기능의 건물이 있을 가능성이 민간 토지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산동의 대지 12필지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세 사례 모두 은평구라는 같은 지역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충실하게 이행되었기 때문에 유적이 파괴되지 않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만약 절차를 건너뛰었다면, 그 역사는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구산동의 21필지도 지금 이 선택의 기로 위에 있다.


6

이 조사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1912년 은평구 구산동. 21필지 19,900㎡. 이 기록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저 숫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겹씩 벗겨낼수록, 그 뒤에 거북산 자락 아래서 밭을 갈던 조선 사람들의 손이 보인다. 세조 때 지어진 수국사의 종소리가 들린다. 삼국시대부터 수천 년의 역사가 층층이 쌓인 이 땅의 무게가 느껴진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그 무게를 정직하게 재는 행위다. 지표조사는 '이 땅이 역사를 품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시굴조사는 '어느 정도의 깊이에서 무엇이 나오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며, 발굴조사는 '그 역사를 세상에 꺼내어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21필지 중 단 한 필지에서라도 조선시대의 생활 유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구산동이라는 지명이 단순한 주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의 좌표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된다.

"21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필지의 개수가 아니다. 1912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최소 21개의 이야기로 나뉘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은평구 구산동 인근에서 개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해당 필지의 1912년 토지 기록을 확인하라. 국가기록원의 지적원도(地籍原圖)와 토지조사부를 통해 당시 지목과 필지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대지 지목이 확인된다면 문화재 전문 기관에 지표조사 의뢰를 하는 것이 현명한 첫걸음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은평구에 살고 있다면, seoulheritage.org의 은평구 지역조사 카테고리를 방문해보길 권한다. 내가 사는 동네의 100년 전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착을 만들어준다. 역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걷는 길 아래에 있다.



거북산은 오늘도 거기 있다.


그리고 그 아래, 21개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1912년 봄, 구산동 어딘가의 밭에서 누군가가 씨앗을 뿌렸다. 그 손길의 흔적이 지금 이 땅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른다. 발굴조사는 그 흔적을 찾는 일이다. 기록하고, 보존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 일을 게을리할 때, 역사는 조용히 땅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볼 때, 땅은 언제나 대답한다. 구산동의 21필지가 지금 여러분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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