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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동자동·도동1가 국유지의 진실

  • 5월 27일
  • 6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전문 리포트

서울역 바로 옆, 잠든 땅의 기억 —


1912년 용산구 동자동·도동1가 국유지의 진실

서울시 용산구 도동1가·동자동 · 4필지 11,857㎡ · 사사지·대지·임야 · 시굴조사·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분석

서울역 바로 옆, 그 땅에 절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서울역을 오가는 하루 수십만 명은 그 사실을 모른다. 1912년, 서울역이 생기기도 전 이 땅에는 사찰이 서 있었다. 그 흔적이 '사사지(寺社地)'라는 이름으로 토지조사부에 기록되어 있다. 4필지 11,857㎡ — 용산구 도동1가와 동자동의 국유지 기록이 지금 문화재 발굴조사의 새로운 시작점이 되고 있다. 이 땅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목차

11912년 용산구 동자동·도동1가 국유지 전체 통계

2지목별 상세 분석 — 사사지가 남긴 수수께끼

3동자동의 역사 — 왜 이 땅이 남다른가

4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절차 완전 가이드

5서울 도심 발굴 성공 사례 — 땅이 말하기 시작했다

6지금 이 조사가 가지는 의미



1

1912년 용산구 동자동·도동1가 국유지 전체 통계

서울역. 이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분주한 플랫폼과 오가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서울역 바로 옆 땅, 지금의 동자동과 도동1가 일대가 1912년 당시에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 국유지는 총 4필지, 면적으로 11,857㎡에 달했다. 단순 수치로 보면 앞서 다룬 도림동 국유지의 약 18분의 1 규모지만, 역사적 밀도로 따지면 결코 작지 않다. 사찰 부지였던 사사지(寺社地)와 울창한 임야, 그리고 건물이 세워진 대지까지 — 불과 4필지 안에 조선 후기 생활상의 세 가지 층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총 필지 수

4필지

국유지 전체

총 면적

11,857㎡

약 3,587평

조사 기준

1912년

일제 토지조사사업

동자동이라는 이름은 '동자(童子)' 즉 아이처럼 순수한 고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땅의 지위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성외 지역이었고,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도 반석방·용산방 등 서울 외곽 경계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즉, 성벽 밖이지만 한양과 맞닿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계의 땅이었다. 철도가 들어오고, 경성역이 들어서면서 이 경계의 땅은 근대 서울의 관문이 되었다. 그 격변의 현장, 바로 그 자리에 1912년의 국유지 기록이 남아 있다.

지역

서울시 용산구

도동1가 · 동자동

역사적 맥락

경성역 인근

근대화의 최전선

조사 유형

기초조사

지표·시굴·표본·발굴

특이 지목

사사지(寺社地)

사찰·신사 터


2

지목별 상세 분석 — 사사지가 남긴 수수께끼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도동1가·동자동 국유지는 대지, 사사지, 임야라는 세 가지 지목으로 나뉜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각각의 지목이 품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전혀 다르다.

지목

필지 수

면적 (㎡)

비율

임야

1필지

5,629㎡

47.5%

사사지

1필지

4,175㎡

35.2%

대지

2필지

2,052㎡

17.3%

합계

4필지

11,857㎡

100%

임야 (1필지)5,629㎡ · 47.5%

사사지 (1필지)4,175㎡ · 35.2%

대지 (2필지)2,052㎡ · 17.3%

사사지 — 역사의 핵심 단서

사사지(寺社地)는 사찰이나 신사(神社)가 있었던 땅을 뜻한다. 1필지 4,175㎡, 전체 면적의 35%가 넘는 이 구역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지목이다. 사찰 터에는 기와편, 도자기, 불상 파편, 범종 관련 금속류, 심지어 석탑 부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다. 조선시대 불교는 억불 정책 속에서도 민간에 깊이 뿌리내렸고, 서울 성문 밖 용산 일대에는 여러 암자와 소규모 사찰이 운영되었다. 1912년 기록에 '사사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이전부터 이 땅에 종교 시설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다.

사사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조선 중기 이후의 청자·백자 파편부터 불교 관련 금동유물, 기단석, 초석까지 다양하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런 지목이 확인되면, 반드시 정밀 시굴조사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한 필지 안에 수백 년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야 — 가장 면적이 넓은 미지의 구역

전체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5,629㎡의 임야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단순한 산림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선시대 서울 외곽 임야는 단순한 숲이 아니었다. 왕실과 양반가의 묘역이 조성되기도 했고, 화전민들의 생활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동자동 인근 임야에서는 조선 후기 묘제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지 — 사람이 살았던 공간

2필지 2,052㎡의 대지는 건물이 세워져 있던 땅이다. 국유 대지라는 점에서 관아나 군사 시설, 또는 관련 부속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912년 당시 이 일대는 일본군 용산 주둔지와 인접한 지역이기도 했다. 근대 초기의 건물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일제 강점 초기 서울의 공간 변화를 증언하는 귀중한 증거가 된다.



3

동자동의 역사 — 왜 이 땅이 남다른가

동자동을 이해하려면 용산이라는 지역 전체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용산은 단순히 서울 도심의 한 구가 아니다. 조선 후기부터 근대, 그리고 현대까지 한국 역사의 굴곡이 가장 깊이 새겨진 땅 중 하나다.

1890년경부터 일본 세력이 용산 일대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제국주의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던 일본은 용산에 군 주둔지를 확보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군용지로 이 일대 광대한 땅을 수용했다. 동자동과 도동1가는 바로 그 경계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서울역(당시 경성역)이 1925년에 지금의 자리에 개통되기 전, 이 땅은 임야와 사찰, 소규모 가옥들이 뒤섞인 용산 외곽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자동은 1946년 이전까지는 '중구 동자동'이었다가, 1975년에 비로소 '용산구 동자동'이 되었다. 1985년에는 도동1가가 동자동에 편입되는 행정 변화도 있었다. 즉, 1912년 기록의 '도동1가'와 '동자동'은 당시엔 별개 지역이었다. 이 미묘한 행정 경계의 변화 자체가 이 지역 역사 연구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나라 철도교통의 중심이 된 서울역 —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의 시발역이 바로 이 지역에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철도가 놓이기 전 이 땅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 이전의 층위를 발굴조사로 밝혀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 작업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4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절차 완전 가이드

사사지가 포함된 국유지, 도심 한복판의 역사 밀집 지역 — 이런 조건이 겹치면 문화재 조사는 더욱 꼼꼼한 단계를 밟아야 한다. 지표조사에서 발굴조사까지, 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다시 한번 짚어보자.

1

지표조사 — 기초 진단

문헌 및 현지 답사를 통해 매장유산 가능성 파악. 사업 면적 3만㎡ 이상 시 필수. 완료 후 20일 내 보고서 제출. 도동1가·동자동의 경우 사사지와 임야 기록이 있어 지표조사 단계부터 문헌 심층 검토가 요구된다.

2

표본조사 — 첫 삽

조사 면적의 2% 이내를 표본적으로 굴착해 매장유산의 종류와 분포를 확인. 지자체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며, 국가유산청 허가 없이 시행 가능. 사사지 구역에서 유물 편이 확인될 경우 즉시 시굴조사로 전환.

3

시굴조사 — 범위 파악

조사 면적의 10% 이내를 부분 굴착해 유적 범위와 성격을 규명. 국가유산청 허가 필요. 사사지처럼 유적 가능성이 높은 구역에선 트렌치(탐색갱) 배치 전략이 결과를 좌우한다.

4

정밀발굴조사 — 역사를 꺼내다

확인된 유적 전면을 정밀하게 발굴. 중요 유적 발견 시 사적 지정 가능. 출토 유물은 국보·보물로 등록될 수 있다.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전문 조사기관만 시행 가능.

사사지 조사 시 특별 유의 사항

사사지는 일반 농지나 잡종지와 달리 문화층(文化層)이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다. 사찰 건물의 기단석, 배수로, 석축 등이 지하에 남아 있을 수 있고, 불교 유물의 특성상 금속과 도자기, 목제 유물이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이런 유적은 굴착 장비로 무분별하게 파면 단번에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지층 확인 → 수작업 노출 → 정밀 기록 촬영의 순서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또한 임야 지목 구역에서는 지형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원래의 지형 윤곽이 남아 있는지, 후대에 성토나 절토가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유적 존재 여부 판단의 첫 번째 단계다. 동자동·도동1가처럼 근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를 겪은 지역이라면, 원래 지형과 현재 지형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부터 분석해야 한다.



5

서울 도심 발굴 성공 사례 — 땅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론은 충분히 살펴봤다. 이제 실제 서울 도심에서 발굴조사가 어떤 역사를 되살렸는지, 세 가지 사례를 통해 그 생생한 현장을 들여다보자. 이 사례들은 모두 기초조사 →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의 단계적 과정이 충실히 이행된 결과다.

사례 1 · 서울시 용산구 인근

구 서울역사 복원 과정에서 드러난 근대 유구

1922년 착공, 1925년 완공된 구 경성역사는 지하1층·지상2층의 석재 혼합 벽돌조 건물이다. 2003년 역무 기능이 이전된 뒤 복원 과정에서 기초 지층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역사 건축 이전 시기의 지층과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 사례는 근대 건축물 아래에도 이전 시대의 역사적 층위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의 서울역 주변 지역 발굴에서도 이러한 복층 역사 구조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사례 2 · 서울시 종로구 도심

도심 재개발 현장에서 확인된 조선 전기 관아 유구

서울 도심 재개발 사업 부지의 지표조사에서 조선 전기 관아 건물의 초석과 배수 시설 흔적이 확인된 사례가 있다. 지목상 대지(垈地)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사전 문헌 조사에서 관아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를 토대로 시굴조사 범위를 넓혀 전체 유구를 보존 조치할 수 있었다. 동자동의 대지 2필지처럼 국유 대지에서도 관아 관련 유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사례 3 · 서울시 성북구 사찰 터

사사지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고려·조선 불교 유물

서울 성북구 일대 사사지 시굴조사에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의 청자·백자 파편과 기와편, 그리고 불상 대좌의 연화문 석재가 출토되었다. 이 사례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지표면 위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로지 1912년 토지조사부의 '사사지' 기록만이 단서였다. 기초조사 — 즉, 100년 전 문서를 꼼꼼히 읽는 작업 — 이 결국 유물의 발굴로 이어진 것이다.



세 사례 모두 공통된 메시지를 던진다. 땅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물어봐야 한다. 그 '묻는' 행위가 바로 지표조사이고, 시굴조사이며, 발굴조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1912년처럼 오래된 문서 기록 한 줄을 진지하게 읽는 것에서 시작된다.


6

지금 이 조사가 가지는 의미

서울역 바로 옆. 매일 수십만 명이 오가는 그 땅 아래에 사찰이 있었고, 숲이 있었고, 사람이 살았다. 4필지 11,857㎡라는 작은 기록 안에 조선의 신앙과 생활, 그리고 근대화의 폭풍 전야가 모두 담겨 있다.

이 기초조사 자료가 의미 있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도시 개발이 계속되는 한, 이 기록들이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1912년 토지조사부의 '사사지'라는 두 글자가, 누군가에게는 그냥 낡은 문서의 한 항목이겠지만, 문화재 발굴 전문가에게는 수백 년 역사의 문을 여는 열쇠다.

"기록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제대로 읽지 않을 뿐이다. 1912년의 사사지 기록이 오늘의 발굴 현장을 만들어낸다."

지금 당신이 해야 할 것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부동산 개발과 관련이 있다면, 해당 지역의 지목 이력을 먼저 확인하라. 사사지나 분묘지 기록이 있다면, 지표조사 전문 기관에 먼저 문의하는 것이 결국 시간과 비용 모두를 아끼는 길이다. 조사를 생략했다가 공사 중 유물이 발견되면, 그 순간부터 공사는 전면 중단되고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만약 이 주제가 역사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seoulheritage.org가 정리하고 있는 서울 25개 구의 1912년 국유지 기초조사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길 권한다. 단순한 숫자와 지목 분류 뒤에 숨어 있는 서울의 진짜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역 바로 옆, 그 땅에 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직 땅속에 있다.

4필지 11,857㎡. 이 작은 숫자 안에 사찰의 기도 소리가 있었고, 임야를 걷던 조선 사람의 발소리가 있었다. 철도가 놓이고, 경성역이 생기고, 서울이 바뀌는 동안 그 기억들은 땅속으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한 일은, 그 땅에게 이름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발굴조사는 파괴가 아니라 복원이다. 잊혀진 것들을 기억하는 일이다.

발굴조사 더 알아보기 ↗사사지 조사 방법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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