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송파구 방이동, 그 시절 이야기를 파헤쳐봤어!
- 2025년 4월 12일
- 7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1912년 송파구 방이동872필지 위에 새겨진한강 변 마을의 기억
3,095,200㎡ — 축구장 430개 크기의 땅에 밭과 논과 임야와 무덤이 층층이 쌓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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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송파구 풍납동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포클레인 날에 뭔가 걸려 나왔다. 백제 시대 유물이었다. 그 한 순간이 30년 넘는 발굴의 시작이 됐다. 방이동은 바로 그 풍납동과 맞닿아 있는 땅이다. 1912년 방이동의 흙 속에는 아직 아무도 꺼내지 못한 시간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알게 된다. 왜 방이동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송파구 내 어느 지역보다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 땅인지, 그리고 872필지라는 숫자가 단순한 행정 기록을 넘어서는 이유를.
목 차
872필지 3,095,200㎡ — 방이동이 품은 시간의 규모
밭 49%, 논 31%, 임야 13% — 세 가지 자연이 공존한 땅
무덤 27필지의 무게 — 방이동 사람들이 지킨 것
김씨·이씨·윤씨 — 이름으로 읽는 마을 공동체의 지형도
올림픽공원과 방이동의 역사적 층위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방이동 접근법
성공 사례 — 바로 옆 풍납동이 증명한 것
방이동의 땅은 아직 말을 다 하지 않았다

1872필지 3,095,200㎡ — 방이동이 품은 시간의 규모
1912년 송파구 방이동은 총 872개 필지, 3,095,200㎡의 땅이었다. 이 면적을 축구장으로 환산하면 약 430개를 나란히 붙인 크기다. 앞서 살펴본 동네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종로구 공평동이 33,646㎡, 은평구 불광동이 682,670㎡였던 것과 비교하면 방이동은 불광동의 4.5배, 공평동의 92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다.
이 규모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3백만 제곱미터를 넘는 땅이 1912년에 872개 필지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은 필지당 평균 면적이 약 3,550㎡에 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도심 지역의 작고 촘촘한 필지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다. 방이동은 한강 변의 넓은 충적 평야 지대와 남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지형을 함께 가진 땅으로, 논과 밭, 숲과 마을이 서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배치된 전형적인 한강 변 농촌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방이동이라는 이름에도 역사가 담겨 있다. 방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조선 시대부터 사람들이 방문하고 머무는 공간, 즉 교통과 교류의 거점이었음을 암시하는 설도 있다. 한강 수계를 따라 형성된 물자 유통로와 가까운 위치였던 방이동은 조선 시대 서울 동남부의 생산 기지이자 생활 공간이었다. 그 긴 시간의 퇴적이 지금도 이 땅 아래 층층이 쌓여 있다.
872
총 필지 수
(1912년 기준)
3,095,200㎡
전체 면적
(축구장 약 430개)
밭 471필지
1,525,540㎡
전체의 49.3%
논 262필지
953,951㎡
전체의 30.8%
임야 49필지
415,599㎡
전체의 13.4%
무덤 27필지
57,858㎡
+대지 52·잡종지 11필지
2밭 49%, 논 31%, 임야 13% — 세 가지 자연이 공존한 땅
1912년 방이동 토지 구성 비율
밭 (471필지)49.3% · 1,525,540㎡
논 (262필지)30.8% · 953,951㎡
임야 (49필지)13.4% · 415,599㎡
대지 (52필지)2.6% · 81,940㎡
잡종지 (11필지)2.0% · 60,410㎡
무덤 (27필지)1.9% · 57,858㎡
방이동 토지 구성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밭·논·임야가 삼각 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밭 49.3%, 논 30.8%, 임야 13.4%를 합치면 93.5%다. 대지는 2.6%에 불과하다. 방이동의 공간은 압도적으로 농경과 자연으로 채워져 있었고,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집터는 전체의 극히 일부였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 자연 요소가 공간적으로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지를 상상해 보면 방이동의 경관이 그려진다. 한강 가까운 저지대에는 물을 대기 좋은 논이 펼쳐지고, 그보다 조금 높은 충적 대지에는 밭이 이어졌다. 그리고 동남쪽 구릉 방향으로 올라가면 임야가 시작된다. 대지 52필지의 집들은 이 세 자연 사이 어딘가에 마을 단위로 모여 있었을 것이다.
임야 415,599㎡는 방이동의 생태계와 역사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째, 임야는 나무와 풀이 가득한 자연환경으로 주민들의 땔감과 목재를 공급하는 공간이었다. 둘째, 임야 지역은 무덤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방이동의 무덤 27필지가 임야 구역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지형 분석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그리고 셋째, 방이동의 임야 구역에는 방이동 백제 고분군이라는 역사 유적이 실제로 존재한다. 이것이 방이동을 다른 어떤 지역과도 구별되는 특별한 곳으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이유다.
"밭과 논이 80%를 차지하는 이 땅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았다. 그 리듬의 흔적이 지층 속에 고스란히 눌려 있다."

3무덤 27필지의 무게 — 방이동 사람들이 지킨 것
방이동 토지 구성에서 숫자보다 훨씬 무거운 의미를 가진 항목이 있다. 무덤 27필지 57,858㎡다.
앞서 살펴본 지역들과 비교해 보면 방이동 무덤의 규모가 얼마나 주목할 만한지 분명해진다. 동빙고동의 무덤은 12필지 22,112㎡였고, 불광동은 3필지 6,876㎡였다. 방이동의 27필지 57,858㎡는 이들보다 훨씬 크고 많다. 이것은 방이동이 그만큼 오랫동안, 그만큼 많은 가문이 조상을 모셔온 땅이었다는 뜻이다.
27필지의 묘역이 방이동 전체에 어떻게 분포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당시의 공간 구조가 보인다. 풍수지리 원칙에 따라 배산임수의 구조를 선호했던 조선 시대 묘역은 임야와 맞닿은 구릉 방향에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방이동 백제 고분군이 실제로 구릉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조선 시대 민묘들이 그 주변에 함께 형성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무덤 27필지의 공간적 의미는 단순히 죽은 자의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무덤이 있는 곳에는 벌초와 제사를 위해 주기적으로 사람이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주변에 생활 흔적이 남는다. 제기류, 도자기 파편, 음식 준비 흔적, 때로는 소규모 건물지까지 묘역 주변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무덤 구역은 반드시 별도의 세심한 조사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김씨·이씨·윤씨 — 이름으로 읽는 마을 공동체의 지형도

1912년 방이동에서 가장 많은 필지를 소유했던 성씨는 김씨로 177필지였다. 이어서 이씨 138필지, 윤씨 70필지, 최씨 47필지, 구씨 35필지, 박씨 31필지, 심씨 27필지, 조씨 21필지 순이었다. 그 외에도 강씨, 홍씨, 전씨, 서씨, 양씨, 허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방이동에서 저마다의 삶을 일궈 갔다.
김씨 177필지와 이씨 138필지를 합치면 315필지로 전체 872필지의 36.1%에 달한다. 두 성씨가 방이동 토지의 3분의 1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방이동의 성씨 분포가 앞서 살펴본 공평동이나 동빙고동과 다른 점이 있다. 방이동은 상위 성씨들이 비교적 고르게 분산되어 있다. 김씨 177필지는 전체의 20.3%인데, 동빙고동 김씨가 전체의 22.4%를 차지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방이동은 이씨 138필지, 윤씨 70필지처럼 2위, 3위의 비중도 상당하다.
특히 윤씨 70필지는 눈여겨볼 만하다. 상대적으로 드문 성씨인 윤씨가 3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윤씨 가문이 방이동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토착 세력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이런 토착 성씨 정보는 특정 구역에서 어떤 시기, 어떤 계층의 유물이 나올 수 있는지를 예측하는 데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된다.
순위 | 성씨 | 필지 수 | 전체 대비 |
1위 | 김씨 | 177필지 | 20.3% |
2위 | 이씨 | 138필지 | 15.8% |
3위 | 윤씨 | 70필지 | 8.0% |
4위 | 최씨 | 47필지 | 5.4% |
5위 | 구씨 | 35필지 | 4.0% |
6위 | 박씨 | 31필지 | 3.6% |
7위 | 심씨 | 27필지 | 3.1% |
8위 | 조씨 | 21필지 | 2.4% |
강·홍·전·서·양·허씨 등 | 다수 | 37.4% | |
5올림픽공원과 방이동의 역사적 층위
방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방이동 백제 고분군이다.
현재 올림픽공원 내에 위치한 방이동 백제 고분군은 삼국 시대 백제의 무덤들로, 이미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유적이다. 방형, 원형의 분구가 현재도 지표 위에서 관찰될 만큼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이 고분군의 존재는 방이동이 삼국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고 의례를 치르던 공간이었음을 직접적으로 증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군 바깥 구역, 즉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나머지 872필지의 땅은 어떤가. 삼국 시대 취락과 무덤이 형성되던 공간은 단일 지점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고분군 인근의 논밭 지역에서 삼국 시대 생활유구나 부장 유물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방이동의 넓은 논밭 지역이 삼국 시대에는 어떤 공간이었을지, 조선 시대에는 어떤 생활이 펼쳐졌을지. 이 두 시간대의 층위가 함께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방이동을 송파구 내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문화재 발굴 지역으로 만드는 핵심 이유다.
주의: 방이동 백제 고분군 사적 지정 구역 및 그 인접 지역에서는 어떠한 개발·공사 행위도 사전에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적 지정 구역 경계 바깥이라도 매장문화재 매장 가능성이 있는 경우 문화재 지표조사가 의무화된다. 방이동 내 개발 예정지는 반드시 이 기준을 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6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방이동 접근법
방이동처럼 삼국 시대 고분군이 이미 확인된 지역에서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성격이 다른 지역과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역사적 맥락을 기반으로 그 범위와 밀도를 정밀하게 확인하는 작업이 된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방이동 접근의 출발점은 방이동 백제 고분군의 공간 범위를 1912년 필지 경계와 정확하게 대조하는 것이다. 사적 지정 구역이 어느 필지들과 겹치는지, 그 경계 바깥의 어느 필지에서 고분군과 연결되는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분석한다. 논과 밭이었던 구역에서 삼국 시대 취락 흔적이 확인된다면, 방이동의 역사 지도는 지금보다 훨씬 넓어질 수 있다.
시굴조사 단계에서는 고분군 인접 구역부터 우선 표본 트렌치를 설정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방이동의 광대한 면적 전체를 조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1912년 토지조사부의 필지 구성, 성씨 분포, 무덤 27필지의 위치 데이터를 활용해 조사 우선 구역을 선별하면 보다 정밀한 표본 설계가 가능하다.
발굴조사 단계에서 방이동은 단일 시기가 아닌 다층 문화층 조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국 시대 층위와 고려·조선 시대 층위, 그리고 1912년 기록에 반영된 근대 초기 층위가 함께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다층 구조 지역에서는 층위별 기록과 유물 분류가 더욱 세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한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의 역량이 결과의 질을 결정한다.
방이동 문화재 조사 핵심 체크포인트
방이동 백제 고분군 사적 지정 구역 여부 확인 → 인접 구역 지표조사 실시 → 고분군 반경 내 시굴조사 우선 설계 → 다층 문화층 발굴조사 계획 수립. 방이동은 삼국 시대·조선 시대·근대의 세 시간대가 겹치는 곳이다. 어느 한 시기만 보아서는 이 땅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7성공 사례 — 바로 옆 풍납동이 증명한 것

방이동의 발굴 가능성이 어느 수준인지 가장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례가 바로 인접한 풍납동의 이야기다.
1997년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한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포클레인 날에 백제 시대 유물이 걸려 나왔다. 그때까지 풍납동 일대는 아파트와 주거지가 빽빽이 들어선 평범한 서울 동네였다. 아무도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 우연한 발견이 30년 가까운 발굴의 문을 열었고, 풍납토성이라는 이름으로 백제의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대규모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사이트의 풍납동 분석에 따르면, 1912년 풍납동의 토지 기록에는 353필지 1,648,172㎡의 광활한 논밭과 임야가 기록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던 그 넓은 땅 아래에서 백제의 시간이 올라온 것이다. 방이동은 풍납동과 행정구역 경계를 맞대고 있는 인접 지역이다. 방이동에서도 백제 고분군이 이미 확인되어 있다. 풍납동이 보여 준 교훈은 아주 단순하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땅이 가장 많은 것을 품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방이동에서 개발이나 공사가 이루어질 때 문화재 지표조사를 건너뛰는 것은 1997년 이전의 풍납동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사전 조사를 통해 유물이 확인되면 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고, 그 결과는 방이동의 역사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기여가 된다. 반대로 사전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어 유물이 손상되면, 그것은 영원히 복원할 수 없는 기억의 상실이다.
성공 사례 · Success Case
풍납토성 발굴 —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 왕성이 나왔다
1997년 송파구 풍납동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백제 유물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풍납토성 발굴은 서울의 역사를 새로 쓴 사건이었다. 토성 내부에서 백제 시대의 건물지, 제사 유구, 우물, 각종 토기류가 쏟아져 나왔고, 이 일대가 백제 한성기의 핵심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12년 논밭으로 기록되었던 그 땅 아래에서 백제의 시간이 올라온 것이다. 방이동은 이 풍납동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8방이동의 땅은 아직 말을 다 하지 않았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방이동의 이야기를 이렇게 맺고 싶다.
1912년 방이동의 872필지 위에서 김씨와 이씨와 윤씨와 최씨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밭을 갈고 논에 물을 댔다. 임야에서 나무를 해 왔고, 무덤 앞에서 조상을 기렸다. 아이들은 밭 사이로 난 길을 뛰어다녔을 것이고, 어른들은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이면 마을 어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지금 방이동의 아파트 단지와 올림픽공원 아래 어딘가에 고스란히 눌려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더 내려가면, 1912년보다 훨씬 더 오래전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방이동 백제 고분군의 분구들이 지금도 올림픽공원 안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듯이, 그 주변 어딘가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백제의 흔적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삼국 시대와 조선 시대와 근대 초기가 층층이 쌓인 이 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의 시간을 지키는 행위다.
지금 방이동 어딘가에서 삽 하나가 흙을 파고드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얼마나 많은 것을 되찾을 수도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872필지의 땅은 아직 말을 다 하지 않았다.
송파구 방이동 또는 인근 지역에서 개발·재건축·공사를 계획하고 있다면, 착공 전 방이동 백제 고분군 사적 지정 구역 확인과 문화재 지표조사 의무 여부를 반드시 먼저 검토하세요. 풍납토성 사례에서 보듯, 사전 조사 없이 진행된 공사가 되돌릴 수 없는 유물 손실로 이어진 선례가 있습니다.
관련 정보는 국가유산청(khs.go.kr)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 비용·일정·법적 절차 FAQ도 seoulheritage.org에 있습니다.
문화재발굴문화재지표조사서울문화유산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기관방이동송파구1912년토지조사부매장문화재풍납토성백제고분군올림픽공원삼국시대서울역사
872필지의 땅 아래에는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시간이 있다.
밭을 갈던 사람들의 흔적과, 백제의 왕이 쉬었을지도 모를 무덤의 흔적이 같은 땅에 층층이 잠들어 있다. 그것을 꺼내는 것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기억을 지키는 일이다. 방이동의 땅은 오늘도 당신이 귀를 기울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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