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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장지동, 지금은 아파트 숲이지만 1912년에는 논밭이 끝없이 펼쳐졌던 고요한 농촌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 2025년 7월 1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1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기관청동기시대 유적송파구 역사장지동 과거

지금 아파트 단지 아래 청동기시대 집터가 있었다— 송파구 장지동 1912년, 그리고 발굴이 증명한 것

652필지 2,633,188㎡의 광활한 농경 공동체 — 김씨 226필지의 뿌리, 동척 43필지의 그림자, 그리고 택지개발 부지에서 나온 청동기시대 집터의 충격적인 이야기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seoulheritage.org·읽는 시간 약 14분

"2003년, 장지동 택지개발 부지에서


지표조사가 진행되었다.


2004년, 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집터가 나왔다.


지금 그 자리에 아파트가 서있다.


1912년의 기록은 그 땅이 얼마나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송파구 장지동. 지금은 헬리오시티와 위례 신도시 사이, 아파트 단지가 빽빽하게 들어선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652필지, 2,633,188㎡. 논과 밭이 87% 이상을 차지하는 순수한 농경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 땅 아래에는 1912년보다 훨씬 오래된 시간이 잠들어 있었다. 청동기시대 집터가 그 증거다.

이 글은 장지동 1912년 토지 기록을 들춰가며, 이 동네가 얼마나 깊은 역사 층위를 가진 땅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2003년 지표조사와 2004년 시굴조사가 그 층위를 어떻게 꺼냈는지를 함께 이야기한다.


목차 — 이 글의 흐름

1. 장지동, 아파트 이전의 풍경

2. 논 320필지, 밭 332필지 — 87%가 농경지였던 마을

3. 임야 46필지와 분묘 13필지 — 자연과 삶의 끝자락

4. 집터 35필지 — 논밭 사이 드문드문 박힌 삶

5. 김씨 226필지 — 이 마을의 절대적 중심 가문

6. 동척 43필지 — 순수한 농촌 마을도 피할 수 없었다

7. 송파구 땅의 절반이 매장문화재 유존지역인 이유

8. 2003년 지표조사, 2004년 청동기시대 집터의 발견

9.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 순서가 전부다

10. 장지동 땅의 기억을 지켜야 할 이유


1. 장지동, 아파트 이전의 풍경

장지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동네가 조선시대부터 서울 외곽의 조용한 농촌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탄천이 흐르고, 남쪽으로 산이 이어지며, 평탄한 들판에 논과 밭이 펼쳐진 전형적인 한강 남쪽 마을이었다.

1912년의 장지동은 총 652필지, 2,633,188㎡의 광활한 땅이었다. 축구장 약 368개를 합친 면적이다. 지금 장지동에는 헬리오시티 같은 대단지 아파트와 위례 신도시 인근 주거 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이 광활한 농경지가 대규모 주거지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생각하면, 그 아래 남겨진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도 짐작된다. 청동기시대 집터가 아파트 부지 아래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652필지

총 필지 수

2,633,188㎡

총 면적

320필지

332필지

226필지

김씨 소유

43필지

동척 소유



2. 논 320필지, 밭 332필지 — 87%가 농경지였던 마을

논 320필지, 1,227,734㎡. 밭 332필지, 1,058,589㎡. 이 둘을 합치면 2,286,323㎡로, 전체 면적 2,633,188㎡의 87%에 달한다. 장지동은 서울에서도 손꼽힐 만한 순수 농경 마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필지 수에서 밭(332)이 논(320)보다 약간 많지만, 면적에서는 논(1,227,734㎡)이 밭(1,058,589㎡)보다 크다는 점이다. 논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이 3,837㎡, 밭 한 필지가 3,189㎡로, 상대적으로 논이 더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탄천 주변의 비옥하고 평탄한 저지대에 넓은 논이, 구릉지에 밭이 촘촘히 자리한 지형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 논과 밭이 지금은 어디 있을까. 2003년 지표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장지동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지표조사 결과 두 곳의 유물산포지가 확인되었고, 이후 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집터가 나왔다. 논과 밭 아래, 훨씬 더 오래된 시간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332필지 / 1,058,589㎡ / 40%

320필지 / 1,227,734㎡ / 47%

임야

46필지 / 280,378㎡ / 11%

대지

35필지 / 43,791㎡

분묘지

13필지

잡종지

3필지



3. 임야 46필지와 분묘 13필지 — 자연과 삶의 끝자락

임야 46필지, 280,378㎡. 전체 면적의 11%가 산이었다. 탄천과 연결되는 낮은 구릉지에 숲이 형성되어 있었고, 지금의 장지공원 인근 녹지도 그 흔적 중 하나다. 이 임야 구역이 문화재 조사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장지동 청동기시대 집터 발굴 구역이 바로 낮은 구릉의 서쪽 경사면이었기 때문이다. 임야와 구릉 사이, 그 경사면에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집이 있었다.

분묘지 13필지, 12,009㎡. 1912년 장지동에는 13개의 무덤 구역이 있었다. 선산처럼 마을 뒷산에 무덤들이 자리했고, 제사철마다 가족들이 모여 조상에게 절을 올렸을 것이다. 분묘 구역은 부장품과 묘비 석재가 발굴될 수 있는 중요한 조사 대상이다.

"임야 구릉 서쪽 경사면.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집을 지었고,


조선시대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었으며,


1912년 사람들이 논을 갈았다.


같은 땅, 수천 년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4. 집터 35필지 — 논밭 사이 드문드문 박힌 삶

대지 35필지, 43,791㎡. 652필지 중 35필지만이 집터였다. 5.4%에 불과하다. 나머지 94.6%는 논과 밭, 산, 무덤이었다. 장지동은 집보다 자연이 압도적으로 많은 공간이었다.

35채의 집들이 논밭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했을 것이다. 저녁이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가을 추수가 끝난 들판에 황금빛 여운이 남아있는 그 풍경. 지금 헬리오시티 아파트 어딘가 아래에 그 집터의 기단석이 아직 남아있을 수 있다.


5. 김씨 226필지 — 이 마을의 절대적 중심 가문

장지동 토지 소유자 중 김씨가 226필지로 압도적 1위였다. 전체 652필지의 34.7%를 김씨 단일 가문이 차지하고 있었다. 뒤를 이어 전씨 57필지, 이씨 55필지, 강씨 48필지 순이었다.

김씨 226필지. 이 숫자는 서울의 다른 동네와 비교해도 놀랍다. 마포구 신수동 김씨 85필지, 성산동 김씨 134필지. 장지동의 226필지는 그보다 훨씬 크다. 김씨 가문이 장지동의 세 곳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건, 이 가문이 마을 공동체의 핵심 그 자체였다는 뜻이다.

전씨, 이씨, 강씨의 분포도 의미 있다. 특히 전씨 57필지는 장지동에서 두 번째로 많은 필지다. 전씨 가문과 김씨 가문이 집중된 구역이 어디인지가 발굴 방향 설정의 핵심 단서가 된다. 특정 가문이 집중된 구역에서 종중 관련 유구나 가문 공동 시설 흔적이 발굴될 가능성이 높다.

김씨

226필지


전체의 35%

전씨

57필지

이씨

55필지

강씨

48필지

동척

43필지


식민 수탈 기관

국유지

4필지


일본인 4필지


6. 동척 43필지 — 순수한 농촌 마을도 피할 수 없었다

김씨 226필지가 장지동의 얼굴이라면, 동척 43필지는 장지동의 상처다. 전체 652필지 중 43필지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였다. 조용한 농촌 마을도 식민 지배의 손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43필지는 적지 않은 숫자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여러 동네와 비교하면 성산동 43필지, 진관외동 19필지, 진관동 20필지보다 크거나 같은 규모다. 장지동 전체의 6.6%가 동척 소유였다는 건, 이 마을의 농경지 일부가 조선인 농부들의 손을 떠나 식민 기관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동척 43필지 — 장지동 농경지 수탈의 규모

동척이 소유한 43필지는 대부분 장지동의 비옥한 논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척은 수탈한 농경지를 일본인 소작 농가에 배분하거나 직영 경작을 통해 조선 농업 자원을 착취했다. 국유지 4필지와 일본인 개인 소유 4필지를 합치면 총 51필지, 전체의 8%가 조선인 개인이 아닌 외부 세력의 손에 있었다.



7. 송파구 땅의 절반이 매장문화재 유존지역인 이유

2022년 발표된 '서울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보존방안(송파·강동·성저십리 확대지역)' 보고서에 따르면 송파구 전체 면적(33.99㎢)의 49.7%, 즉 절반에 가까운 땅이 매장문화재 유존지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장지동을 포함한 송파구 일대에서 시굴조사가 필요한 지역이 구 면적의 7.1%, 표본조사가 필요한 지역이 42.6%에 달한다.

송파구 매장문화재 현황 — 서울에서 가장 문화재 밀도가 높은 지역

송파구는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던 몽촌토성·풍납토성이 있고, 삼국시대 고분군이 집중된 곳이다. 서울 25개 자치구 중 매장문화재 유존지역 비율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장지동을 포함한 송파구에서 재건축이나 개발이 이루어질 때 사전 지표조사가 더욱 엄격하게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장지동의 87% 농경지, 청동기시대 집터 발굴 사례, 그리고 송파구 전체의 49.7% 매장문화재 유존 비율.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장지동이 왜 문화재 지표조사가 가장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지역 중 하나인지가 명확해진다.


8. 2003년 지표조사, 2004년 청동기시대 집터의 발견

장지동의 역사 발굴 과정은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다른 동네들과 결이 다르다. 실제로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의 전 과정이 완료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2003년, 장지동 택지개발지구에서 중앙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두 곳의 유물산포지가 확인되었다. 2004년 12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유물산포지1에서 청동기시대 집터와 수혈유구가 확인되었고, 유물산포지2에서 조선시대 수혈유구가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집터.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에서 3,000년 전 사람들이 이 장지동 구릉 경사면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증거다. 이 발견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다. 지표조사가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절차가 없었다면 택지개발 공사 중에 이 집터는 영원히 파괴되었을 것이다.

장지동 청동기시대 집터 — 발굴의 타임라인

2003

지표조사 실시


유물산포지 2개 확인

2004~05

시굴조사 진행


청동기시대 집터 발견

2,500~

집터의 추정 연대


(년 전)

발굴 구역은 장지동 산25번지 일대 해발 50m 낮은 구릉의 서쪽 경사면이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함께 조선시대 유구도 같은 구역에서 확인되어, 이 땅이 수천 년에 걸쳐 사람이 살아온 공간임이 실물로 증명되었다.



9.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 순서가 전부다

장지동 청동기시대 집터 발견은 이 순서가 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표조사 없이 택지개발 공사가 바로 시작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터는 포클레인 날에 부서진 채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STEP 1

지표조사

문헌·현장


비파괴 분석

STEP 2

표본조사

2% 이내


탐색 발굴

STEP 3

시굴조사

10~20%


예비 발굴

STEP 4

정밀 발굴

면 단위


전면 기록

STEP 5

보존·전시

보고서·교육


문화 활용

송파구 땅의 절반이 매장문화재 유존지역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장지동 일대에서 앞으로 이루어질 재건축이나 재개발에서 이 절차를 더욱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2022년 보고서에서 시굴조사가 필요한 지역으로 분류된 구역들은 반드시 사전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지동 청동기시대 집터처럼 운 좋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청동기시대 집터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성공 사례 01

잠실진주아파트 재건축 — 백제 주거지가 공원이 됐다

장지동과 같은 송파구 잠실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23m 길이의 육각형 백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발굴조사를 거쳐 해당 유구 밀집 지역이 아파트 단지 내 공원 부지로 보존될 예정이다. 재건축 사업이 중단되지 않고 유적도 보존하는 방식으로 조율된 것은 체계적인 발굴조사 덕분이었다. 장지동의 청동기시대 집터와 같은 맥락의 성공 사례다.

성공 사례 02

풍납토성 발굴 — 지표조사가 선행했을 때의 차이

1997년 풍납동 아파트 공사에서 포클레인 날에 백제 유물이 걸려 나온 사례는 지표조사가 없었을 때의 손실을 보여준다. 그 충격적인 사건 이후 풍납동 일대에 체계적인 지표조사 체계가 구축되었다. 장지동 청동기시대 집터 발굴(2003~2005)은 바로 그 교훈이 제대로 적용된 사례다.

성공 사례 03

장지동 인근 — 조선 후기 생활 흔적의 귀환

장지동 인근 개발 과정에서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 후기 생활 흔적이 확인된 사례가 있다. 도자기 파편과 옛 도로 흔적이 복원되었고, 서울 역사 교육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1912년의 논밭 아래 조선시대 생활 유구가 남아있었다는 이 발견은, 장지동 땅의 역사 층위가 얼마나 두터운지를 증명한다.



10. 장지동 땅의 기억을 지켜야 할 이유

장지동은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다른 동네들과 다른 점이 있다.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전 과정이 실제로 이루어졌고, 청동기시대 집터라는 구체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하나다. 조사를 하면 반드시 무언가가 나온다.

1912년 장지동의 652필지, 그 논밭 아래에 조선시대 유구가 있고, 그 아래 더 깊은 곳에 청동기시대 집터가 있었다. 이런 땅에서 재건축이나 재개발이 이루어질 때마다 이 절차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에 지표조사를 의뢰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1912년의 기록이 타임캡슐이라면, 그 캡슐을 여는 열쇠는 지표조사다. 장지동의 청동기시대 집터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어딘가에서 발굴을 기다리는 역사의 조각들이 있다.



장지동 아파트 단지 어딘가 아래에


2,500년 전 누군가가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1912년에는 그 위에서 논을 갈았고,


지금은 그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같은 땅 위에 쌓여 있습니다.


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역사는 살아남습니다.



지표조사가 그 기억의 시작입니다.


그 시작을 만드는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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