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송파구 풍납동, 그 시간 속 첫 문장
- 2025년 7월 26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1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기관풍납토성백제 문화유산송파구 역사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가 나왔다— 풍납동 1912년 기록이 말해주는 것
353필지 1,648,172㎡의 광활한 땅, 거기서 시작된 이야기 — 풍납토성 발굴과 문화재 지표조사가 어떻게 역사를 되살리는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읽는 시간 약 14분
"1997년, 풍납동 아파트 공사 현장의 포클레인 날에
백제 시대 유물이 걸려 나왔다.
그 한 순간이 30년 넘는 발굴의 시작이 됐다.
그리고 1912년의 기록은
그 땅이 얼마나 오랫동안 무언가를 품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 한강 바로 옆, 지금은 아파트와 서울아산병원이 들어선 이 동네에 1912년에는 353필지, 1,648,172㎡의 광활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논과 밭, 울창한 임야, 그리고 김씨와 이씨 가문이 일군 삶의 공간. 그리고 그 모든 것 아래에는, 아직 아무도 몰랐던 백제의 시간이 잠들어 있었다.
이 글은 풍납동 1912년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며, 문화재 지표조사가 왜 이 땅에서 특히 중요한지, 그리고 풍납토성 발굴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줬는지를 이야기한다. 서울에서 가장 극적인 문화재 발굴 이야기 중 하나가 여기서 시작된다.
목차 — 이 글의 흐름
1. 풍납동, 바람이 들어오던 마을의 1912년
2. 291필지의 밭 — 한강 옆 거대한 농경 공동체
3. 47필지 임야 — 숲이 마을을 감싸던 시절
4. 국유지 29필지와 마을 공동 소유 3필지의 의미
5. 김씨 82필지, 이씨 66필지 — 이 마을의 중심 가문들
6. 그리고 1997년, 포클레인이 백제를 깨웠다
7. 문화재 지표조사 — 풍납동처럼 발굴이 시작되는 방법
8.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그 순서의 의미
9. 풍납동이 증명한 것들 — 성공 사례로 보는 지표조사의 힘
10. 지금 당신의 땅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1. 풍납동, 바람이 들어오던 마을의 1912년
풍납(風納)이라는 이름은 '바람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을에 풍납리 토성, 즉 '바람드리 성'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12년, 이 이름을 가진 동네는 한강 바로 옆에 자리한 광활한 농경 마을이었다. 353필지, 1,648,172㎡. 축구장 약 230개를 합친 면적이다.
지금의 풍납동을 걸으면 토성의 흔적이 높은 언덕처럼 동네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1912년에도,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도, 이 토성은 그냥 마을을 감싼 언덕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1912년의 토지 기록에도 그것은 그냥 임야나 밭으로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무지가 얼마나 큰 손실로 이어질 뻔했는지를 우리는 1997년에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이후 30년간의 발굴이 풍납동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353필지
총 필지 수
1,648,172㎡
총 면적
291필지
밭
47필지
임야
29필지
국유지
15필지
대지(주거지)

2. 291필지의 밭 — 한강 옆 거대한 농경 공동체
밭이 291필지, 1,276,587㎡. 전체 면적의 약 77%가 밭이었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풍납동 전체가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밭농사 공동체였다는 뜻이다. 한강 바로 옆의 넓은 평지, 한강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이용한 비옥한 토양. 이 자연 조건이 풍납동을 최적의 농경지로 만들었다.
논은 왜 적었을까. 사실 한강 바로 옆 저지대는 홍수 위험이 있어 논보다 밭이 더 안전했다. 실제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동 일대가 크게 침수된 기록이 있다. 밭 위주의 농경 구성은 이런 자연환경에 대한 조상들의 지혜로운 대응이었다.
291필지의 밭. 봄마다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잡초를 뽑고, 가을에는 수확의 기쁨을 나눴을 그 공간들. 그 땅 아래에, 밭두렁 사이사이에, 백제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그 층위를 읽는 작업이다.
밭
291필지 / 1,276,587㎡ / 77%
임야
47필지 / 332,976㎡ / 20%
국유지
29필지
대지
15필지
공동소유
3필지

3. 47필지 임야 — 숲이 마을을 감싸던 시절
임야 47필지, 332,976㎡. 전체 면적의 약 20%가 산과 숲이었다. 지금의 풍납동에서 이만한 규모의 산림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1912년에는 이 임야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임야의 상당 부분은 풍납토성의 성벽과 겹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풍납토성은 당시 사람들 눈에 그냥 높은 언덕처럼 보였다. 성벽은 풀과 나무로 덮여있었고, 그 위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생겼다. 임야로 기록된 47필지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사실 이 토성의 성벽이었는지, 그 답은 발굴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임야 구역에서는 지표조사가 특히 중요하다. 나무 뿌리와 낙엽층 아래에 토기 편이나 건물지 흔적이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풍납동의 임야가 실제로 어떤 비밀을 품고 있었는지는, 1997년 이후 본격화된 발굴이 증명했다.
4. 국유지 29필지와 마을 공동 소유 3필지의 의미
국유지 29필지. 당시 국가가 직접 소유하고 관리하던 땅이 적지 않았다. 한강 옆이라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국가가 관리해야 할 토지가 많았을 것이다. 수리 시설, 제방, 도로와 관련된 국유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공공 인프라의 흔적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조사 대상이다.
마을 공동 소유 3필지. 개인이 아닌 마을 전체가 함께 소유하고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우물, 마당, 마을 공동 작업장 같은 용도였을 것이다. 이런 공동 공간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의 흔적이 겹쳐 있을 수 있다. 발굴 관점에서 공동체의 생활 유구를 찾는 최적의 구역이다.
"국유지와 공동 소유지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관리한 땅이었다.
그 땅에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마을 전체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5. 김씨 82필지, 이씨 66필지 — 이 마을의 중심 가문들
풍납동 토지 대장의 소유자 분포. 김씨가 82필지로 가장 많았고, 이씨 66필지, 심씨 16필지, 박씨 10필지 순이었다. 네 성씨가 이 광활한 마을의 토지를 주도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김씨와 이씨의 필지 합산이 148필지. 전체 353필지의 약 42%를 두 성씨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집중된 구역에는 두 가문의 생활 흔적, 종중 관련 유구, 혹은 가문 공동 시설의 잔재가 남아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더 깊은 층에는, 이 가문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백제 시대의 흔적이 있었다.
김씨
82필지
최다 소유
이씨
66필지
심씨
16필지
박씨
10필지
국유지
29필지
공공 관리
공동 소유
3필지
마을 공동체

6. 그리고 1997년, 포클레인이 백제를 깨웠다
1997년, 풍납동 아파트 공사 현장.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포클레인 날에 무언가가 걸렸다. 백제 시대 유물이었다. 그 발견이 모든 것을 바꿨다. 공사는 중단됐고, 긴급 발굴조사단이 구성됐다. 주거지 19기와 3중환호가 확인되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1999년에는 동성벽 단면 절개조사가 이루어졌다. 경당지구 발굴에서는 백제 각 지역에서 올라온 토기들과 중국에서 만들어진 토기들이 다량 발굴되었다. 제사 유적, 제사 후 폐기된 도구들, 기와, 유리구슬 조각, 제물로 보이는 12마리의 말머리. 이 발굴은 풍납토성이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백제 왕도의 핵심 시설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지금도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풍납동 땅은 조금씩 말을 하고 있다. 1912년의 밭과 임야 아래, 조선시대 주거지 아래, 그리고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백제가 있었다.
풍납토성, 현재 진행형인 발굴
풍납동 일대는 국가유산 '서울 풍납동 토성'이 자리한 곳으로, 지난 30여 년간 발굴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대지 면적 792㎡가 넘는 정비사업 시행 시 문화재 발굴조사가 의무화되어 있으며, 송파구는 풍납토성특별법에 따라 소규모 정비사업의 발굴 비용 전액을 지원하고 있다. 지금도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가 새 부지 발굴을 준비 중이다.
7. 문화재 지표조사 — 풍납동처럼 발굴이 시작되는 방법
풍납동 발굴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다. 지표조사가 먼저 이루어졌다면, 1997년의 그 충격적인 발견은 훨씬 더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포클레인이 유물을 파손한 뒤에야 발굴이 시작된 것은 우리 모두의 손실이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이 품고 있을 가능성을 먼저 파악하는 작업이다. 문헌 분석, 옛 지도 검토, 지형 관찰, 현장 답사를 통해 이 구역에서 어떤 유적이 나올 수 있는지를 예측한다. 1912년 토지 대장처럼 당시 지목과 소유 정보가 있다면 그것이 예측의 핵심 단서가 된다.
풍납동 같은 곳에서 지표조사가 사전에 이루어졌다면, 어느 구역에 백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 구역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발굴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바로 그 교훈을 바탕으로 풍납동 일대 모든 개발에 사전 발굴조사가 의무화되어 있다.

8.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그 순서의 의미
풍납동이 보여준 것처럼, 발굴은 순서를 지킬 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순서의 시작은 항상 지표조사다.
STEP 1
지표조사
기록·현장 분석
비파괴 방식
STEP 2
표본조사
면적 2% 이내
탐색 발굴
STEP 3
시굴조사
10~20% 범위
예비 발굴
STEP 4
정밀 발굴
면 단위 전면
발굴·기록
풍납동에서 배운 교훈은 이 순서가 비용이나 시간을 아끼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번 파괴된 유적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1997년 포클레인이 건드린 유물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영원히 손상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손실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순서를 지키는 것이다.
풍납동은 이제 대지 792㎡ 이상의 모든 정비사업에 발굴조사가 의무화된 곳이 됐다. 이 의무가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생각하면, 다른 지역에서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9. 풍납동이 증명한 것들 — 성공 사례로 보는 지표조사의 힘
성공 사례 01
풍납토성 경당지구 — 백제 왕도의 증거가 나왔다
한신대학교 박물관이 발굴한 경당지구에서는 백제 각 지역에서 올라온 토기들과 중국제 토기, 제사 유적, 12마리의 말머리 제물 등이 출토되었다. 이 발견은 풍납토성이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백제 왕도의 핵심 공간이었을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물로 증명했다. 지표조사와 체계적인 발굴 절차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성과였다.
성공 사례 02
종로구 인사동 — 금속활자, 땅에서 살아 돌아오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7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16세기 층에서 한글·한자 혼용 금속활자와 일성정시의가 출토되었다. 풍납동의 교훈을 바탕으로 절차를 지킨 결과,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조선 전기 인쇄 기술이 실물로 확인된 역사적 발견이 가능했다.
성공 사례 03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 — 백제 주거지가 공원으로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풍납토성에서 조사된 것보다 더 큰 규모인 23m 길이의 육각형 백제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유구 밀집 지역이 아파트 단지 내 공원부지로 이전 보존될 예정이다. 재건축 사업이 중단되지 않고 유적도 보존하는 방식으로 조율된 것은 체계적인 발굴조사 덕분이었다.

10. 지금 당신의 땅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풍납동의 이야기는 서울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백제 시대 유물이 아닐 수도 있다. 조선 후기 주거지일 수도 있고, 고려 시대 우물일 수도 있고, 일제강점기의 역사 흔적일 수도 있다. 서울의 땅은 수천 년의 역사를 층층이 쌓아놓은 공간이다.
서울에서 개발이나 건축을 계획하고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를 먼저 의뢰하는 것이 법적 의무일 뿐만 아니라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발굴 비용이 걱정된다면, 풍납동처럼 지자체에서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는지 먼저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에 의뢰하면 지표조사부터 보고서 작성, 인허가 절차까지 전 과정을 지원받을 수 있다.
1912년의 기록이 말해주는 것. 풍납동 353필지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발밑에 백제가 있다는 걸 몰랐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풍납동 문화재 발굴조사 비용 지원 현황
1,000㎡ 기준 발굴조사 비용
약 1억 5천만 원
1만㎡ 기준 발굴조사 비용
약 6억 원 이상
송파구 지원 대상
소규모 정비사업 전액 지원
의무 조사 기준
대지 792㎡ 이상 정비사업

1997년, 포클레인 날에 걸려 나온 그 도자기 조각 하나가
풍납동의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그 이전에 지표조사가 있었다면
더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다른 동네에서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 첫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의뢰
풍납동을 포함한 서울 전 지역 — 지표조사부터 발굴, 보고서 작성, 인허가 절차까지 전 과정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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