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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송파구 거여동 임야 3,008㎡가 품은 2천 년

  • 4시간 전
  • 7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전문 리포트

백제 왕도 한성의 숲 —


1912년 송파구 거여동 임야 3,008㎡가 품은 2천 년

서울시 송파구 거여동 · 2필지 3,008㎡ · 임야 100% · 시굴조사·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분석

이 숲 아래에 백제가 있다.

송파구 거여동. 지하철 5호선 거여역 주변, 지금은 아파트와 도로로 가득한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숲이었다. 임야(林野) 2필지 3,008㎡. 그런데 이 숲이 그냥 숲이 아니다. 거여동이 속한 송파구 일대는 기원전 18년 백제가 위례성을 세우고 493년간 수도로 삼은 바로 그 땅이다.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 그 모든 역사 유적의 배후지가 거여동이다. 1912년의 임야 기록은, 백제 왕도 한성의 마지막 자연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증거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그 땅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목차

11912년 거여동 국유지 — 임야 100%가 던지는 질문

2임야 지목이 왜 중요한가 — 숲이 품은 유산

3거여동의 역사 — 백제 한성에서 조선 주막까지

4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절차 안내

5송파구 발굴 성공 사례 — 땅이 백제를 돌려줬다

6거여동 임야가 지금 우리에게 남긴 것



1

1912년 거여동 국유지 — 임야 100%가 던지는 질문

이 시리즈를 통해 여러 지역의 국유지를 살펴봤다. 도림동에는 논·밭·임야·잡종지·철도용지·분묘지가 있었고, 동자동에는 대지·사사지·임야가, 구산동에는 대지·밭이, 견지동에는 대지만 있었다. 거여동은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2필지 3,008㎡ — 전체가 임야(林野)다. 100%.

임야 2필지 3,008㎡ — 전체가 숲

논도, 밭도, 대지도 없다. 오직 임야. 1912년 거여동의 국유 임야는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림 상태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백제 한성 도읍지의 배후 구릉지에 형성된 이 숲은, 문화재 매장 가능성이 다른 어떤 지목보다 높은 유형의 땅이다.

임야라는 지목 하나가 이렇게까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개발되지 않은 임야는 지층이 교란되지 않은 채로 수백, 수천 년의 문화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도심 대지가 건물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지층이 뒤섞이는 것과 달리, 임야는 인위적인 교란이 훨씬 적다. 거여동의 국유 임야는 그 점에서 문화재 발굴조사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손댄 적 없는' 땅일 수 있다.

총 필지 수

2필지

임야 전체

총 면적

3,008㎡

약 910평

지목 구성

임야 100%

단일 지목

행정 위치

송파구 거여동

1912년 경기도 광주군

역사적 맥락

백제 한성 배후지

위례성 권역 내

지층 보존성

매우 높음

임야 교란 최소

주변 유산

풍납·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인근

또 하나 짚어볼 것이 있다. 1912년 당시 거여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지금의 송파구 지역은 당시 경기도 광주군에 속해 있었다. 서울에 편입된 것은 1963년이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총독부가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기 때문에 경기도 광주군의 토지도 포함되었고, 그 기록이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 거여동의 국유지 기초조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즉, 거여동의 1912년 기록은 단순히 서울의 역사가 아니라 경기도 광주의 역사이기도 하다.


2

임야 지목이 왜 중요한가 — 숲이 품은 유산

임야는 문화재 조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없는 숲이지만, 실제 발굴에서는 가장 극적인 발견이 임야 구역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지목

필지 수

면적 (㎡)

비율

임야 (林野)

2필지

3,008㎡

100%

합계

2필지

3,008㎡

100%

임야에서 무엇이 나오나

첫째, 고분(古墳)과 묘제 유구다. 조선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무덤은 대부분 산록과 구릉지, 즉 임야에 조성되었다. 백제 왕도 한성이 있었던 송파구 일대에는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이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거여동의 임야 역시 알려지지 않은 고분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둘째, 토성 관련 유구다. 백제 한성 시기에는 방어를 위해 여러 곳에 토성을 쌓았다. 거여동 인근 구릉지에도 소규모 토성이나 목책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임야 지층에는 이러한 방어 시설의 흔적이 토층 변화나 목탄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셋째, 생활 유구다. 백제 시대 사람들은 구릉지 사면에 주거지를 만들기도 했다. 임야의 완만한 사면부에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반수혈식(半竪穴式) 주거지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임야 조사의 핵심은 지표면에서 시작한다. 낙엽과 부식토를 걷어낸 표층 아래에서 유물 편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임야의 지형 분석을 통해 과거 인위적으로 조성된 둔덕, 평탄지, 도랑의 흔적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지표조사 과제다. 거여동 임야의 경우 백제 도읍지 권역 안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지형 분석 단계부터 백제 시대 유구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해야 한다.

국유 임야라는 점의 의미

민간 임야와 달리 국유 임야는 조선시대에 특정한 목적으로 지정된 경우가 많다. 왕실 묘역의 금지림(禁止林), 봉산(封山), 또는 군사 방어를 위한 보안림이 대표적이다. 거여동의 국유 임야가 이런 목적으로 지정된 땅이었다면, 그 주변에 관련 유구가 함께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 부분에 대한 문헌 조사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3

거여동의 역사 — 백제 한성에서 조선 주막까지

거여동(巨余洞). 이 이름 하나에 수천 년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거여(巨余)라는 지명의 유래는 '큰 나머지'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백제 도읍지의 외곽 배후지였음을 암시하는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 진위와 무관하게, 거여동이 속한 송파구 일대의 역사적 지위는 한반도 고대사에서 독보적이다.

기원전 18년 ~ 서기 475년

백제 한성 도읍기 — 위례성의 땅

온조왕이 한강 남쪽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한 이후 493년간 도읍지였던 한성(漢城). 풍납토성(북성)과 몽촌토성(남성)이 그 핵심이었고, 거여동은 이 왕성의 배후 구릉지 지역이었다. 석촌동 고분군·방이동 고분군이 이 시기의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이다.

475년 이후

고구려 점령기 — 몽촌토성의 새 주인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는 몽촌토성을 사령부로 삼고 한강 건너 아차산에 보루를 설치했다. 거여동 일대의 구릉지는 이 시기 고구려 방어선의 배후 지역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거여리점(巨余里店) — 왕실 장례 행렬의 길목

조선 순원황후의 장례 행렬이 거여리점(巨余里店)을 지났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점(店)'은 여인숙·주막을 뜻한다. 왕실 장례 행렬이 지나치는 길목에 주막이 있었다는 것은, 거여동이 조선시대에 한양 외곽과 경기도를 연결하는 주요 통행로 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1912년

경기도 광주군 시대 — 국유 임야 기록

이 기초조사의 출발점.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거여동 국유 임야 2필지 3,008㎡가 기록됨. 당시 이 지역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 광주군 소속이었다. 1963년 서울 편입, 1988년 송파구 거여동으로 현재의 행정 구역이 완성되었다.

이 네 개의 시간층이 거여동이라는 하나의 공간 위에 겹겹이 쌓여 있다. 백제의 왕도, 고구려의 점령, 조선의 길목, 일제의 측량 — 그 모든 역사의 공통점은 이 땅이 단 한 번도 역사 밖에 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2년의 임야 기록은, 그 2천 년의 역사가 아직 땅속에 잠들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마지막 단서다.

거여동과 백제 유적의 거리

약 2km

풍납토성

약 2.5km

몽촌토성

약 3km

석촌동 고분군

거여동은 백제 한성 도읍지의 대표 유적들과 불과 2~3km 거리에 있다. 이 거리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거여동 일대는 백제 도읍지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었다. 도읍지 외곽 2~3km 반경의 구릉지는 고분 조성, 방어 시설 설치, 농경지 개간, 사냥터 운영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거여동의 국유 임야는 이 반경 안에 있다.



4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절차 안내

임야 지목 국유지에 대한 문화재 조사는 대지나 농경지와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숲이라는 환경 자체가 조사의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거여동 국유 임야 2필지 3,008㎡를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 단계별로 살펴보자.

1

지표조사 — 임야에서의 지표 탐색

임야 지표조사에서는 문헌 조사와 함께 항공사진·위성사진 분석이 특히 중요하다. 지형도를 통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평탄면, 둔덕, 테라스형 지형 등 고분이나 생활 유구의 흔적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장에서는 낙엽 제거 후 유물 편 분포를 직접 확인하는 '지표 채집'이 진행된다. 백제 도읍지 권역임을 감안해 백제계 토기 편 발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표본조사 — 2% 범위의 탐색갱 설치

3,008㎡의 2%는 약 60㎡. 이 좁은 범위 안에서 트렌치를 배치해 지층 구조를 파악한다. 임야에서는 부식토층(A층) → 황갈색 점토층(B층) → 기반암이나 생토(C층)의 순서로 층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문화층은 주로 A층과 B층 경계부 또는 B층 상부에서 확인된다. 표본 트렌치에서 목탄이나 토기 편이 발견되면 즉시 시굴조사로 전환해야 한다.

3

시굴조사 — 유구 범위와 성격 파악

조사 면적의 10% 이내에서 복수의 트렌치를 설치해 유적 분포 범위를 파악한다. 임야에서는 특히 고분 봉토의 흔적인 적석층(積石層)이나 할석(割石) 집중부를 주시해야 한다. 백제 시기 고분이 발견될 경우 봉토의 규모와 내부 구조 파악이 관건이다. 국가유산청 허가 후 전문 조사기관만 시행 가능하다.

4

정밀발굴조사 — 역사의 전면 개방

확인된 유구 전체를 정밀하게 발굴한다. 백제 고분이 확인될 경우 사적 지정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장 유물인 토기·금속류·유리류 등은 국보·보물 지정 대상이 될 수 있다. 발굴 보고서는 국가유산청과 지자체에 제출되며, 중요 유적은 원지형 보존 또는 정비·복원 계획이 수립된다.

임야 발굴에서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지표면을 너무 빠르게 제거하는 것이다. 임야의 부식토층은 얇아 보여도 그 안에 문화층의 결정적 단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낙엽·부식토를 걷을 때도 수작업으로 신중하게 진행하고, 각 층위를 촬영·기록한 뒤에야 다음 층으로 넘어가야 한다. 속도보다 정확성이 임야 발굴의 핵심이다.



5

송파구 발굴 성공 사례 — 땅이 백제를 돌려줬다

거여동의 국유 임야가 왜 중요한지, 같은 송파구 안에서 일어난 발굴 사례들이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사례들은 단순한 참고 자료가 아니라, 거여동 조사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예시하는 역사적 증거다.

사례 1 ·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발굴 — 백제 왕도의 실체를 드러내다

1997년 아파트 재건축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유물을 계기로 본격 발굴이 시작된 풍납토성은, 이후 수십 년에 걸친 발굴 조사에서 백제 한성기의 제사 시설·관청·공방·도로·대형 주거지 등 도읍에 걸맞은 유적들이 대거 확인되었다. 성벽 둘레만 3,500m, 내부 면적 84만㎡에 달하는 이 거대 유적은 사전 문화재 조사의 필요성을 국가적으로 각인시킨 상징적 사례가 되었다. 공사 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훨씬 많은 유구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픔이 남아 있다.

사례 2 · 송파구 방이동

방이동 고분군 발굴 — 임야에서 나온 백제 고분

방이동 고분군은 구릉지 임야에 조성된 백제 시대 고분들의 집합체다. 발굴 조사를 통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구조가 확인되었고, 다양한 토기와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 고분군이 있는 방이동 구릉지는 거여동과 지형적으로 연속된 같은 구릉지대에 속한다. 거여동의 임야가 방이동 고분군과 유사한 지형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거여동 임야에도 알려지지 않은 고분이 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사례 3 · 송파구 석촌동

석촌동 고분군 재발굴 — 백제 초기 문화의 다양성 확인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백제 초기 고분 구조의 다양성이 확인되었다. 계단식 돌무지무덤(적석총), 토광묘, 목관묘 등 서로 다른 형식의 무덤이 함께 발견되어, 백제 건국 초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집단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성과는 거여동 임야 발굴에서도 단일한 형식이 아닌 복수의 문화적 층위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세 사례 모두 한 가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송파구의 땅은 언제 어디서 삽을 꽂아도 역사가 나온다. 그 역사를 지키느냐 잃느냐는, 조사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에서 결정된다. 거여동의 임야 3,008㎡도 지금 그 선택의 앞에 서 있다.


6

거여동 임야가 지금 우리에게 남긴 것

2필지 3,008㎡의 임야. 지도 위에 표시하면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작은 점의 아래에는 2천 년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다. 백제 위례성을 세운 온조왕의 신하들이 이 구릉을 걸었을 수도 있다. 고구려 병사들이 이 숲을 방패 삼아 한강을 내려다봤을 수도 있다. 조선 시대 순원황후의 장례 행렬이 이 길을 지나쳤을 수도 있다. 그리고 1912년, 일제의 측량사가 이 땅을 '임야'라고 기록했다.

그 기록이 지금 우리의 손에 있다.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 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 이 땅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 그것이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이미 풍납토성 발굴에서 보았듯, 조사 없이 개발이 먼저 이루어지면 그 손실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임야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손대지 않은 땅일수록, 그 아래 역사는 더 온전하게 남아 있다. 거여동의 2필지 3,008㎡, 그 숲은 지금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송파구 거여동 또는 인근에서 임야를 포함한 개발 사업이 계획되어 있다면, 반드시 사전에 문화재 전문 기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하라. 특히 방이동·석촌동 고분군과 지형적으로 연속된 구릉지 임야라면, 자발적 지표조사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역사를 지키는 행위다. seoulheritage.org의 송파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거여동을 포함한 인근 지역의 1912년 국유지 기초조사 자료를 함께 살펴보면, 이 지역 전체의 역사적 맥락이 더욱 선명하게 이해된다.



이 숲 아래에 백제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기원전 18년 위례성에서 온조왕이 나라를 세웠을 때, 거여동의 구릉은 그 왕도를 둘러싼 울창한 숲이었다. 2천 년이 지난 1912년, 그 숲은 여전히 임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땅의 기록을 손에 쥐고 있다. 발굴조사는 백제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이다. 고분에 묻힌 이름 없는 사람에게 존재를 돌려주는 일이다. 잊혀진 역사에 목소리를 주는 일이다. 거여동의 2필지 3,008㎡, 그 작은 숲이 지금 당신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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