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동구 성수동, 힙스터들의 성지에 숨겨진 충격적인 땅 이야기! 밭 뷰 맛집 시절?!
- 2025년 4월 11일
- 9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 문화재 발굴조사
성수동 땅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나 — 1912년 성수1가의 충격적인 진실, 문화재 발굴조사가 풀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리서치팀 · 성동구 성수1가 지역조사 ·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시굴조사
당신이 오늘 카페 라떼를 마신 그 자리, 100년 전엔 누군가의 밭이었다.
성수동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핸드드립 커피 향, 빈티지 공방, 인생샷 스팟.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 발밑, 아스팔트 수십 센티 아래에는 100년 전 사람들이 밭을 갈고 이랑을 세우던 흙이 그대로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밝혀낸 1912년 성수1가의 진짜 얼굴 —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성수동 골목을 걷는 감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목 차
1. 성수동이 숨긴 100년의 비밀 — 왜 지금 발굴조사인가
2. 1912년 성수1가, 숫자로 읽는 땅의 얼굴 — 전체 통계
3. 밭 80%의 충격 — 농촌 성수의 실제 모습
4. 집터와 수도용지,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의 기록
5. 땅 주인들의 계보 — 성씨별 필지 분포와 그 의미
6.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것
7. 실제 성공 사례 — 서울에서 발굴로 되살아난 기억들
8. 지금 성수동을 새롭게 걷는 법 — 과거를 품은 현재
01
성수동이 숨긴 100년의 비밀 — 왜 지금 발굴조사인가
성수동을 아는 사람치고 이 동네가 '힙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리모델링된 공장 건물에 들어선 카페들, 아티스트 공방, 편집숍, 그리고 주말마다 인파가 넘쳐나는 팝업 스토어들. 성수동은 지금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동네 중 하나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수동은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 전문가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100년 전 서울의 지도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 작업의 핵심은 1912년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기록이다. 이 시기 작성된 토지조사부는 단순한 행정 문서가 아니다. 당시 땅의 용도, 면적, 소유자, 필지 구획이 상세히 담겨 있어서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결정적 기초 자료가 된다.
1912년에는 토지조사령이 공포되며 전국적으로 토지 소재와 지목, 소유권이 공식 문서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이 자료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시점에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도시 개발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땅속에 잠든 옛 생활의 흔적들이 사라질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그 흔적들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첫 번째 단계이고,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는 그것을 실제로 꺼내 기록하는 과정이다.
성수동이 개발되고 건물이 올라가는 그 순간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땅의 과거를 그냥 덮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기록하고 보존할 것인가. 그 선택의 출발점이 바로 1912년 성수1가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문화재 발굴기관인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 따르면, 1910년대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도심 개발 구역에서 문화재 발굴조사와 시굴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단서로 기능한다. 성수동처럼 급격히 도시화된 지역일수록 땅속에 조선시대 생활 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02
1912년 성수1가, 숫자로 읽는 땅의 얼굴 — 전체 통계
1912년 성동구 성수1가의 전체 규모부터 살펴보자. 이 지역에는 총 696필지, 면적으로는 1,259,959㎡의 토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면적으로만 환산하면 약 38만 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지금의 성수동 핫플레이스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블록들을 상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광활한 공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696
총 필지 수
125만㎡
총 면적
126필지
밭 (전)
551필지
집터 (대지)
이 숫자들을 지목별로 나누어 보면 그림이 훨씬 선명해진다. 집터로 쓰이던 대지가 551필지, 178,066㎡였고, 밭(전)은 126필지이지만 면적은 무려 979,882㎡로 전체의 약 77.8%를 차지했다. 수도용지가 1필지, 78,869㎡, 그리고 잡종지가 18필지, 23,140㎡로 기록되어 있다. 필지 수로는 집터가 많아 보이지만, 실제 면적으로 따지면 밭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데이터를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밭이 집중된 구역에서는 농업 도구, 수로 흔적, 토기류가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대지가 밀집된 구역에서는 생활 유구, 우물, 온돌 흔적, 건물지 등이 나올 수 있다. 수도용지가 있었던 구역은 수리 시설과 관련된 구조물이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개연성이 크다. 1912년의 지목 정보는 '어느 구역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핵심 가이드인 셈이다.
밭 (전)
77.8%
집터
14.1%
수도용지
6.3%
잡종지
1.8%
면적 비율을 보면 1912년 성수1가의 성격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도시형 상업·주거지역이지만, 당시에는 대규모 경작지가 중심이었던 전형적인 도시 외곽 농촌 지대였다. 이런 구조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복합적 생활 유형의 지역'으로 분류되는 매우 흥미로운 조건을 갖추고 있다.
03
밭 80%의 충격 — 농촌 성수의 실제 모습

1912년 성수1가 전체 면적의 77.8%가 밭이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의미를 품고 있다. 126필지에 걸쳐 979,882㎡. 이 광활한 경작지에서 성수1가 주민들은 고구마, 무, 배추, 콩 등 다양한 작물을 키우며 살아갔다. 당시 성수동은 논이 없는 대신 밭 중심의 농업 지대였는데, 이는 한강과의 거리와 지형적 조건을 반영한 결과였다.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와 시멘트 블록 사이에서 흙 한 줌 찾기 어려운 성수동이지만, 1912년에는 이른 봄 씨앗을 뿌리는 손길과 가을 수확의 기쁨이 넘쳤던 공간이었다. 농사짓는 소리, 물 대는 소리, 이웃끼리 품앗이하는 목소리들이 지금의 카페 BGM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해 보라. 성수동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느껴질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 입장에서 이 밭 지대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십 년, 수백 년간 경작된 토지는 농업 관련 유구가 잘 보존되는 특성이 있다. 수로의 흔적, 밭고랑의 구조, 농기구 파편, 토기 조각 등이 지표면 바로 아래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서울 다른 지역의 발굴조사에서 이런 농경 유구들이 도시 개발 과정에서 연이어 발견된 사례들이 있다.
979,882㎡에 달하는 성수1가의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다. 이 땅 아래에는 수백 년 된 경작의 흔적과 생활 유구가 켜켜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 발굴조사가 이 구역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당시 성수1가에 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성동구의 하왕십리나 행당동 등 한강과 더 가까운 지역에서는 논이 일부 확인되는 반면, 성수1가는 완전히 밭 중심의 경작지였다. 이는 당시 한강 수계와 지형적 조건이 각 동네의 농업 방식을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기도 하다. 지금 성수동을 걸을 때, 이 땅이 한때 어떤 작물로 가득했는지 상상해 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04
집터와 수도용지,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의 기록
밭이 면적을 지배하고 있었던 1912년 성수1가이지만, 필지 수만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터(대지)는 551필지로 전체 696필지 중 무려 79%를 차지한다. 하나하나의 필지가 그리 넓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178,066㎡를 551필지로 나누면 필지당 평균 약 323㎡, 약 98평 정도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단독주택 한 채 정도의 규모다.
이 촘촘하게 나뉜 집터들은 당시 성수1가가 꽤 많은 가구가 모여 살던 생활 공동체였음을 말해준다. 551가구 이상이 서로 이웃을 맞대며 살아가는 공간. 아침이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골목을 채우고, 장이 서는 날이면 사람들이 모여들던 그 공간의 온기가 이 숫자 뒤에 숨어 있다.
수도용지는 1필지이지만 면적이 78,869㎡로 상당히 넓었다. 이는 당시 성수1가 일대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수원지 혹은 저수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필지로 묶여 있다는 것은 개인 소유가 아닌 공용 시설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런 수도용지의 기록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수리 시설과 관련된 구조물이나 수로의 흔적이 이 구역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잡종지는 18필지, 23,140㎡였다. 잡종지는 특정 용도로 지정되지 않은, 마을 공용 공간이나 시장 터, 빈터로 활용되던 땅이다. 서교동이나 하왕십리 등 다른 서울 지역의 잡종지 분석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확인된 바 있다. 잡종지가 있던 구역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공적 성격의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아, 생활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될 수 있는 지점으로 주목받는다.
이 네 가지 지목 — 대지, 전, 수도용지, 잡종지 — 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농사짓고, 밥 짓고, 물 긷고, 이웃과 어울리던 1912년 성수1가. 그 생생한 삶의 기록이 지금 우리 발밑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05
땅 주인들의 계보 — 성씨별 필지 분포와 그 의미
1912년 성수1가의 토지 기록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성씨별 필지 분포다.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소유자들의 성씨를 분석해 보면, 이 동네가 어떤 집안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였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순위 | 성씨 | 필지 수 | 특징 |
1 | 이씨 (李) | 127필지 | 최다 보유 성씨 |
2 | 김씨 (金) | 126필지 | 단 1필지 차이의 박빙 |
3 | 박씨 (朴) | 31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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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조씨 (趙) | 28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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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유씨 / 최씨 | 각 26필지 | 공동 5위 |
6 | 신씨 (申) | 19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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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정씨 (鄭) | 18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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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홍씨 (洪) | 16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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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강씨 / 노씨 / 황씨 | 각 15필지 | 공동 9위 |
10 | 손씨 / 한씨 / 우씨 | 각 13필지 |
|
이씨가 127필지로 1위, 김씨가 126필지로 2위. 단 1필지 차이의 박빙이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한 숫자지만, 당시에는 이씨 집안과 김씨 집안이 성수1가의 최대 토지 보유 가문으로서 이 동네의 주요 구성원이었음을 의미한다. 그 뒤를 이어 박씨, 조씨, 유씨, 최씨, 신씨, 정씨, 홍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고루 분포해 있었다.
이 성씨 분포 패턴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특정 성씨가 집중된 구역에서는 그 집안과 연관된 생활 유물이나 건물지 흔적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훈정동 분석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사사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씨가 모여 살았던 구역은 생활과 신앙이 겹쳐진 복합 문화 공간이었고, 이런 지역에서 발굴조사 시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는 패턴이 있다.
더불어 성수1가의 성씨 분포에서는 특정 집안이 토지를 독점하지 않고, 다양한 성씨들이 분산 소유하는 형태를 보인다. 이는 이 동네가 특정 문중의 세거지가 아니라 여러 집안이 함께 어우러진 자연 발생적 생활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그 어울림의 흔적이 지금도 성수동 땅 아래에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06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이쯤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1912년 성수1가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지금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명확하다.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성수동의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할 수 있다.
문화재 조사는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가장 먼저 실시하는 것이 지표조사다. 땅을 직접 파기 전에 지표면을 꼼꼼히 살피며 유물이나 유구의 흔적을 파악하는 단계다. 1912년의 지목 정보는 '어느 구역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핵심 가이드가 된다. 성수1가의 경우 밭이 집중된 서쪽 구역과 대지가 밀집된 동쪽 구역은 서로 다른 유형의 유물이 나올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지표조사를 통해 유물 가능성이 확인된 구역에서는 시굴조사와 표본조사가 이어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좁고 긴 구덩이를 파내려 가며 지층의 구성과 유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토기 조각, 기와편, 생활 도구의 파편, 건물지 흔적 등이 발견되면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성수동처럼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된 지역도 땅속에는 조선시대, 더 나아가 삼국시대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다. 마포구 서교동 인근에서는 실제로 조선시대 건물지와 조선 전기 도자기, 심지어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된 사례가 있다. 이는 도심부라고 해서 발굴조사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도심일수록 다양한 시대의 층위가 복합적으로 쌓여 있어 더욱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을 수 있다.
문화유산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땅속에 묻힌 것들이야말로 진짜 타임캡슐이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로 이어지는 과정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서울을 찾는 여정이다. 성수1가의 979,882㎡ 밭, 178,066㎡의 집터, 그 아래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다.
특히 수도용지로 기록된 구역은 당시의 수리 시설, 즉 우물이나 저수지와 연관된 구조물이 지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용산구 한남동의 발굴조사 기초 연구에서도 이런 수리 시설 관련 유구가 중요한 발굴 대상으로 분류된 바 있다. 성수1가의 1필지 수도용지, 78,869㎡는 그 규모만으로도 당시 성수 일대의 물 공급 체계를 복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07
실제 성공 사례 — 서울에서 발굴로 되살아난 기억들
1912년의 토지 기록과 문화재 발굴조사가 만나 실제로 역사를 복원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이 작업이 왜 중요한지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성공 사례 01 · 마포구 서교동
서교동은 지금 홍대 앞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실시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조선 전기 도자기, 심지어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된 사례가 있다. 1912년 서교동의 토지 기록이 조사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가이드로 활용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발굴조사가 성공적인 유물 출토로 이어졌다. 지금 홍대 앞 클럽 음악이 울려 퍼지는 그 땅 아래에서 천 년이 넘은 유물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성공 사례 02 · 종로구 훈정동
1912년 훈정동 기록에서는 사사지(사찰 터)가 거의 모든 면적을 차지하는 독특한 구조가 확인됐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에서 우물, 담장 흔적, 기와편, 소규모 건물지가 함께 확인됐다. 사사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씨가 모여 살았던 구역에서 종교 유구와 생활 유구가 복합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 데이터는 현재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취락 구조 해석'의 핵심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성공 사례 03 · 용산구 한남동
한남동의 1912년 기록에는 23필지, 18,958㎡의 분묘지와 1필지의 사사지가 확인됐다. 이 기록을 기반으로 실시된 문화재 시굴조사와 표본조사에서 실제로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가 출토됐다. 한강변 마을 구조를 복원하는 핵심 단서로 1910년대의 토지 구획 기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 한남동 고급 주거지로 알려진 그 땅이 한때 조상들의 쉼터였음을 발굴조사가 증명한 것이다.
성공 사례 04 · 구로구 구로동
구로동의 229필지 논 지역과 6필지 연못 터가 기록된 1912년 자료를 근거로 진행된 지표조사에서, 수로와 논둑 구조물의 잔재와 수리 시설 구조물이 확인됐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선 구로동에서, 땅속에 여전히 농업 사회의 생생한 흔적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이 사례가 보여준다. 발굴조사는 그 아픈 역사의 흔적도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사례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1912년의 토지 기록과 오늘날의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결합될 때, 우리는 도시 아래 잠들어 있는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00년 전 지도와 기록을 꾸준히 분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08
지금 성수동을 새롭게 걷는 법 — 과거를 품은 현재

자, 이제 다시 성수동으로 돌아가자. 당신이 즐겨 가는 그 카페, 그 공방, 그 핫플레이스 아래에는 1912년 이씨 집안의 밭이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김씨 집안의 집터가 있었을 수도 있다. 작물을 키우고, 아이를 키우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의 온기가 그 흙 속에 스며 있다.
이 사실을 알고 걷는 성수동과, 모르고 걷는 성수동은 분명히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발밑의 아스팔트 너머로, 100년 전 누군가가 씨앗을 심던 흙을 느끼게 된다. 그게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가장 특별한 경험이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역사를 감각하게 만드는 것.
성수동이 힙한 이유는 단순히 세련된 공간들 때문만이 아니다. 오래된 공장 건물이 새로운 문화를 품고,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특유의 레이어드 감성이 이 동네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레이어는 사실 지표면 아래로도 계속 이어진다. 1912년의 밭, 집터, 수도용지, 그리고 이씨와 김씨 집안의 이야기까지. 성수동의 레이어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만약 지금 성수1가 일대에 개발 계획이 있거나, 땅속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를 통해 전문적인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의뢰해 볼 것을 권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옛것을 찾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뿌리를 알아야, 미래를 더 잘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의뢰하고 싶다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 비용, 법적 절차, 공사 일정 관련 FAQ를 확인할 수 있다. 발굴조사 노트, 발굴조사 법적·행정 FAQ 등 실용적인 정보가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성수1가 발굴조사·지표조사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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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은,누군가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든 기억의 공간이다."
성수동 골목을 걸을 때 잠깐 멈춰 서서, 발밑을 한번 내려다봐 주길 바란다. 아스팔트 아래, 콘크리트 아래, 1912년 이씨 집안의 밭이 있었고, 김씨 집안의 집터가 있었으며, 이름 모를 아이들이 뛰놀던 흙이 있었다. 그 기억을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 우리는 100년 전 그 사람들에게 작은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그것이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성수동은 힙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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