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북구 종암동의 숨겨진 이야기
- 2025년 5월 31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성북구 종암동, 100년 전엔 창덕궁 왕실의 땅이 있었고 동척도 파고들었다
1912년 성북구 종암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캐낸 왕실·수탈·마을의 이야기
종암동 골목을 걷다가 딱 한 번만 생각해봐.
지금 네가 걷는 이 동네,
100년 전엔 창덕궁이 14필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동척이 13필지를 집어삼켰고,
황금빛 벼가 출렁이는 논이 전체의 절반을 덮고 있었다.

목차
종암동의 땅 이야기
사람들의 삶과 집
산과 논, 그리고 밭
종암동을 소유한 사람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흔적
창덕궁의 숨겨진 땅
국유지, 그 하나의 비밀
성북구 종암동. 고려대학교가 가까이 있고, 아리랑고개와 개운산이 품고 있는 이 동네는 서울에서도 조용한 주거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히 역사적인 동네라는 인상은 없지만, 1912년 기록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힌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종암동은 총 126필지, 525,721㎡의 땅으로 이루어진 논 중심 농경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창덕궁 왕실의 땅,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 흔적, 그리고 김씨·오씨·정씨 가문들의 삶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보자.
1. 종암동의 땅 이야기
1912년 종암동을 가장 잘 설명하는 한 문장을 꼽으라면 이거다. 절반이 논이었다. 총 126필지 525,721㎡ 중 39필지, 241,908㎡가 논이었다. 전체 면적의 46%가 넘는 땅이 논으로 덮여 있었다는 뜻이다.
126필지
종암동 전체 필지
39필지
논 (241,908㎡)
68필지
밭 (188,959㎡)
18필지
대지 (44,072㎡)
13필지
임야 (38,406㎡)
14필지
창덕궁 소유
39필지의 논, 241,908㎡. 지금 종암동에서 그 면적을 상상해보면 실감이 난다. 고려대 인근에서 개운산 자락까지 이어지는 이 동네 상당 부분이 물이 고인 논이었다는 거다. 봄이면 모내기로 마을 전체가 들썩였고,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개운산을 배경으로 출렁였을 거다.
종암동은 왜 논이 많았을까. 개운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 지역에 풍부한 수자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산이 있는 지역은 계곡물이 논으로 흘러들기 좋아 논농사에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종암동은 서울 동북쪽에서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역 중 하나였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논이 많은 지역은 독특한 토양 층위를 형성한다. 수백 년간 물이 고였다 빠지기를 반복한 논의 점토질 층은 지층에 뚜렷하게 기록된다. 논두렁 경계, 수리 시설 터, 농기구 흔적 같은 것들이 종암동 지하 어딘가에 아직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2. 사람들의 삶과 집

1912년 종암동의 집터는 18필지, 44,072㎡였다. 전체 126필지 중 18필지가 집터라는 건, 종암동이 논과 밭이 압도적으로 많고 집은 비교적 모여 있던 농촌 마을이었다는 뜻이다. 필지당 평균 2,448㎡의 집터라는 건 지금 기준으로는 꽤 넓은 마당을 가진 집들이 있었을 거라는 의미다.
18필지의 집들. 개운산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그 집들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졌을까. 아침이면 논으로 나가는 농부들의 발소리, 저녁이면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이웃집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일상이 닿는 그 가까운 거리. 지금 종암동 골목을 걷다 만나는 오래된 담장 어딘가가 그 18필지 중 한 집의 흔적일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핵심 유구다. 온돌 구조, 기와 파편, 아궁이 재층, 생활 도기 조각들이 당시 종암동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구체적으로 복원해준다. 집은 사라져도 삶의 온기는 흙 속에 남는다.
3. 산과 논, 그리고 밭
종암동에는 임야가 13필지, 38,406㎡ 있었다. 개운산 자락이 종암동을 감싸고 있으니, 이 임야가 어느 방향에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마을 북쪽과 동쪽으로 산이 이어지고, 그 산 발치에 논과 밭이 펼쳐졌을 거다.
13필지 38,406㎡의 숲.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구하러 오르내린 그 길, 아이들이 뛰어놀던 그 숲길이 지금의 개운산 등산로 어딘가와 겹칠 수 있다. 땅의 형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100년이 지나도 산의 능선과 계곡은 대체로 그 자리에 있다. 지금 개운산에 오르는 그 길이 어쩌면 1912년 종암동 사람들의 발자국 위에 놓인 거다.
밭은 68필지, 188,959㎡였다. 논보다 필지 수는 훨씬 많지만 면적은 더 작다. 즉 논은 크고 넓은 필지들이 모여 있었고, 밭은 상대적으로 작은 필지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여러 가문이 나눠 가진 소규모 밭들이 논 사이사이에 퍼져 있었을 거다. 고추·배추·콩·마늘을 키우는 그 밭들이 종암동 식탁을 채웠다.
"개운산이 품고, 논이 적시고, 밭이 먹이던 그 마을이 종암동이었다."
4. 종암동을 소유한 사람들

1912년 종암동의 토지 기록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한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건 김씨로 31필지였다. 오씨가 30필지로 바로 뒤를 따랐고, 정씨가 13필지로 세 번째였다.
31필지
김씨
30필지
오씨
13필지
정씨
1필지
국유지
김씨 31필지와 오씨 30필지. 단 1필지 차이다. 이 두 가문이 종암동에서 거의 대등하게 땅을 나눠 가진 공동 지주였다는 뜻이다. 혹시 이 두 가문이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아니면 서로 다른 구역을 나눠 각자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을까? 기록에는 없지만, 두 가문이 같은 마을에서 거의 같은 규모로 공존했다는 건 종암동이 특정 성씨 하나가 독점하는 집성촌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씨라는 성씨가 서울 종암동에 30필지나 있었다는 건 흥미롭다. 해주 오씨, 동복 오씨, 보성 오씨 등 어느 계열인지에 따라 이 가문의 내력이 달라진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성씨 기록과 토지 분포를 결합하면, 출토 유물의 귀속과 마을 공동체의 사회 구조를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5.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흔적

1912년 종암동 기록에서 무거운 이름이 등장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3필지.
동척 13필지가 종암동에 있었다는 것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조선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세운 국책 수탈 기관이다. 조선 총독부 다음으로 많은 땅을 가진 최대 지주로, 소작농들에게 수확의 50% 이상을 소작료로 요구했다. 종암동 13필지는 그 수탈 시스템의 일부였다. 논이 많고 수확이 좋은 종암동이기에, 동척이 일찍부터 이 지역 땅을 확보하려 했을 거다.
동척 13필지. 종암동 126필지 중 10%가 넘는 땅이다. 그 13필지에서 농사를 지었던 조선인 소작농들은 황금빛 벼를 거두고도 그 절반 이상을 동척에 내야 했다. 39필지의 논에서 이뤄진 풍성한 수확이 온전히 마을 사람들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 분노와 슬픔이 종암동 이 논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
나석주 의사가 1926년 동척 건물에 폭탄을 던진 것은 이런 전국적인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종암동의 13필지도 그 저항이 향한 이유의 일부였을 거다. 역사는 이름 없는 땅 하나하나에도 새겨져 있다.
6. 창덕궁의 숨겨진 땅
종암동 기록에서 가장 뜻밖의 발견이 여기 있다. 창덕궁 소유 토지 14필지.
창덕궁이 성북구 종암동에 14필지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왕궁이 서울 외곽의 작은 농촌 마을에 14필지나 소유했다는 게 처음엔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조선 시대 왕실은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땅들은 궁방전이라고 불렸는데, 왕실의 살림살이와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수입원이었다.
창덕궁이 종암동에 14필지를 가진 이유
조선 왕실은 왕실 경비 조달을 위해 전국 각지에 '궁방전'을 운영했다. 수확이 좋고 물 좋은 논이 많던 종암동은 왕실 소유 농지로 활용하기에 좋은 조건이었을 거다. 창덕궁에서 사용할 쌀과 각종 작물을 이 14필지에서 재배하거나, 소작을 줘 수입을 거뒀을 가능성이 있다. 1912년 시점엔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이 땅은 구한말 왕실 소유지가 그대로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창덕궁 소유지 14필지. 이 땅이 어느 구역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종암동 39필지의 논 중 일부가 창덕궁의 쌀을 생산하던 왕실 농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왕실의 밥상이 종암동 논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묘하게 감동적이지 않은가.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창덕궁 소유지는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땅이다. 왕실 관련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왕실 표시가 있는 백자 제기, 관인이 찍힌 기와, 왕실 소유를 표시하는 경계석 같은 것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14필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면, 종암동 발굴에 결정적인 가이드가 될 수 있다.
7. 국유지, 그 하나의 비밀

1912년 종암동 토지 기록의 마지막 항목이 인상적이다. 국유지 단 1필지. 126필지 중 오직 하나만 국유지였다.
이 단 하나의 국유지가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에 명확히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가능성을 추론해볼 수 있다. 종암동이 성북구에 위치하고 개운산과 가깝다는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마을 논으로 끌어들이는 수리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39필지의 논에 물을 대려면 체계적인 수로 관리가 필요했고, 그 핵심 시설이 국유지로 관리됐을 수 있다.
단 1필지지만 그 하나가 마을 전체 논농사의 생명줄이었을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수리 시설의 흔적은 독특한 토양층 형태로 나타난다. 돌로 쌓은 수로 구조, 물 흐름의 흔적, 관련 도구 같은 것들이 그 1필지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종암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분석해 역사 지도를 구축하고 있다. 창덕궁 14필지, 동척 13필지, 김씨·오씨·정씨의 삶, 그리고 단 1필지의 국유지. 이 모든 조각들이 모여 1912년 종암동의 완전한 그림이 된다. 공사 전 지표조사, 필요 시 시굴조사와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작업이 그 그림을 다시 꺼내는 방법이다.

종암동 골목을 걸을 때, 딱 한 번만 멈춰봐.
개운산이 등 뒤에 있고,
앞에는 황금빛 논이 출렁이던 그 땅에서
김씨와 오씨가 벼를 길렀고,
창덕궁 왕실의 밥이 여기서 자랐고,
동척이 그 풍성함을 13필지나 빼앗아갔다.
그 모든 걸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 이 골목 아래 아직 숨 쉬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는 발걸음은 무게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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