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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은행나무 정자 아래, 갈대벌 393,271㎡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7월 20일
  • 7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양천구 편

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은행나무 정자 아래, 갈대벌 393,271㎡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31필지국유지 전체

453,327㎡총면적 · 약 13.7만 평

5종지목 구성

86.7%잡종지 면적 비율

AI 브리핑 ·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는 국유지 31필지, 총 453,327㎡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논 13필지 36,760㎡, 밭 5필지 14,105㎡, 잡종지 10필지 393,271㎡, 수도용지 2필지 8,525㎡, 대지 1필지 664㎡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86.7%가 잡종지였으며, 이는 안양천 하류의 갈대벌과 저습지가 국유지로 편입된 결과로 해석됩니다.

서울 국유지의 87%가 논도, 밭도, 집터도 아니었던 동네가 있습니다.

지도를 펼쳐 놓고 잠시 상상해 보세요.

1912년 어느 가을 아침, 안양천 하류의 낮은 들판입니다.

물안개가 걷히면 사람 키를 넘는 갈대가 끝없이 흔들립니다.

그 갈대벌 사이로 측량 기수가 삼각대를 세우고, 조선인 안내인이 논둑을 따라 걷습니다.

그날 장부에 적힌 숫자가 백십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국유지 31필지, 453,327㎡.

축구장 63개를 이어 붙인 크기의 땅이 한 마을 안에 국가 소유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넓은 땅의 대부분이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고, 집터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그 수수께끼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목차

  1. 한눈에 보는 신정동 국유지 핵심 요약

  2. 1912년 신정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3. 신정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 몇 ㎡였나요?

  4. 잡종지 10필지 393,271㎡, 왜 이렇게 넓었을까요?

  5. 논 13필지 36,760㎡는 무엇을 말해주나요?

  6. 밭 5필지 14,105㎡의 기록

  7. 수도용지 2필지 8,525㎡, 근대의 물길이 지나간 흔적

  8. 대지 1필지 664㎡, 단 하나의 국유 집터

  9. 숫자로 다시 보는 신정동 — 표와 그래프

  10. 검증 노트 — 2㎡의 차이까지 기록합니다

  11.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1. 한눈에 보는 신정동 국유지 핵심 요약

바쁜 분들을 위해 결론부터 정리합니다.

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국유지는 총 31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453,327㎡, 평수로 환산하면 약 13만 7천 평입니다.

지목은 다섯 종류로 나뉩니다.

논 13필지 36,760㎡, 밭 5필지 14,105㎡, 잡종지 10필지 393,271㎡, 수도용지 2필지 8,525㎡, 그리고 대지 1필지 664㎡입니다.

필지 수로는 논이 가장 많지만, 면적으로는 잡종지가 전체의 86.7%를 차지하며 압도적입니다.

이 극단적인 불균형이 바로 신정동 기록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잡종지 면적 비율 86.7%. 지금까지 본 시리즈에서 다룬 서울의 동네들 가운데 최상위권에 드는 수치입니다. 여기에 수도용지라는 희귀 지목까지 등장합니다. 수도용지는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극소수의 동네에서만 확인되는 지목으로, 신정동 기록의 희소성을 한층 높여 줍니다.


2. 1912년 신정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신정동이라는 이름에는 두 마을의 이름이 숨어 있습니다.

새로 일군 마을이라는 뜻의 신트리, 그리고 커다란 은행나무 정자가 있어 은행정이라 불리던 마을입니다.

신트리의 신 자와 은행정의 정 자를 합쳐 신정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름부터가 개척과 쉼터의 합성어인 셈입니다.

1912년 당시 이 일대는 지금의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김포군 관할이었습니다.

양천이라는 오래된 고을 이름 아래,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낮은 들판에 자리한 전형적인 강변 농촌이었습니다.

여름이면 물이 넘고, 물이 빠지면 갈대가 자라는 땅.

사람들은 물이 닿지 않는 언덕 자락에 집을 짓고, 그 아래 낮은 곳에 논을 풀었습니다.

은행나무 정자에 앉으면 갈대벌 너머로 한강 물빛이 보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풍경 위에 측량 깃발이 꽂힌 해가 1912년이었습니다.



3. 신정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 몇 ㎡였나요?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신정동 국유지는 총 31필지, 453,327㎡입니다.

이 숫자가 얼마나 큰지 감을 잡아 볼까요.

453,327㎡는 여의도 공원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넓고, 축구장으로는 63개 이상을 깔 수 있는 면적입니다.

한 필지의 평균 크기는 약 14,623㎡, 4,400평이 넘습니다.

본 시리즈에서 다뤄 온 서울 도심 동네들의 국유지 평균 필지가 수백 평 수준인 경우가 많았던 것과 비교하면, 신정동의 필지들은 스케일 자체가 다릅니다.

도심의 국유지가 관청 터, 창고 터처럼 점으로 존재했다면, 신정동의 국유지는 면으로, 벌판째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답은 지목 구성에 있습니다.


4. 잡종지 10필지 393,271㎡, 왜 이렇게 넓었을까요?

신정동 국유지의 심장은 단연 잡종지입니다.

10필지에 393,271㎡, 전체 국유지 면적의 86.7%입니다.

잡종지 한 필지의 평균이 39,327㎡, 약 1만 2천 평에 달합니다.

잡종지란 논, 밭, 대지, 임야 같은 뚜렷한 용도 어디에도 넣기 어려운 땅에 붙이는 지목입니다.

그렇다면 신정동의 잡종지는 실제로 어떤 땅이었을까요.

지형이 힌트를 줍니다.

신정동 일대는 안양천 하류의 범람원, 곧 물이 들고 나는 저습지였습니다.

비가 오면 잠기고, 물이 빠지면 갈대와 억새가 자라는 벌판.

농사를 짓기에는 불안정하고, 집을 짓기에는 위험하며, 그렇다고 숲이라 부를 수도 없는 땅입니다.

토지조사사업은 이런 하천 부지와 저습지를 대부분 소유자 없는 땅으로 간주해 국유지로 편입시켰습니다.

주민들이 대대로 갈대를 베고 땔감을 얻고 물고기를 잡던 공유의 벌판이, 장부 위에서는 하루아침에 국가의 잡종지가 된 것입니다.

신정동의 잡종지 39만 ㎡는 그래서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강과 함께 살던 마을의 생활권이 통째로 국유지 대장에 옮겨 적힌 흔적입니다.

흥미로운 후일담이 하나 있습니다.

이 광활한 저습지 벌판은 훗날 목동 신시가지 개발의 배후지가 되고,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학교, 공원이 들어선 주거지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912년의 갈대벌 위에 오늘 수만 명이 살고 있는 셈입니다.



5. 논 13필지 36,760㎡는 무엇을 말해주나요?

필지 수만 놓고 보면 신정동 국유지의 주인공은 논입니다.

31필지 가운데 13필지, 무려 42%가 논이었습니다.

면적은 36,760㎡, 약 1만 1천 평입니다.

논 한 필지의 평균은 2,828㎡, 850평 남짓입니다.

잡종지 평균의 14분의 1 크기입니다.

이 대비가 재미있습니다.

잡종지가 벌판째 통으로 기록된 땅이라면, 논은 물길과 논둑을 따라 잘게 나뉜 생활의 단위였습니다.

13필지의 국유 논은 아마도 안양천 물을 끌어 쓰기 좋은 자리마다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국유지가 된 논이라 해도 벼농사가 멈춘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마을 농민들이 소작으로 계속 경작하며 국가에 소작료를 냈습니다.

모내기 철이면 이 논들에도 어김없이 물이 잡히고, 가을이면 나락이 익었을 것입니다.

장부의 소유자 칸은 바뀌었지만, 논둑을 걷는 발걸음의 주인은 여전히 신정동 사람들이었습니다.


6. 밭 5필지 14,105㎡의 기록

밭은 5필지, 14,105㎡였습니다.

약 4,270평, 한 필지 평균 2,821㎡로 논의 평균 크기와 거의 정확히 같습니다.

물이 닿지 않는 언덕 자락과 모래 섞인 둔덕에는 밭이 일궈졌습니다.

보리와 콩, 조와 채소가 자라던 땅입니다.

논 면적의 38% 수준이라는 비율은 이 마을의 성격을 말해 줍니다.

신정동은 밭농사 마을이 아니라, 강물에 기대어 사는 논농사와 갈대벌의 마을이었다는 것입니다.

논과 밭을 합친 경작지는 총 18필지 50,865㎡.

필지 수로는 전체의 58%를 차지하지만, 면적으로는 11.2%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손이 닿은 땅은 잘게 많았고, 물의 영역은 넓게 적었습니다.


7. 수도용지 2필지 8,525㎡, 근대의 물길이 지나간 흔적

이번 기록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지목이 등장합니다.

수도용지 2필지, 8,525㎡입니다.

수도용지는 상수도 시설과 그 부지에 붙는 지목으로, 본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드물게 나타나는 희귀 지목입니다.

1912년이면 서울 사대문 안에서도 수돗물이 낯설던 시절입니다.

1908년 뚝도수원지가 완공되며 한성에 근대 상수도가 처음 공급되었고, 이후 수도 관련 시설과 부지들이 각지에 지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강변의 농촌 마을 신정동에 수도용지가 두 필지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 일대가 물을 다루는 근대 기반시설의 경로 위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한 필지 평균 4,263㎡라는 크기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초가지붕 마을과 갈대벌 사이로, 근대의 물길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장부 안에 갈대벌과 수도 시설이 나란히 적혀 있는 장면.

1912년 신정동은 전통과 근대가 한 페이지 위에서 만나던 마을이었습니다.



8. 대지 1필지 664㎡, 단 하나의 국유 집터

마지막 지목은 대지입니다.

단 1필지, 664㎡.

전체 국유지 면적의 0.15%에 불과한, 약 200평짜리 집터 하나입니다.

45만 ㎡가 넘는 국유지 안에 집터가 딱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신정동의 집들은 대부분 민유지 위에 있었고, 국가 소유의 건물 터는 사실상 이 한 곳뿐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664㎡가 어떤 건물의 터였는지 대장은 말해 주지 않습니다.

마을의 공용 건물이었을 수도 있고, 관에서 쓰던 작은 시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입니다.

이런 단독 필지야말로 훗날 문화유산 조사에서 가장 먼저 들여다보게 되는, 이야기가 응축된 지점이라는 사실입니다.


9. 숫자로 다시 보는 신정동 — 표와 그래프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장의 표로 정리합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잡종지

10필지

393,271

86.7%

39,327

13필지

36,760

8.1%

2,828

5필지

14,105

3.1%

2,821

수도용지

2필지

8,525

1.9%

4,263

대지

1필지

664

0.15%

664

합계

31필지

453,327

100%

14,624

※ 면적 비율은 소수점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한 값입니다. 지목별 면적의 단순 합은 453,325㎡로, 제시된 총면적 453,327㎡와 2㎡의 차이가 있습니다. 상세 내용은 아래 검증 노트를 참고해 주세요. 1912년 당시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김포군 관할이었으며, 현재의 서울 양천구 신정동 일대에 해당합니다.

면적 비율을 그래프로 보면 잡종지의 존재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잡종지

86.7%

8.1%

3.1%

수도용지

1.9%

대지

0.15%

이미지 설명: 위 표와 그래프는 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 국유지 31필지 453,327㎡의 지목별 구성을 정리한 것으로, 잡종지 10필지 393,271㎡, 논 13필지 36,760㎡, 밭 5필지 14,105㎡, 수도용지 2필지 8,525㎡, 대지 1필지 664㎡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10. 검증 노트 — 2㎡의 차이까지 기록합니다

검증 노트

본 시리즈는 모든 수치를 프로그램으로 교차 검산한 뒤 공개합니다.

첫째, 필지 수 검증입니다. 논 13필지, 밭 5필지, 잡종지 10필지, 수도용지 2필지, 대지 1필지를 더하면 정확히 31필지로, 제시된 전체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둘째, 면적 검증입니다. 지목별 면적을 모두 더하면 36,760 + 14,105 + 393,271 + 8,525 + 664 = 453,325㎡입니다. 제시된 총면적 453,327㎡와 2㎡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 정도의 미세한 차이는 원자료 작성 당시 평 단위를 ㎡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필지별 반올림 값이 누적되며 흔히 생기는 오차로 판단됩니다.

본 시리즈는 이런 차이를 임의로 맞추어 지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기초조사 자료의 생명은 정확성과 투명성이기 때문입니다.


11.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여기서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백 년 전 땅 장부가 오늘의 문화재 발굴과 무슨 상관이냐고요.

상관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현행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문화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조사는 보통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문헌과 지표를 훑는 지표조사, 일부 지점을 확인하는 표본조사, 시험 구덩이를 파 보는 시굴조사, 그리고 본격적인 발굴조사입니다.

이 모든 단계의 첫 단추가 바로 기초조사, 곧 옛 기록 검토입니다.

1912년 토지조사부는 이때 결정적인 나침반이 됩니다.

어느 자리가 옛 집터였는지, 어디가 논이었고 어디가 저습지였는지를 필지 단위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신정동처럼 잡종지가 87%였던 저습지 지대는 퇴적층 아래에 옛 생활면이 눌러 담겨 있을 가능성을, 단 하나뿐인 대지 664㎡는 건물지 유구의 가능성을 각각 시사합니다.

기초조사가 만들어 낸 실제 성공 사례들

옛 기록에서 출발한 조사가 무엇을 찾아냈는지, 세 장면만 보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 동대문운동장입니다.

운동장을 헐고 공원을 만들기 전, 옛 문헌과 지적 기록에 근거한 발굴조사가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 군영인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땅속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고, 지금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핵심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장면, 풍납토성입니다.

아파트 재건축 과정의 조사에서 한성백제 왕성의 실체가 확인되며 한국 고대사 연구의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기록 검토와 시굴조사가 없었다면 2천 년 왕성은 콘크리트 아래 영영 묻혔을 것입니다.

세 번째 장면, 2021년 인사동입니다.

재개발 부지의 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항아리째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실물이 서울 한복판에서, 정식 조사 절차 덕분에 세상으로 돌아온 순간이었습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땅을 파기 전에, 먼저 기록을 팠다는 것.

지금 정리하고 있는 1912년 신정동의 31필지 데이터도, 언젠가 이 일대에서 진행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첫 페이지가 되기 위한 기초 자료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총 31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453,327㎡로, 약 13만 7천 평에 해당합니다.

Q2. 1912년 신정동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은 무엇이었나요?잡종지입니다. 10필지 393,271㎡로 전체 국유지 면적의 86.7%를 차지했습니다. 안양천 하류의 갈대벌과 저습지가 국유지로 편입된 결과로 해석됩니다.

Q3. 1912년 신정동 국유지 중 논과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논은 13필지 36,760㎡, 밭은 5필지 14,105㎡였습니다. 논과 밭을 합친 경작지는 18필지 50,865㎡로, 필지 수의 58%를 차지하지만 면적으로는 11.2%였습니다.

Q4. 수도용지 2필지 8,525㎡는 어떤 의미인가요?수도용지는 상수도 시설 부지에 붙는 지목으로, 1912년 기록에서 매우 드물게 확인되는 희귀 지목입니다. 신정동 일대가 근대 상수도 기반시설의 경로 위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단서입니다.

Q5.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에 앞서 진행되는 기초조사의 핵심 문헌 자료입니다. 옛 집터, 경작지, 저습지의 위치를 필지 단위로 파악해 조사 범위와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활용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 국유지는 총 31필지 453,327㎡였으며,


논 13필지 · 밭 5필지 · 잡종지 10필지 · 수도용지 2필지 · 대지 1필지로 구성되어


전체 면적의 86.7%가 갈대벌과 저습지의 잡종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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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현재의 서울 양천구 신정동 일대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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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는 베어도 이듬해 다시 자랐다.


장부의 주인은 바뀌어도


논둑을 걷는 발걸음은 바뀌지 않았다.



물이 들고 나던 그 벌판 위에


오늘은 수만 개의 창문이 불을 켠다.



백십사 년 전 서른한 줄의 기록이


당신이 선 그 자리의 첫 문장이었다는 것.



땅은 잊지 않는다.


우리가 읽어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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