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금천구 시흥동, 지금 우리가 아는 곳이 아니었다고?”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조사잡종지·연못금천구 역사시흥동1912년 서울
지하철역 그 발밑,700필지 논밭과 절터가 잠든 1912년 시흥동
1912년 금천구 시흥동 토지대장으로 읽는 잊혀진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자료
아침마다 붐비는 시흥동 지하철역 플랫폼.
그 바쁜 출퇴근길 발밑에,
1912년에는 227필지의 논이 황금빛으로 출렁이고,
절터 세 곳에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씨 222필지, 마을 전체 토지의 30%를
한 성씨가 쥐고 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목차
1912년, 금천구 시흥동을 만나다
논과 밭 — 700필지 삶터의 압도적 규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집터 125필지
역사의 흔적 — 사사지 3필지와 절터의 비밀
정체불명의 땅 — 잡종지 10필지가 품은 이야기
작지만 소중했던 연못, 그 자리는 지금 어디인가
금천구 시흥동 성씨 이야기 — 이씨의 압도적 존재감
나라의 땅 국유지 20필지의 역사적 의미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시흥동에 주목하는 이유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01 — 1912년, 금천구 시흥동을 만나다
아침마다 출퇴근 인파로 붐비는 시흥동.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아파트와 상가가 빼곡하게 들어선 이 도심 한가운데가, 불과 100여 년 전에는 전혀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다. 지금 바쁘게 지나치는 그 발밑에, 수백 필지의 논과 밭이 펼쳐지고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고요하게 흘렀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의 기록에 따르면, 1912년의 금천구 시흥동은 총 700필지, 1,788,632㎡의 규모를 가진 마을이었다. 178만 제곱미터. 그 넓은 땅 위에 논과 밭, 집터, 절터, 연못, 그리고 잡종지까지 다양한 용도의 공간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토지 구성을 가진 동네는 서울 안에서도 흔치 않다. 시흥동이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다층적인 삶이 어우러진 복합 공동체였다는 뜻이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 다양한 토지 구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논, 밭, 집터, 절터, 잡종지, 연못이 한 마을 안에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매장 문화재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그 1912년 시흥동의 땅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총 필지
700필지
1912년 기준
총 면적
1,788,632㎡
약 54만 평 규모
논(답)
227필지
720,952㎡
밭(전)
331필지
784,585㎡
02 — 논과 밭, 700필지 삶터의 압도적 규모
1912년 시흥동 700필지 중 논과 밭을 합치면 558필지, 1,505,537㎡에 달한다. 전체의 84%가 농경지였다는 뜻이다. 이 비율은 당시 시흥동이 얼마나 철저하게 농업 중심 마을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 지하철역 주변 상가와 아파트가 들어선 그 자리의 10곳 중 8곳 이상이 논이거나 밭이었던 것이다.
논이 227필지, 720,952㎡. 시흥동의 논은 안양천 지류와 주변 수로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좋은 지형 덕분에 발달했다. 봄이면 못자리에서 키운 모종을 논으로 옮겨 심고, 여름이면 초록빛 벼가 마을 전체를 감쌌다. 가을이면 황금빛 이삭이 고개를 숙이며 수확의 시간을 알렸다. 그 벼가 주민들의 한 해 양식을 책임졌다.

밭은 논보다 더 많은 331필지, 784,585㎡였다. 필지 수에서도, 면적에서도 논을 앞질렀다. 배추, 무, 고추, 참깨, 콩, 팥. 계절마다 다른 작물이 밭을 가득 채웠고, 주민들은 그 밭에서 난 채소로 식탁을 채우고 이웃과 나눴다. 밭 지대는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생활 유물 출토 가능성이 높은 구역으로 분류된다. 매년 경작으로 표토가 뒤집히지만, 그 아래 지층에는 이전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03 —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집터 125필지
논과 밭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흥동이었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던 집터도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125필지, 154,413㎡의 대지다. 700필지 중 125필지라는 숫자는 당시 시흥동이 단순한 경작지가 아닌, 꽤 많은 가구가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서울 안의 다른 소규모 마을과 비교하면 집터의 절대적 필지 수 자체가 상당한 규모다.
125필지의 집터 위에 수백 명의 삶이 함께 숨 쉬었다. 마당이 있는 한옥들이 논밭 사이로 길을 내어 이어지고, 저녁이면 굴뚝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 우물가에서 나누는 대화, 논에서 돌아온 농부가 마루에 걸터앉아 저녁 바람을 맞는 그 평화로운 일상. 지금의 빽빽한 시흥동 골목 어딘가에 그 온기가 아직 배어 있다.

집터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집중적인 유물 출토가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온돌 흔적, 기와 조각, 분청사기·백자 파편, 우물 터, 철제 생활 도구들이 그 집에서 살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말을 건네온다. 시흥동 125필지의 집터 지층이 품고 있을 이야기가 언젠가 세상으로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04 — 역사의 흔적, 사사지 3필지와 절터의 비밀
시흥동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있다. 바로 사사지(寺社地) 3필지, 2,998㎡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동네들 중 상도동에 2필지, 신림동에 2필지의 사사지가 있었는데, 시흥동에는 무려 3필지가 있었다. 서울 남서쪽 지역에는 조선 시대부터 크고 작은 사찰들이 여럿 자리 잡고 있었고, 시흥동의 세 사사지는 그 불교 문화의 흔적이다.
각 사사지에 어떤 사찰이 있었는지, 그 규모는 얼마나 되었는지는 더 정밀한 문헌 연구와 지표조사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 곳의 절터가 시흥동 어딘가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지고, 주민들이 새벽길을 걸어 절에 오르던 그 기억이 땅속에 남아 있다.
시흥동 사사지 3필지, 왜 중요한가
상도동 2필지, 신림동 2필지에 비해 시흥동의 사사지는 3필지로 서울 남서부 지역에서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사사지에서는 건물지 기초석, 기와 조각, 청동 불구, 도자기 공양 용기 등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시흥동처럼 안양천과 지류가 가까운 지역의 사찰 터에서는 고려 시대까지 소급되는 유물층이 확인된 선례가 있어 발굴조사 기관들의 각별한 주목이 필요하다.
05 — 정체불명의 땅, 잡종지 10필지가 품은 이야기
시흥동에는 논도 밭도 집터도 아닌, 독특한 성격의 땅이 있었다. 잡종지 10필지, 121,964㎡. 이 시리즈에서 다른 동네들과 비교하면 시흥동의 잡종지 면적은 단연 눈에 띈다. 10필지에 121,964㎡라면 단순 계산으로도 필지당 평균 12,000㎡가 넘는 넓은 땅이다. 논이나 밭, 주거지도 아닌 이 광활한 잡종지가 대체 어떤 용도였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다.
잡종지는 특정 용도가 정해지지 않거나 복합적 목적으로 사용되던 땅을 의미한다. 장터가 서던 공터, 마을 공동 작업장, 도자기나 옹기를 굽는 가마터, 혹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부지가 잡종지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흥동의 121,964㎡에 달하는 잡종지가 과연 어떤 공간이었을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밝혀질 날을 기다린다. 만약 이곳이 도자기 가마터였다면, 그 아래 지층에서 다량의 도자기 폐기물이 출토될 가능성도 있다.
논도 밭도 집터도 아닌 121,964㎡의 잡종지. 이 넓은 땅에서 1912년 시흥동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그 답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06 — 작지만 소중했던 연못, 그 자리는 지금 어디인가
시흥동에는 아주 작지만 마을의 일상과 깊이 연결된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연못 2필지, 1,127㎡. 신림동(224㎡)이나 상도동(224㎡)의 연못보다 훨씬 큰 규모다. 두 필지의 연못이 각각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더 구체적인 기록이 있어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연못들이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논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 역할을 하거나, 마을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물을 긷는 공동 우물의 기능을 했을 것이다. 여름이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연못 주변에 가득하고, 아이들이 연못가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풀잎으로 배를 접어 띄우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겨울이면 꽁꽁 언 연못 위를 아이들이 미끄러지며 놀았을 것이다. 그 연못이 있던 두 자리가 지금 시흥동의 어느 건물 아래에 잠들어 있다.

연못 지층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특별한 관심 구역이다. 연못에는 마을 사람들이 버린 도자기 조각, 나무 그릇 파편, 씨앗류 등이 퇴적되는 경우가 많고, 물기가 많은 환경 덕분에 유기물 보존율이 높다. 시흥동의 두 연못 지층이 품고 있을 이야기가 언젠가 발굴조사를 통해 세상에 나올 날을 기대해 볼 만하다.
07 — 금천구 시흥동 성씨 이야기, 이씨의 압도적 존재감
1912년 시흥동에서 토지를 소유한 성씨들을 보면, 마을의 인적 구성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씨가 222필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전체 700필지 중 약 32%. 마을 땅 세 필지 중 하나를 이씨가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토지 소유를 넘어 이씨 가문이 시흥동 마을의 실질적인 중심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뒤를 이어 김씨 93필지, 안씨 57필지, 배씨 39필지, 문씨 38필지가 마을의 주축을 이뤘다. 안씨 57필지, 배씨 39필지, 문씨 38필지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성씨들이 시흥동에서 상당한 규모의 땅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각 씨족 공동체가 오랜 세월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1912년 시흥동 주요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이씨222필지 (전체의 약 32%)
김씨93필지
안씨57필지
배씨39필지
문씨38필지
국유지20필지
이씨 222필지가 마을 전체의 1/3을 차지한다는 것은, 이씨 가문의 제사 공간, 문중 회합 장소, 집단 주거 구역이 마을 곳곳에 분산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씨 소유 토지가 집중된 구역은 조선 시대 양반 집안의 생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지점으로 특별히 주목된다.
08 — 나라의 땅 국유지 20필지의 역사적 의미
1912년 시흥동에는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국유지가 20필지 있었다. 시흥은 조선 시대에 경기도 시흥현에 속했던 지역으로, 한성 도성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지리적 위치 덕분에 시흥 일대에는 조선 시대부터 역참과 관아 관련 시설이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20필지의 국유지는 그런 역사적 맥락의 연장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참 부속지, 군사 관련 시설, 혹은 국가 농장으로 활용되던 둔전(屯田)이었을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국유지들은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넘어갔고, 이후 공공시설이나 도로 부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밟았다. 지금 시흥동의 도로와 공원, 공공건물 중 일부가 그 20필지의 역사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09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시흥동에 주목하는 이유
시흥동은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서울 남서부 지역 중 가장 다층적인 역사 가능성을 품은 동네 중 하나다. 논, 밭, 집터, 사사지 세 곳, 연못 두 곳, 광활한 잡종지, 그리고 이씨 중심의 대규모 씨족 거주 흔적. 이 모든 요소가 한 마을 안에 복합적으로 분포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특히 121,964㎡에 달하는 잡종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세 곳의 사사지가 각각 어떤 사찰과 연관되어 있었는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국가유산청 규정에 따라 시흥동 내 건축이나 토지 형질 변경 전에는 반드시 지표조사를 거쳐야 하며, 유존 가능성이 확인되면 표본조사 → 시굴조사 →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단계가 진행된다.

2023년부터 소규모 발굴조사에 대한 국비 지원이 가능해졌다. 만약 시흥동 내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건축 공사를 앞두고 있다면,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전문 발굴조사 기관에 지표조사를 먼저 의뢰해 볼 것을 권한다. 내 땅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아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공사 과정에서 불필요한 법적 분쟁을 예방하는 실질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10 —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1912년의 시흥동을 한 바퀴 돌아왔다. 700필지 1,788,632㎡의 땅 위에서 우리는 논에서 벼를 심던 이씨 가문을 만났고, 밭을 일구던 김씨와 안씨를 만났다. 세 곳의 절터에서 기도를 올리던 사람들을, 연못가에서 놀던 아이들을, 그리고 정체 모를 잡종지 어딘가에서 삶을 이어가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그 모든 이야기가 지금 시흥동 지하철역 플랫폼 아래에, 빽빽한 아파트 지층 속에, 출퇴근길 발밑에 잠들어 있다. 아침마다 바쁘게 지나치는 그 발밑에서 100년 전 사람들의 땀과 기도가 고요히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안다.

다음에 시흥동에서 지하철을 내릴 때, 혹은 출퇴근길 그 골목을 지날 때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자. 이 땅 아래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 짧은 질문이 우리를 100년의 시간 너머로 이어준다.
세 곳의 절터에서 기도 소리가 울리고,
이씨 222필지 논밭에서 황금빛 수확이 펼쳐지던 그 가을.
연못가에서 놀던 아이들의 웃음이 아직 땅 아래에 있다.
출퇴근길 지하철 플랫폼 발밑에,
700필지의 기억이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시흥동을 지나는 오늘의 당신에게,
그 100년 전의 온기가 닿기를 바란다.
시흥동금천구역사문화재지표조사문화재발굴조사사사지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뢰1912년서울잡종지서울문화유산매장유산seoulheritage금천구역사탐방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