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동, 지금 우리가 아는 곳이 아니었다고?”
- 서울 HI
- 5월 20일
- 2분 분량
아침마다 붐비는 지하철역과 바쁜 출퇴근길로 익숙한 금천구 시흥동. 그런데 이곳이 과연 100여 년 전에도 이렇게 바빴을까? 시간 여행을 떠나볼 준비가 되었어? 자, 시곗바늘을 1912년으로 돌려보자!
목차
1912년, 금천구 시흥동을 만나다
논과 밭, 금천구 시흥동의 주요한 삶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대지’
역사의 흔적, ‘사사지’와 ‘임야’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잡종지’
작지만 소중했던 ‘연못’
금천구 시흥동 성씨 이야기
나라의 땅, 국유지의 비밀
에필로그 -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1912년, 금천구 시흥동을 만나다
“시흥동의 1912년 모습이라니?” 지금의 시흥동을 생각하면 아파트와 상가가 가득한 도심을 떠올리겠지만, 그때는 달랐어. 그때의 시흥동은 무려 700필지, 총 1,788,632㎡의 땅 위에 다양한 모습의 삶터가 펼쳐져 있었어.
논과 밭, 금천구 시흥동의 주요한 삶터
당시 시흥동에는 넓고 푸르른 논이 펼쳐져 있었어. 227필지에 달하는 720,952㎡의 논은 주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먹거리 터전이었지. 이외에도 331필지, 784,585㎡의 밭이 있어 주민들은 계절마다 다양한 작물을 키워 삶을 이어갔어. 농사가 중심이 된 이곳의 일상은 어땠을까?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대지’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 바로 대지. 1912년 시흥동에는 125필지, 154,413㎡의 집터가 있었어. 사람들은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갔지. 집집마다 피어난 이야기들을 상상하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아?
역사의 흔적, ‘사사지’와 ‘임야’
역사의 발자국을 느낄 수 있는 땅도 있었어. 3필지, 2,998㎡의 사사지(절터)는 과거 이곳에 존재했을 법한 사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 그리고 산림으로 이루어진 임야가 2필지, 2,591㎡ 존재했지. 도시 속에 묻힌 자연과 역사의 흔적들이 참 귀하게 느껴지네.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잡종지’
잡종지라는 명칭이 생소하지? 10필지, 121,964㎡의 잡종지는 당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공간이야. 때로는 장터가, 때로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터로 사용되었겠지. 그 안에서 주민들의 다양한 생활 이야기가 펼쳐졌을 거야.
작지만 소중했던 ‘연못’
마을 한구석, 작지만 소중한 연못 2필지(1,127㎡)도 있었어. 마을 아이들이 놀이터 삼아 뛰어놀거나 주민들이 물을 기르는 데 이용했을 그 연못,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네.
금천구 시흥동 성씨 이야기
1912년의 시흥동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이곳에 가장 많이 땅을 소유하고 살았던 성씨는 바로 이씨(222필지)였어. 그 다음으로는 김씨(93필지), 안씨(57필지), 배씨(39필지), 문씨(38필지) 등이 마을의 주축이었지. 다양한 성씨들이 각자의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아?
나라의 땅, 국유지의 비밀
당시 시흥동에는 국유지도 20필지 있었어. 국가가 관리하던 이 땅들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혹시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이나 공공시설의 자리였을지도 모르지. 작은 궁금증들이 모여, 시흥동의 역사가 더 흥미롭게 느껴져.
에필로그 -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1912년의 시흥동과 현재의 시흥동,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지? 이렇게 옛날의 시흥동 모습을 들여다보니,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와. 우리 주변에 숨겨진 역사를 돌아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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