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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 1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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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필지, 5만 1천 평방미터 — 이 시리즈에서 가장 큰 땅이 품은 가장 복잡한 이야기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국유지 기초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모든 것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을 잠깐 돌아봅니다. 노고산동 20,512㎡, 신설동 19,451㎡, 쌍계동 17,649㎡. 결코 작지 않은 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할 금천구 시흥동은 그 모든 것을 단숨에 넘어섭니다. 20필지, 51,702㎡.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지역의 두 배가 넘는 면적입니다. 여의도공원 전체 면적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넓이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구성이 더 놀랍습니다. 밭, 대지, 잡종지, 논 — 무려 네 가지 지목이 한 동네 안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지목, '잡종지(雜種地)'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잡종지가 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시흥동에만 그것이 있었을까요.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지금 시작됩니다.

20필지

1912년 시흥동


국유지 총 필지 수

51,702㎡

국유지 전체 면적


(약 15,640평)

10필지

밭 (전, 田)


28,552㎡

7필지

대지 (집터)


16,687㎡

1필지

잡종지


4,482㎡

2필지

논 (수전)


1,980㎡


목 차

1. 시흥동, 천 년의 길목에 쌓인 역사의 지층

2. 20필지 기초조사 — 네 가지 지목이 그리는 복합 지형도

3. 잡종지(雜種地)란 무엇인가 — 이 시리즈 첫 등장의 의미

4. 밭 10필지, 이 시리즈 최대 규모 전(田) 지목의 발굴 가능성

5. 대지 7필지 — 시흥행궁(始興行宮)의 흔적을 찾아서

6. 문화재 지표조사 — 51,702㎡를 어떻게 접근하나

7.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대규모 복합 지목에 적용하면

8. 서울 다른 지역과 규모 비교 — 시흥동이 갖는 특별한 위치

9. 문화재 발굴 기관 — 대규모 복합 조사의 주체들

10. 성공 사례 — 왕의 길목에서 나온 것들

11. 마치며 — 가장 큰 땅이 들려주는 가장 깊은 이야기


1. 시흥동, 천 년의 길목에 쌓인 역사의 지층



시흥(始興). 이름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습니다. '비로소 흥한다'는 뜻을 가진 이 이름은 조선 시대 경기도 시흥현(始興縣)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 왕조가 경기 남부 일대를 관할하는 지역 행정 중심으로 삼았던 이 고장은, 그 이름처럼 역사의 중심에서 오랫동안 '흥성'해 왔습니다.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은 서울 남서부에 위치하며, 관악산 북쪽 기슭과 안양천 사이의 완만한 평지에 자리합니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 한양 도성에서 수원, 충청, 전라, 경상도로 이어지는 삼남대로(三南大路)가 통과하는 핵심 길목이었습니다. 모든 남쪽 길이 이 땅을 거쳐야 했고, 그 때문에 이 땅은 언제나 사람과 역사의 교차점이 되었습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정조대왕(正祖大王)과의 인연입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 지금의 수원 화성 융릉)을 참배하기 위해 매년 수원을 오갔는데, 그 능행(陵幸) 길의 중간 기착지가 바로 시흥 일대였습니다. 정조는 이 길목에 시흥행궁(始興行宮)을 세워 하루를 묵었습니다. 왕이 머물렀던 그 땅, 지금의 시흥동 국유지 어딘가가 그 행궁 터와 겹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초조사 시리즈에서 시흥동은 단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20필지, 51,702㎡. 이 광대한 국유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이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복층적이고 가장 풍부합니다.


2. 20필지 기초조사 — 네 가지 지목이 그리는 복합 지형도


숫자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이번 데이터는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지역보다 복잡하고 입체적입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전체 비율

밭 (전, 田)

10필지

28,552㎡

약 55.2%

대지 (집터)

7필지

16,687㎡

약 32.3%

잡종지 (雜種地)

1필지

4,482㎡

약 8.7%

논 (수전, 水田)

2필지

1,980㎡

약 3.8%

합계

20필지

51,702㎡

100%

밭 (田)

55.2%

대지

32.3%

잡종지

8.7%

논 (水田)

3.8%

밭이 10필지, 28,552㎡로 전체의 55.2%를 차지합니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어떤 지역의 밭보다도 넓습니다. 신설동의 밭이 11,973㎡였으니, 시흥동의 밭은 그 두 배를 훌쩍 넘습니다. 삼남대로 길목에 이렇게 넓은 국유 밭이 있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조선 왕조의 경제적 요충지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대지가 7필지, 16,687㎡로 전체의 32.3%를 차지합니다. 이 역시 압도적인 규모입니다. 노고산동의 대지 전체(7필지, 13,980㎡)보다 넓습니다. 이 대지들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가 — 이 질문이 이 기초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행궁, 관아, 역참, 군사 시설 중 어느 것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목표가 됩니다.

논이 2필지, 1,980㎡로 전체의 3.8%를 차지합니다. 작은 비중이지만 두 필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안양천의 지류와 연결된 소규모 수전이 분산 배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 사상 처음 등장하는 잡종지가 1필지, 4,482㎡로 전체의 8.7%를 차지합니다.

"100년 전 서울의 지도와 기록을 통해 잊혀진 역사를 되짚고,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갑니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3. 잡종지(雜種地)란 무엇인가 — 이 시리즈 첫 등장의 의미



이 시리즈를 통틀어 처음 등장하는 지목, 잡종지(雜種地). 낯선 이름입니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에서 사용된 지목 분류 중 하나인 잡종지는, 논·밭·대지·임야·묘지·사찰지 등 다른 어떤 지목에도 해당하지 않는 토지를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노면(路面), 하천 제방, 광장, 운동장, 공사 현장, 창고 부지, 군사 시설 부지, 시장 터 등이 잡종지로 분류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용도가 명확히 하나로 정해지지 않은 복합적 목적의 땅, 혹은 특수 목적으로 쓰이는 땅입니다. 1912년 시흥동에 잡종지 1필지, 4,482㎡가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 땅이 단순한 농경지나 주거지가 아닌, 뭔가 다른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시흥동 잡종지 4,482㎡의 정체 — 세 가지 가설

가설 1 — 역원(驛院) 부속 시설: 삼남대로의 주요 역참인 시흥역(始興驛)과 관련된 마구간·창고·숙소 부속 공간. 교통 요지의 역참은 단순 건물 외에 광장이나 적치 공간을 필요로 했고, 이런 복합 기능 공간이 잡종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가설 2 — 행궁 부속 공간: 정조의 시흥행궁(始興行宮)에는 본관 건물 외에도 경호 인원 숙소, 마구간, 행렬 대기 공간 등 부속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이 복합 기능 공간이 잡종지로 분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설 3 — 군사 훈련 공간: 삼남대로 길목의 군사 검문소나 훈련 공간. 이동하는 병력을 위한 집결지나 훈련장이 잡종지로 기록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 잡종지 4,482㎡는 발굴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구역입니다. 복합 기능 공간이었다면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혼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구간 터라면 말뼈와 마구(馬具) 유물이, 시장 터라면 상업 거래 관련 유물과 도량형 기구가, 군사 시설 터라면 무기류와 군복 관련 유물이 출토될 수 있습니다. 잡종지 하나가 당시 시흥동의 복잡한 사회경제적 기능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타임캡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밭 10필지, 이 시리즈 최대 규모 전(田) 지목의 발굴 가능성


10필지, 28,552㎡의 밭. 이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넓은 밭 구역입니다. 신설동의 밭(11,973㎡)이 이미 넓다고 생각했는데, 시흥동의 밭은 그 2.4배에 달합니다. 이 광대한 국유 밭이 삼남대로 길목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질까요.

가장 유력한 해석은 역둔토(驛屯土)입니다. 조선 시대 역참 운영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는데, 이를 충당하기 위해 역 주변 농경지에서 나오는 수확물을 역의 운영 재원으로 활용했습니다. 이런 역의 전용 농경지를 역둔토라고 했고, 시흥역처럼 중요한 역참 주변에는 넓은 역둔토가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28,552㎡에 달하는 시흥동의 국유 밭이 바로 이 역둔토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관영 채소밭이나 약초밭입니다. 정조의 능행 때 왕과 수행원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한 식재료 공급지가 행궁 주변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밭의 배치가 행궁 위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체계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발굴 관점에서 10필지의 밭은 표본조사를 통해 먼저 각 필지의 문화층 존재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경작층 아래에 조선 시대 생활 유구가 있다면, 밭의 경계를 나누던 석열(石列)이나 배수 시설, 농기구 관련 유물이 출토될 것입니다. 역둔토였다면 역과 밭의 경계를 표시하는 표석(標石)이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5. 대지 7필지 — 시흥행궁(始興行宮)의 흔적을 찾아서



대지 7필지, 16,687㎡. 이 숫자 앞에서 한 이름이 떠오릅니다. 시흥행궁(始興行宮). 조선 후기 정조대왕이 수원 현륭원 능행(陵幸) 중 중간 기착지로 사용했던 임시 왕궁입니다.

정조는 재위 기간(1776~1800) 동안 총 13차례 현륭원을 참배했습니다. 한양에서 수원까지의 왕의 행차는 수천 명의 인원이 동행하는 대규모 행렬이었고, 중간에 하루를 묵을 수 있는 행궁이 필요했습니다. 시흥행궁은 1795년 을묘원행(乙卯園幸) 때 크게 확장되었는데, 이 해의 능행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겸한 역대 최대 규모의 왕실 행사였습니다. 조선의 군사·문화·예술이 한데 모였던 그 역사적 행렬이 시흥동의 이 땅 위를 지나갔습니다.

시흥행궁은 개항 이후 점차 쇠락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철거되었습니다. 그 정확한 위치와 규모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12년 기록의 대지 7필지, 16,687㎡가 행궁 터 또는 그 부속 시설과 일치하거나 근접한다면, 이 기초조사 데이터는 시흥행궁의 위치를 추적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대지 발굴에서 행궁 관련 유구가 확인된다면 — 기단 석렬, 장대석(長臺石, 넓고 긴 돌), 온돌 시설, 전돌(煎乭, 벽돌) 포장면, 우물 등 — 이는 조선 후기 왕실 건축의 흔적을 복원하는 매우 중요한 발굴이 됩니다. 정조의 능행과 관련된 왕실 유물, 즉 백자 어기(御器)나 왕실 인장, 행렬 관련 금속 유물 등이 출토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시흥행궁 관련 핵심 참고 자료: 정조실록(正祖實錄),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795년 능행 기록), 시흥현 지도, 1872년 군현도(郡縣圖), 일제강점기 초기 지형도. 이 자료들을 1912년 지적원도와 교차 분석하면 대지 7필지의 역사적 성격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6. 문화재 지표조사 — 51,702㎡를 어떻게 접근하나



51,702㎡. 이 면적의 지표조사는 이 시리즈에서 다룬 어떤 사례와도 차원이 다릅니다. 이전까지 살펴본 노고산동(20,512㎡), 쌍계동(17,649㎡)의 두 배가 넘는 이 부지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우선 20필지를 지목별로 그룹화합니다. 밭 10필지, 대지 7필지, 잡종지 1필지, 논 2필지 — 각 지목 그룹은 서로 다른 조사 방법과 우선순위를 요구합니다. 대지 7필지는 건물 기초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가장 먼저 집중 지표조사를 실시합니다. 특히 행궁 터와의 관련성을 확인하기 위해 사전 문헌 조사와 고지도 대조를 병행합니다.

잡종지 1필지는 성격 파악이 우선입니다. 지표면에서 어떤 유물이나 흔적이 발견되는지에 따라 역원·행궁·군사 시설 중 어떤 가설이 더 유력한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밭 10필지는 넓은 면적 때문에 드론 항공 촬영으로 전체를 먼저 파악한 뒤, 이상 징후가 나타나는 구역을 선별해 집중 지표조사를 진행합니다. 논 2필지는 수계 분석과 함께 주변 지형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규모의 지표조사라면 최소 2주에서 한 달 이상의 현장 조사 기간이 필요하고, 전문 조사원 10명 이상이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됩니다. 조사 결과는 지목별로 구분된 분포도와 함께 종합 보고서로 정리되어 이후 시굴·발굴조사의 기초 자료가 됩니다.


7.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대규모 복합 지목에 적용하면


51,702㎡의 복합 지목 부지에서 시굴조사(試掘調査)는 전략적 접근이 필수입니다. 전체를 한꺼번에 시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비효율적입니다.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문화재 밀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구역을 우선 선정하고, 단계적으로 시굴 범위를 확대하는 전략을 씁니다.

1단계로 대지 7필지와 잡종지 1필지에 집중 시굴을 실시합니다. 행궁 관련 유구 확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대지 필지마다 2~3개의 트렌치를 설치해 건물 기단층의 존재와 깊이를 확인합니다. 잡종지에는 넓은 면적(4,482㎡)을 고려해 격자형 탐색 트렌치를 배치합니다.

표본조사(標本調査)는 밭 10필지(28,552㎡)에 주로 적용합니다. 10필지를 북·중·남 세 구역으로 나눠 각 구역 대표 필지에서 소형 트렌치를 굴착하고 문화층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표본 결과가 긍정적이면 해당 구역 전체 시굴로 확대하고, 부정적이면 다른 구역에 집중합니다.

발굴조사(發掘調査)는 시굴에서 유적이 확인된 구역부터 시작합니다. 행궁 터가 확인된다면 이것만으로도 수년에 걸친 대규모 발굴 프로젝트가 될 수 있습니다. 정조의 능행 관련 유적이라면 국가유산청의 특별 관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고, 문화재 보호 구역 지정이나 사적(史蹟) 지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8. 서울 다른 지역과 규모 비교 — 시흥동이 갖는 특별한 위치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지역들의 면적을 한눈에 비교해봅니다.

시흥동 (금천)

51,702㎡

노고산동 (마포)

20,512㎡

신설동 (동대문)

19,451㎡

쌍계동 (노원)

17,649㎡

대방동 (동작)

8,211㎡

쌍문동 (도봉)

1,246㎡

시흥동 51,702㎡는 2위 노고산동(20,512㎡)의 2.5배가 넘습니다. 이 압도적인 규모 차이는 단순히 땅이 넓다는 것을 넘어, 이 지역이 조선 시대 국가 행정에서 차지했던 비중이 다른 지역과 달랐음을 보여줍니다. 삼남대로의 핵심 길목, 왕의 행차 기착지, 역참과 행궁의 소재지라는 역사적 위상이 이 넓은 국유지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지목 다양성 측면에서도 시흥동은 독보적입니다. 밭·대지·잡종지·논의 네 가지 지목이 공존하는 것은 이 시리즈에서 유일합니다. 각 지목이 서로 다른 역사적 기능을 담당했다면, 시흥동 국유지 20필지는 사실상 하나의 작은 도시 기능을 수행하는 복합 구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9. 문화재 발굴 기관 — 대규모 복합 조사의 주체들


51,702㎡, 네 가지 지목, 행궁 가능성이라는 조건의 발굴조사는 단일 기관이 단독으로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기관이 역할을 분담하고 긴밀하게 협력해야 합니다.

국가유산청(khs.go.kr)은 허가·감독의 최상위 기관으로, 특히 행궁 관련 유적이 확인될 경우 국가 차원의 특별 보호 조치가 발동될 수 있습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nrich.go.kr)은 왕실 관련 유적 발굴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 시흥행궁 관련 유구가 확인되면 직접 개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금천구청 문화체육과는 지역 내 문화재 행정의 실무 창구이며, 서울시 문화재과와 협력해 발굴 진행을 지원합니다. 실제 현장 조사는 한국문화유산협회(kaah.kr) 등록 발굴기관이 담당하는데, 이 규모의 복합 발굴이라면 광역 도심 유적 발굴 경험이 풍부하고 다수의 전문 인력을 보유한 대형 기관이 적합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초조사 데이터는 이 복잡한 발굴의 설계도 역할을 합니다. 20필지의 위치·면적·지목이 정리된 기초 데이터를 바탕으로, 발굴기관은 어느 구역부터 어떤 방법으로 접근할지를 훨씬 체계적으로 계획할 수 있습니다. 기초조사 없이 51,702㎡를 맨땅에 헤딩하듯 굴착하는 것과, 데이터를 가지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결과의 질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10. 성공 사례 — 왕의 길목에서 나온 것들



성공 사례 01 — 수원 화성행궁 발굴·복원 프로젝트

정조의 수원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병원으로 전용된 뒤 오랫동안 그 흔적이 묻혀 있었습니다. 1996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행궁의 건물 배치, 기단 석렬, 우물, 배수 시설이 차례로 확인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행궁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시흥행궁도 이와 유사한 발굴·복원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시흥동 국유지 대지 7필지가 그 핵심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 안양 과천 삼남대로 역참 유적 발굴

삼남대로 구간에 위치한 과천 인근 역참 유적 발굴에서 역둔토로 추정되는 경작층과 역참 건물지, 마구간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역 운영 관련 도량형 기구와 행정 문서 관련 인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시흥동의 밭 10필지와 잡종지 1필지가 이와 유사한 역참 관련 유적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공 사례 03 — 서울 종로 피맛골 잡종지 구역 발굴

종로 재개발 지역 내 잡종지로 분류된 구역에서 조선 시대 시장 관련 유구와 상업 유물이 대거 출토된 사례입니다. 도량형 기구, 엽전, 상업 계약서 관련 인장, 각종 상품 보관 용기가 발굴되었습니다. 잡종지 특유의 복합 기능이 다양한 종류의 유물을 한 곳에 집적시켰기 때문입니다. 시흥동 잡종지 4,482㎡도 이와 유사한 다층적 유물 출토 가능성을 가집니다.

세 사례 모두가 말해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역사의 교차점에 있던 땅일수록, 그 땅 아래에는 더 풍부하고 다양한 역사가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시흥동은 삼남대로와 왕의 능행길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이 교차점의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아직 절반도 알지 못합니다.


11. 마치며 — 가장 큰 땅이 들려주는 가장 깊은 이야기



왕이 지나간 길, 우리가 걷는 길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향해 걸었던 그 길. 수천 명의 신하와 군사들이 그 뒤를 따랐던 그 행렬. 한 번의 능행이 시흥 땅 위에 남긴 기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어딘가에 새겨져 있습니다.



밭을 갈던 농부의 손이, 역참을 지키던 병사의 발자국이, 행궁 마당을 쓸었던 관리의 빗자루 소리가 — 51,702㎡의 땅 아래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가장 큰 땅이 반드시 가장 큰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흥동만큼은, 면적만큼이나 깊고 넓은 역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 기초조사 시리즈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노고산동에서 시작해 대방동, 신설동, 쌍문동, 쌍계동을 거쳐 이곳 시흥동까지 — 서울 25개 구의 모든 국유지가 기록되는 날, 우리는 이 도시의 진짜 뿌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그 뿌리를 찾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초조사 데이터는 그 도구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지도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신이 서 있는 이 서울이라는 도시는, 수백 년의 삶이 층층이 쌓인 기억의 땅입니다. 삼남대로를 걷던 나그네도, 행궁 마당을 지키던 병사도, 역둔토를 갈던 농부도 — 모두 이 땅 위에서 살았고, 이 땅 아래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 이름들을 역사에 돌려주는 일. 그것이 문화재 발굴의 본질이고, 우리가 이 기초조사를 이어가는 이유입니다.



시흥동의 가장 큰 국유지가, 가장 큰 이야기를 품은 채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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