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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소금 창고 마을에 남은 밭 한 자락과 논 여섯 배미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0월 28일
10분 분량

최종 수정일: 10월 28일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서구 편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소금 창고 마을에 남은 밭 한 자락과 논 여섯 배미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전체

10필지

83,564㎡

밭 (전)

1필지

39,867㎡ · 47.7%

논 (답)

6필지

31,011㎡ · 37.1%

잡종지

1필지

10,208㎡ · 12.2%

대지

2필지

2,476㎡ · 3.0%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는 국유지 10필지, 총 83,564㎡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밭은 1필지 39,867㎡, 논은 6필지 31,011㎡, 잡종지는 1필지 10,208㎡, 대지는 2필지 2,476㎡였습니다.

즉, 1912년 염창동 국유지는 밭 한 필지가 면적의 약 47.7%를 차지한, 농경지 중심의 땅이었습니다.


강서구 염창동의 테마

  1.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밭 1필지와 논 6필지의 기록

  2. 1912년 염창동 국유지 현황: 10필지 83,564㎡, 밭 39,867㎡

  3. 염창동 역사, 소금 창고 마을의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읽기

  4. 1912년 염창동 국유지 절반이 밭 한 필지였다?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정리

  5. 강서구 염창동 역사와 1912년 국유지, 발굴조사 전에 꼭 봐야 할 숫자


염창동은 이름부터소금 창고였습니다.그런데 나라 땅의 절반은밭 한 필지였습니다.

염창역 지나갈 때 이름이 좀 특이하다고 느낀 적 있으신가요?

소금 염(鹽), 곳집 창(倉).

말 그대로 소금을 쌓아 두던 창고가 있던 동네입니다.

그러니 1912년 기록을 열면 소금 창고 터가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막상 숫자를 펼쳐 보면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갑니다.

나라가 가진 땅 10필지 가운데, 단 한 필지가 전체 면적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 필지는 창고 터가 아니었습니다.

밭이었습니다.

필지는 하나인데, 논 여섯 배미를 다 합친 것보다 넓은 밭.

강가 소금 마을에 왜 이렇게 큰 나라 밭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아파트가 빼곡한 그 땅 아래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고 114년 전의 장부를 한 장씩 넘겨 봤습니다.

끝까지 따라오시면, 염창동이라는 세 글자가 전혀 다르게 들릴 겁니다.


목차

  1. 소금 창고가 이름이 된 동네, 염창동 역사

  2. 1912년 염창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3. 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4. 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5. 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잡종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6. 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7. 표와 그래프로 보는 네 가지 땅

  8. 1912년의 염창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9. 소금배가 닿던 강가, 문화재 지표조사의 시선

  10.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조사 흐름

  11. 땅이 역사를 돌려준 성공 사례

  12. 114년 전 소금배 사공에게 보내는 답장


1소금 창고가 이름이 된 동네, 염창동 역사

서해의 소금이 한강을 거슬러 오던 길

염창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 이곳에 있던 소금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서해안 염전에서 만든 소금이 배에 실려 한강 하구로 들어왔습니다.

그 소금을 내려 쌓아 두던 곳이 바로 이 강가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마포 쪽으로 올라간 소금은 한양 사람들의 밥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실제로 마포의 염리동은 소금배가 드나들고 소금 장수들이 모여 살던 동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염창은 한양으로 가는 소금길의 중간 정거장이었던 셈입니다.

창고 하나가 마을의 이름이 되기까지

생각해 보면 신기합니다.

건물 하나가 수백 년 뒤 지하철역 이름으로까지 남았으니까요.

그만큼 그 창고가 이 마을 사람들의 삶에서 컸다는 뜻입니다.

새벽마다 배가 닿고, 짐꾼들이 소금 가마니를 나르고, 짠 바람이 강 냄새와 섞이던 마을.

안양천이 한강과 만나는 물목, 낮은 산자락이 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염창동은 그렇게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도 그 산은 염창산이라는 이름으로 동네 뒤편에 남아 산책로가 되어 있습니다.

1912년 국유지 기록은 바로 이 소금 마을의 땅을 숫자로 보여 줍니다.


21912년 염창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답부터 드립니다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국유지는 10필지, 83,564㎡가 있었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25,278평입니다.

표준 축구장 한 면을 약 7,140㎡로 잡으면, 축구장 11개 반 정도의 넓이입니다.

동네 하나에 흩어진 나라 땅으로는 꽤 묵직한 규모입니다.

필지 수는 적은데 왜 넓을까

10필지를 평균 내면 한 필지가 약 8,356㎡입니다.

그런데 이 평균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한 필지가 혼자서 39,867㎡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9필지는 모두 합쳐도 43,695㎡ 정도입니다.

한 필지와 아홉 필지가 거의 반반으로 땅을 나눠 가진, 아주 기울어진 구조입니다.

이런 쏠림은 동 단위 국유지 기록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염창동 기록의 주인공은 단연 그 한 필지의 밭입니다.

한 줄 정리 · 1912년 염창동 국유지는 10필지 83,564㎡로, 밭·논·잡종지·대지 네 가지 지목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3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필지, 39,867㎡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 가운데 밭은 1필지 39,867㎡였습니다.

국유지 전체 면적의 약 47.7%입니다.

평으로는 약 12,060평, 축구장 다섯 면 반을 이어 붙인 크기입니다.

필지 수로는 10분의 1인데, 면적으로는 절반에 가깝습니다.

논 여섯 배미보다 넓은 밭 하나

비교해 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논 6필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31,011㎡입니다.

밭 한 필지가 논 여섯 필지보다 약 8,856㎡ 더 넓었습니다.

강가 마을이니 당연히 논이 주인공일 거라는 예상이 여기서 뒤집힙니다.

왜 밭이었을까

정답을 기록 한 장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땅의 생김새를 떠올려 보면 짐작은 해 볼 수 있습니다.

물을 대기 쉬운 낮은 강변은 논이 되고,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비탈과 둔덕은 밭이 되는 것이 우리 옛 마을의 흔한 질서였습니다.

염창동에는 강을 굽어보는 산자락이 있었습니다.

그 완만한 경사면 어딘가에 넓은 밭이 한 덩어리로 펼쳐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필지로 이렇게 넓다는 건, 오랫동안 쪼개지지 않고 하나로 관리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가 이 밭을 일구었고, 왜 나라 땅으로 묶였는지는 앞으로 현장이 대답해 줄 질문입니다.



4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6필지, 31,011㎡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 가운데 논은 6필지 31,011㎡였습니다.

면적 비중은 약 37.1%입니다.

필지 수로는 10필지 중 6필지, 60%로 가장 많습니다.

개수로는 논이 1등, 넓이로는 밭이 1등인 셈입니다.

한 배미의 크기

6필지를 평균 내면 논 한 필지가 약 5,169㎡입니다.

대략 1,560평 정도의 논배미가 여섯 개 흩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같은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 논의 평균이 약 9,486㎡였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을 조금 넘는 크기입니다.

김포평야 쪽으로 탁 트인 방화동과 달리, 염창동은 산과 강 사이 좁은 땅에 논이 끼어 있었던 모습이 숫자에서도 읽힙니다.

모내기철이면 강물을 끌어온 논에 하늘이 비치고, 그 너머로 소금배 돛이 지나갔을 겁니다.

논과 소금배가 한 화면에 담기는 풍경, 그것이 1912년 염창동의 여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줄 정리 · 1912년 염창동 국유지 논은 6필지 31,011㎡로, 필지 수는 가장 많았지만 면적은 밭 1필지보다 작았습니다.


5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잡종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필지, 10,208㎡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 가운데 잡종지는 1필지 10,208㎡였습니다.

면적 비중은 약 12.2%입니다.

한 필지가 1만㎡를 넘으니, 결코 자투리땅이 아닙니다.

이름은 평범한데, 가장 궁금한 땅

잡종지는 논도 밭도 집터도 아닌, 다른 지목에 딱 들어맞지 않는 땅을 묶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조사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궁금한 땅이 됩니다.

강가 소금 마을이라는 조건을 떠올리면 상상이 커집니다.

짐을 부리던 나루의 둔치였을까요.

물이 들고 나는 강변 모래땅이었을까요.

아니면 창고가 사라진 뒤 쓰임이 정해지지 않은 채 남은 빈터였을까요.

기록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말할 수 없음"이 현장 조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름이 흐릿한 땅일수록, 땅속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6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필지, 2,476㎡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 가운데 대지는 2필지 2,476㎡였습니다.

면적 비중은 약 3.0%입니다.

한 필지 평균은 1,238㎡, 약 375평입니다.

작지만 사람이 머물던 자리

대지는 건물이 서 있던 땅입니다.

면적은 가장 작지만, 사람의 손때가 가장 짙게 밴 곳이기도 합니다.

집터에는 아궁이와 구들, 깨진 그릇, 기와 조각 같은 생활의 흔적이 층층이 남습니다.

나라 소유의 대지가 소금 창고 마을에 있었다는 점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관에서 쓰던 건물이 있던 자리였는지, 다른 사연으로 국유가 된 집터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살던 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조사의 우선순위는 높아집니다.

한 줄 정리 · 1912년 염창동 국유지 대지는 2필지 2,476㎡로 면적은 가장 작지만,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땅입니다.


7표와 그래프로 보는 네 가지 땅

1912년 염창동 국유지 현황표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필지당 평균

밭

1필지

39,867

47.7%

39,867㎡

논

6필지

31,011

37.1%

약 5,169㎡

잡종지

1필지

10,208

12.2%

10,208㎡

대지

2필지

2,476

3.0%

1,238㎡

국유지 합계

10필지

83,564

100%

약 8,356㎡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서구 염창동(당시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 지목별 합계는 83,562㎡로 총면적과 2㎡ 차이(검증 노트 참고)

면적 비중 그래프

밭 · 1필지39,867㎡ · 47.7%

논 · 6필지31,011㎡ · 37.1%

잡종지 · 1필지10,208㎡ · 12.2%

대지 · 2필지2,476㎡ · 3.0%

그래프를 보면 한눈에 들어옵니다.

볏짚빛 밭 막대 하나가 거의 절반을 채우고, 초록 논 막대가 그 뒤를 바짝 쫓습니다.

밭과 논을 합치면 70,878㎡, 국유지의 약 84.8%가 농사짓는 땅이었습니다.

나머지 15% 남짓을 잡종지와 대지가 나눠 가졌습니다.

방화동과 나란히 놓아 보면

같은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는 논이 99.2%를 차지한, 거의 한 가지 색깔의 땅이었습니다.

반면 염창동은 밭, 논, 잡종지, 대지 네 가지 색이 섞여 있습니다.

넓은 평야에 기댄 방화동과, 강과 산과 나루가 한데 모인 염창동의 차이가 지목 구성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같은 구 안에서도 동네마다 땅의 얼굴이 이렇게 다릅니다.


81912년의 염창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

여기서 꼭 짚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912년의 염창동은 행정구역상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 일대는 양천현에 속했습니다.

1896년에는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가 되었습니다.

토지조사 기록이 만들어지던 1912년에도 이 땅은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였습니다.

김포군을 거쳐 서울 강서구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양천군이 김포군에 합쳐지면서, 이곳은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가 됩니다.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영등포구에 속했고, 1977년 강서구가 새로 생기면서 지금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옛 땅을 다시 읽은 표현입니다.

반세기 넘게 경기도의 강변 마을이었던 곳이 짧은 시간 만에 서울의 주거지로 바뀌었습니다.

변화가 빠를수록 땅 밑의 기억은 더 쉽게 덮입니다.

그래서 이 오래된 숫자들이 더 귀합니다.


9소금배가 닿던 강가, 문화재 지표조사의 시선

나루가 있던 곳에는 흔적이 남는다

배가 닿고 짐을 부리던 곳은 사람이 끊임없이 모이던 곳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길이 생기고, 창고가 서고, 밥을 짓는 불이 피워집니다.

그 모든 활동은 흙 속에 흔적을 남깁니다.

깨진 옹기, 기와 조각,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 나무 기둥이 박혔던 구멍까지.

염창동처럼 수백 년 동안 물류의 길목이었던 땅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지목별로 달라지는 조사 포인트

1912년 기록이 귀한 이유는 개발 전 땅의 "원래 얼굴"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밭이었던 넓은 경사지는 경작층 아래 더 오래된 생활면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논이었던 저지대는 물과 흙이 쌓인 퇴적층 속 수로와 논둑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잡종지는 나루나 강변 시설과 관련된 흔적이 있는지 눈여겨볼 지점입니다.

대지는 건물지와 생활 유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입니다.

이렇게 지목을 알면 조사의 순서와 방식이 달라집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912년 기록을 동 단위로 하나하나 정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0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조사 흐름

땅을 읽는 네 개의 계단

문화유산 조사는 처음부터 땅을 크게 파헤치지 않습니다.

먼저 읽고, 조금 확인하고, 필요한 곳만 깊이 들어가는 단계적 과정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가 이 절차의 기준이 됩니다.

1단계 · 지표조사

문헌, 옛 지도, 1912년 토지 기록 같은 자료를 검토하고 현장을 걸으며 지표에 드러난 유물과 지형을 살핍니다.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판단하는 첫 관문입니다.

2단계 · 표본조사

가능성이 보인 범위 가운데 일부를 골라 작게 파 보며 유적이 있는지 빠르게 확인합니다.

3단계 · 시굴조사

트렌치를 넣어 땅속 층위를 확인하고, 유적의 분포 범위와 성격을 구체적으로 가늠합니다.

4단계 · 발굴조사

유적이 확인된 범위 전체를 체계적으로 파고 기록합니다. 가장 정밀하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단계입니다.

염창동 국유지에 대입해 보면

염창동 국유지 총면적 83,564㎡는 일반적으로 지표조사 대상이 되는 건설공사 기준인 3만㎡의 두 배를 훌쩍 넘습니다.

밭 한 필지만으로도 그 기준을 넘는 넓이입니다.

1912년 장부 한 장이 조사 설계도의 밑그림이 되는 셈입니다.

잠깐, 여러분 발밑의 이야기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염창동 어딘가에서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굴착기가 들어왔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흙 속에서 오래된 옹기 조각과 다듬은 돌이 줄지어 나옵니다.

공사는 멈추고, 일정은 밀리고, 비용은 하루하루 불어납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이 장면은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공사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반대로 사업 초기에 지표조사를 충실히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디를 조심해야 하는지 미리 알고 설계에 담을 수 있습니다.

옛 지목을 확인하고, 지금 위치와 겹쳐 보고, 가능성 높은 곳부터 살피는 것.

그것이 시간과 비용, 그리고 역사를 함께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11땅이 역사를 돌려준 성공 사례

빌딩 지하에 되살아난 한양의 골목

서울 종로 공평동에서는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됐습니다.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집터와 골목길이 층층이 드러났습니다.

유적은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새 건물 지하에 그대로 보존되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시민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개발과 보존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문을 연 신라의 흔적

금천구 독산동에서는 도시개발사업 구역을 조사하다가 유물 700점이 넘게 출토되었습니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나아가던 시기의 흔적이었습니다.

그 기록은 아파트 단지 안 전시관에 토층 전사와 복제 유물로 남아, 주민들이 일상 속에서 만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공통점은 하나, 먼저 읽었다는 것

두 사례 모두 땅을 파기 전에 기록과 지형을 살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옛 기록을 읽어 두면 조사 범위를 정확히 좁힐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굴착은 줄이고, 꼭 필요한 곳에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염창동의 1912년 국유지 기록도 바로 그런 "먼저 읽기"의 재료입니다.


12114년 전 소금배 사공에게 보내는 답장

숫자 뒤에 서 있는 사람들

10필지, 83,564㎡.

처음엔 그저 마른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 뒤에는 새벽 강물 위로 노를 젓던 사공이 있었습니다.

소금 가마니를 지게에 얹고 진흙 강둑을 오르던 짐꾼이 있었습니다.

산자락 넓은 밭에서 허리를 펴며 강 쪽을 바라보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들은 우리에게 편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땅을 남겼습니다.

밭의 흙과 논의 층, 집터의 그을음과 강변의 모래까지, 땅은 그 모든 걸 조용히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땅을 읽는 일은, 어쩌면 114년 늦게 보내는 답장일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이 강가에 있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음식을 오래 지키는 힘이 있다고 하지요.

염창동이라는 이름도 어쩌면 그렇게, 이 마을의 기억을 백 년 넘게 절여 지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염창역을 지나거나 염창산 길을 걷게 된다면, 잠깐 발밑을 내려다봐 주세요.

소금 창고 마을은 아직 그 자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읽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검증 노트

입력 자료의 수치를 계산으로 교차 확인했습니다. 밭 1필지, 논 6필지, 잡종지 1필지, 대지 2필지를 더하면 10필지로 합계와 일치합니다. 지목별 면적(39,867㎡ + 31,011㎡ + 10,208㎡ + 2,476㎡)을 더하면 83,562㎡로, 제시된 총면적 83,564㎡와 2㎡ 차이가 납니다. 평과 ㎡ 환산 과정에서 생기는 반올림 차이로 보이며, 본문과 표의 총면적은 원자료의 83,564㎡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면적 비중은 총면적 83,564㎡ 기준으로 밭 47.71%, 논 37.11%, 잡종지 12.22%, 대지 2.96%이며 본문에서는 소수 첫째 자리로 반올림했습니다.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입니다. 원자료 4번 문항의 "강서구염창동" 띄어쓰기는 "강서구 염창동"으로 바로잡았습니다. 1912년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였고, 현재 행정구역명으로 표기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염창동 국유지는 단 한 필지의 밭이 면적의 47.7%를 차지하는, 강서구 편에서 보기 드문 "한 필지 쏠림" 구조입니다. 앞서 다룬 방화동 국유지가 논 99.2%의 단색 구조였다면, 염창동은 밭·논·잡종지·대지 네 지목이 섞인 다색 구조입니다. 같은 한강변이라도 평야형 마을과 나루형 마을의 땅 구성이 뚜렷이 다르다는 점이 동 단위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Q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0필지, 83,564㎡였습니다.

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1필지 39,867㎡로, 국유지 면적의 약 47.7%를 차지했습니다.

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논은 6필지 31,011㎡로, 국유지 면적의 약 37.1%였습니다.

1912년 염창동 국유지 중 잡종지와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잡종지는 1필지 10,208㎡(약 12.2%), 대지는 2필지 2,476㎡(약 3.0%)였습니다.

염창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조선 후기 서해안에서 한강을 따라 들어온 소금을 보관하던 소금 창고(鹽倉)가 이곳에 있었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1912년 염창동은 서울이었나요?

아닙니다. 당시에는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였고, 1914년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가 되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개발 전 원래의 토지 이용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밭과 논은 경작층과 그 아래 퇴적층을, 대지는 건물지와 생활 유물을, 잡종지는 강변 시설 흔적을 우선 살피는 등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범위와 순서를 정하는 기초자료가 됩니다.

한 줄 결론 · 1912년 서울 강서구 염창동 국유지는 총 10필지 83,564㎡였으며, 밭 1필지 39,867㎡, 논 6필지 31,011㎡, 잡종지 1필지 10,208㎡, 대지 2필지 2,476㎡로 이루어진 농경지 중심의 땅이었습니다.

우리 땅의 1912년이 궁금하다면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앞두고 계신가요? 서울 25개 구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정리한 기초자료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확인하세요.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의 국유지 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 염창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서구 염창동 (1912년 당시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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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소금이강물을 거슬러 이 마을에 닿았다

짐꾼의 어깨에서 내려진 하얀 가마니는창고에 쌓여 한양의 밥상을 기다렸다

산자락엔 넓은 밭 한 자락강가엔 논 여섯 배미가 누워 있었다

백 년이 흘러 창고는 사라지고배 닿던 자리엔 불빛이 들어섰지만

이름은 남았다소금처럼, 기억을 지키며

우리가 읽어 주는 날땅은 다시 짠 바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서구 편 · 염창동©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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