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논 열여섯 배미와 무덤 두 자리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서구 편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논 열여섯 배미와 무덤 두 자리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전체
18필지
153,038㎡
논 (답)
16필지
151,782㎡ · 99.2%
분묘지
2필지
1,256㎡ · 0.8%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는 국유지 18필지, 총 153,038㎡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논은 16필지 151,782㎡, 분묘지는 2필지 1,256㎡였습니다.
즉, 1912년 방화동 국유지는 면적 기준 99.2%가 논이었던 전형적인 농경지형 국유지였습니다.
강서구 방화동의 테마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논 16필지와 분묘지 2필지의 기록
1912년 방화동 국유지 현황: 18필지 153,038㎡, 논 151,782㎡
방화동 역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으로 읽는 개화산 옆 논벌
1912년 방화동 국유지 99.2%가 논이었다?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정리
강서구 방화동 역사와 1912년 국유지, 발굴조사 전에 꼭 봐야 할 숫자
방화동,불을 지르는 방화(放火)가 아닙니다.꽃 곁에 앉은 방화(傍花)입니다.
처음 이 동네 이름을 듣고 흠칫한 적 있으신가요?
지하철 5호선 종점 안내방송에서 "방화행"을 듣고 속으로 웃어 본 사람, 꽤 많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꽃이 숨어 있습니다.
꽃이 피어나는 모양의 산, 개화산 곁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서 방화동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꽃 곁의 땅이 114년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숫자로 펼쳐 보려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결과가 조금 놀랍습니다.
나라가 가진 땅 18필지 가운데 16필지가 논이었습니다.
나머지 두 필지는 무덤 자리였습니다.
논과 무덤. 먹고 사는 땅과 잠드는 땅.
이 두 가지만으로 이루어진 국유지는 흔치 않습니다.
지금 아파트 단지와 차량기지가 들어선 그 땅 아래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궁금해지지 않으신가요?
끝까지 읽으시면, 여러분이 매일 밟는 길이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목차
방화동이라는 이름에 피어 있던 꽃
1912년 방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1912년 방화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방화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표와 그래프로 보는 논 99.2%의 땅
1912년의 방화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능말 전설과 두 자리의 무덤
논 아래 잠든 것들, 문화재 지표조사의 시선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조사 흐름
땅이 역사를 돌려준 성공 사례
지금 방화동에서 땅을 판다면 생기는 일
114년 전 농부에게 보내는 답장

1방화동이라는 이름에 피어 있던 꽃
개화산 옆, 꽃 곁의 마을
강서구청의 동 유래 설명을 보면 이름의 뿌리가 선명합니다.
사계절 꽃향기가 번지는 개화산 옆 동네라는 뜻에서 방화(傍花)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곁 방(傍), 꽃 화(花).
불 지를 방(放), 불 화(火)와는 한자가 완전히 다릅니다.
개화산에는 신라 때 도인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 신비한 꽃 한 송이가 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산의 생김새 자체가 꽃이 피어나는 형국이라는 풀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화동은 이름부터가 꽃과 산에 기대어 태어난 마을입니다.
세 개의 옛 마을이 모여 하나가 되다
지금의 방화동은 원래 몇 개의 자연마을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능말이라 불린 능리, 꿩 사냥하기 좋은 고개 옆 치현리, 가뭄에도 샘물이 마을을 휘돌아 흘렀다는 정곡리가 그 주인공입니다.
여기에 공항 쪽으로 넓게 펼쳐진 논밭이 더해졌습니다.
이 이름들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산자락의 고개, 마르지 않는 샘,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논.
1912년 국유지 기록이 논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여기서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21912년 방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답부터 드립니다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국유지는 18필지, 153,038㎡가 있었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46,294평입니다.
표준 축구장 한 면을 약 7,140㎡로 잡으면, 축구장 21개가 조금 넘는 넓이입니다.
동네 하나에 흩어진 나라 땅치고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입니다.
방화동 전체에서 차지한 비중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앞서 정리한 1912년 방화동 전체 토지 면적은 4,031,115㎡였습니다.
이 수치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국유지는 방화동 전체 면적의 약 3.8%를 차지했습니다.
백 걸음을 걸으면 네 걸음쯤이 나라 땅이었던 셈입니다.
나머지 96% 남짓은 마을 사람들과 여러 성씨 집안이 나눠 가진 땅이었습니다.
비중은 작지만, 이 3.8%는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줄 정리 · 1912년 방화동 국유지는 18필지 153,038㎡로, 방화동 전체 면적의 약 3.8%였습니다.
31912년 방화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16필지, 151,782㎡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 가운데 논은 16필지 151,782㎡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18필지 중 16필지, 약 88.9%입니다.
면적으로는 무려 99.2%입니다.
사실상 방화동의 나라 땅은 거의 전부가 논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한 배미가 얼마나 컸을까
16필지를 평균 내면 논 한 필지가 약 9,486㎡입니다.
대략 2,870평 정도의 논이 한 덩어리씩 놓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손바닥만 한 다랑논이 아니라, 소가 한참을 걸어야 끝이 나는 넓은 논배미였습니다.
한강과 가까운 저지대, 김포평야로 이어지는 평평한 땅이었기에 가능한 크기입니다.
모내기철이면 이 넓은 논에 물이 차올라 하늘이 그대로 비쳤을 겁니다.
여름에는 벼가 초록 물결로 출렁이고,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바뀌었겠지요.
강서구청 설명에서도 방화동은 서울 편입 무렵까지 대부분이 논밭이었다고 전합니다.
1912년 국유지 기록은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숫자로 증명합니다.

41912년 방화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필지, 1,256㎡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 가운데 분묘지는 2필지 1,256㎡였습니다.
면적 비중은 약 0.8%입니다.
한 필지 평균은 628㎡, 약 190평 정도입니다.
작은 마당 두어 개를 합친 크기입니다.
작지만 가장 무거운 숫자
숫자로 보면 분묘지는 존재감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문화유산 조사의 눈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분묘지는 사람이 실제로 묻힌 자리입니다.
유골과 부장품, 봉분의 흔적, 비석이나 석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땅입니다.
논이 "살아 있던 사람들의 땅"이었다면, 분묘지는 "떠난 사람들이 머무는 땅"입니다.
면적은 0.8%지만, 조사 현장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한 줄 정리 · 1912년 방화동 국유지는 논 16필지 151,782㎡와 분묘지 2필지 1,256㎡, 단 두 가지 지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5표와 그래프로 보는 논 99.2%의 땅
1912년 방화동 국유지 현황표
구분 | 필지 수 | 면적(㎡) | 면적 비중 | 필지당 평균 |
논 | 16필지 | 151,782 | 99.2% | 약 9,486㎡ |
분묘지 | 2필지 | 1,256 | 0.8% | 628㎡ |
국유지 합계 | 18필지 | 153,038 | 100% | 약 8,502㎡ |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당시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일대)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면적 비중 그래프
논 · 16필지151,782㎡ · 99.2%
분묘지 · 2필지1,256㎡ · 0.8%
그래프를 보면 한눈에 들어옵니다.
초록 막대가 거의 끝까지 차 있고, 흙빛 막대는 가느다란 선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논과 분묘지의 면적 차이는 150,526㎡입니다.
논 면적은 분묘지의 약 121배였습니다.
이웃 동네와 나란히 놓아 보면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 정리된 강서구 내발산동 기록을 보면, 1912년 내발산동 전체 598필지 2,142,293㎡ 가운데 논이 361필지 1,526,737㎡였습니다.
동네 전체로 봐도 논이 70%를 넘었던 셈입니다.
강서 일대가 통째로 거대한 논벌이었다는 사실이 이웃 동네 기록에서도 겹쳐 보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방화동 국유지의 논 비중 99.2%는 유독 짙은 초록색입니다.
61912년의 방화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의 마을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1912년의 방화동은 행정구역상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고려 말 1310년 무렵부터 이 일대는 양천현에 속했습니다.
1896년에는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에 소속되었습니다.
토지조사 기록이 만들어지던 1912년에도 이 땅은 양천군 삼정면 일대였습니다.
김포군을 거쳐 서울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양천군은 김포군에 합쳐졌고, 이곳은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가 됩니다.
서울특별시가 된 것은 1963년의 일입니다.
그때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가, 1977년 강서구가 새로 생기면서 지금의 소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말하는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옛 땅을 다시 읽은 표현입니다.
반세기 가까이 경기도의 농촌이었던 땅이, 불과 60여 년 만에 서울의 아파트 단지로 바뀐 것입니다.
변화가 빠를수록 땅 밑의 기억은 더 쉽게 덮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록이 더 소중합니다.

7능말 전설과 두 자리의 무덤
아무도 묘를 쓸 수 없었던 마을
방화동의 옛 마을 능말에는 묘한 전설이 전해집니다.
고려 말, 이 땅이 왕릉 자리로 점찍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능지라는 표시로 말뚝을 박았고, 그 뒤로 아무도 이곳에 묘를 쓰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능리, 능말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기록에는 무덤이 있다
흥미로운 대목이 바로 여기입니다.
전설은 묘를 쓸 수 없던 땅을 이야기하는데, 1912년 국유지 기록에는 분묘지 2필지가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두 필지가 정확히 능말 안에 있었는지는 기록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방화동은 여러 마을이 모인 넓은 동이니까요.
하지만 "왜 나라 땅으로 분류된 무덤 자리가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충분히 던져 볼 만합니다.
관에서 관리하던 묘역이었을까요.
주인이 확인되지 않아 국유로 정리된 오래된 묘였을까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하나입니다.
현장에 가서, 땅을 읽는 것입니다.
전설과 기록이 엇갈리는 지점은 조사자에게 가장 설레는 출발점이 됩니다.

8논 아래 잠든 것들, 문화재 지표조사의 시선
논은 역사를 덮는 담요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논이었으면 그냥 농사만 지은 땅 아닌가?"
그런데 고고학 현장에서는 정반대로 봅니다.
논은 수백 년 동안 물과 흙이 차곡차곡 쌓이는 땅입니다.
그 층 하나하나가 시대의 기록입니다.
옛 논둑의 흔적, 물길을 끌어오던 수로, 농기구 조각, 볍씨 자국이 찍힌 토기 조각까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논은 깊게 파헤쳐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그 아래 더 오래된 생활 흔적을 담요처럼 덮어 보호하기도 합니다.
한강 가까운 저지대라는 조건
방화동은 한강과 맞닿은 강서구 서북단의 땅입니다.
옛날 이 일대는 강화, 인천, 한양을 오가는 뱃길 어귀와 가까웠고, 개화산에는 봉수대도 있었습니다.
물길과 산길, 신호의 길이 만나는 자리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오가던 길목에는 반드시 사람의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방화동처럼 넓은 논이 펼쳐졌던 곳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땅입니다.
국유지 기록이 왜 기초자료가 되는가
1912년 토지 기록은 개발로 지형이 바뀌기 전의 "원래 얼굴"을 보여 줍니다.
어디가 논이었고, 어디가 무덤이었는지 알면 조사의 우선순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논이었던 곳은 경작층과 그 아래 퇴적층을, 분묘지였던 곳은 매장 흔적을 집중해서 살피는 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912년 기록을 동 단위로 하나하나 정리하는 이유입니다.
9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조사 흐름
땅을 읽는 네 개의 계단
문화유산 조사는 한 번에 땅을 파헤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조금 파 보고, 필요한 곳만 더 깊이 들어가는 단계적 과정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가 이 절차의 기준이 됩니다.
1단계 · 지표조사
문헌과 옛 지도, 1912년 토지 기록 같은 자료를 검토하고 현장을 걸으며 지표면에 드러난 유물과 지형을 살핍니다.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판단하는 첫 관문입니다.
2단계 · 표본조사
지표조사에서 가능성이 보인 범위 가운데 일부를 골라 작게 파 보며 유적의 존재 여부를 빠르게 확인합니다.
3단계 · 시굴조사
트렌치를 넣어 땅속 층위를 확인하고, 유적의 분포 범위와 성격을 구체적으로 가늠합니다.
4단계 · 발굴조사
유적이 확인된 범위 전체를 체계적으로 파고 기록합니다. 가장 정밀하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단계입니다.
방화동 국유지에 대입해 보면
방화동 국유지 총면적 153,038㎡는 일반적으로 지표조사 대상이 되는 건설공사 기준인 3만㎡의 다섯 배가 넘는 넓이입니다.
논 16필지는 경작층 아래 옛 생활면을 확인하는 데 초점을 둘 수 있습니다.
분묘지 2필지는 매장 흔적과 석물의 존재를 우선 확인해야 할 지점입니다.
1912년 기록 한 장이 조사 설계도의 밑그림이 되는 셈입니다.

10땅이 역사를 돌려준 성공 사례
빌딩 지하에 되살아난 한양의 골목
서울 종로 공평동에서는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됐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집터와 골목길이 층층이 드러났습니다.
유적은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새 건물 지하에 그대로 보존되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으로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개발과 보존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평범한 동네 아래서 나온 백제의 도성
송파구 풍납동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택과 아파트가 빽빽한 평범한 동네로 여겨졌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사 현장과 조사를 거치며 백제 한성기의 도성, 풍납토성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교과서의 한 줄이 우리 동네 땅 밑에 실재한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공통점은 하나, 먼저 읽었다는 것
두 사례 모두 땅을 파기 전에 기록과 지형을 살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옛 기록을 읽어 두면 조사 범위를 정확히 좁힐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굴착은 줄이고, 꼭 필요한 곳에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방화동의 1912년 국유지 기록도 바로 그런 "먼저 읽기"의 재료입니다.
11지금 방화동에서 땅을 판다면 생기는 일
잠깐, 여러분 발밑의 이야기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방화동 어딘가에서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굴착기가 들어왔습니다.
첫 삽을 뜬 지 사흘째, 흙 속에서 오래된 사기 조각과 석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공사는 멈추고, 현장은 술렁입니다.
일정은 밀리고, 비용은 늘어나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미리 알았다면 달라지는 것들
이런 장면은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적 가능성을 늦게 확인하면 사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업 초기에 지표조사를 충실히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디를 조심해야 하는지 미리 알고 설계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방화동처럼 1912년에 넓은 논과 분묘지가 기록된 땅이라면, 그 출발점은 더 분명합니다.
옛 지목을 확인하고, 현재 위치와 겹쳐 보고, 가능성이 높은 곳부터 조사하는 것.
그것이 시간과 비용, 그리고 역사를 함께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12114년 전 농부에게 보내는 답장
숫자 뒤에 서 있는 사람들
18필지, 153,038㎡.
처음엔 그저 건조한 숫자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 숫자 뒤에는 새벽마다 논둑을 걷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를 심고, 물꼬를 보고, 가을이면 허리 굽혀 벼를 베던 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들판 끝 두 자리의 무덤에는, 누군가 끝내 잊지 못한 이름이 잠들어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들은 우리에게 편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땅을 남겼습니다.
논의 층과 흙의 빛깔, 무덤의 자리까지, 땅은 그 모든 걸 조용히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땅을 읽는 일은, 어쩌면 114년 늦게 보내는 답장일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여기 있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방화역을 지나거나 개화산 둘레길을 걷게 된다면, 잠깐 발밑을 내려다봐 주세요.
꽃 곁의 마을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읽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검증 노트
입력 자료의 수치를 계산으로 교차 확인했습니다. 논 16필지와 분묘지 2필지를 더하면 18필지로 합계와 일치합니다. 논 151,782㎡와 분묘지 1,256㎡를 더하면 153,038㎡로 총면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 비중은 논 99.18%, 분묘지 0.82%이며 본문에서는 소수 첫째 자리로 반올림했습니다.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입니다. 방화동 전체 면적 4,031,115㎡는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게시글 수치를 인용했으며, 국유지 비중 3.8%는 이를 기준으로 한 계산값입니다. 1912년 당시 이 지역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일대였고, 현재 행정구역명으로 표기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방화동 국유지는 지목이 논과 분묘지 단 두 가지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지나 밭, 임야가 한 필지도 없이 면적의 99.2%가 논에 집중된 구조입니다. 강서구 편에서 앞서 다룬 내발산동 역시 동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논이었다는 점과 함께 보면, 1912년 강서 일대가 한강 하류의 거대한 논벌이었다는 사실이 동 단위 기록에서 거듭 확인됩니다.
Q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8필지, 153,038㎡였습니다.
1912년 방화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논은 16필지 151,782㎡로, 국유지 면적의 약 99.2%를 차지했습니다.
1912년 방화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분묘지는 2필지 1,256㎡로, 국유지 면적의 약 0.8%였습니다.
1912년 방화동은 서울이었나요?
아닙니다. 당시에는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일대였고, 1914년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가 되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개발 전 원래의 토지 이용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논은 경작층과 그 아래 퇴적층을, 분묘지는 매장 흔적을 우선 살피는 등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범위와 순서를 정하는 기초자료가 됩니다.
한 줄 결론 · 1912년 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유지는 총 18필지 153,038㎡였으며, 논 16필지 151,782㎡와 분묘지 2필지 1,256㎡로 이루어진 논 중심의 땅이었습니다.
우리 땅의 1912년이 궁금하다면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앞두고 계신가요? 서울 25개 구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정리한 기초자료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확인하세요.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의 국유지 자료를 바탕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1912년 당시 경기도 양천군 삼정면 일대)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지명 유래 참고: 강서구청 방화동 동 유래 및 연혁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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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산 곁에물 댄 논 열여섯 배미가 누워 있었다
하늘을 비추던 그 물 위로백로가 지나가고 계절이 지나갔다
들판 끝 작은 언덕엔이름 모를 두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백 년이 흘러 논은 길이 되고길은 불빛이 되었지만
흙은 잊지 않았다꽃 곁의 마을, 방화
우리가 읽어 주는 날땅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서구 편 · 방화동©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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