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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강남구 율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밤나무 고개와 방죽 마을에 남은 열세 필지의 기록 율현동 역사 ·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0월 24일
9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남구 편

1912년 서울 강남구 율현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밤나무 고개와 방죽 마을에 남은 열세 필지의 기록

율현동 역사 ·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3국유지 필지 수

48,876㎡국유지 총면적

71.5%논과 밭이 차지한 면적 비율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강남구 율현동에는 국유지 13필지, 총 48,876㎡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논 6필지 17,884㎡, 밭 4필지 17,054㎡, 임야 1필지 8,915㎡, 대지 2필지 5,021㎡였습니다.

즉, 율현동 국유지는 논과 밭이 면적의 71.5%를 차지한 농경지 중심의 땅이었고, 논이 필지 수와 면적 모두 1위였습니다.

지금 당신이 지나가는 율현동 아파트 단지,그 이름은 밤나무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지금 율현동에서 밤나무 숲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보이는 건 단정한 아파트, 넓은 도로, 주말마다 산책하는 공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밤나무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그 밤나무 아래 살던 사람들의 흔적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답의 일부가 114년 전 토지 장부 속에 있습니다.

1912년, 이 작은 고개 마을에는 나라 소유의 땅이 13필지 있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작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열세 필지를 한 줄씩 펼치면, 논과 방죽과 숲과 집터가 차례로 걸어 나옵니다.

조금만 따라와 주세요.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 율현동이라는 세 글자가 전혀 다르게 들릴 겁니다.


목차

11912년 율현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율현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3율현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4율현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5율현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6율현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7지목별 비교 표로 한눈에 보기

8율현동은 어떻게 서울이 되었을까요?

9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10땅을 먼저 읽어서 지켜 낸 성공 사례

11자주 묻는 질문

12한 줄 결론과 마지막 이야기



11912년 율현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숫자부터 정확하게

1912년 서울 강남구 율현동에 있던 국유지는 13필지입니다.

면적을 모두 합치면 48,876㎡입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14,785평이에요.

국제 규격 축구장 하나가 약 7,140㎡이니, 축구장 7개 가까운 넓이입니다.

필지 하나의 평균 면적은 약 3,760㎡로, 작은 동네치고는 꽤 큼직합니다.

지목은 딱 네 가지였습니다.

논, 밭, 임야, 대지.

물을 대는 땅, 마른 땅, 숲, 그리고 사람이 사는 땅.

시골 고개 마을 하나를 이루는 데 필요한 요소가 국유지 안에 고스란히 다 들어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 율현동은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꼭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습니다.

1912년의 율현동 일대는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에 속한 고개 마을이었어요.

‘율현리’라는 이름조차 아직 없었습니다.

밤고개와 방죽말이라는 두 마을이 각자의 이름으로 살고 있던 시절이죠.

그러니까 이 글의 숫자는, 율현동이 율현동이 되기 직전의 모습을 붙잡아 둔 스냅사진입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율현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대) 국유지는 총 13필지, 48,876㎡로 축구장 약 7개 넓이였습니다.


2율현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밤 율(栗), 고개 현(峴)

율현동의 ‘율’은 밤나무 율 자입니다.

‘현’은 고개를 뜻합니다.

우리말로 풀면 그대로 ‘밤고개’예요.

예부터 이 일대에 밤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집니다.

재미있는 전설도 하나 있습니다.

이 밤나무들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이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예요.

정승이 손수 심은 밤나무가 고개를 뒤덮고, 그 고개가 동네 이름이 된 겁니다.

지금도 이 일대를 지나는 도로 이름에 ‘밤고개’가 남아 있고, 율현공원이라는 이름 역시 이 고개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방죽말

율현동을 만든 또 하나의 마을이 있습니다.

방죽말입니다.

방죽은 물을 막아 가두는 둑, 또는 그렇게 생긴 작은 저수지를 말합니다.

방죽이 있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물을 모아 어딘가에 대야 했다는 뜻입니다.

그 어딘가는 거의 언제나 논이었죠.

여기서 소름이 살짝 돋습니다.

1912년 율현동 국유지에서 필지 수와 면적이 모두 1위인 지목이 바로 논이거든요.

마을 이름 하나에, 땅 통계의 실마리가 이미 숨어 있었던 겁니다.


3율현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필지도 1위, 면적도 1위

1912년 율현동 국유지 가운데 논은 6필지, 17,884㎡였습니다.

전체 13필지 중 46.2%, 거의 절반이 논이었습니다.

면적으로는 36.6%를 차지해 네 지목 가운데 가장 넓습니다.

평으로는 약 5,410평이에요.

필지 수와 면적이 모두 1위인 지목은 시리즈 안에서도 자주 보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보통은 밭이 필지 수를, 논이 면적을 나눠 갖는 경우가 많거든요.


작게, 촘촘하게

그런데 논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2,981㎡입니다.

밭 한 필지 평균보다 오히려 작습니다.

논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죠.

고개 아래 좁은 골짜기를 따라 계단처럼, 혹은 방죽 물길을 따라 작은 배미들이 이어졌던 풍경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넓은 평야의 큰 논이 아니라, 산자락과 물길 사이에 아껴 가며 만든 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논에 물을 대던 것이 마을 이름에 남은 방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지목과 지명을 함께 놓고 세운 추정입니다.

실제 위치는 옛 지적도와 현장을 맞춰 봐야 확인됩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논은 6필지 17,884㎡로, 필지 수(46.2%)와 면적(36.6%) 모두 1위였습니다.


4율현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논과 거의 같은 넓이

1912년 율현동 국유지 가운데 밭은 4필지, 17,054㎡였습니다.

원자료에는 ‘4필2ㅣ’로 적혀 있었는데, 문맥과 합계로 볼 때 ‘4필지’의 입력 오타로 보고 바로잡았습니다.

면적 비율은 34.9%입니다.

논과의 차이는 겨우 830㎡.

평으로 치면 약 251평 차이니, 사실상 논과 밭이 반반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밭이 더 크게 나뉜 이유

흥미로운 건 필지당 크기입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4,264㎡로, 논보다 1.4배 넓습니다.

밭은 물을 대지 않아도 되니 고갯길 옆 완만한 비탈이나 마을 뒤 언덕에 넓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밤나무가 서 있는 산자락 아래로 콩과 조, 보리가 자라는 넓은 밭이 펼쳐졌을 수도 있겠죠.

논과 밭을 합치면 10필지, 34,938㎡입니다.

율현동 국유지 면적의 71.5%, 필지의 76.9%가 농사짓는 땅이었습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밭은 4필지 17,054㎡로, 논보다 830㎡ 작지만 필지당 평균은 약 4,264㎡로 더 넓었습니다.


5율현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단 한 필지, 그러나 가장 큰 덩어리

1912년 율현동 국유지 가운데 임야는 1필지, 8,915㎡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7.7%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면적은 18.2%, 약 2,697평입니다.

한 필지 크기로는 네 지목 중 압도적인 1위예요.

숲과 산자락은 잘게 쪼개지 않고 큰 덩어리로 남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밤고개의 숲이었을까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이 한 필지의 국유 임야는 어떤 숲이었을까요.

마을 이름이 밤고개였으니, 고갯마루를 덮은 밤나무 숲의 한 자락이었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보게 됩니다.

정답은 지목 한 줄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고개 위 구릉지 임야는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땅입니다.

물을 피하면서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릉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을 짓고 무덤을 쓰던 자리였거든요.

숲 아래 땅이 수천 년의 기억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임야는 1필지 8,915㎡로, 필지 수는 가장 적지만 필지당 면적은 가장 컸습니다.


6율현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두 필지의 집터

1912년 율현동 국유지 가운데 대지는 2필지, 5,021㎡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15.4%, 면적으로는 10.3%입니다.

한 필지 평균은 약 2,511㎡, 평으로는 약 760평이에요.

요즘 감각으로 보면 집 한 채 터로는 꽤 넓습니다.


나라 땅 위의 집, 누가 살았을까

고개 마을에 나라 소유의 집터가 두 필지 있었다는 건 작지 않은 단서입니다.

공적인 용도의 건물이 있었을 수도 있고, 마을 사람이 나라 땅 위에 오래 살아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통계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사자에게 대지는 언제나 먼저 동그라미를 치는 땅입니다.

사람이 오래 머문 자리에는 집자리, 아궁이, 우물, 생활 쓰레기 같은 흔적이 겹겹이 남기 때문이에요.

밤고개 사람들의 부엌과 마당이 지금 어느 건물 아래 잠들어 있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묘해집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대지는 2필지 5,021㎡로, 필지당 평균 약 2,511㎡의 넉넉한 집터였습니다.


7지목별 비교 표로 한눈에 보기

흩어져 있던 숫자를 한 장으로 모았습니다.

필지 수, 면적, 비율, 평균 면적을 나란히 놓으면 율현동 땅의 얼굴이 또렷해집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필지 비율

필지당 평균(㎡)

논

6

17,884

36.6%

46.2%

2,981

밭

4

17,054

34.9%

30.8%

4,264

임야

1

8,915

18.2%

7.7%

8,915

대지

2

5,021

10.3%

15.4%

2,511

합계

13

48,876

100%

100%

3,760

표 설명: 1912년 서울 강남구 율현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대) 국유지 13필지 48,876㎡의 지목별 현황. 비율은 원자료 총면적 48,876㎡, 총 13필지 기준이며 소수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했다. 지목별 면적 합계는 48,874㎡로 2㎡ 차이가 있다(검증 노트 참고).


지목별 면적 비율

논

36.6%

밭

34.9%

임야

18.2%

대지

10.3%

지목별 필지 수 비율

논

46.2%

밭

30.8%

대지

15.4%

임야

7.7%

그래프 설명: 논은 면적과 필지 수 모두 1위다. 임야는 필지 수는 꼴찌지만 면적은 3위로 올라서, 숲이 한 덩어리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표에서 읽히는 세 가지

첫째, 율현동 국유지는 농경지가 중심이었습니다.

논과 밭을 합치면 면적의 71.5%, 필지의 76.9%입니다.

둘째, 논이 필지와 면적에서 모두 1위였습니다.

방죽말이라는 마을 이름과 나란히 놓으면 물을 다루며 살던 마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셋째, 임야 한 필지가 전체의 거의 5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밤고개라는 이름처럼, 숲은 이 마을의 뼈대였습니다.


8율현동은 어떻게 서울이 되었을까요?

두 마을이 하나의 이름으로

조선 후기 이 일대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에 속해 있었습니다.

1912년 토지조사 때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2년 뒤인 1914년,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면서 밤고개와 방죽말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렇게 태어난 이름이 대왕면 율현리입니다.

방죽말이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공식 지명에서 사라지고, 밤고개만 한자로 남게 됩니다.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세요.

1912년의 토지 장부는 방죽말이 행정 지도에서 지워지기 직전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성동구에서 강남구로

율현리가 서울이 된 건 1963년 1월입니다.

서울시 행정구역이 크게 넓어지면서 성동구 율현동이 되었어요.

1975년 10월,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갈라져 나오면서 강남구 율현동이 됩니다.

1979년에는 동의 일부가 송파 쪽 장지동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지금 율현동은 법정동이고, 행정 업무는 세곡동 주민센터가 맡고 있습니다.

북쪽으로 자곡동, 남쪽과 서쪽으로 세곡동, 동쪽으로 송파구 가락동과 맞닿아 있죠.

한 세기 남짓 만에 경기도의 고개 마을이 서울 강남의 주거지가 된 겁니다.

한 줄 정리율현동은 1912년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의 밤고개·방죽말이었고, 1914년 율현리, 1963년 성동구 율현동, 1975년 강남구 율현동이 되었습니다.


9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삽을 뜨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것

서울에서 건물을 새로 짓거나 땅을 크게 고칠 때, 그 밑을 먼저 확인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바로 매장유산 조사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조사는 보통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첫 단계는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지명, 현장 답사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살피는 단계예요.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바로 이 지표조사에서 가장 먼저 펼쳐 보는 자료 중 하나입니다.

두 번째는 표본조사입니다.

일부 지점을 작게 파 보고 유구나 유물이 나오는지 확인합니다.

세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트렌치를 넣어 유적이 어디까지, 얼마나 깊이, 어떤 성격으로 남아 있는지 가늠합니다.

마지막이 발굴조사입니다.

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하는 본 조사입니다.

이 네 단계는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이 맡아 진행하고, 결과에 따라 보존이나 기록 후 공사 진행이 결정됩니다.


율현동 데이터가 주는 조사 포인트

율현동의 1912년 국유지 통계는 조사자에게 꽤 구체적인 신호를 줍니다.

국유 대지 2필지는 옛 생활 유구, 건물지, 우물 등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구역입니다.

임야 1필지는 구릉 위 선사시대 집자리나 옛 무덤을 검토해야 할 대상입니다.

논 6필지는 방죽과 이어진 옛 수로, 수리 시설, 논 경작층을 확인할 단서가 됩니다.

밭 4필지는 비탈의 토양층과 경작 흔적을 살필 자리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습니다.

디지털강남문화대전에는 ‘율현동 유물산포지’라는 항목이 따로 올라 있습니다.

유물산포지는 땅 위에서 토기 조각 같은 옛 유물이 흩어져 발견되는 곳을 말합니다.

즉, 율현동은 이미 유물이 지표에서 확인된 기록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에요.

1912년 지목을 오늘의 지번 위에 겹치고, 유물산포지 기록과 함께 보면 어디를 먼저, 어디를 더 조심해서 볼지가 선명해집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율현동 국유지 지목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대지·임야·논·밭별 유적 가능성을 판단하고,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범위를 정하는 기초자료로 쓰입니다.


10땅을 먼저 읽어서 지켜 낸 성공 사례


같은 강남구, 역삼동의 교훈

율현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같은 강남구 역삼동 이야기를 해 볼게요.

1960년대 역삼동 구릉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가 조사되었습니다.

그때 나온 토기와 집자리의 특징은 한반도 중부 청동기 문화를 설명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계는 지금도 ‘역삼동 유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 뒤 그 언덕은 몇십 년 만에 빌딩 숲으로 바뀌었습니다.

만약 개발이 먼저였다면 어땠을까요.

그 마을은 기록 한 줄 없이 콘크리트 아래로 사라졌을 겁니다.

조사가 먼저였기에 3천 년 전 사람들의 집이 교과서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조사가 공사를 살린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는 공사를 막는 절차라고요.

현장에서 보면 정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옛 지목과 지명, 유물산포지 기록을 미리 맞춰 본 사업장은 조사 범위를 정확히 잡습니다.

필요한 곳만 표본조사와 시굴조사를 하고, 나머지는 일정대로 진행합니다.

반대로 사전 검토 없이 굴착부터 했다가 공사 도중 유구가 드러나면 현장은 멈춰 섭니다.

일정은 밀리고 비용은 불어나고, 유적은 이미 일부 훼손된 뒤입니다.

1912년 토지 장부 한 장이 지표조사를 똑똑하게 만들고, 그 지표조사가 시간과 비용과 역사를 함께 지켜 줍니다.

율현동의 열세 필지도 바로 그런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1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강남구 율현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3필지, 면적은 48,876㎡였습니다.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대였습니다.

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논은 6필지 17,884㎡로, 필지 수(46.2%)와 면적(36.6%) 모두 1위였습니다.

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4필지 17,054㎡로, 면적의 34.9%를 차지했습니다.

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A. 임야는 1필지 8,915㎡로, 면적의 18.2%였으며 필지당 면적이 가장 컸습니다.

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2필지 5,021㎡로, 면적의 10.3%였습니다.

율현동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겼나요?

A. 밤나무가 많은 고개, 곧 ‘밤고개’를 한자로 옮긴 이름입니다. 1914년 밤고개와 방죽말이 합쳐져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율현리가 되었고, 1963년 서울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에 어떻게 쓰이나요?

A. 옛 지목(논, 밭, 임야, 대지)을 현재 지번과 대조해 유적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가려내는 지표조사 기초자료로 쓰이며, 이후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계획을 세우는 근거가 됩니다.

검증 노트

지목별 필지 수를 더하면 6 + 4 + 1 + 2 = 13필지로, 제시된 총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목별 면적을 더하면 17,884 + 17,054 + 8,915 + 5,021 = 48,874㎡로, 제시된 총면적 48,876㎡와 2㎡ 차이가 납니다. 평(坪) 단위 원자료를 ㎡로 환산하며 생긴 반올림 차이로 판단되며, 본문은 원자료 총면적 48,876㎡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원자료의 밭 항목 ‘4필2ㅣ’는 입력 오타로 보고 ‘4필지’로 바로잡았습니다. 필지 수 합계 13필지와도 맞습니다.

1912년 당시 율현동 일대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에 속했으며, 1914년 율현리가 되었고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습니다. 본문의 ‘서울 강남구 율현동’은 현재 행정구역 기준 표기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율현동 국유지는 논이 필지 수와 면적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한 구조입니다. 같은 강남구 역삼동이 필지는 밭, 면적은 논으로 순위가 갈렸던 것과 대비됩니다.

임야 1필지(8,915㎡)가 면적의 18.2%를 차지해, 필지당 면적 기준으로 이번 편의 최대 덩어리로 기록해 둡니다.


12한 줄 결론과 마지막 이야기

한 줄 결론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강남구 율현동 국유지는 총 13필지 48,876㎡였으며, 논 6필지(17,884㎡)와 밭 4필지(17,054㎡)가 면적의 71.5%를 차지하고 임야 1필지(8,915㎡)와 대지 2필지(5,021㎡)가 함께한 밤고개 마을의 땅이었습니다.


이름만 남은 마을에게

율현동은 이름에 자기 과거를 품고 사는 동네입니다.

밤나무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밤고개라는 이름은 동네와 길과 공원에 남았습니다.

방죽말은 그보다 더 일찍, 1914년에 지도에서 지워졌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방죽에 물을 가두고, 그 물로 작은 논 여섯 배미를 적셨을지도 모릅니다.

가을이면 고개에서 떨어진 밤을 주워 아이들 주머니에 넣어 주었겠죠.

그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건 13필지, 48,876㎡라는 차가운 숫자뿐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를 오래 들여다보면 이상하게 따뜻해집니다.

숫자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밥이고, 누군가의 집이고, 누군가의 가을이었으니까요.

우리가 114년 전 장부를 다시 펼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다음 삽이 땅을 뜨기 전에, 그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율현동을 지나간다면 잠깐만 걸음을 늦춰 주세요.

당신 발밑 어딘가에, 밤 향기 나던 고개 하나가 아직 조용히 누워 있습니다.


우리 부지의 1912년은 어땠을까요?

개발 예정지의 옛 지목과 매장유산 가능성이 궁금하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까지의 기초자료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확인해 보세요.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남구 율현동 (1912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대)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면적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가운데 국유지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강남구 율현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율현동의 테마

  1. 1912년 서울 강남구 율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논과 밭 면적 정리

  2. 1912년 율현동 국유지 현황: 13필지 48,876㎡, 논 17,884㎡·밭 17,054㎡

  3. 율현동 역사, 밤고개와 방죽말에 남은 1912년 국유지 13필지의 기록

  4. 1912년 율현동 국유지 중 임야와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5. 밤고개 마을 율현동, 1912년 토지조사로 본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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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마다 밤송이가 입을 벌리던 가을,


아래 방죽은 하늘을 가득 담았다.


논 여섯 배미에 물이 돌고


밭 네 뙈기에 콩꽃이 피었다.


숲 한 자락, 집터 두 곳,


열셋이라는 숫자 안에


한 마을의 사계절이 접혀 있다.


이름은 지워져도 땅은 기억한다.


우리가 먼저 읽는 것은


그 기억을 깨우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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