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강남구 수서동의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을까? 아직 서울이 아니었던 시절, 왕자들의 무덤이 있던 마을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22시간 전
  • 4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남구 편 · 첫 회(국유지)

1912년 강남구 수서동의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을까?

아직 서울이 아니었던 시절, 왕자들의 무덤이 있던 마을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6필지292,966㎡밭 74.5%궁마을(궁촌)의 자리

제목 후보  ①1912년 강남구 수서동의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을까? 밭 74.5%의 기록  ②왕자들의 무덤이 있던 궁마을, 수서동 국유지 1912년 기록  ③1912년 수서동 국유지 16필지, 아직 경기도였던 시절  ④탄천 서쪽의 그 마을, 수서동이라는 이름의 뜻  ⑤1912년 수서동 국유지 논·임야·잡종지·밭 현황

지금은 강남의 일부이지만,


1912년의 이 마을은 아직 서울이 아니었다.

수서동. 이 이름은 한강의 지류인 탄천 서쪽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그런데 1912년 당시, 이 마을은 지금과 달리 서울이 아니었다. 수서동은 조선 후기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으며, 1914년 경기도 구역 획정 때도 여전히 경기도 광주군 소속으로 남아있었다. 서울로 편입된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1963년의 일이다.

또한 이 마을은 예부터 '궁말' 또는 '궁촌'이라 불렸다. 조선 태조의 아들 무안대군과 그 후사 광평대군의 묘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무덤을 곁에 둔 이 마을의 1912년 국유지 기록을 열어보면, 16필지 292,966㎡가 국가 소유로 등록되어 있었다. 이 국유지의 세부 내역을 지금부터 풀어본다.

핵심 요약

1912년 수서동의 국유지는 총 16필지, 면적 292,966㎡였다.

밭 8필지 218,153㎡, 논 6필지 31,170㎡, 잡종지 1필지 29,061㎡, 임야 1필지 14,581㎡로 구성되어 있었다.

밭이 국유지 면적의 74.5%를 차지해 압도적인 비중을 보였다.

목차

  1. 1912년 수서동 국유지, 총 얼마나 있었을까 — 전체 규모 먼저 보기

  2. 밭 8필지, 218,153㎡ — 국유지의 4분의 3

  3. 논 6필지, 잡종지 1필지, 임야 1필지

  4. 궁말·궁촌이라 불린 이유 — 왕자들의 무덤

  5. 탄천 서쪽 마을, 아직 서울이 아니었던 시절

  6. 자주 묻는 질문

  7. 한 줄 결론


11912년 수서동 국유지, 총 얼마나 있었을까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수서동에 등록된 국유지는 총 16필지, 면적으로는 292,966㎡였다.

필지당 평균 면적은 18,310㎡에 달할 만큼 매우 넓은 규모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비율

8필지

218,153㎡

74.5%

6필지

31,170㎡

10.6%

잡종지

1필지

29,061㎡

9.9%

임야

1필지

14,581㎡

5.0%

합계

16필지

292,966㎡

100%

16

국유지 필지 수

292,966㎡

국유지 전체 면적

18,310㎡

필지당 평균 면적

면적 오차 안내지목별 면적 합계는 292,965㎡로, 표기된 전체 면적 292,966㎡보다 1㎡ 적습니다. 평→㎡ 환산 과정에서 발생한 반올림 오차로 추정되며, 필지 수 합계(16필지)는 정확히 일치합니다.


2밭 8필지, 218,153㎡ — 국유지의 4분의 3

국유지 292,966㎡ 중 218,153㎡, 74.5%가 밭이었다.

필지당 평균 27,269㎡에 달하는 이 넓은 밭들은, 왕실 묘역 인근 경작지가 국가 관리 아래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3논 6필지, 잡종지 1필지, 임야 1필지

논은 6필지, 31,170㎡로 10.6%를 차지했다. 잡종지는 1필지, 29,061㎡로 확인되는데 단일 필지로는 상당히 넓은 규모다. 임야는 1필지, 14,581㎡로 나타난다.

시리즈 기록 노트국유지 16필지 모두가 비교적 넓은 대형 필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대모산 자락과 탄천 사이 이 넓은 저지대가, 왕실 관련 묘역 관리와 함께 국가 소유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4궁말·궁촌이라 불린 이유 — 왕자들의 무덤

궁마을의 유래를 보면, 1470년(성종 원년) 세종의 손자인 영순군을 대모산에 예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496년(연산군 2년) 무안대군과 광평대군의 묘소를 광주 서촌 학당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중종실록』에는 남한산성 서쪽으로 탄천이 흐르고 동쪽과 서쪽에 수초가 무성해 수렵의 장소로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있어, 당시 이 일대가 울창한 숲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왕실 종친의 무덤이 모여 있었기에 '궁말' 또는 '궁촌'이라 불렸던 이 마을에서, 1912년 확인되는 넓은 국유지는 바로 이 왕실 묘역과 그 부속지가 국가 관리로 편입된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



5탄천 서쪽 마을, 아직 서울이 아니었던 시절

수서동은 조선 후기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다. 해방 후인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비로소 서울에 편입되었다. 1990년대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의 일환으로 수서지구가 개발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12년, 아직 경기도 광주군에 속해 있던 이 조용한 궁마을의 국유지 16필지, 292,966㎡는, 지금의 화려한 강남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넓은 밭과 논, 그리고 왕실 종친의 무덤이 자리한 이 마을이, 훗날 서울의 핵심 지역으로 편입되고 SRT와 GTX가 지나는 교통 요지로 성장하게 될 줄은 당시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오래된 국유지 기록이 앞으로 이 일대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도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6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수서동의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6필지였습니다.

수서동 국유지의 전체 면적은 얼마였나요?

292,966㎡였으며, 이 중 밭이 74.5%를 차지했습니다.

1912년 당시 수서동은 서울이었나요?

아니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으며, 1963년에야 서울로 편입되었습니다.

수서동이 '궁마을'로 불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 태조의 아들 무안대군과 광평대군 등 왕실 종친의 묘소가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서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한강의 지류인 탄천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7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수서동의 국유지는 총 16필지 292,966㎡였으며, 밭이 74.5%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가운데 논, 잡종지, 임야가 함께 확인되었다. 당시 이 마을은 아직 서울이 아닌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으며, 조선 왕실 종친의 무덤이 있어 '궁마을'이라 불렸다.

이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강남구 수서동의 국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향후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데이터 검증 노트

  • 지목별 필지 수 합계(논 6 + 임야 1 + 잡종지 1 + 밭 8 = 16필지)는 표기된 전체 필지 수 16필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 지목별 면적 합계는 292,965㎡로, 표기된 전체 면적 292,966㎡와 1㎡ 차이가 발생하며, 평→㎡ 환산 반올림 오차로 추정됩니다.

  • 이번 자료는 수서동 전체가 아닌 국유지 항목만을 다룬 기록으로, 조선인·일본인 등 개인 소유 토지 현황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 수서동·궁마을·행정구역 연혁 관련 역사 정보는 위키백과, 나무위키 및 디지털강남문화대전 공개 자료를 근거로 인용했으며, 1912년 토지조사 수치와는 별개의 역사적 배경 설명임을 명시합니다.

#수서동#강남구수서동#1912년토지조사#국유지#궁마을#무안대군#광평대군#대모산#탄천#문화재발굴#문화유산발굴조사#문화재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국유지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더 많은 서울 동별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궁금하다면


탄천의 서쪽, 아직 경기도라 불리던 그 마을에


왕자들의 무덤이 대모산 자락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나라의 이름으로 등록된 열여섯 필지의 밭과 논이


그 오랜 왕실의 자취 곁에 나란히 자리했다


반세기가 지나서야 서울의 품에 안긴 이 마을은


이제 기차와 급행열차가 오가는 관문이 되었다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