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대문구 충정로3가로 떠나는 시간여행
- 2025년 8월 1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서대문 역사
미국인, 영국인, 일본인이
한 동네 땅을 나눠 가졌던 그 시절
— 1912년 서대문구 충정로3가 토지 기록과 열강의 발자취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지금 충정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다면,
그 건물이 서 있는 땅이 113년 전에는 누구 것이었는지 아시나요?
김씨였을 수도 있고, 이씨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미국인이었거나, 영국인이었거나, 일본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12년 서대문구 충정로3가. 546필지 위에 펼쳐진 동서양이 뒤섞인 기묘한 공존의 세계로 지금부터 들어갑니다.
546필지
1912년 충정로3가
총 필지 수
217,571㎡
전체 토지
총 면적
31필지
외국인(미·영·일)
소유 토지
목 차
1.서두 — 1912년 충정로3가로 떠나는 시간여행
2.546필지의 땅,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삶
3.대지와 밭의 비율이 말해주는 생활상
4.김씨부터 홍씨까지,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5.외국인의 땅 — 미국, 영국, 일본의 발자취
6.국유지 1필지의 의미
7.100년 전 충정로3가에서 본 사회 변화의 단면
8.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로 보는 과거의 기록 보존 가치
9.성공 사례 — 옛 토지 기록에서 시작된 문화유산 복원
10.결론 — 기록 속 땅에서 되살아난 사람들의 숨결
01
서두 — 1912년 충정로3가로 떠나는 시간여행
크다란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갑니다. 자동차 대신 인력거가 다니고, 양복보다 두루마기가 더 흔하며, 골목마다 장독대가 줄지어 서 있는 풍경. 1912년 서대문구 충정로3가의 한복판에 지금 막 내려섰다고 상상해봅시다.
이곳은 오늘날의 빽빽한 고층 건물 대신, 낮은 기와집과 마당 딸린 한옥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평온한 풍경 속에도 시대의 격랑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서대문은 조선의 서쪽 관문이었고, 한양 도성을 드나드는 사람과 물자의 통로였습니다. 그 역사적 요충지가 1912년, 일제강점기 2년 차를 맞으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546필지, 217,571㎡. 이 숫자들은 그냥 면적 수치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수백 명의 삶이, 세 나라의 탐욕이, 그리고 한 시대의 전환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인, 영국인, 일본인이 함께 이 동네 땅의 일부를 나눠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02
546필지의 땅,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삶
필지라는 말이 낯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공식적으로 나눠진 토지 조각' 하나하나입니다. 충정로3가의 546필지는 각각 다른 주인을 가졌고, 각각 다른 쓰임새가 있었습니다. 어떤 필지엔 집이 있었고, 어떤 필지엔 밭이 있었으며, 어떤 필지엔 아직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빈 땅이 있었습니다.
그 546필지를 합쳐보면 217,571㎡. 지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축구장 약 30개 넓이입니다. 서대문역 일대부터 충정로 언덕배기까지를 통째로 담아놓은 면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넓은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 특징 |
대지 | 460 | 150,258 | 전체의 84.2% 필지, 주거·상업 |
밭 | 86 | 67,313 | 도시 근교 농업 흔적 |
합계 | 546 | 217,571 | 서대문 관문 지역 |
03
대지와 밭의 비율이 말해주는 생활상
460필지가 대지, 86필지가 밭이었다는 비율이 무엇을 뜻할까요? 필지 기준으로 대지가 전체의 약 84%를 차지합니다. 이는 충정로3가가 순수한 농촌이 아니라, 이미 도시의 성격을 강하게 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서울 서쪽의 관문이자 교통 요충지였던 이곳에서, 사람들은 주로 집에 살고 장사를 하며 서비스업에 종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86필지, 67,313㎡의 밭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닙니다. 1912년 충정로에는 아직 도시의 끝자락과 농촌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밭에서는 배추, 무, 고추, 파 같은 채소들이 자랐고, 아침마다 아낙들이 그날 수확한 채소를 바구니에 담아 가까운 장터로 나갔겠죠. 그 바구니 안의 채소들이 누군가의 오늘 밥상을 채웠습니다.
"대지가 많다는 건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 밭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완전히 도시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1912년 충정로3가는 그 딱 경계선 위에 서 있었습니다."

04
김씨부터 홍씨까지,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1912년 충정로3가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성씨는 단연 김씨였습니다. 무려 128필지. 전체 546필지 중 약 23%를 한 성씨가 쥐고 있었다는 건, 이 마을에서 김씨 가문의 위상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김씨
128필지
이씨
70필지
임씨
42필지
최씨
39필지
조씨·한씨
각 13필지
정씨·홍씨
각 10필지
이씨 70필지, 임씨 42필지, 최씨 39필지. 이 네 성씨만 합쳐도 279필지로 전체의 절반이 넘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임씨가 세 번째로 많다는 것인데, 당시 충정로 일대에 임씨 집성촌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조씨, 한씨, 정씨, 홍씨도 10필지 안팎씩 갖고 있어, 이 동네는 특정 가문이 독점하기보다 여러 성씨가 공존하는 다양한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토지 소유와 권력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128필지를 가진 김씨 가문은 마을 의사결정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냈을 겁니다. 장터를 어디에 열지, 도로를 어디로 낼지, 마을 공동 우물을 어디에 팔지 같은 문제에서 그들의 의견이 먼저 고려됐겠죠. 이것이 바로 토지 기록이 단순한 면적 통계를 넘어서는 이유입니다.
05
외국인의 땅 — 미국, 영국, 일본의 발자취
자, 이제 이 블로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충정로3가에는 조선인만이 땅을 가진 게 아니었습니다. 세 나라의 외국인이 이 동네에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
미국인
11필지 소유
🇬🇧
영국인
3필지 소유
🇯🇵
일본인
17필지 소유
미국인 11필지. 1912년 충정로3가에 미국인이 땅을 갖고 있었다는 건 얼핏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 시기 서대문 일대는 미국 선교사들의 주요 거점이었습니다. 1885년 광혜원(지금의 연세의료원 전신)과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미국 선교사들은 병원, 학교, 교회를 운영하며 이 지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11필지는 그 선교 거점들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인 3필지. 소수이지만 존재 자체가 의미심장합니다. 영국인 역시 외교 거점이나 상업 시설, 혹은 종교 관련 부지를 이 동네에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충정로 일대에는 외국 공관과 연계된 시설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주목할 사실: 일본인이 가진 17필지는 단순한 거주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들은 충정로 일대의 상업·교통 요충지 입지를 파악하고 조직적으로 토지를 매입했습니다. 이들의 땅은 훗날 일본식 상점, 숙소, 관청 연계 시설로 탈바꿈했습니다. 실제로 1920년대에 충정로 인근 서대문 밖에는 '금화장 문화주택지'라 불리는 일본식 주거 단지가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세 나라의 외국인 합산 31필지. 전체 546필지의 약 5.7%입니다. 숫자로는 작아 보이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건 단순한 토지 소유 이상입니다. 이 동네의 한 귀퉁이가 이미 국제 정치와 경제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06
국유지 1필지의 의미
546필지 가운데 국유지는 단 1필지였습니다. 지금 시대의 감각으로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도로, 공원, 관공서, 학교 등 공공 소유 토지가 도시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니까요. 하지만 1912년은 달랐습니다.
그 단 1필지의 국유지는 무엇이었을까요? 관청 건물, 군사 관련 시설, 혹은 세금 징수용 창고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912년은 조선총독부가 전국 토지조사사업을 막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국유지가 이렇게 적다는 건, 대부분의 땅이 개인, 외국인, 또는 법인의 손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국가의 존재감이 이 마을에서는 너무나 희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국유지 1필지 대 개인·외국인 소유 545필지. 이 극단적인 불균형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국가 권력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국가가 백성의 삶을 지켜주어야 할 자리에, 개인 지주들과 외국 자본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1필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에 쓰였는지를 밝혀내는 것도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07
100년 전 충정로3가에서 본 사회 변화의 단면
토지 소유 기록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1912년 충정로3가가 얼마나 복잡한 시대의 교차점에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김씨 대가문의 128필지와 일본인의 17필지가 같은 동네 안에 공존했습니다. 선교를 위해 온 미국인과 외교적 거점을 유지하던 영국인도 이 땅의 일부를 쥐고 있었습니다.
그 골목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을까요. 아침 일찍 새벽 시장에서 들려오는 상인들의 외침, 인력거 바퀴가 돌길을 구르는 소리,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낯선 언어의 대화가 오가는 소리. 이 모든 것이 섞여 있던 충정로3가는,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이었습니다.
1912년은 조선이 사라진 지 2년째이자, 새로운 권력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도기였습니다. 그 소용돌이의 현장이 바로 이 546필지 위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가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고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끌려가는 곳과, 외국인들이 땅을 사들이는 곳이 같은 동네 안에 공존했습니다.

08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로 보는 과거의 기록 보존 가치
이런 토지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핵심 참고 자료가 됩니다. 지표조사란,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과 기존 기록을 검토해 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판단하는 작업입니다. 1912년 토지대장처럼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면, 조사 전문가들은 어느 필지가 대지였고, 어디에 밭이 있었는지를 미리 파악해 발굴 범위와 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충정로3가의 460필지 대지 터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의 건물 기초가 겹겹이 쌓인 지층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외국인 소유 필지가 집중된 구역에서는 서양식 건물의 기초 구조나 수입 도자기, 유리 제품 같은 근대 유물이 출토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 기록과 현장 발굴이 맞닿는 지점에서,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쓰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의뢰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재개발, 재건축, 신축 공사 전에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에 의뢰하면 절차와 소요 기간, 비용을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사전 조사는 번거로운 규제가 아니라, 내 땅 아래에 잠든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면적 이상의 개발 사업에는 사전 지표조사가 법적으로 요구됩니다. 이를 생략하면 역사적 유구가 공사 과정에서 영구적으로 파괴될 수 있습니다.
09
성공 사례 — 옛 토지 기록에서 시작된 문화유산 복원
실제로 이런 토지 기록을 활용한 문화유산 복원 사례는 서울 곳곳에 존재합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종로구 일대 한옥 마을 복원 사례
1910년대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기반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 후기 한옥 마을의 담장 기초와 온돌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기록들은 현재 해당 지역 한옥 보존 구역 지정의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
서대문 선교병원 터 확인 사례
서대문구 일대 재개발 과정에서 진행된 지표조사를 통해, 근대 초기 선교병원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벽돌 기초와 서양식 의료 도구 잔편이 발굴된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소유로 기록된 토지와 일치하는 위치였습니다.
🌿
봉원동 발굴 사례 (서대문구 인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진행한 서대문구 봉원동 기초조사에서, 1912년 당시 논·밭·대지·산이 공존하던 농촌 마을의 구조가 토지 기록과 지형 데이터로 상세히 복원되었습니다. 이 자료는 해당 지역 문화재 보존 기준 수립에 활용되었습니다.

10
결론 — 기록 속 땅에서 되살아난 사람들의 숨결
1912년 충정로3가. 이 작은 동네의 546필지는 단순한 면적 기록이 아닙니다. 골목을 누비던 아이들, 새벽 장터를 향해 바구니를 든 어머니, 김씨 대가문의 당주가 마당을 거니는 소리, 낯선 외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선교사들, 그리고 이 땅을 눈여겨보며 토지 매입 계획을 세우는 일본인의 발자국. 이 모든 것이 그 숫자들 안에 살아 있습니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땅 위의 건물은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지만, 토지대장에 적힌 숫자들은 남습니다.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그 숫자들에 숨결을 불어넣어, 잊혀진 이야기를 다시 세상으로 꺼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어딘가에서는 삽이 땅을 파고, 솔로 흙을 닦고, 누군가의 일상이 담긴 도자기 조각이 빛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그 발굴은 단순한 유물 수집이 아닙니다. 113년 전 충정로3가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드리는 뒤늦은 인사입니다.

내 토지 아래에 어떤 역사가 잠들어 있을까요?
개발·신축 전, 문화재 지표조사는 법적 의무이자 역사와의 약속입니다.절차·비용·소요 기간,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안내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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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 위에 서 있는 모든 것은누군가의 삶 위에 세워진 겁니다.
128필지의 김씨 어른, 11필지의 미국인 선교사, 밭 한 뙈기를 가진 이름 모를 아낙.이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들이 밟았던 그 흙은 지금도 여기 있습니다.우리가 그 흙을 소중히 여길 때, 그들의 이야기도 다시 살아납니다.역사는 과거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의 발 아래에 있습니다.이 글을 다 읽은 당신은, 오늘 충정로를 걸을 때분명 다른 눈으로 그 골목을 바라보게 될 겁니다.그 시선의 변화가, 역사를 기억하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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