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대문구 충정로3가로 떠나는 시간여행
- 서울 HI
- 8월 11일
- 3분 분량
목차
1. 서두 – 1912년 충정로3가로 떠나는 시간여행
2. 546필지의 땅,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삶
3. 대지와 밭의 비율이 말해주는 생활상
4. 김씨부터 홍씨까지,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5. 외국인의 땅 소유 – 미국, 영국, 일본의 발자취
6. 국유지 1필지의 의미
7. 100여 년 전 충정로3가에서 본 사회 변화의 단면
8.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로 보는 과거의 기록 보존 가치
9. 성공사례 – 옛 토지 기록에서 시작된 문화유산 복원 이야기
10. 결론 – 기록 속 땅에서 되살아난 사람들의 숨결

⸻
서두 – 1912년 충정로3가로 떠나는 시간여행
커다란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갑니다.
자동차 대신 인력거가 다니고, 서양식 건물은 드물며, 골목마다 장독대가 줄지어 서 있는 풍경.
1912년, 서대문구 충정로3가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이곳은 오늘날처럼 빽빽한 고층 건물 대신, 낮은 기와집과 마당이 있는 한옥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평온한 풍경 속에도 그 시대의 사회 변화와 권력 구조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546필지, 217,571㎡라는 숫자 속에는 사람들의 땀과 희망, 그리고 외세의 발자취가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
546필지의 땅,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삶
충정로3가의 전체 땅은 546필지였습니다. 필지라는 말이 낯설 수 있지만, 쉽게 말해 ‘나눠진 토지 조각’입니다. 한 필지 안에는 누군가는 삶을 일구는 집이 있었고, 또 누군가는 먹거리를 키우는 밭이 있었습니다.
그 중 460필지, 150,258㎡가 대지였습니다. 이는 거주와 생활을 위한 공간이었죠. 86필지, 67,313㎡는 밭으로 쓰였습니다. 대지가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는 건, 당시 이 지역이 농업 중심보다는 이미 도시적 생활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서대문 일대가 서울의 서쪽 관문이자 교통 요충지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 비율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
대지와 밭의 비율이 말해주는 생활상
대지가 밭보다 세 배 가까이 넓었다는 사실은, 당시 이곳 사람들이 주로 장사와 서비스업, 혹은 도시 노동에 종사했을 가능성을 높입니다. 집과 상점, 창고, 그리고 마당이 섞여 있었을 겁니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저녁이 되면 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밭이 전혀 없던 건 아닙니다. 67,313㎡에 달하는 밭은 당시 주민들이 직접 채소를 재배하고, 그날그날 장터에 내다 팔거나 가족 식탁에 올렸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혼재한 ‘도시 근교’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
김씨부터 홍씨까지,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1912년 충정로3가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성씨는 김씨였습니다. 무려 128필지를 소유했습니다. 이어 이씨가 70필지, 임씨가 42필지, 최씨가 39필지, 조씨와 한씨가 각각 13필지, 정씨와 홍씨가 각각 10필지를 소유했습니다.
이렇게 성씨별로 땅 소유를 살펴보면, 당시 마을의 권력 구조가 보입니다. 김씨가 단연 우위에 있었고, 몇몇 성씨가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마을의 중심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이들 가문은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외국인의 땅 소유 – 미국, 영국, 일본의 발자취
충정로3가의 토지 중 일부는 외국인 소유였습니다.
미국인은 11필지, 영국인은 3필지, 일본인은 17필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지 2년째였고, 외국인 토지 소유는 정치적·경제적 세력 확장의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인의 17필지는 단순한 투자 목적을 넘어 행정·상업 거점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소유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토지 소유는 주로 선교 활동, 외교 거점, 혹은 상업 시설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실제로 서대문 일대에는 선교병원과 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죠.
⸻
국유지 1필지의 의미
흥미롭게도, 당시 국유지는 단 1필지였습니다. 지금처럼 공공기관 건물이나 도로, 공원이 많은 시대와는 달랐죠. 그 한 필지는 관청 건물이나 군사 시설, 혹은 관리용 창고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국유지가 적었다는 건, 대부분의 토지가 개인 혹은 외국인 소유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국가보다는 개인과 외세의 영향력이 훨씬 강했던 시대적 현실을 말해줍니다.
⸻
100여 년 전 충정로3가에서 본 사회 변화의 단면
토지 소유 구조만 봐도, 이 지역은 전통적인 한국 마을 구조에서 서서히 벗어나, 식민지 도시로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김씨, 이씨, 임씨 등 전통적 토착 세력과 일본, 서양 세력이 공존하던 시기.
골목 끝마다 들려오는 장사 소리, 마차 바퀴가 깔린 돌길 위를 구르며 내는 소리, 교회 종소리와 함께 울리는 장터의 북소리. 이 모든 것이 섞여 있던 곳이 바로 1912년의 충정로3가였습니다.
⸻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로 보는 과거의 기록 보존 가치
이런 토지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쓰입니다. 지표조사는 땅 위·아래에 있는 문화유산의 존재를 파악하는 기초 조사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토지 용도와 소유 기록은 발굴 조사 전에 유적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충정로3가의 경우, 1912년 기록은 당시 생활상과 토지 이용 구조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발굴을 진행하면, 집터의 구조나 생활 유물, 외국인 거주지의 흔적 등을 발견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
성공사례 – 옛 토지 기록에서 시작된 문화유산 복원 이야기
서울의 다른 지역, 예를 들어 종로구 모처에서는 1910년대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토대로 발굴 조사를 진행해, 조선 후기 한옥 마을의 유구와 도자기, 생활 도구들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처럼 기록에서 출발해 현장에서 확인하는 과정은, 단순히 땅 속 유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을 복원하는 작업입니다.
⸻
결론 – 기록 속 땅에서 되살아난 사람들의 숨결
1912년의 충정로3가는 단순한 숫자와 필지 목록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골목을 누비던 아이들, 부지런히 장사를 하던 상인, 밭에서 채소를 뽑던 어머니, 그리고 이 땅을 눈여겨보던 외국인들의 발자취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그 기록을 다시 꺼내고, 잊힌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불러낼 수 있습니다.
과거의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역사의 증언자입니다.
⸻
해시태그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