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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당인동에 논밭, 무덤 실화?! 지금 힙스터들의 성지 맞아?

  • 2025년 4월 1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문화재 발굴조사 · 마포 역사

1912년엔 밭이었다. 1930년엔 발전소가 됐다. 지금은 공원이다.

한 땅이 100년 동안 세 번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가졌어. 그리고 그 첫 번째 얼굴, 논밭과 무덤의 기억이 지금도 땅 아래 잠들어 있어.

1912년 마포구 당인동, 논밭 위에 발전소가 서기까지 —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로 되살아나는 한강변 마을의 세 가지 기억

seoulheritage.org 기반 분석 | 문화재 발굴기관 ·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마포구 문화유산


목차

1. 당인동이라는 이름 — 한강 모래사장 마을의 시작

2. 1912년 당인동 토지 통계 — 77필지에 담긴 한강변 농촌의 얼굴

3. 밭 33필지가 가장 넓었다 — 한강변 충적토 위의 채소 농경지

4. 논 8필지와 묘지 4필지 — 물과 죽음이 공존한 한강변 마을

5. 대지 31필지 — 작지만 조밀했던 마을 사람들의 집터

6. 이씨·김씨가 나눠 가진 땅 — 한강변 마을 두 가문의 이야기

7. 1912년 밭에서 1930년 발전소로 — 당인동의 세 가지 얼굴

8.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발전소 부지 아래 묻힌 농경지를 찾는 법

9. 실제 성공 사례 — 1912년 기록이 마포구 한강변 발굴을 바꾼 이야기

10. 마무리 — 발전소 굴뚝 아래 밭이 잠들어 있었다


1.당인동이라는 이름 — 한강 모래사장 마을의 시작

당인동(唐人洞).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한강변에 중국 사람(唐人)들이 살던 마을이 있었다는 설, 혹은 마을 지형이 당나라 사람처럼 생겼다는 설도 있어. 어떤 유래든 하나는 분명해. 이 동네는 한강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는 거야.

당인동은 마포구 서쪽 끝에 있어. 지금도 한강과 직접 맞닿아 있어. 그 한강변에 마을이 형성된 건 오래된 일이야. 배가 드나들고, 물자가 오가고,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던 한강 물가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생겼을 거야. 당인동 땅이 한강 충적토로 이루어진 평지라는 사실이 그걸 뒷받침해.

그리고 1912년 이 마을의 기록이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남았어. 그 시점에 당인동은 77필지의 논밭이 있는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어. 당인리발전소가 들어서기 18년 전의 이야기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 기록을 분석해서 마포구 일대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고 있어. 자, 그 기록을 들여다볼게.



2.1912년 당인동 토지 통계 — 77필지에 담긴 한강변 농촌의 얼굴

1912년 당인동의 기록을 숫자로 보면, 이 동네가 얼마나 소박하고 조용한 한강변 마을이었는지가 선명하게 나타나.

1912년 마포구 당인동 토지 통계 요약 (seoulheritage.org 기반)

전체 필지 수77필지

전체 면적147,167㎡

밭 (전)33필지 / 67,577㎡ (전체의 약 46%)

대지 (집터)31필지 / 28,562㎡ (전체의 약 19%)

묘지 (무덤)4필지 / 15,854㎡ (전체의 약 11%)

논 (수전)8필지 / 30,896㎡ (전체의 약 21%)

임야 (산)1필지 / 4,277㎡

밭+논 합계41필지 / 98,473㎡ (전체의 약 67%)

주요 소유 성씨 1위이씨 21필지

주요 소유 성씨 2위김씨 17필지


147,167㎡. 축구장 약 20개를 합쳐놓은 크기야. 다른 서울 동네들과 비교하면 작은 편이야. 당인동은 작은 마을이었어. 77필지, 147,167㎡. 단출한 숫자야.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서 주목할 게 하나 있어. 묘지가 4필지 15,854㎡야. 전체의 11%야. 필지 수도 많고 면적도 꽤 넓어. 밭 33필지, 집터 31필지 다음으로 묘지 4필지가 있다는 게 흥미로운 구성이야. 그리고 이 묘지가 1930년 발전소 부지 선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당인동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야.

논이 8필지 30,896㎡로 전체의 21%야. 밭이 33필지 67,577㎡로 46%야. 합치면 67%가 논밭이야. 한강에 인접한 충적 평야를 이용해서 밭농사 중심의 생활을 했고, 일부 구역에 논도 조성했어. 전형적인 한강변 소규모 농경 마을이었어.


3.밭 33필지가 가장 넓었다 — 한강변 충적토 위의 채소 농경지

33필지 67,577㎡의 밭. 전체의 46%. 당인동에서 밭이 가장 넓은 지목이야. 한강변 충적토는 논보다 밭에 유리한 경우가 많아. 물 빠짐이 빠른 모래질 충적토에서는 배추, 무, 마늘, 고추, 참깨 같은 밭작물이 잘 자라거든. 당인동 사람들은 바로 그 충적토를 이용해서 밭농사를 지었을 거야.

한강변 밭에서 수확한 채소는 마포 나루를 통해 서울 도심으로 팔려 나갔을 거야. 마포 나루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서울과 서해를 연결하는 핵심 물류 거점이었어. 당인동 밭에서 자란 배추가 마포 나루를 통해 서울 시내 시장으로 이동하는 풍경이 눈에 그려져.

33필지라는 숫자는 수십 가구가 각자의 밭을 일구며 살았다는 뜻이야. 매일 새벽 한강변 밭에 나가 호미로 흙을 뒤집고, 계절에 따라 씨앗을 뿌리고, 수확한 채소를 등에 지고 나루터로 향했을 거야. 그 손길이 닿았던 충적토 안에 농기구의 파편, 씨앗을 담던 도기 조각이 잠들어 있을 수 있어.

"밭 구역에서는 농기구 잔재와 생활 도기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한강변 충적토 지역은 유물이 수평으로 분산되어 있어, 지표조사 단계에서 수평 탐색 방식이 효율적이다." — seoulheritage.org 신수동 조사 기록 기반

그런데 1930년 이 밭 위에 대한민국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들어섰어. 33필지의 밭이 발전소 부지로 전환됐어. 80년 넘게 석탄과 LNG를 태우던 그 발전소 아래에 밭농사의 흔적이 잠들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지금 그 발전소가 문화창작발전소로 변신하면서 지상에 공원이 조성되고 있어. 그 공원 아래에 113년 전 밭의 기억이 아직 있을 수 있어.



4.논 8필지와 묘지 4필지 — 물과 죽음이 공존한 한강변 마을

당인동 기록에서 두 가지 지목이 특별히 주목을 끌어. 논 8필지 30,896㎡와 묘지 4필지 15,854㎡야.

논은 8필지밖에 안 돼. 필지 수는 적지만 면적이 30,896㎡로 꽤 넓어. 한강 인접 구역에서 물을 끌어오기 용이한 지점에 논이 조성됐을 거야. 그 논 아래에 수로 구조물의 잔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런데 묘지가 흥미로워. 4필지 15,854㎡. 전체의 11%가 무덤이었어. 작은 마을 당인동에서 무덤이 차지하는 면적이 이렇게 넓다는 건 이 구역이 상당히 정비된 가문 묘역이었음을 시사해. 단순한 마을 공동묘지가 아니라, 당인동 주요 가문이 대를 이어 관리해온 묘역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묘지 4필지와 발전소 부지 선정의 연결고리

1930년 당인동에 발전소 부지를 선정할 때, 이미 일부 토지는 변경 과정을 거쳤을 거야. 일제강점기에 대규모 시설 부지를 조성하면서 기존 농경지와 묘지를 수용하거나 이전시킨 사례가 많았어. 당인동의 묘지 4필지 15,854㎡가 발전소 부지 조성 과정에서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명확하지 않아. 하지만 발전소 가동 수십 년 동안 그 아래의 분묘 관련 흔적이 교란 없이 보존됐을 가능성도 있어. 특히 발전소 건물 기초가 닿지 않은 구역이라면, 조선시대 분묘 관련 유물이 남아 있을 수 있어. 이 부분이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부지 정비 과정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특히 중요한 이유야.

임야 1필지 4,277㎡는 당인동의 지형이 얼마나 평평했는지를 보여줘. 산이 거의 없는 한강변 평지야. 그 위에 논밭이 펼쳐지고, 마을이 형성되고, 한쪽에 무덤이 자리 잡은 전형적인 한강변 소규모 농촌 마을이었어.



5.대지 31필지 — 작지만 조밀했던 마을 사람들의 집터

당인동에서 대지(집터)가 31필지 28,562㎡라는 건 흥미로운 숫자야. 전체 77필지 중 31필지가 집터야. 40%야. 밭 33필지 다음으로 집터가 많아. 이문동이 352필지 중 집터가 29필지(8.2%)였던 것과 비교하면, 당인동은 상대적으로 집터 비율이 높은 편이야.

이 숫자가 말해주는 건 당인동이 순수한 농경 마을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생활 공동체가 형성된 마을이었다는 거야. 77필지 중 31필지가 집터라는 건 마을 구성원들이 꽤 밀집해서 살았다는 뜻이야. 집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 논밭이 주변을 둘러싸는 형태의 전형적인 한국 농촌 구조였을 거야.

집터 31필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최우선 집중 구역이야. 집터 구역 아래에는 여러 세대가 남긴 생활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어. 도자기, 생활 도구, 건축 부재, 아궁이의 흔적이 그 토층 안에 담겨 있을 수 있어. 특히 당인동처럼 한강변 충적토 위에 형성된 집터에서는 토층이 여러 시대에 걸쳐 겹겹이 쌓인 경우가 많아. 그 층위를 하나씩 확인하는 게 발굴조사의 묘미야.

1930년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이 31필지 집터는 어떻게 됐을까? 일부는 수용됐을 거고, 일부는 다른 곳으로 이전됐을 거야. 그 과정에서 집터 아래의 문화층이 교란됐을 수도 있어. 근데 발전소 건물 기초가 닿지 않은 구역이라면, 100년 전 당인동 주민들의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어.


6.이씨·김씨가 나눠 가진 땅 — 한강변 마을 두 가문의 이야기

1912년 당인동에서 가장 많은 필지를 가진 성씨는 이씨야. 21필지. 그 다음이 김씨 17필지야. 전체 77필지에서 두 가문이 38필지를 가지고 있었어. 약 49%야. 두 가문이 당인동 땅의 절반을 나눠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씨 — 21필지

당인동 1위. 77필지 중 27%를 이씨가 소유. 밭 중심의 집성촌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아. 발전소 부지 선정 과정에서 이씨 가문의 땅이 어떻게 처리됐는지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이야.

김씨 — 17필지

당인동 2위. 이씨와 함께 마을의 두 축을 이룬 가문. 17필지라는 비중은 작은 마을 당인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의미해. 두 가문의 집성촌 위치가 발굴 우선 구역 결정에 중요한 단서야.

이씨 21필지, 김씨 17필지. 두 가문이 마을의 절반 가까이를 소유하고 있었어. 이 규모의 집성촌은 여러 세대가 같은 구역에서 살면서 생활 흔적을 켜켜이 쌓아온 공간이야. 발굴조사에서 집성촌 추정 구역은 항상 집중 탐색 대상이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어. 이씨와 김씨가 가진 21필지와 17필지 중 밭과 집터가 얼마씩이었을까? 밭을 주로 소유했다면 농경지로서의 흔적이 더 많을 거야. 집터를 많이 소유했다면 생활 유물이 더 집중될 거야. 이 구분이 지표조사 방향 설정에서 중요한 변수야.

혹시 당인동에 뿌리를 둔 이씨나 김씨 독자 있어? 1912년 기록에 네 조상의 필지가 있을 수 있어. 그 땅 위에 발전소가 세워졌고, 지금은 공원이 됐어. 100년 넘는 시간 동안 그 땅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생각하면, 뭔가 복잡한 감정이 생기지 않아?


7.1912년 밭에서 1930년 발전소로 — 당인동의 세 가지 얼굴

당인동이 특별한 이유는 한 땅이 100년 동안 세 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기 때문이야. 그 변천사를 순서대로 보면 이 동네가 얼마나 드라마틱한 역사를 품고 있는지가 느껴져.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 당인동 77필지 147,167㎡. 밭 33필지·집터 31필지·묘지 4필지·논 8필지. 이씨 21필지·김씨 17필지가 마을의 핵심. 한강변 조용한 농촌 마을.

1929년

당인리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기 위한 철도 당인리선 개통. 발전소 건설 준비 시작.

1930년

대한민국 최초의 화력발전소 당인리발전소 1·2호기 준공. 당인동 논밭 위에 석탄화력발전소가 들어섬. 1912년 기록의 밭·묘지 구역이 발전소 부지로 전환.

1970년대

발전소 4·5호기 준공. 당인리발전소가 서울 전력의 75%를 공급하는 핵심 시설로 성장. 당인동 전체가 발전소 권역으로 편입.

1980년

당인리선 철도 폐선. 연료가 석탄에서 LNG로 전환되면서 철도 기능 상실.

2019~현재

발전소 지하화 완료. 지상에 마포새빛문화숲 공원 조성.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개발 진행 중. 세 번째 변신 시작.

이 타임라인이 말해주는 게 있어. 1912년 이씨와 김씨가 밭을 일구던 그 땅 위에, 18년 뒤 발전소가 들어섰어. 발전소가 90년 가까이 서울 전력을 공급했어. 그리고 지금 그 발전소가 지하로 내려가고 지상에는 공원이 생기고 있어. 세 번의 완전한 변신. 근데 가장 첫 번째 얼굴, 논밭과 무덤의 기억은 그 변신들 아래에 여전히 잠들어 있을 수 있어.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부지를 정비하는 지금 이 순간, 1912년 기록이 살아있는 자료가 돼. 발전소 기초 공사가 닿지 않은 구역이 어디인지, 그 구역의 1912년 지목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면 발굴 가능성이 있는 구역을 특정할 수 있어.



8.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발전소 부지 아래 묻힌 농경지를 찾는 법

당인동처럼 발전소 부지였다가 문화공간으로 변신하는 지역에서는 문화재 지표조사가 특별한 의미를 가져. 발전소 건물과 기초 공사로 인해 일부 구역은 이미 교란됐을 수 있어. 하지만 발전소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주변 구역에는 1912년 농경지와 묘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

1

지표조사 — 1912년 지목과 발전소 건물 기초 구역 대조

당인동 지표조사의 핵심은 1912년 기록의 밭 33필지·묘지 4필지·집터 31필지 분포를 당인리발전소 각 호기의 건물 기초 구역과 대조하는 거야. 발전소 기초가 닿지 않은 구역을 특정하면 그 구역이 조사 우선 대상이 돼.

2

표본조사 — 밭·묘지·집터 구역을 분리해서 설계

조사 면적 2% 이내에서 표본 굴착 시, 밭 구역(농기구 잔재), 묘지 구역(분묘 유물), 집터 구역(생활 유물)을 각각 별도 포인트로 설정해. 세 구역의 예상 유물 종류가 완전히 달라서 분리 설계가 효율을 높여.

3

시굴조사 — 한강변 충적층 수평 탐색 병행

한강 인접 충적토 지역에서는 수직 굴착과 수평 탐색 트렌치를 병행해야 해. 유물이 충적층을 따라 수평으로 분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특히 묘지 4필지 추정 구역에서는 집중적인 수평 탐색이 필요해.

4

본발굴조사 — 발전소 관련 근대 산업 유물도 함께 검토

당인리발전소 자체가 1930년대 최초 화력발전소로 근대 산업유산이야. 발굴 과정에서 조선시대 농경 유물 외에도 근대 발전소 관련 자재, 당인리선 철도 관련 유물이 나올 수 있어. 이 두 층위를 구분해서 기록하는 게 중요해.

당인동은 지금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개발이 진행 중이야. 이 과정에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타이밍이 중요해. 개발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1912년 기록을 바탕으로 조사 방향을 잡아야 해. seoulheritage.org에서 마포구 전체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어.


9.실제 성공 사례 — 1912년 기록이 마포구 한강변 발굴을 바꾼 이야기

당인동과 비슷한 맥락에서 1912년 기록이 마포구 인근 발굴에 어떤 차이를 만들었는지 살펴볼게.

사례 1 — 마포구 서교동: 조선 전기 도자기·삼국시대 토기 출토

seoulheritage.org가 서교동 1912년 기록을 분석했어. 서교동 인근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조선 전기 도자기, 심지어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된 사례가 있어. 홍대와 카페가 즐비한 지금의 서교동이 사실 수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야. 당인동처럼 한강변에 인접한 마포구 지역들은 이 가능성을 공유하고 있어.

사례 2 — 마포구 신수동: 농경지 터에서 토기·농기구 잔해 출토

신수동 일대 발굴에서 조선시대 기와 조각과 생활 유물이 출토됐어. 농경지 터에서 토기 조각과 농기구 잔해가 발견됐고, 주변에서는 사당터로 추정되는 유구도 확인됐어. 당인동의 밭 33필지 구역에서 비슷한 종류의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어.

사례 3 — 서울 구로동: 묘지 기록 기반 분묘 유물 예측 적중

구로동 1912년 기록의 무덤 1필지를 시굴 우선 대상으로 설정했더니 분묘 관련 유물이 확인됐어. 당인동에는 묘지가 4필지 15,854㎡로 훨씬 넓어. 더 집중적인 시굴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구역이야. 특히 발전소 기초 공사가 닿지 않은 묘지 구역이라면 분묘 관련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을 수 있어.

세 사례가 말하는 건 하나야. 1912년 기록을 먼저 분석하고, 각 지목별로 조사 방향을 설정했을 때 발굴 효율이 압도적으로 올라간다는 거야. 당인동의 77필지도 이 경로를 따르면 그 안에 잠든 기억을 꺼낼 수 있어.



10.마무리 — 발전소 굴뚝 아래 밭이 잠들어 있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제 당인동을 지날 때 다른 눈이 생길 거야. 마포새빛문화숲에서 한강을 바라볼 때,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앞을 걸을 때, 딱 한 번만 발아래를 생각해줘.

이씨 21필지. 김씨 17필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1912년 이 땅에서 밭을 일구고 살았어. 배추를 심고, 무를 뽑고, 마포 나루로 채소를 실어 나르던 사람들이야. 무덤 4필지에는 그 사람들의 조상이 잠들어 있었어. 한강 물소리를 들으며, 계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기억이야.

그리고 18년 뒤, 그 밭 위에 굴뚝이 솟아올랐어. 석탄 연기가 하늘을 덮고, 발전기가 돌아가고, 서울 시내 전깃불이 켜졌어. 그 발전소가 90년 동안 서울을 밝혔어. 그리고 지금은 지하로 내려가고, 지상에는 공원이 생기고, 문화창작 공간이 들어서고 있어.

세 번의 완전한 변신. 논밭에서 발전소로, 발전소에서 문화공간으로. 근데 그 모든 변신 아래에 첫 번째 기억이 남아 있어. 이씨 가문이 일구던 밭, 김씨 가문의 묘역, 마포 나루로 이어지던 흙길. 그게 지금도 땅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거야.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그 첫 번째 기억을 찾는 일이야. 발전소가 덮어버리기 이전의 당인동, 그 논밭과 무덤의 흔적을 꺼내는 일. 그 기억이 되살아나야 이 땅이 걸어온 100년이 완전하게 기록돼.

다음에 한강 산책길에서 당인동 쪽을 바라보거든, 그 발전소 굴뚝이 서 있던 자리를 한 번만 생각해줘. 거기, 밭이 있었어. 그리고 밭을 일구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의 기억이 지금도 땅 아래에서 숨 쉬고 있어.



밭이 발전소가 되고,


발전소가 공원이 됐다.



세 번 변한 땅 아래에


첫 번째 기억이 아직 잠들어 있다.



그 기억을 찾는 것이


이 땅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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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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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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