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동대문구 이문동6필지 9,778㎡세 가지 비밀을 품은 관문 마을
- 5월 29일
- 8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기관 완벽 가이드
조선의 관문 ·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里門洞)
1912년 동대문구 이문동6필지 9,778㎡세 가지 비밀을 품은 관문 마을임야 50.6% · 밭 32.2% · 지소 17.1%
마을 어귀에 세워진 조선의 돌문, 이문(里門).그 문 앞의 숲과 밭과 연못이 품은 600년의 기억이9,778㎡의 땅속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
임야 4,952㎡ (50.6%)
밭 3,154㎡ (32.2%)
지소 1,672㎡ (17.1%)
6필지
총 필지 수
9,778㎡
총 면적
1,629.7㎡
필지당 평균
1912년
지적 등록
SCROLL
里門 · 조선의 관문 마을 · 임야·밭·지소 3종
"마을 어귀에 세운 돌문, 이문(里門).그 문이 사라진 뒤에도 이름만은 남았다.그리고 그 이름 아래 역사도 남았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지금은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경희대학교가 자리한 대학가로 유명한 이 동네의 이름 '이문(里門)'은 조선시대 마을 어귀에 세웠던 돌로 쌓은 문에서 비롯됐다. 그 문은 마을을 지키고 경계를 표시했다. 1912년 이 마을에는 국유지 6필지 9,778㎡가 있었다. 임야, 밭,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지소(池沼). 관문 마을의 세 가지 땅이 품은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
목차 — Table of Contents
011912년 이문동 국유지 통계 — 6필지 세 가지 땅의 구성
02이문(里門)이란 무엇인가 — 마을 어귀 돌문의 역사
03이문동이란 어디인가 — 한양 동북쪽 관문 마을의 역사
04임야·밭·지소 각각의 발굴 가치 — 관문 마을의 세 가지 보물
05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관문 마을 터를 읽는 법
06표본·시굴·발굴조사 — 단계별 완전 해설
07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 어디에 맡겨야 하나
08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 행동을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
01핵심 통계
1912년 이문동 국유지 통계 — 6필지 세 가지 땅의 구성

9,778㎡ — 6필지 · 임야·밭·지소 3종 구성
임야 2필지 50.6%밭 3필지 32.2%지소 1필지 17.1%
🌲
임야 (林野)
2필지
4,952㎡ · 50.6%
필지당 평균 2,476㎡
🌾
밭 (田)
3필지
3,154㎡ · 32.2%
필지당 평균 1,051㎡
💧
지소 (池沼)
1필지
1,672㎡ · 17.1%
단독 연못 필지
6필지
총 필지
1,629.7㎡
필지당 평균
50.6%
임야 비율
17.1%
지소 비율
토지 유형별 면적 비율 (총 9,778㎡)
🌲임야
50.6%4,952㎡
🌾밭
32.2%3,154㎡
💧지소
17.1%1,672㎡
다른 지역 지소 비율 비교 — 이문동의 특이성
이문동
지소 17.1%
17.1%
구로동
지소 5.1%
5.1%
후암동
지소 0%
0%
이문동
임야 50.6%
50.6%
이문동 국유지 9,778㎡는 이 시리즈에서 비교적 소규모에 속한다. 하지만 규모가 작다고 역사가 얕은 것은 아니다. 6필지에 임야, 밭, 지소 세 가지가 균형 있게 배치된 이 구성은, 한 마을이 갖추어야 할 생태 환경의 완결성을 보여준다. 숲이 있고, 밭이 있고, 물이 있다.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가 모두 이 9,778㎡ 안에 담겨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지소 비율이다. 1필지 1,672㎡, 전체의 17.1%가 지소다. 지소가 등장한 두 번째 지역인 이문동에서 지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구로동(5.1%)보다 3배 이상 높다. 이문동의 국유 지소는 단순한 자연 연못이 아니라 마을의 수환경을 관리하던 핵심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연못의 바닥에, 수백 년의 시간이 가라앉아 있다.
02이름의 역사
이문(里門)이란 무엇인가 — 마을 어귀 돌문의 역사
🏛️
이문 (里門)
里門 · 마을 리 + 문 문 · '마을의 문'
조선시대 도성 주변 마을 어귀에 세웠던 돌로 쌓은 작은 문.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며, 도둑과 맹수를 막는 역할을 했다. 이문은 마을 공동체의 안과 밖을 나누는 상징적 경계였으며, 이 앞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소사를 의논했다. 이문동이라는 지명은 이 돌문이 마을 어귀에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
이문(里門)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 주변 마을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마을 관문이다. 성곽 내부의 한양 도성에 성문이 있었다면, 그 외곽 마을들에는 이문이 있었다. 이문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했다. 첫째는 경계 표시다. 이 문을 기준으로 마을의 안과 밖이 구분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 문 안쪽의 땅에 대해 공동 책임을 졌다. 둘째는 방어다. 야간에 이문을 닫아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마을의 안전을 지켰다.
이문동에 이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이 단순한 농촌 취락이 아니라 일정한 공동체 조직을 갖춘 정착 마을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문을 세우고 관리할 만한 마을 공동체가 있었고, 그 공동체는 이 9,778㎡의 국유지를 중심으로 생활했을 것이다. 임야에서 땔감을 구하고, 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지소에서 물을 길어다 쓰면서.
발굴 고고학 관점에서 이 사실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문 자체의 석축 기초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으며, 이문 앞의 광장이나 모임 공간의 흔적이 밭 구간에서 확인될 수 있다. 지소는 마을 공동 우물 또는 생활 수원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고, 임야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던 봉산(封山)의 성격을 가졌을 수 있다.
이문이 사라진 뒤에도 마을은 그 이름을 기억했다. 600년이 지난 지금, 이문동이라는 지명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 문 앞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도 땅 아래에서 살아있을 것이다.
03역사 배경
이문동이란 어디인가 — 한양 동북쪽 관문 마을의 역사

이문동(里門洞)은 동대문구의 북쪽에 위치하며,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경희대학교 캠퍼스가 자리한 대학 도시의 풍경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현대적 풍경 아래에는 훨씬 깊은 역사가 숨어 있다.
이문동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동북쪽 관문 지역이었다.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과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에서 이어지는 도로가 이 지역을 지나 경기도 북부 방향으로 이어졌다. 한양과 경기 북부를 연결하는 이 도로 변에 형성된 마을이 이문동의 전신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향할 때, 혹은 경기 북부에서 한양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지나치는 관문 마을이었던 것이다.
이런 교통 요충지적 성격은 이문동이 왜 임야·밭·지소의 세 가지 국유지를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도성과 외곽을 연결하는 길목 마을에는 여행자를 위한 식수 공급(지소), 식량 공급(밭), 연료 공급(임야)을 위한 국가 관리 자원이 필요했다. 1912년의 국유지 9,778㎡는 조선시대부터 국가가 이 교통 요충지에 유지해온 공공 자원의 마지막 기록일 것이다.
04유형별 분석
임야·밭·지소 각각의 발굴 가치 — 관문 마을의 세 가지 보물

🌲
임야 — 50.6%
4,952㎡
인위적 교란 최소. 마을 공동 봉산 관련 유구. 분묘군 가능성. 도성 동북 관문 마을 방어 시설 흔적. 보존 상태 양호.
🌾
밭 — 32.2%
3,154㎡
도자기·기와 파편 분포. 이문(里門) 석축 기초 잔존 가능. 조선시대 마을 광장·모임 공간 흔적. 도로 유구 가능성.
💧
지소 — 17.1%
1,672㎡
습지 고고학 환경. 마을 공동 수원 관련 시설. 목재·유기물 탁월 보존. 여행자 식수 공급 시설 흔적 가능.
💧
이문동 지소 1,672㎡ — 관문 마을의 생명줄
이 지소는 단순한 자연 연못이 아니었다. 도성 동북쪽 관문 마을을 지나는 여행자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고, 마을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지탱했던 공공 수원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체의 17.1%를 차지하는 이 지소의 퇴적층에는 수백 년간의 여행자와 마을 사람들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을 것이다. 목재 두레박, 식기류, 동전, 장신구. 연못 바닥에 가라앉은 이 모든 것들이 조선의 일상을 말해준다.
밭 3,154㎡는 이문동 발굴에서 가장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구간이다. 조선시대 마을 어귀에는 이문 앞에 넓은 광장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소사를 의논하고,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여행자들이 쉬어가던 그 공간. 밭으로 전용되기 이전에 이 3,154㎡에는 그런 마을 공동 공간이 있었을 수 있다. 발굴팀이 이 구간의 경작층 아래에서 석재 포장 흔적이나 이문의 기초 석축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이문동 지명의 기원을 물리적으로 입증하는 역사적 발견이 될 것이다.
임야 4,952㎡는 발굴 잠재력 면에서 가장 높은 보존 가능성을 가진 구간이다. 마을 공동 봉산의 성격을 가진 숲에는 분묘가 조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이문동 마을 사람들의 분묘군이 이 임야에 잠들어 있다면, 비석, 석물, 묘곽 구조, 부장품 등이 함께 출토될 것이다. 도성 동북쪽 관문 마을의 주민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 살았는지를 분묘 연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05조사 방법론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관문 마을 터를 읽는 법
이문동 9,778㎡의 지표조사는 규모는 작지만 내용이 풍부한 조사다. 임야·밭·지소 세 유형 각각에 맞는 접근 방법을 적용하면서, 동시에 이 세 구간이 어떻게 하나의 마을 공동체를 이루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특히 이문이라는 역사적 지명과 연결된 이 지역의 조사는 단순한 유물 발굴을 넘어 이문동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기원을 물리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9,778㎡는 법적 지표조사 의무 기준인 3만 제곱미터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적 지명과 직접 연결된 이 지역의 특수성, 그리고 지소라는 희귀 토지 유형의 존재를 감안하면 사전 기초조사의 가치는 면적을 훨씬 초과한다. 동대문구 역사문화 환경 보존 지구 포함 여부 확인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1
이문(里門) 관련 문헌 조사 — 위치 및 형태 추적
조선시대 이문 설치·관리 관련 기록, 한양 도성 외곽 마을 지도, 이문동 지명 유래 문헌을 분석해 이문의 정확한 위치와 석축 형태를 파악한다. 이것이 밭 구간 발굴 우선 위치를 결정하는 핵심 자료다.
2
지소 수계 분석 및 역사 용도 파악
1,672㎡ 지소가 어떤 수계 환경에서 형성되었는지, 도성 동북 방면 도로와의 관계에서 어떤 공공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역사 기록과 지형 분석으로 파악한다.
3
3유형 현장 지표 조사 및 유물 분포 기록
임야·밭·지소 구간 각각의 지표 조사를 실시한다. 밭에서는 기와·도자기 파편과 석재 흔적을, 임야에서는 봉분·석물 흔적을, 지소 주변에서는 목재 말뚝·석재 구조물 흔적을 집중 탐색한다.
4
이문동 역사 맥락 종합 보고서 작성
3유형 조사 결과를 이문(里門)이라는 역사 지명과 연결하여, 조선시대 관문 마을로서의 이문동 공간 구성을 재구성하는 종합 보고서를 작성한다.
06발굴 단계
표본·시굴·발굴조사 — 단계별 완전 해설

9,778㎡의 발굴은 규모 면에서는 이 시리즈의 소형 사례에 속하지만, 조사의 내용 면에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세 가지 토지 유형이 각기 다른 발굴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표본조사의 2% 이내, 즉 최대 195.6㎡에서 시작하는 이 조사는 작은 면적이지만 핵심 구간을 잘 선택하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표본조사에서 가장 전략적인 선택은 밭 구간에 이문 석축 탐색 트렌치를 설치하는 것이다. 이문(里門)의 석축 기초는 조선시대 석재 구조물 특성상 지하 30~50cm 깊이에 잔존할 가능성이 있다. 이 트렌치에서 다듬어진 석재 열이 확인된다면, 이문동 지명의 기원을 처음으로 물리적으로 증명하는 순간이 된다. 지소 구간에서는 퇴적물 코어를 채취해 수계 역사와 유물 존재 가능성을 먼저 확인한다.
시굴조사 단계에서 977.8㎡로 확장하면, 이문동 관문 마을의 전체 공간 구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문의 석축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 있었는지, 지소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수로가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임야의 봉분들이 어떤 간격으로 분포하는지. 이 모든 것이 연결되면 9,778㎡의 작은 국유지가 실제로는 얼마나 복잡하고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정밀발굴조사에서 기다리는 가장 감동적인 발견은 이문 석축 그 자체다. 수백 년 전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쌓은 그 돌문의 기초가 땅 아래에서 온전히 발굴된다면, 그것은 지명 연구와 고고학이 만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이문동'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행정 지명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물리적 흔적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 순간.
작은 땅이 큰 이야기를 품는다. 9,778㎡는 서울 한복판의 작은 점이지만, 그 점 안에 이문이 있고 연못이 있고 숲이 있다. 조선의 관문 마을 전체가 이 작은 국유지 안에 압축되어 있다. 첫 삽이 그것을 열 것이다.
07기관 안내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 어디에 맡겨야 하나
이문동처럼 역사 지명과 직결된 마을 터 발굴은 고고학적 기술과 역사학적 해석이 균형 있게 결합된 전문 기관이 담당해야 한다. 특히 이문 석축이라는 특수 구조물 발굴 경험, 지소 습지 발굴 기술, 그리고 조선시대 마을 공동체 관련 유구 판독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이문동처럼 역사 지명이 살아있는 조선시대 마을 터의 고고학적 검증을 중요한 연구 과제로 삼고 있다. 이문(里門)이라는 구체적인 물리 구조물과 연결된 이 지역은, 발굴 결과가 역사 지명학 연구와 직접 연결되는 특별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발굴 기관 선정 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조선시대 마을 관문(里門) 관련 유적 발굴 경험, 지소 습지 발굴 기술, 소규모 복합 토지 체계적 발굴 능력, 그리고 역사 지명 검증 관련 학술 연구 역량이다. 이문동의 발굴은 단순히 유물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이문동'이라는 이름이 왜 생겼는지를 처음으로 증명하는 학술적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성공 사례 — 서울 북촌 조선시대 마을 이문 발굴
서울 북촌 일대에서 진행된 조선시대 마을 관련 발굴에서는 마을 어귀 석축 구조물의 잔존 기초가 확인된 사례가 있다. 이 발굴은 이문동 밭 구간 발굴에서 이문 석축을 탐색할 때 참고할 수 있는 방법론적 선례다. 지하 40~60cm 깊이에서 확인된 다듬어진 석재 열이 마을 경계 구조물의 잔존임을 입증한 이 발굴은, 이문동에서 동일한 발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성공 사례 — 동대문구 인근 한양 동북 방면 도로 유구 발굴
한양 도성 동북쪽 도로 변 마을 발굴에서는 조선시대 도로 포장 흔적과 함께 도로 변 생활 유구가 확인되었다. 같은 동북 방면 관문 마을이었던 이문동에서도 도성을 오가는 여행자들의 흔적이 밭 구간 아래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고 사례다.
08행동 촉구
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 행동을 부르는 마지막 이야기

이 글을 끝까지 읽어온 당신은 이제 '이문동'이라는 이름을 다르게 읽을 것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경희대학교가 있는 대학가, 서울 동북쪽의 평범한 주거지. 그 이름 안에 조선의 마을 관문이 있고, 여행자들이 물을 마시던 연못이 있고, 마을 사람들이 조상을 묻었던 숲이 있다는 것을.
만약 당신이 동대문구 이문동이나 인근 지역에서 건설·개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면,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동대문구 일대는 한양 도성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역사 문화 환경 보존 지구와 겹칠 가능성이 있다. 착공 전 국가유산청 또는 서울시에 해당 구역의 역사문화환경 보존 지구 포함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문동 국유지처럼 작은 면적이라도, 역사 지명이 살아있는 땅에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발견이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법적 확인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이문동'이라는 이름을 수백 년간 보존해온 이 마을에, 그 이름의 기원이 되는 돌문의 흔적이 아직 땅속에 있을 수 있다. 그 돌문을 찾아내어 이름과 실체를 처음으로 연결하는 일. 그것이 고고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마을의 문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름은 남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만든 돌들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문동'이라는 글자 한 획 한 획이 그 돌들을 기억하고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지금도 이문동처럼 역사 지명 속에 살아있는 유산의 흔적들을 추적하며 잠든 역사를 찾아가고 있다. 1912년 동대문구 이문동 9,778㎡의 세 가지 땅이 전하는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밭 아래에서 첫 번째 돌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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