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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도봉구 창동의 땅이 들려주는 숨겨진 이야기와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의 오늘

  • 2025년 11월 28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4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조사 · 서울 도봉구 창동 역사 · 문화재 발굴기관 · 동양척식주식회사 · 유적발굴단


이곳을 스크롤하는 순간, 당신은 113년 전 창동의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땅의 비밀.


서울 도봉구 창동. 지금은 복잡한 철도망과 아파트 단지로 가득한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 있었다. 735필지 2,399,428㎡. 서울 북부권에서 손꼽히는 광대한 농경 지역이었고, 이씨·김씨·한씨가 이 넓은 들판을 나눠 갖고 일궈가던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름이 조용히 올라와 있었다.

이 글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1912년 창동 토지 기록을 바탕으로, 이 동네의 뿌리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세계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생생하게 풀어낸다.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기 어렵다. 이야기는 아주 깊고, 아주 생생하다.


목차

1113년 전 창동, 땅의 구조를 열어보다

2논과 밭,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새겨진 흔적들

3성씨별 토지 소유에서 드러나는 마을의 흐름

4공유지·국유지·동양척식주식회사 토지의 충격적 의미

5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로 다시 깨어나는 창동

6실제 성공 사례로 보는 발굴조사의 가치

7지금 서울에서 발굴조사를 의뢰해야 하는 이유

8마지막에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단 하나의 진심


735

총 필지 수

2,399,428㎡

총 면적

389

논 필지

153

이씨 필지

14

동양척식 소유

5

무덤 필지


1. 113년 전 창동, 땅의 구조를 열어보다



1912년의 창동을 상상해보자. 지금 우리가 아는 복잡한 철도망도, 고층 건물도, 주거 밀집 지역도 없다. 인간의 삶의 결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땅의 질감이 느껴지는 마을이 그 자리에 있었다. 735필지 2,399,428㎡. 지금의 면적 감각으로는 쉽게 와닿지 않지만 당시 기준으로 서울 북부권에서 손꼽히는 광대한 공간이었다.

그 땅 곳곳에는 시간의 결이 남아 있었고, 그 결은 지금 발굴조사원들이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며 다시 되살리고 있다. 문화재 발굴, 유물 발굴, 유적 발굴은 이렇게 숫자 속에 숨은 이야기를 현실로 꺼내는 작업이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도봉구 창동의 기록을 들여다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735필지라는 방대한 기록 안에 창동의 과거 전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거를 제대로 읽어내야만,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가 보인다.


2. 논과 밭,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새겨진 흔적들



창동의 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논이었다. 389필지 1,658,139㎡. 전체 2,399,428㎡의 약 69%가 논이었다. 지금의 창동역 주변을 떠올리면 도무지 겹쳐지지 않는 풍경이지만, 1912년의 이곳에서는 계절마다 물길이 달라지고 벼가 자라고 수확이 이어지는 농촌의 시간이 흘렀다. 창동 사람들의 삶이 농업 중심이었음을 이 하나의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 옆에는 278필지 519,797㎡의 밭이 이어졌다. 논과 밭을 합치면 667필지로 전체의 90.7%가 농경지였다. 집은 겨우 49필지 46,063㎡. 아주 작은 취락 형태로 광대한 들판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무덤 5필지 9,471㎡의 존재다. 마을 한 켠에 조상의 묘역이 있었다는 것은 이 공동체가 여러 세대에 걸쳐 이 땅에 뿌리내려 왔다는 증거다. 임야 11필지 54,608㎡와 연못(지소) 2필지 4,499㎡도 함께 존재했다.

이런 공간 구성 자체가 오늘날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무덤이 있던 자리에서는 당시 유력 가문의 장례 관련 유물이, 연못 인근에서는 수변 생활 유구가, 임야 경계부근에서는 경작 관련 흔적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당시 사람들의 삶의 동선을 재구성하고 발굴 위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 이 필지 구성에서 나온다.

389필지

1,658,139㎡ (69%)

278필지

519,797㎡

대지(집)

49필지

46,063㎡

임야

11필지

54,608㎡

무덤

5필지

9,471㎡

연못(지소)

2필지

4,499㎡


3. 성씨별 토지 소유에서 드러나는 마을의 흐름



성씨별 토지 소유 기록을 펼치는 순간 창동이라는 마을의 사회 구조가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다. 이씨 153필지, 김씨 140필지, 한씨 122필지. 이 세 성씨만 합치면 415필지로 전체 735필지의 56.5%를 차지한다. 세 집안이 창동의 절반 이상을 대대로 이어온 것이다. 뒤를 이어 조씨 66필지, 전씨 37필지, 박씨 26필지, 최씨 22필지, 송씨 20필지, 장씨 18필지, 임씨 10필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구조는 단순한 소유 현황이 아니다. 마을의 중심 가문과 주변 세력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씨 153필지가 집중된 구역에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이씨 가문의 생활 흔적이 두텁게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무덤 5필지와 성씨 분포를 함께 분석하면 어떤 가문이 이 마을의 제향을 담당했는지까지 추정할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토지 소유 구조를 가장 먼저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씨 122필지의 존재도 주목할 만하다. 창동 일대에서 한씨는 이씨·김씨와 함께 이 마을을 삼분하는 세력이었다. 세 집안이 서로 이웃하며 혼인과 제향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공동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 세 집안의 생활 터전이 겹치는 구역에서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복합적인 생활 유구가 한 층위 안에 쌓여 나올 가능성이 크다.

153

이씨 필지

140

김씨 필지

122

한씨 필지

66

조씨 필지

37

전씨 필지

26

박씨 필지

22

최씨 필지

14

동양척식


4. 공유지·국유지·동양척식주식회사 토지의 충격적 의미

1912년의 토지 조사는 식민지 지배 체제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사실을 기억한 채 기록을 다시 보면 공유지 13필지, 국유지 5필지라는 수치가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 14필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조용하지만 묵직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설립된 국책 기관이었다. 1912년 창동에서 이미 14필지가 이 회사의 이름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은, 창동에서도 토지 수탈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씨·김씨·한씨가 대대로 일궈온 들판 한 켠에 침투한 외부 권력의 그림자가 이 14필지 안에 담겨 있다.

이 기록은 유적발굴단이 특정 구역을 조사할 때 당시 생활상이 왜 갑자기 끊기거나 변화했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동양척식 소유지 인근에서는 기존 조선인 생활 유구가 교란된 흔적이나 일제강점기 시기의 다른 층위가 겹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문화재발굴조사 장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역사적 공백'을 이 문서 기록이 채워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4필지 + 국유지 5필지 + 공유지 13필지 = 총 32필지. 전체 735필지의 4.4%가 식민지 권력 및 공공 기관과 연결된 토지였다. 이씨·김씨·한씨 415필지가 장악한 마을 한복판에 이 32필지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창동 발굴조사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5.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로 다시 깨어나는 창동



지금 서울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바로 이런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진행된다. 지표조사로 땅 위의 흔적을 파악하고, 시굴조사·표본조사로 내부층을 확인한 뒤, 본격적인 유적 발굴로 이어지는 이 과정의 출발점이 1912년 창동 기록 같은 역사 자료다.

창동의 1912년 기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지표 자료다. 논 389필지가 분포한 방향, 무덤 5필지의 위치, 동양척식 14필지의 구역.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유물 발굴과 유적 발굴 위치를 예측하고, 발굴조사원과 조사보조원이 실제 땅을 파며 역사를 복원한다. 기록이 정밀할수록 발굴이 정확해지고, 발굴이 정확해질수록 잃어버린 역사가 더 온전히 돌아온다.

창동은 서울 북부권에서 가장 풍부한 농경 역사를 가진 지역 중 하나다. 735필지의 광대한 기록이 발굴의 나침반이 되어, 언젠가 이곳에서 이루어질 조사에서 1912년의 삶이 온전히 되살아날 것이다.


6. 실제 성공 사례로 보는 발굴조사의 가치

성공 사례 — 서울 북부권 조선 후기 생활 유구 발굴

창동 인근 지역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생활 토기 파편이 대량 출토된 사례가 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단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본격 발굴에서 삶의 흔적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발굴조사단은 당시 마을 생활 수준과 이동 경로까지 재구성할 수 있었다. 과거의 땅은 절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땅속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 시간이 여전히 누워 있기 때문이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참고)

이런 사례가 반복될수록 창동처럼 농경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성씨 집중도가 뚜렷한 지역의 발굴 가치는 더욱 선명해진다. 한 번의 발굴이 단순히 유물을 드러내는 데서 끝나지 않고, 도시 전체의 역사 인식을 바꾼다. 그것이 발굴의 진짜 힘이다.


7. 지금 서울에서 발굴조사를 의뢰해야 하는 이유

도시 재개발, 건축 허가, 공공 시설 조성과 함께 지금 가장 많이 검색되는 분야가 서울지역 문화유적 시굴조사, 표본조사, 지표조사, 발굴조사 의뢰다. 이제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파도 유물이 나오는 서울에서 문화재 발굴은 곧 도시의 품격이다.

창동처럼 과거 기록이 풍부한 지역일수록 조사 결과의 정확도는 더 높아진다. 문화재발굴조사 장비의 전문화, 유적발굴단의 체계화, 발굴조사원의 숙련된 역량이 결합되면 어느 구역이든 정교한 조사가 가능하다. 초기에 제대로 지표조사를 진행하면 공사 중 예상치 못한 유물 발견으로 인한 수억 원의 추가 비용과 공사 지연을 막을 수 있다. 발굴조사는 개발의 장애물이 아니라 가장 확실한 리스크 관리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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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지막에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단 하나의 진심



113년 전 창동의 땅은 말이 없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를 듣는다. 이씨·김씨·한씨 세 집안이 어깨를 맞대며 들판을 일궜던 이야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름이 조용히 파고들던 그 해의 긴장. 무덤 5필지 옆에서 조상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의 마음. 그 모든 이야기가 735필지 2,399,428㎡ 안에 켜켜이 쌓여 있다.

당신이 오늘 이 글을 읽었다면, 그 기억을 지키는 일에 이미 동참한 것이다. 서울의 문화유산은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땅속의 시간은 지금도 숨 쉬고 있고, 우리가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땅은 잊지 않는다. 우리가 잊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귀 기울이는 한, 창동의 시간은 계속 살아 있다.

사람이 남긴 흔적을 다시 만나는 일.


그 일은 결국, 사람을 다시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느껴지는 건 설명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이다.

창동의 735필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땅 아래에서 지금도 113년 전의 숨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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