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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도봉구 방학동의 땅 아래 숨겨진 이야기-사라진 논과 밭, 그리고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가 밝혀낸 100년의 흔적

  • 2025년 11월 17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4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조사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역사 · 발굴조사원 · 유적발굴단 · 동양척식주식회사


거대한 들숨을 들이마신 듯 모든 감각이 멈추는 기이한 경험. 1912년 도봉구 방학동의 기록을 펼치는 순간, 사라진 논의 물결과 밭을 일구던 손길이 되살아난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도로, 상가 건물이 가득한 이 동네가 1912년에는 논 284필지 1,172,646㎡가 들판을 가득 채우던 거대한 농경 마을이었다. 598필지 1,732,920㎡. 이씨·조씨·권씨·신씨가 오랜 세월 이 땅을 지켰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손길이 7필지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지금 우리가 지나치는 방학동 골목들 곳곳에 그들이 흘린 땀과 웃음, 그리고 시대가 남긴 상처가 켜켜이 쌓여 있다.

이 글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1912년 방학동 토지 기록을 바탕으로, 사라진 풍경의 이야기와 문화재 발굴조사의 실제 의미를 함께 풀어낸다. 이 글을 끝까지 읽는 순간 서울의 땅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목차

1오래된 지도 한 장이 던지는 질문

21912년 방학동의 땅, 그리고 사라진 풍경

3논·밭·대지·임야가 말하는 삶의 결

4성씨별 토지 소유와 마을 공동체의 구조

5공유지, 일본인 소유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6문화재 발굴과 오늘의 방학동

7서울지역 발굴조사 의뢰가 필요한 이유

8성공 사례로 보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의 가치

9동요시키는 질문, 우리가 이 땅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10마무리, 기억을 복원하는 사람들에게

598

총 필지 수

1,732,920㎡

총 면적

284

논 필지

233

밭 필지

105

이씨 필지

7

동양척식 소유


1. 오래된 지도 한 장이 던지는 질문



1912년 방학동은 총 598필지 면적 1,732,920㎡였다. 요즘 지도 앱으로 보면 한 번 손가락을 오므렸다 펼치는 거리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공간은 삶 그 자체였다. 지금 우리가 지나치는 방학동 골목들 곳곳에는 그들이 흘린 땀과 웃음, 그리고 시대가 남긴 상처까지 켜켜이 쌓여 있다.

이 시리즈에서 함께 들여다본 도봉구 동네들, 창동(735필지 2,399,428㎡), 쌍문동(550필지 1,176,084㎡)과 나란히 놓으면 방학동(598필지 1,732,920㎡)은 창동보다 필지는 적지만 면적이 쌍문동을 훌쩍 넘는다. 도봉구 세 동네 모두 광대한 농경지를 품었지만, 방학동은 특히 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논 284필지 1,172,646㎡는 전체 면적의 67.7%에 달한다.


2. 1912년 방학동의 땅, 그리고 사라진 풍경



1912년 방학동을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압도적인 규모의 논과 밭이다. 논 284필지 1,172,646㎡, 밭 233필지 442,048㎡. 이 두 농경지를 합치면 517필지로 전체 598필지의 86.5%다. 창동(89.4%)에는 미치지 않지만, 방학동 역시 도봉구를 대표하는 광대한 농경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이 숫자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부드러운 물결 같은 농경 풍경은 지금의 방학동 주거지나 도로, 상가 건물 속으로 스며들어 흔적만 남겼다. 논 284필지에서 아침마다 흔들리던 벼의 잎사귀, 밭 233필지에서 계절마다 이어지던 씨 뿌리고 수확하는 손길. 그 모든 것이 지금 방학동역 주변 아파트 단지 아래 어딘가에 켜켜이 잠들어 있다.

284필지

1,172,646㎡ (67.7%)

233필지

442,048㎡

임야

26필지

72,750㎡

대지

54필지

44,413㎡

분묘

1필지

1,061㎡

방학동 농경지 비율: 논+밭 517필지 / 전체 598필지 = 86.5%. 논 단독 비율 67.7%는 도봉구 세 동네(창동·쌍문동·방학동)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이 압도적인 논 비중은 방학동 발굴조사에서 수계 관련 유구와 수로 시설이 가장 풍부하게 출토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3. 논·밭·대지·임야가 말하는 삶의 결

대지는 54필지 44,413㎡. 집이 드문드문 있었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구조다. 이 시리즈에서 함께 들여다본 도봉구 창동(49필지 46,063㎡), 쌍문동(58필지 36,195㎡)과 비교하면 방학동도 비슷한 규모의 취락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세 동네 모두 광대한 논밭 속에 작은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은 분산형 구조였다.

임야는 26필지 72,750㎡. 산을 등지고 들에 기대 살아가던 조선 후기 작은 촌락의 형태가 이 면적 안에 담겨 있다. 도봉산 자락과 이어지는 이 임야 구역은 발굴조사에서 분묘 관련 유물이나 제례 유구가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지점이다. 단 한 필지 1,061㎡의 분묘지. 누군가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이 자리도 지금은 사라졌거나 다른 용도로 변했을 것이다. 그 자리를 추적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시작이다.


4. 성씨별 토지 소유와 마을 공동체의 구조



1912년 방학동에서는 이씨가 105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했다. 조씨 67필지, 권씨 61필지, 신씨 60필지, 안씨 39필지, 임씨 30필지, 김씨 28필지, 윤씨 26필지 등. 이 구성이 흥미로운 것은 도봉구 다른 동네들과 비교했을 때다. 창동의 이씨(153필지·20.8%), 쌍문동의 이씨(127필지·23.1%)와 달리 방학동은 이씨 105필지가 전체의 17.6%에 불과하다. 대신 조씨·권씨·신씨가 나란히 뒤를 이어 어느 한 성씨가 압도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다성씨 공존 구조였다.

이 다양한 성씨 구성은 방학동이 단일 집성촌이 아니라 여러 씨족이 함께 공존하던 열린 마을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씨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안전망이자 네트워크였다. 조씨 67필지, 권씨 61필지, 신씨 60필지가 이씨 105필지와 서로 다른 구역을 나눠 경작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105

이씨 필지

67

조씨 필지

61

권씨 필지

60

신씨 필지

39

안씨 필지

30

임씨 필지

7

동양척식

2

일본인 소유


5. 공유지, 일본인 소유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1912년이라는 날짜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다. 방학동에도 동척 소유지가 7필지 있었다. 창동(14필지), 쌍문동(20필지)에 비하면 적은 수치지만, 이 7필지가 이씨·조씨·권씨·신씨 집안들이 지켜온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긴장감을 선명하게 전해준다.

일본인 개인 소유 토지는 2필지, 공유지는 1필지. 공유지 1필지는 방학동 전체를 하나로 묶던 공동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여러 성씨가 공존하는 방학동에서 이 공유지 1필지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이던 중심점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지의 이동은 곧 삶의 이동이었다. 동척 7필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그 감정이 지층에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

동양척식주식회사 7필지(1.2%) + 일본인 2필지 + 공유지 1필지. 방학동의 동척 비율은 이 시리즈 도봉구 세 동네 중 가장 낮다(창동 1.9%, 쌍문동 3.6%). 그러나 여러 성씨가 공존하는 다성씨 구조 속에서 동척 7필지가 어느 성씨 구역에 침투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발굴조사의 핵심 과제가 된다.


6. 문화재 발굴과 오늘의 방학동



지금 우리가 문화재 발굴, 유물 발굴, 유적 발굴에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라진 마을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땅이 말하는 과거를 읽어내기 위해서다. 발굴조사원과 유적발굴단이 흙 한 줌을 걷어낼 때마다 1912년 방학동의 삶이 조용히 다시 등장한다.

방학동의 논 284필지가 있던 구역에서는 수로 흔적, 논두렁 경계, 수문 기초 구조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권씨·신씨·조씨가 집중된 구역을 각각 추적하면 그 성씨들의 생활 유구가 구역별로 다른 특성을 보일 수 있다. 이것이 데이터 기반 문화재 조사의 힘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과거는 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7. 서울지역 발굴조사 의뢰가 필요한 이유

서울은 오래된 역사 위에 새로운 도시가 계속 겹겹이 쌓여온 곳이다. 그래서 신축 공사나 개발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필수적이다. 방학동처럼 논이 전체 면적의 67.7%를 차지하던 지역은 토광, 고분, 생활 유구, 도기 파편, 수계 관련 구조물 등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사소한 공사라도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를 진행하면 뜻밖의 문화재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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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성공 사례로 보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의 가치

성공 사례 — 소규모 시굴조사에서 드러난 지역의 역사

최근 서울의 한 지역에서 실시된 소규모 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토기와 생활 유구가 발견됐고, 그 결과 개발 방향이 조정되어 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지켜낸 사례가 있다. 발굴조사 한 번이 지역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방학동에서도 같은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 다성씨 공존 구조를 가진 방학동에서 각 성씨의 생활 유구가 구역별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온다면, 조선 후기 서울 외곽 농경 마을의 사회 구조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참고)


9. 동요시키는 질문, 우리가 이 땅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 걷는 길 아래에 100년 전 누군가의 집터가 있었다면

?네가 앉아 있는 카페 자리가 누군가의 논둑이었다면

?그 흔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다시는 볼 수 없다면

이 질문을 떠올리는 순간, 발굴조사의 의미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10. 마무리, 기억을 복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발굴조사를 하는 이유는 단순한 과거 복원이 아니다. 사라진 기억을 다시 연결해 현재를 더 넓은 시야로 보기 위함이다. 1912년 방학동의 기록은 말한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나를 잊지 말아라.

이씨·조씨·권씨·신씨가 나란히 논밭을 일구던 방학동. 동양척식주식회사 7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그 마을. 공유지 1필지에서 여러 성씨가 함께 모이던 공동체. 이 모든 이야기가 598필지 1,732,920㎡ 안에 잠들어 있다.

우리가 걷는 곳곳엔 시간이 남긴 온기가 있다. 그 온기를 지켜내고 이어가는 사람들이 언젠가 이 도시의 기억을 단단하게 이어줄 것이다.

1912년 방학동의 598필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도봉산 자락 아래 논물이 흔들리던 284필지,


이씨·조씨·권씨·신씨가 함께 일구던 들판이


지금도 방학동역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억을 복원하는 사람들,


그게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너 같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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