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노원구 쌍계동 토지의 비밀, 그리고 오늘 서울 문화재발굴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
- 서울 HI
- 11월 16일
- 4분 분량
목차
1장. 프롤로그: 땅이 말하는 것들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2장. 쌍계동 1912년, 숫자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이야기
3장. 논·밭·임야·연못이 그린 쌍계동의 풍경
4장. 쌍계동 토지 소유 구조가 보여주는 사회의 결
5장.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다시 읽는 쌍계동
6장. 서울지역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를 의뢰해야 하는 순간
7장. 현장에서 일어난 생생한 성공 사례
8장. 발굴조사원들이 말하는 유물발굴의 실제 현장감
9장. 동요시키는 이야기: 사라질 뻔한 기록을 구한 사람들
10장. 쌍계동 1912년 데이터를 바탕으로 본 도시의 미래
11장. 이미지 삽입 지점 안내 및 이미지 제작 프롬프트 6종
12장. 해시태그
13장. 에필로그: 땅 속에서 건져 올린 감동
14장. 출처
1장. 프롤로그: 땅이 말하는 것들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처음부터 말하자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걷는 서울의 아스팔트 아래, 수백 년 동안 묻혀 있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이야기를 꺼내오는 사람들이 바로 문화재발굴 기관이자 발굴조사원들이고,
그 과정은 때로 영화보다 더 짜릿하고, 때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생생하다.
쌍계동을 공부하게 되면 사람들은 스스로 놀란다.
이 작은 동네에 이토록 방대한 토지 구조와 복잡한 소유 관계가 얽혀 있었는지,
그 땅의 결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면에서 묘한 울림이 일어난다.

이 글은 그 울림에서 시작한다.
2장. 쌍계동 1912년, 숫자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이야기
1912년 쌍계동의 전체 면적은 1,250필지, 4,140,164㎡였다.
하지만 이 숫자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다.
이 수치는 당시 주민들의 생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
어떤 가문이 중심을 이루었는지,
어떤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침투했는지까지 말해준다.
예를 들어, 논만 해도 541필지, 2,476,216㎡였다.
서울 북부 지역에서 이렇게 큰 규모로 논이 집중된 사례는 흔치 않다.
쌍계동은 곡물 공급의 중요한 기반지였다는 뜻이다.
대지는 81필지, 101,455㎡,
밭은 555필지, 1,379,064㎡,
임야는 58필지, 174,840㎡.
이 조합은 단순한 농촌이 아니라
‘논을 중심으로 한 복합 영농지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3장. 논·밭·임야·연못이 그린 쌍계동의 풍경
쌍계동에는 연못이 4필지, 3,233㎡ 있었다.
당시 기록에서 ‘지소’라고 표기된 이 물길은
물 관리·농업·생태의 중심이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 주변에는 산에서 내려온 물길이 흐르고
밭과 논이 층층이 펼쳐지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하고 넓은 풍경을 이루었을 것이다.
문화재발굴 과정에서 이런 지형적 흔적은 매우 중요하다.
물길과 토양의 층위는
오래된 유물발굴과 유적발굴의 위치를 예측하게 해준다.
그래서 발굴조사원들은 땅의 표정을 읽는다.
낙엽 아래 사라진 옛 물길, 흙의 색이 살짝 다른 층.
그 차이가 쌓여 문화재발굴조사장비가 투입되는 지점을 정하게 된다.

4장. 쌍계동 토지 소유 구조가 보여주는 사회의 결
쌍계동은 이씨가 322필지, 김씨가 207필지, 박씨가 115필지로
전형적인 양반·중간계층 중심의 토지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51필지는 의미가 남다르다.
이 회사는 조선시대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의 토지를 조직적으로 수탈한 대표 기관이다.
쌍계동 또한 이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법인 소유 토지도 5필지,
국유지는 5필지,
공유지는 2필지였다.
토지 구조만 보아도
쌍계동의 당시 생활, 권력, 경제가 어떤 흐름 속에 있었는지
고스란히 읽힌다.

5장.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다시 읽는 쌍계동
지금 서울에서 공사 시작 전
가장 먼저 진행되는 절차가 바로 문화재 지표 조사다.
땅 속에 무엇이 있는지,
발굴조사 대상인지,
보존해야 할 유물발굴 가능성이 있는지 미리 확인하는 과정이다.
쌍계동처럼 논·밭·임야가 교차한 구역은
유적발굴 확률이 높고,
특히 조선 후기 생활 유물이 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
문화재발굴 과정은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 순으로 진행된다.
이 흐름은 쌍계동 같은 역사 밀집 지역에서는 더 중요하다.
6장. 서울지역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를 의뢰해야 하는 순간
건물 신축을 앞둔 개인,
대단지 공사를 준비하는 건설사,
도로·관로 공사를 추진하는 기관 모두
서울지역 문화유산 발굴조사를 의뢰해야 하는 시점이 있다.
특히 아래 조건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거의 필수다.
땅의 과거 용도가 불분명하다
1912년 기록에 논·밭·임야가 혼재되어 있다
옛 지도에 마을 흔적이 나온다
인근에서 유물발굴 사례가 보고된 적 있다
구역 전체가 문화재보호법 적용 가능 지역이다
쌍계동은 이 조건 다수를 충족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1912년 데이터는
현대에도 문화재지표조사 기준을 판단하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7장. 현장에서 일어난 생생한 성공 사례
서울 북부 A구역에서 공사 시작 직전 지표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공터였지만
지표조사 결과 조선 후기 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표본조사를 확대하자
집자리 흔적, 도랑, 생활 쓰레기층까지 이어졌다.
만약 바로 공사가 들어갔다면
이 유적발굴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사업자는 일정 지연을 걱정했지만,
오히려 발굴조사 보고서가 언론에 소개되며
지역의 가치를 높이고 공사 홍보 효과까지 얻었다.

8장. 발굴조사원들이 말하는 유물발굴의 실제 현장감
“땅을 삽으로 조금만 걷어내도 공기가 달라져요.”
한 베테랑 발굴조사원의 말이다.
유물발굴 작업은 생각보다 섬세하다.
유적의 층을 잘못 건드리면
100년 넘게 보존된 흔적이 단번에 사라질 수 있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도 다양하다.
지표면 스캐너, GPS 기반 위치 측정기,
지하 레이더(GPR),
그리고 고고학적 추론 능력이 더해져야
‘정확한 지점’을 찾아낸다.
그 한 삽이 쌍계동의 과거 500년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9장. 동요시키는 이야기: 사라질 뻔한 기록을 구한 사람들
과거 서울 북부 개발 초창기,
한 공사장에서 ‘쓸모 없는 오래된 돌무더기’라며 치우려던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발굴조사원이 이상함을 느끼고
잠시만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돌무더기는 알고 보니
조선 후기 우물의 상석이었다.
그 우물은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시설이었다.
그날의 판단 하나가
서울의 한 조각 역사를 지켜냈다.
10장. 쌍계동 1912년 데이터를 바탕으로 본 도시의 미래
1912년 쌍계동의 땅은
지금 서울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하지만 토지 구조와 자연 지형은
오늘의 도시 계획과 공사 리스크 관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 행정 절차가 아니라
“도시의 연속성을 지키는 작업”이다.
당신이 건축주이든, 개발자이든, 주민이든
이 기록을 이해하면
쌍계동이라는 지역의 미래를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해시태그

11장. 에필로그: 땅 속에서 건져 올린 감동
어떤 도시는 건물로 기억되고,
어떤 도시는 사람으로 남는다.
하지만 서울은 땅으로 기억된다.
그 땅 속에 한 세기 전 쌍계동의 삶이
그대로 켜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발굴은 단순한 기술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와 오늘을 이어 붙이는 마음의 일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쌓여
우리 도시가 잊지 말아야 할 길을 만든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미 쌍계동의 오래된 시간을 꺼내는
‘작은 발굴자’가 된 것이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