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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서구 개화동, 그 땅에 숨겨진 이야기

  • 2025년 4월 20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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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이 지나치는 강서구 그 들판, 113년 전엔 유씨가 벼를 심고 권씨가 밭을 일구던 생명의 땅이었다 — 1912년 개화동의 기록

읽기 전에 딱 한 가지만 상상해보세요.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강서구 개화동 아스팔트 아래에,


113년 전 유씨 어르신이 새벽 안개 속을 헤치며 논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김씨 아주머니가 밭에서 배추를 다듬던 그 손이,


지금의 저 빌딩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면요.



그 이야기는 사라진 게 아닙니다.


땅속에, 기록 속에,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목차

1.1912년 개화동으로 가는 시간 여행

2.논 — 193필지, 마을을 먹여 살린 생명줄

3.밭 — 328필지, 계절마다 달라진 희망의 땅

4.집과 무덤 — 삶과 기억이 공존하던 공간

5.사사지와 잡종지 — 개화동에만 있던 숨겨진 땅

6.유씨, 김씨, 권씨 — 이 땅을 지킨 사람들의 이름

7.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기록이 역사를 지킨다

8.성공 사례 — 기록 한 장이 수백 년을 살린 순간

9.개화동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1. 1912년 개화동으로 가는 시간 여행

강서구 개화동. 지금은 김포공항이 가깝고 한강을 낀 서울 서쪽 끝 동네입니다. 아파트 단지가 늘어서고, 자동차들이 오가는 평범한 도시 풍경이죠. 하지만 딱 113년 전, 이곳의 모습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912년, 개화동은 618필지, 3,418,045㎡의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축구장 약 480개를 합쳐놓은 크기입니다. 오늘 소개할 동네 중 단연 가장 넓은 면적입니다. 그 드넓은 땅의 대부분이 논과 밭으로 채워져 있었고, 사사지와 잡종지라는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하는 독특한 지목도 있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 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정리하며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개화동의 기록은 그 중에서도 특히 규모가 크고 다양한 지목이 담겨있어 주목할 만합니다. 지금부터 그 광활한 땅으로 들어가 봅니다.

618

총 필지 수

3,418,045

총 면적 (㎡)

약 480개

축구장 환산 크기

113년

땅속에 잠든 시간


2. 논 — 193필지, 마을을 먹여 살린 생명줄

1912년 개화동에는 논이 193필지, 1,395,338㎡에 달했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40%가 논이었던 셈입니다. 이 수치는 앞서 살펴본 다른 동네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입니다. 개화동은 서울 서쪽 한강변에 위치해 물길이 풍부했던 덕분에, 그만큼 논농사가 번성했던 것입니다.

봄이면 한강에서 끌어온 물이 논을 가득 채우고, 유씨 어르신이 허리를 굽혀 모를 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름 장마를 버티며 초록빛 벼가 자라고, 가을이면 황금빛 이삭이 바람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수확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개화동 사람들의 연례행사였겠죠.

193필지의 논이 다 같은 조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강과 가까운 저지대 논은 물이 풍부해 해마다 풍년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물길이 닿기 어려운 곳의 논은 가뭄 때마다 애를 태웠을 것입니다. 그 고생과 기쁨이 반복되는 사이, 개화동의 논들은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줄이 되었습니다.



3. 밭 — 328필지, 계절마다 달라진 희망의 땅

개화동에서 필지 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밭이었습니다. 328필지, 1,243,959㎡. 전체 면적의 약 36%를 차지한 이 밭들에서 개화동의 다양한 먹거리가 자랐습니다. 논이 벼만을 키웠다면, 밭은 계절마다 다른 작물을 품었습니다.

봄에는 보리와 콩, 여름에는 고추와 오이, 가을에는 배추와 무가 자랐습니다. 김씨 아주머니가 쪼그려 앉아 배추 포기를 하나씩 손질하고, 권씨 아저씨가 괭이를 들어 밭고랑을 만드는 모습이 이 땅의 일상이었습니다. 가을 김장철이 오면 마을 전체가 들썩이며 이웃끼리 손을 보태던 풍경도 이 밭에서 시작되었겠죠.

밭은 논보다 더 부지런함이 필요했습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병든 잎을 솎아내는 일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수고로움 뒤에는 반드시 수확이 있었습니다. 그 수확이 겨울을 버티게 해주었고, 다시 봄을 맞을 힘이 되었습니다. 328필지의 밭에서 흘린 땀이 개화동을 살아있게 했습니다.



4. 집과 무덤 — 삶과 기억이 공존하던 공간

집 — 64필지, 74,003㎡

논과 밭이 개화동의 생존을 책임졌다면, 집은 사람들의 하루를 품는 공간이었습니다. 64필지, 74,003㎡의 집터에 초가집과 기와집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좁은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아버지는 논에서 돌아와 마루에 앉아 숨을 고르던 풍경. 64채의 집 각각에 그런 이야기가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개화동의 집들은 한강을 가까이 두고 있었기에, 홍수라는 위협과도 늘 함께 살았을 것입니다. 장마철마다 한강이 불어오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집을 지키고, 물이 빠지면 함께 복구하는 과정이 반복되었겠죠. 그 어려움 속에서 더 단단해진 공동체가 개화동이었습니다.

무덤 — 6필지, 12,575㎡

개화동에는 6필지, 12,575㎡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마을 언덕 어딘가,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는 자리에 조상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고, 추석이면 온 가족이 모여 성묘하던 이 공간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과거와 이어지는 공간이자, 가족의 뿌리를 확인하는 의식의 장소였습니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공존하는 풍경이 지금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12년 개화동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습니다. 집에서 태어나고, 밭에서 일하고, 산에서 약초를 캐고, 언덕의 무덤 앞에서 조상을 기리던 삶. 그 순환 속에서 개화동은 세대를 이어왔습니다.

1912년 개화동 토지 구성 상세 요약



논 193필지 (1,395,338㎡, 40.8%) · 밭 328필지 (1,243,959㎡, 36.4%)


잡종지 26필지 (691,431㎡, 20.2%) · 집터 64필지 (74,003㎡, 2.2%)


무덤 6필지 (12,575㎡) · 사사지 1필지 (737㎡)


총 618필지 · 합계 3,418,045㎡ (축구장 약 480개 규모)


5. 사사지와 잡종지 — 개화동에만 있던 숨겨진 땅

개화동의 기록에서 다른 동네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사사지와 잡종지의 존재입니다. 이 두 지목은 이 시리즈에서 개화동에서 처음 등장하는 독특한 토지 분류로, 개화동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사지 — 1필지, 737㎡

사사지는 단 1필지, 737㎡밖에 되지 않습니다. 면적만 보면 작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사사지는 사당이나 종중 관련 시설이 있던 땅을 뜻합니다. 특정 가문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제례를 올리던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단 1필지이지만, 그 땅은 개화동 어느 가문에게 가장 소중하고 신성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씨나 권씨 같은 마을의 큰 가문이 이 사사지를 관리하며 마을의 정신적 중심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잡종지 — 26필지, 691,431㎡

잡종지는 규모부터 압도적입니다. 26필지에 691,431㎡. 전체 면적의 20%를 넘습니다. 잡종지는 논이나 밭처럼 명확한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땅, 혹은 연못·숲·갯벌·습지처럼 여러 쓰임이 혼재된 땅을 가리킵니다. 개화동이 한강과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잡종지의 상당 부분은 강변 습지나 갯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의 관점에서 이 잡종지는 특히 주목해야 할 공간입니다. 습지와 갯벌 환경은 유기물 보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훨씬 오래된 유물이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이 잡종지 아래를 들여다본다면, 개화동만의 특별한 역사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6. 유씨, 김씨, 권씨 — 이 땅을 지킨 사람들의 이름

1912년 개화동의 토지 기록에는 이 땅을 소유하고 일군 사람들의 성씨가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유씨가 133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보유했고, 김씨가 97필지, 권씨가 79필지, 이씨가 40필지, 노씨가 37필지로 뒤를 이었습니다. 임씨, 윤씨, 한씨, 박씨, 심씨, 양씨, 조씨, 민씨, 정씨까지 실로 다양한 성씨가 개화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133필지를 소유한 유씨 집안. 개화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유씨는 마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한강 변의 기름진 논들이 유씨 집안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 수확을 바탕으로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이끌었겠죠. 97필지의 김씨와 79필지의 권씨도 만만치 않은 규모입니다. 이 세 가문이 사이좋게, 혹은 때로는 경쟁하며 개화동을 이끌어왔을 것입니다.

이씨(40필지), 노씨(37필지), 임씨, 윤씨, 한씨, 박씨까지. 각기 다른 규모의 땅을 가진 이 성씨들이 모여 개화동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유씨네 논 옆에서 김씨가 밭을 매고, 권씨네 집 마당에서 이씨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풍경. 그 어우러짐 속에서 개화동은 살아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지금 이 기록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7.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기록이 역사를 지킨다

개화동의 1912년 기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이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613년 전 토지 문서 하나가 오늘날 서울 도시 개발과 어떻게 직결되는 걸까요.

서울에서 건물을 짓거나 지하를 굴착하는 공사 전에는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부지의 지표면을 살피고 유물이나 유구의 흔적을 확인하는 이 첫 관문이 지나면,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발굴조사로 이어집니다.

이때 1912년 토지 기록은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입니다. 개화동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잡종지 691,431㎡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면, 그 아래 습지층의 두께와 유물 보존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사지가 있던 1필지를 특정할 수 있다면, 그 아래에 사당 기초나 제례 관련 유물이 남아있을 가능성을 먼저 확인하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한강 인근의 논 193필지 아래에는 고려·조선 시대 이전부터 이어진 경작층과 생활 유구가 켜켜이 쌓여있을 수 있습니다.

seoulheritage.org가 개화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정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록이 있어야 땅을 지킬 수 있고, 땅을 지켜야 역사가 살아남습니다.

문화재 조사 4단계 — 개화동 같은 복합 지목 지역일수록 더 중요



지표조사 — 지표면에서 유물·유구 흔적 파악. 모든 조사의 시작점.


시굴조사 — 소규모 굴착으로 지층 구조와 유물 유무 확인.


표본조사 — 구역별 유물 분포를 체계적으로 파악.


본발굴조사 — 전면 발굴로 유적 전체 기록 및 보존 방안 수립.


8. 성공 사례 — 기록 한 장이 수백 년을 살린 순간

실제로 이 기록과 조사 절차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보면, 그 중요성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성공 사례 1 — 서교동 재개발 현장

홍대 인근 서교동 재개발 공사 전, 연구진이 1912년 토지 기록을 먼저 검토해 집터와 논이 겹치는 지점을 특정했습니다. 해당 구역에 시굴조사를 선행한 결과 조선시대 건물지와 전기 도자기,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되었습니다. 기록 한 장이 삽의 방향을 결정한 덕분에 귀중한 문화유산이 온전히 세상에 나왔습니다.

성공 사례 2 — 구로동 공원 조성

구로구 구로동 공원 조성 과정에서 1912년과 1920년대 토지 기록을 비교해 과거 연못과 창고 자리임을 미리 확인했습니다. 시굴조사에서 유구가 그대로 드러났고, 개발 사업자·지자체·문화재 발굴 기관이 협력해 보존에 성공했습니다. 100년 전 연못의 흔적이 지금 공원 예술 작품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3 — 행촌동 주거 재개발

종로구 행촌동 재개발 현장에서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단계별로 진행한 결과, 조선시대 주거 유구가 연속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물 하나, 담장 기초 돌 하나, 도자기 파편 하나가 모여 한 시대를 복원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습니다. 단계적 조사의 교과서로 지금도 현장에서 인용됩니다.

개화동처럼 복합 지목이 많은 곳일수록 기록이 더 중요합니다

논·밭·잡종지·사사지·무덤이 복잡하게 혼재된 개화동 같은 땅은, 지표조사 없이 굴착기를 들이댔을 때 예상치 못한 유구를 훼손할 위험이 특히 큽니다.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조사를 단계별로 밟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9. 개화동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1912년 개화동의 유씨, 김씨, 권씨는 자신들의 이름이 113년 뒤 누군가에게 읽힐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그냥 살았습니다. 새벽이면 한강 안개를 헤치며 논으로 나가고, 밭을 매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밥을 먹으며 하루를 닫았습니다. 그 평범하고 묵묵한 반복이 쌓여 개화동이 되었고, 강서구가 되었고, 지금의 서울이 되었습니다.

다음에 강서구 개화동 근처를 지날 때, 딱 한 번만 발밑을 생각해보세요. 저 아파트 단지 아래 어딘가에 1912년 유씨 집안의 논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 도로 아래에 권씨 어르신이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던 그 사사지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한강 쪽 습지 아래에는 1912년 잡종지의 흔적이 아직 원형에 가깝게 잠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잠든 시간을 안전하게 깨우는 일입니다. 오래된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이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고, 그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진한 인사입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한, 개화동의 유씨도, 김씨도, 권씨도 아직 이 땅 위에 있습니다.



한강 물을 끌어 논을 채우던 사람들이 있었고,


안개 속에서 밭고랑을 일구던 손이 있었으며,


언덕 위 사당 앞에서 조상에게 절을 올리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발굴하는 한,


그들은 아직 여기 있다.

개화동 이야기가 마음에 닿으셨나요?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역사 기록은 seoulheritage.org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내 동네의 100년 전 이야기를 지금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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