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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동구 상일동의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쳐보자!

  • 2025년 4월 1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문화재 발굴문화재 지표조사상일동 역사강동구 문화유산

지금 당신이 사는 강동구 그 아파트 단지, 113년 전엔 김씨가 벼를 심고 임씨가 밭을 일구던 475필지의 땅이었다 — 1912년 상일동의 기록

이 글을 읽기 전에, 딱 한 문장만 생각해보세요.



지금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상일동 그 길 아래에,


113년 전 김씨 어르신이 새벽부터 논두렁을 걸으며 물길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조씨 아주머니가 밭에서 배추를 다듬던 그 손이,


지금의 저 상가 건물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면요.



그 이야기, 사라진 게 아닙니다.


땅속에, 기록 속에, 아직 살아있습니다.


목차

1.1912년 상일동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2.논 — 200필지, 마을의 생명을 키운 땅

3.밭 — 206필지, 사계절 내내 희망을 심은 흙

4.산 — 34필지, 마을을 품은 자연의 울타리

5.집과 무덤 — 삶과 기억이 나란히 잠든 공간

6.김씨, 조씨, 임씨 — 이 땅을 일군 사람들의 이름

7.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기록이 있어야 땅이 산다

8.성공 사례 — 기록이 역사를 건진 순간들

9.상일동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1. 1912년 상일동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강동구 상일동.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상가들이 줄지어 선 전형적인 서울 동쪽 주거지입니다. 출퇴근 시간이면 바쁜 발걸음이 이어지고, 주말이면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동네를 채웁니다. 하지만 딱 113년 전, 이곳의 풍경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912년, 상일동은 475필지, 1,501,705㎡의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축구장 약 210개를 합쳐놓은 크기입니다. 그 넓은 땅이 논, 밭, 산, 집터, 그리고 무덤으로 나뉘어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논과 밭이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상일동은 그야말로 농업의 땅이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 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하나씩 정리하며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상일동 기록도 그 일환입니다. 지금부터 그 기록 속으로 걸어 들어가 113년 전 상일동의 아침을 만나봅니다.

475

총 필지 수

1,501,705

총 면적 (㎡)

약 210개

축구장 환산 크기

113년

땅속에 잠든 시간


2. 논 — 200필지, 마을의 생명을 키운 땅

1912년 상일동에서 논은 200필지, 605,401㎡를 차지했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40%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상일동이 한강 지류와 가까운 지역적 특성 덕분에, 물을 끌어다 쓰기 좋은 논농사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봄이 오면 200필지의 논에 일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김씨 집안 어르신이 새벽 안개 속을 헤치며 논으로 나가 물길을 살피고, 마을 사람들이 손을 맞잡아 모내기를 함께 했겠죠. 여름 장마를 버티고 초록빛 벼가 하늘을 향해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황금빛 이삭이 바람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수확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상일동 사람들의 연례 행사였을 것입니다.

200필지가 모두 같은 조건의 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길이 잘 닿는 비옥한 논에서는 해마다 풍년을 기대했겠지만, 가뭄이 들면 물 한 바가지가 아쉬웠을 구석 논도 있었겠죠. 그 기쁨과 걱정이 반복되는 사이, 상일동의 논들은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든든한 생명줄이 되었습니다.



3. 밭 — 206필지, 사계절 내내 희망을 심은 흙

상일동에서 필지 수로 논을 근소하게 앞선 것은 밭이었습니다. 206필지, 538,375㎡. 전체 면적의 약 36%를 차지한 이 밭들에서 고구마, 감자, 배추, 무, 고추 같은 다양한 작물이 계절마다 교대로 자랐습니다. 논이 벼 하나에 집중했다면, 밭은 사계절 내내 쉬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봄에는 감자와 콩 씨앗을 심고, 여름에는 고추와 오이를 돌보고, 가을이면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임씨 아주머니가 쪼그려 앉아 배추 포기를 하나하나 손질하고, 박씨 아저씨가 괭이를 들어 밭고랑을 새로 만드는 모습이 상일동의 일상이었습니다. 가을 김장철이 오면 온 마을이 들썩이며 이웃끼리 손을 보태던 풍경도 이 밭에서 시작되었겠죠.

206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그 숫자만큼 많은 가족이 이 밭에서 땀을 흘리고, 그 수확으로 겨울을 버텼습니다. 밭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새벽이 있었고, 해 질 녘까지 굽힌 허리가 있었습니다. 그 묵묵한 손길들이 상일동의 뿌리를 만들었습니다.



4. 산 — 34필지, 마을을 품은 자연의 울타리

상일동에는 34필지, 316,454㎡의 임야가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21%에 해당하는 이 산은 마을 사람들에게 논밭만큼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단순히 경치를 즐기는 공간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마을 남자들은 지게를 지고 산을 올라 땔감을 구했습니다. 봄이면 약초를 캐고 산나물을 뜯어 식탁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조씨 청년이 산길을 따라 나무를 지고 내려오고, 윤씨 할머니가 약초 바구니를 차며 돌아오는 모습이 상일동 산의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숨바꼭질하고 뛰어노는 놀이터였고, 마을 전체에는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든든한 울타리이기도 했습니다.

34필지, 316,454㎡의 산이 마을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기에, 상일동 사람들은 혹독한 계절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 산이 내어준 자원들이 한 세대 한 세대를 이어온 셈입니다.

1912년 상일동 토지 구성 상세 요약



논 200필지 (605,401㎡, 40.3%) · 밭 206필지 (538,375㎡, 35.9%)


산 34필지 (316,454㎡, 21.1%) · 집터 34필지 (40,800㎡, 2.7%)


무덤 1필지 (674㎡)


총 475필지 · 합계 1,501,705㎡ (축구장 약 210개 규모)


5. 집과 무덤 — 삶과 기억이 나란히 잠든 공간

집터 — 34필지, 40,800㎡

논과 밭, 산이 생존을 책임졌다면, 집터는 사람들의 하루를 담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34필지, 40,800㎡. 전체 면적의 2.7%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공간 안에 상일동 사람들의 모든 일상이 담겨있었습니다. 초가지붕이 얹힌 집 앞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아버지는 논에서 돌아와 마루에 앉아 하루의 피곤을 내려놓는 풍경. 34채의 집 각각에서 그런 이야기가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상일동의 집들은 논밭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창문을 열면 논두렁이 보이고, 마당을 나서면 바로 밭이 이어지는 구조였겠죠. 논농사와 밭농사가 삶의 중심이었던 만큼, 집 역시 그 땅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난 존재였습니다.

무덤 — 1필지, 674㎡

상일동에는 무덤이 단 1필지, 674㎡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은 면적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 무덤에 잠든 누군가는 상일동에서 논을 갈고 밭을 매며 한평생을 살다 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후손들이 봄가을로 찾아와 제사를 올리고, 조상의 이름을 불러가며 가족의 뿌리를 기억하던 공간이었습니다. 단 1필지지만, 그 무덤은 상일동 사람들이 과거와 이어지는 가장 직접적인 끈이었습니다.



6. 김씨, 조씨, 임씨 — 이 땅을 일군 사람들의 이름

1912년 상일동의 토지 기록에는 이 땅을 소유하고 일군 사람들의 성씨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김씨가 99필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조씨가 61필지, 임씨가 57필지, 박씨가 54필지, 윤씨가 38필지로 뒤를 이었습니다. 이씨, 유씨, 우씨, 민씨, 심씨, 정씨, 강씨까지 실로 다양한 성씨들이 상일동이라는 무대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99필지를 소유한 김씨 집안. 상일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김씨는 마을의 구심점이었을 것입니다. 논과 밭을 골고루 갖고 있었을 김씨는 풍년이 들면 이웃과 나누고, 흉년이면 함께 걱정하며 마을을 이끌었겠죠. 61필지의 조씨와 57필지의 임씨, 54필지의 박씨도 만만치 않은 규모입니다. 이 네 가문이 상일동의 기둥이었을 것입니다.

38필지의 윤씨, 그 아래 이씨·유씨·우씨·민씨·심씨·정씨·강씨까지. 각기 다른 규모의 땅을 가진 이 성씨들이 모여 상일동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김씨네 논 옆에서 조씨가 밭을 매고, 임씨네 마당에서 박씨 아이들이 뛰어노는 풍경. 그 어우러짐 속에서 상일동은 하나의 마을로 살아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지금 이 기록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7.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기록이 있어야 땅이 산다

1912년 상일동 기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13년 전의 토지 문서 하나가 오늘날 강동구 도시 개발과 어떻게 직결되는 걸까요.

서울에서 건물을 새로 짓거나 지하를 파는 공사 전에는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해당 부지의 지표면을 살펴 유물이나 유구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이 첫 관문이 지나면,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발굴조사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을 건너뛰면, 수백 년의 역사가 포클레인 앞에서 하루 만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때 1912년의 토지 기록은 결정적인 길잡이입니다. 상일동의 경우, 논 200필지가 어느 위치에 분포했는지를 알면 그 아래 경작층의 두께와 유물 보존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집터 34필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면, 조선시대 생활유물이나 건물 기초가 남아있을 구역을 미리 특정할 수 있습니다. 단 1필지지만 무덤의 위치를 안다면, 그 아래 부장품이나 묘비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도 사전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seoulheritage.org가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하나씩 정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록이 있어야 땅을 지킬 수 있고, 땅을 지켜야 역사가 살아남습니다.

문화재 조사 4단계 — 상일동처럼 논밭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필수



지표조사 — 지표면에서 유물·유구 흔적 파악. 모든 조사의 시작점.


시굴조사 — 소규모 굴착으로 지층 구조와 유물 유무 확인.


표본조사 — 구역별 유물 분포를 체계적으로 파악.


본발굴조사 — 전면 발굴로 유적 전체를 기록하고 보존 방안 수립.


8. 성공 사례 — 기록이 역사를 건진 순간들

실제 현장에서 이 기록과 조사 과정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살펴보면, 그 중요성이 구체적으로 느껴집니다.

성공 사례 1 — 서교동 재개발 현장

홍대 인근 서교동 재개발 공사 전, 연구진이 1912년 토지 기록을 먼저 검토해 집터와 논이 겹치는 구역을 특정했습니다. 시굴조사를 선행한 결과 조선시대 건물지와 전기 도자기,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되었습니다. 기록 한 장이 삽의 방향을 결정하며 귀중한 문화유산이 온전히 세상에 나왔습니다.

성공 사례 2 — 구로동 공원 조성 사업

구로구 구로동 공원 조성 과정에서 1912년과 1920년대 토지 기록을 비교해 과거 연못과 창고 자리임을 미리 확인했습니다. 시굴조사에서 유구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개발 사업자·지자체·문화재 발굴 기관이 협력해 보존에 성공했습니다. 100년 전 연못의 흔적이 지금 공원 예술 작품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3 — 행촌동 주거 재개발

종로구 행촌동 재개발 현장에서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단계별로 밟은 결과 조선시대 주거 유구가 연속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물 하나, 담장 기초 돌 하나, 도자기 파편 하나가 한 시대를 복원하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단계적 조사의 교과서로 지금도 현장에서 인용됩니다.

논과 밭 비율이 76%인 상일동, 경작층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

논과 밭이 전체 면적의 76%를 차지하는 상일동은 오랜 경작층이 두텁게 쌓인 지역입니다. 이런 땅은 지표조사 없이 굴착하면 경작층 아래 숨어있던 더 오래된 유구를 순식간에 훼손할 위험이 큽니다.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조사를 단계별로 밟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9. 상일동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1912년 상일동의 김씨, 조씨, 임씨는 자신들의 이름이 113년 뒤 누군가에게 읽힐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냥 살았습니다. 새벽이면 논으로 나가고, 밭을 매고, 산에서 땔감을 구하고, 저녁이면 가족과 밥을 먹으며 하루를 닫았습니다. 그 평범하고 묵묵한 반복이 쌓여 상일동이 되었고, 강동구가 되었고, 지금의 서울이 되었습니다.

다음에 상일동 거리를 걸을 때, 딱 한 번만 발밑을 생각해보세요. 이 아파트 단지 아래 어딘가에 1912년 김씨 집안의 논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 상가 건물 아래에 임씨 아주머니가 배추를 다듬던 밭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저 산자락 어딘가에 상일동 어느 가문의 무덤이 조용히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그 땅 아래에, 113년의 시간이 고요히 남아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잠든 시간을 안전하게 깨우는 일입니다. 오래된 물건을 찾는 게 아닙니다. 이 도시가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고, 그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건네는 가장 조용하고 진한 인사입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한, 상일동의 김씨도, 조씨도, 임씨도 아직 이 땅 위에 있습니다.



논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올라갔고,


밭이 있던 자리에 상가가 들어섰으며,


산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생겼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아래 흙 속에


그들의 씨앗이 아직 잠들어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발굴하는 한,


그 씨앗은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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