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문배동, 조선인은 단 한 뼘의 땅도 갖지 못했다?
- 2025년 5월 15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기초자료 · 용산구
지금 네가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카페 자리에 조선인은 땅 한 뼘도 없었다
1912년 용산구 문배동 — 39필지 84,340㎡, 그리고 충격적인 소유권의 진실
트렌디한 카페와 맛집이 가득한 지금의 용산구 문배동. 그런데 1912년, 이 39필지 땅의 37필지가 일본인 소유였고, 조선인 소유 토지는 단 한 필지도 없었다. 이게 단순한 역사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아직 진짜 충격을 받지 못한 거다. 끝까지 읽으면 지금 네가 걷는 문배동 골목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거야.
목 차
1 84,340㎡, 39필지 — 1912년 문배동의 첫인상
2 논 11필지 — 21,861㎡, 도심 속 생명의 땅
3 대지 76필지 — 54,882㎡의 삶의 터전
4 도로·잡종지 — 도시가 되어가던 흔적
5 밭 7필지 — 24,132㎡의 계절 풍경
6 충격의 진실 — 37필지를 가진 일본인들
7 조선인 소유 토지 0필지 — 그 의미
8 국유지 2필지 — 식민 행정의 발판
9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문배동이 품은 역사층
10 에필로그 — 빼앗긴 땅 위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39필지
총 84,340㎡
1912년 문배동 전체
일본인 37필지
전체의 94.9%
조선인 소유 0필지
대지 76필지
54,882㎡
최대 비중 토지 유형
184,340㎡, 39필지 — 1912년 문배동의 첫인상
지금 용산구 문배동은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한 동네 중 하나다. 이태원, 한남동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 덕분에 세련된 식당과 카페들이 골목마다 들어섰고, 주말이면 인스타 감성을 찾아온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이 트렌디한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1912년 문배동의 전체 필지는 39필지, 총 면적은 84,340㎡였다. 지금 기준으로 축구장 약 12개 면적이다. 넓지 않은 이 땅 위에 논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사람들의 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땅의 주인들에 관한 기록이 지금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를 담고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자치구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며, 용산구 지역조사 카테고리를 통해 이 일대 동네들의 기초 자료를 꾸준히 쌓아가고 있다. 이 기록들은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핵심 기초 데이터로 활용된다.

2논 11필지 — 21,861㎡, 도심 속 생명의 땅
1912년 문배동에는 논이 11필지, 21,861㎡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카페가 들어서 있다는 게 상상이 안 될 만큼, 당시 이 논은 마을 사람들의 식량을 책임지는 생명의 땅이었다.
문배동은 용산 일대에 위치해 있어, 한강 수계의 영향을 받는 비교적 저지대 지형이었다. 물을 끌어오기 용이한 이런 지형은 논 경작에 적합했다. 봄이면 모내기, 여름이면 벼가 자라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계절의 반복이 이 11필지 위에서 해마다 이어졌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논 지층은 중요한 유적 환경이다. 오랜 세월 물이 고여 산소가 차단된 혐기성 환경은 유기물 보존에 유리하다. 목기, 씨앗, 도기, 볏짚 잔해 같은 유기질 유물들이 논 지층에서 발견되는 사례는 전국 발굴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용산 일대는 백제의 초기 중심지와도 지리적으로 가까워, 문배동 논 지층 아래에는 생각보다 오래된 역사 층위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3대지 76필지 — 54,882㎡의 삶의 터전
문배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토지 유형은 대지였다. 무려 76필지, 54,882㎡. 전체 면적의 약 65%가 대지였다는 것은, 이미 1912년에 문배동이 상당히 '주거화'된 동네였다는 뜻이다.
논과 밭이 주를 이루던 서울 외곽 지역들과 달리, 문배동의 대지 비율은 압도적이었다. 용산이라는 지명이 주는 군사·교통의 요충지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용산은 일본이 강제 병합 이전부터 군사적 거점으로 주목했던 곳이고, 그 인근의 문배동에는 이미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지 76필지 위에 세워진 집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기록을 보면 전통 한옥과 일본식 목조 건물이 뒤섞이는 모습이 용산 일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인 집과 일본인 집이 같은 골목에 마주하는 아이러니한 풍경이 이미 1912년에 문배동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4도로·잡종지 — 도시가 되어가던 흔적
문배동에는 도로 1필지 793㎡와 잡종지 8필지 25,593㎡가 있었다. 도로는 단 1필지뿐이었지만, 잡종지의 규모는 상당했다. 잡종지란 특정 용도로 지정되지 않아 창고, 시장, 임시 적치장 등 여러 목적으로 쓰이던 땅이다.
잡종지 8필지 25,593㎡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이 땅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용산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군수 물자 창고나 일본 상인들의 물류 거점으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도시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공백 같은 땅, 그것이 잡종지였다.
잡종지와 문화재 지표조사
잡종지는 용도가 불명확하고 다양한 주체들이 사용한 공간이기 때문에, 지표면이 복잡하게 교란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교란층 아래에 더 오래된 생활면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 잡종지는 반드시 표본조사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다.
5밭 7필지 — 24,132㎡의 계절 풍경
문배동에는 밭도 있었다. 7필지, 24,132㎡. 논보다 필지 수는 적었지만 면적은 비슷했다. 봄에는 파와 감자, 여름엔 고추와 오이, 가을엔 배추와 무가 이 땅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밭 7필지의 소유자는 누구였을까. 아마 이미 눈치챘겠지만, 조선인이 아니었다. 문배동의 토지 소유 구조를 보면, 이 밭들조차 조선인의 손을 거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기 땅이 아닌 밭에서, 소작료를 내며 농사를 짓는 조선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논
11필지 · 21,861㎡
밭
7필지 · 24,132㎡
대지
76필지 · 54,882㎡
도로
1필지 · 793㎡
잡종지
8필지 · 25,593㎡
국유지
2필지
6충격의 진실 — 37필지를 가진 일본인들
이제 이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을 얘기할 차례다. 1912년 문배동 전체 39필지 중, 일본인이 소유한 필지는 37필지였다. 비율로 따지면 94.9%. 거의 모든 땅이 일본인의 손에 있었다.
일본인 소유
37필지
전체의 94.9%
조선인 소유
0필지
단 한 필지도 없음
이 숫자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용산은 일본이 1905년 을사늑약 이전부터 군사 기지를 두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군이 용산 일대를 대규모로 점거하고 일본 민간인들도 뒤따라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용산 인근 문배동의 땅들은 빠르게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1912년은 그 결과가 이미 완성된 시점이었다.

37필지를 소유한 일본인들은 단순한 거주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상인, 군 관련 사업자, 토지 투기꾼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식민지 초기의 경제적 수혜를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가져간 계층이었다. 그들이 소유한 문배동 37필지의 대지 위에는 일본식 상점과 주택들이 들어섰고, 조선인들은 그 거리를 지나다니는 이방인이 되었다.
7조선인 소유 토지 0필지 — 그 의미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1912년 문배동에서 조선인이 소유한 토지는 단 한 필지도 없었다. 0필지.
조선인 소유 0필지가 의미하는 것
이것은 단순히 조선인이 이 동네에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조선인들은 이 땅에서 살았다. 농사를 지었고, 집에서 밥을 지었다. 그러나 그 땅의 법적 소유권은 단 한 조각도 조선인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소작농이나 세입자로 살아가는 삶. 1912년 문배동 조선인들의 현실이었다.
전국적으로 조선인 소유 토지가 줄어드는 속도를 보면, 이는 문배동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1912~1918)은 기존 관습적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한 조선인들의 토지를 국유지 혹은 일본인 사유지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문배동은 용산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그 과정이 유독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진 사례였다.
"땅을 빼앗기는 것은 단순한 재산 손실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기반을 빼앗기는 것이고, 역사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문배동의 조선인 소유 토지 0필지는 그 지워짐의 기록이다."

8국유지 2필지 — 식민 행정의 발판
문배동에는 2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작은 숫자지만, 이 국유지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1912년이라는 시점을 다시 한번 떠올려야 한다. 1912년의 국유지는 대한제국의 공공 토지가 아니라, 이미 일본 식민 통치 기구가 관리하는 토지였다.
용산 일대에서 국유지는 주로 군사 시설 주변의 완충 지대나 행정 편의를 위한 공공 용도로 설정되었다. 2필지라는 숫자는 작아 보이지만, 그 위치에 따라 이후 도시 개발 방향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씨앗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용산의 국유지들은 이후 일제 강점기 내내 군사 시설과 철도 인프라 확장의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9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문배동이 품은 역사층
지금까지 살펴본 문배동의 1912년 기록은 단순한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기록들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다. 용산구는 지금도 대규모 개발이 진행 중인 지역이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각종 재개발 사업이 계속되면서 이 땅 아래에 잠든 역사 층위가 교란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
용산 일대는 백제 초기 한성 시기의 유적 분포 권역 안에 포함된다. 즉, 문배동 땅 아래에는 1912년의 기록보다 훨씬 오래된 유물과 유적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1912년 대지와 잡종지로 기록된 복잡하게 교란된 상층부 아래, 그 이전 시대의 생활면이 온전히 보존된 사례는 서울 여러 발굴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어 왔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삽을 꽂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첫 번째 물음이다. 문배동처럼 역사적 복잡성이 높은 지역일수록, 그 물음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발굴조사 절차 안내
용산구 재개발 사업과 문화재 지표조사의 연결
seoulheritage.org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공사 전에는 국가유산청 고시 기준에 따라 문화재 지표조사 의뢰가 필수다. 용산구처럼 역사적 중요도가 높은 지역은 지표조사 이후 시굴조사 또는 발굴조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전에 지표조사를 진행하면 공사 중 유물 발견으로 인한 공정 중단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

10에필로그 — 빼앗긴 땅 위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지금 문배동에서 커피를 마시며 인스타를 찍는 그 순간, 1912년 이 땅에서 소작료를 내며 살아가던 이름 모를 조선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기록에 없다. 그가 어느 집에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어느 밭에서 농사를 지었는지도. 하지만 그가 이 땅 위에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 땅이 그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토지 대장 한 장이 분명히 증명한다.
우리가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유물 발굴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록 밖에 남겨진 사람들의 존재를 땅이라는 언어로 복원하는 행위다. 문배동의 0필지 조선인 소유 토지는 분노스러운 역사다. 하지만 그 분노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기억해야만, 우리는 이 땅 위에서 더 나은 오늘을 만들 수 있다.

그 땅의 주인이 없었던 게 아니다.
주인에게서 땅을 빼앗았던 것이다.
1912년 문배동 조선인 소유 토지 0필지.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땅을 잃고도 그 땅에서 계속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이 골목을 걷는 것은, 그들이 남긴 땅 위를 걷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이 가장 작고도 가장 강한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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