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현석동 토지 기록으로 보는 서울의 과거 풍경
- 2025년 9월 20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리포트
'검은 돌의 마을' 현석동,1912년 그 땅에 누가 살고 있었나
215필지·88,767㎡. 한강변 서강 나루터 곁에서 이씨·김씨·박씨가 살아간 마을, 그리고 그 땅에 드리운 일제의 그림자까지. 100년 전 현석동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다.
215
총 필지 수
88,767
총 면적(㎡)
192
대지 필지(집터)
5
일본인 소유 필지
목차 · Contents
시작 시간 여행의 시작: 1912년 현석동으로 가다
01 집과 대지, 당시 사람들의 생활 터전
02 잡종지와 밭, 생계와 연결된 땅의 쓰임새
03 공유지와 국유지, 공공의 자원은 어디에 있었나
04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마을을 이루던 사람들
05 법인과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시대의 그림자
06 현석동과 한강, 잊혀진 물의 기억
07 서울 문화재 조사와 발굴을 통해 배우는 교훈
마무리 현석동의 이야기가 오늘날 주는 의미
합정역에서 내려 마포대교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현석동. 그 골목 어딘가에, 조선시대 대유학자 박세채(朴世采)가 살던 집터가 있었다.
현석(玄石)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마을에 검은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성리학자 박세채의 호(號)가 현석이어서 그가 살던 이 마을에 그 이름이 남았다는 설이다. 두 이야기 모두 현석동이 그냥 스쳐 지나갈 동네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 마을은 학문과 한강 물류, 오랜 씨족의 기억이 겹쳐 있는 곳이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현석동의 토지 기록은 총 215필지, 88,767㎡다. 다른 동에 비해 면적이 크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215필지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이씨, 김씨, 박씨가 함께 살던 공동체의 질서, 그리고 그 위로 드리워지기 시작한 식민지의 그림자까지. 지금부터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시작하며 — 시간 여행의 시작: 1912년 현석동으로 가다
1912년은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지 2년째 되는 해였다. 일본 총독부는 전국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 땅의 크기와 소유자를 낱낱이 기록해 나갔다. 그 기록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당시 현석동은 마포구 남부, 한강과 가까운 서강(西江) 지역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안의 서강방에 속했고, 1895년에 현석리(玄石里)라는 이름으로 공식 기록에 등장했다.
1912년 당시의 현석동은 총 215필지, 88,767㎡. 지금으로 치면 약 2만 7천 평 정도다. 작은 마을이지만, 한강 물길을 끼고 있어 이 지역은 예로부터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마포와 서강은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곡식과 어물이 집산되는 물류의 중심이었다. 현석동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1912년 현석동 토지 현황 — 핵심 통계
총 필지 수215필지
총 면적88,767㎡ (약 2.7만 평)
대지 (집터)192필지 / 59,983㎡ (67.6%)
밭 (전)21필지 / 26,763㎡ (30.2%)
잡종지2필지 / 2,019㎡ (2.3%)
공유지1필지
국유지5필지
법인 소유2필지
일본인 소유5필지
01 집과 대지, 당시 사람들의 생활 터전
현석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숫자는 대지다. 무려 192필지, 59,983㎡. 전체 215필지 중 89%가 집터였다. 이것은 이전에 살펴본 도림동이나 대방동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현석동은 농경보다 주거 중심의 마을이었다는 뜻이다. 한강과 가깝고 서강 나루터와 연결되는 이 지역의 특성상, 마을 사람들은 논밭을 일구는 것보다 한강 수운과 연결된 삶을 더 많이 살았을 것이다.
192필지의 집터 위에는 다양한 집들이 있었다. 기와를 얹은 반듯한 집도 있었을 것이고, 서민들의 초가도 있었을 것이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집들은 담장 너머로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아침이면 우물가에서 사람들이 모여 하루를 시작했고, 저녁이면 아궁이 연기가 골목마다 피어올랐다. 이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경조사를 함께했고, 아이들은 온 동네를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다.
"192필지의 집터. 이 마을에 살았던 이씨, 김씨, 박씨 가문들의 대문이 골목마다 줄지어 서 있는 풍경. 그 문들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피어나고 사라졌을까."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옛 가옥 터가 발견될 때, 연구자들은 기와 조각 하나, 아궁이 자리 하나로 당시 집의 규모와 생활 수준을 추정한다. 현석동의 192필지는 그런 발굴의 가능성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다. 지표조사를 통해 이 땅의 층위를 열어보면, 100년 전 사람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나타날 수 있다.
02 잡종지와 밭, 생계와 연결된 땅의 쓰임새

밭이 21필지, 26,763㎡. 잡종지가 2필지, 2,019㎡. 현석동의 밭과 잡종지를 더하면 전체 면적의 32%가 넘는다. 집터가 대부분인 주거 중심 마을에서 이 밭의 역할은 더 특별하다. 집 근처에 딸린 텃밭처럼, 마을 사람들이 자급자족에 필요한 채소와 잡곡을 기르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 배추, 고추, 콩, 상추. 계절마다 다른 작물이 이 21필지의 밭을 채웠다. 한강에 가까운 지역이라 땅이 비옥했을 것이고, 물길에서 올라온 풍부한 영양분이 밭의 작물을 살찌웠을 것이다. 이 밭에서 나온 채소는 인근 마포 시장으로 나갔거나, 마을 사람들의 식탁을 직접 채웠다. 한강 물류로 바쁜 마을에서도 밭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터전이었다.
잡종지 2필지는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터였거나, 물건을 주고받는 작은 장터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골목 어귀의 빈터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던 공간. 잡종지라는 이름은 용도가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마을 생활의 다양한 필요를 채우는 유연한 공간이었다.
03 공유지와 국유지, 공공의 자원은 어디에 있었나
현석동에는 공유지 1필지와 국유지 5필지가 있었다. 작은 숫자지만 이 땅들이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공유지 1필지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던 땅이었다. 공동 우물이 있는 마당이었을 수도 있고, 마을 제사를 지내던 제단 터였을 수도 있으며, 장례나 혼례처럼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행사가 열리던 공간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용도였든 간에, 이 한 필지는 개인의 소유가 아닌 현석동 공동체 전체의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국유지 5필지는 성격이 다르다. 국가, 즉 일본 총독부 또는 조선 관청이 관리하는 땅이었다. 관공서 부지였을 수도 있고, 군사적 목적으로 예비해둔 땅이었을 수도 있다. 1912년은 이미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이 5필지의 국유지에 식민지 행정의 손길이 닿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도로나 공공시설 부지처럼 공공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 누구의 이익을 위한 공공인지는 다른 문제였다.
04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마을을 이루던 사람들

1912년 현석동의 땅을 누가 소유했는지를 보면 마을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1912년 현석동 — 성씨별 토지 소유 필지 수
이씨
34필지
김씨
32필지
박씨
23필지
서씨
16필지
전씨
12필지
이씨 34필지, 김씨 32필지. 두 성씨가 거의 대등하게 마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정 씨족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여러 성씨가 비슷한 비중으로 공존하는 형태였다. 여기에 박씨, 서씨, 전씨까지 더해지면 현석동은 다성씨 공존 마을이었음이 분명하다. 한강 물류 도시에 가까운 지역 특성상,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살며 다양한 성씨 구성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씨가 가장 많다 해서 특정 이씨 가문이 마을을 장악한 것은 아닐 수 있다. 다양한 계통의 이씨들이 각자의 필지를 보유하며 마을 안에서 공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성씨 기록은 발굴된 유물의 제작 집단이나 소유 집안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성씨가 새겨진 그릇 하나, 문패 자리 하나도 역사의 단서가 된다.
05 법인과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시대의 그림자
법인 소유 2필지. 이미 1912년 현석동에는 법인이라는 개념이 토지 소유에 적용되고 있었다. 종교 단체, 교육 기관, 혹은 상업 회사 등이 땅을 법인 이름으로 보유하는 것은 당시 도심 인근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던 현상이었다. 한강에 가까운 현석동의 위치상, 물류나 상업과 관련된 법인이 이 땅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인 소유 5필지다. 전체 215필지 중 2.3%에 해당하는 이 5필지가 말해주는 것은 작지 않다. 1912년은 일본 강점이 시작된 지 불과 2년. 이미 일본인들이 서울 마포 한강변의 땅에까지 소유권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 투자가 아니라, 식민지 경제 구조가 현석동 같은 소규모 주거 마을까지 침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이 일본인 소유지는 어떻게 됐을까. 역사는 이미 알려준다. 1912년의 5필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필지로 늘어났고, 조선인 가정들은 그 압박 속에서 서서히 자신의 땅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는 근대 일본식 건축 재료들은 바로 이 시기의 흔적이다.
06 현석동과 한강, 잊혀진 물의 기억
서강(西江) — 조선시대 물류의 대동맥, 현석동의 배경
현석동이 위치한 마포구 남부는 조선시대 서강 지역에 속했다. 서강은 경기·충청·전라에서 올라온 곡식과 어물이 집산되는 조운(漕運)의 종착점이었으며, 광흥창과 풍저창이라는 국가 창고가 이 인근에 있었다. 강배가 오가고 상인들이 모이던 이 물길은, 1912년 현석동 사람들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현석동은 한강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마을이다. 조선시대부터 이 일대는 서강이라 불리며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한강의 핵심 구간이었다. 삼남 지방에서 조세로 거두어진 쌀과 보리, 해안에서 올라온 어물, 강 상류에서 내려온 목재가 모두 이 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 한강 바로 옆에 현석동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나룻배를 부리거나 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었을 것이다. 일부는 물자를 옮기는 일을 했고, 또 일부는 배에서 내린 물건들을 팔거나 보관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192필지라는 집터의 높은 비율은, 이 마을이 농사보다 한강 물류와 더 깊이 연결된 삶을 살았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고 1900년 한강 철교가 완공되면서 한강 수운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배가 아닌 기차가 물자를 나르게 된 것이다. 1912년의 현석동은 바로 그 전환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강배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근대의 물결이 이 마을에도 밀려오고 있었다.
07 서울 문화재 조사와 발굴을 통해 배우는 교훈

1912년 현석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에서 가장 먼저 펼쳐야 하는 지도다. 어느 필지에 집이 있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밭이 펼쳐졌는지, 국유지와 공유지는 어디였는지를 알면, 발굴조사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에서는 도심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이전 유적이 발견되어 역사를 다시 쓴 사례가 여럿 있다. 종로구 개발 현장에서는 조선시대 대형 가옥 터와 생활 유물이 쏟아져 개발 계획이 수정됐다. 마포구 일대에서도 한강 수운과 관련된 근대기 유물들이 조사에서 확인된 사례가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의뢰 안내
현석동처럼 조선시대부터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지역에서 건축이나 토목 공사를 진행할 때는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 순서로 진행되며, 소규모 공사의 경우 국가유산청의 국비 지원 발굴조사 제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해보세요.
발굴조사를 거치면 단순한 공사가 역사를 만나는 순간이 된다. 흙 속에서 나온 기와 조각 하나, 우물 흔적 하나가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살려낸다. 현석동의 192필지 집터 아래에는 아직도 그런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마무리 — 현석동의 이야기가 오늘날 주는 의미
1912년 현석동의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215필지, 88,767㎡라는 숫자 뒤에는 이씨, 김씨, 박씨 가문이 살아온 수백 년의 삶이 있고, 한강 물길 위에서 생계를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으며, 그 위로 드리워지기 시작한 식민지의 그림자가 있다.
도시 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서울에서, 그 땅에 남아 있는 역사와 흔적을 존중하고 기록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과거를 지키지 못하면 현재의 우리도 뿌리를 잃는다. 현석동의 옛 기록은 바로 그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땅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다.

1912년 현석동의 골목을 걷던 이씨, 김씨, 박씨의 발걸음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살던 집터, 그들이 일구던 밭, 그들이 함께 쓰던 공유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아스팔트 아래에, 콘크리트 기초 아래에.
검은 돌의 마을 현석(玄石). 그 이름처럼, 이 마을의 기억도 돌처럼 단단하게 땅 속에 박혀 있다. 발굴은 그 돌을 꺼내 세상의 빛 아래에 놓는 일이다.
오늘 현석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잠깐 멈춰 서서 발 아래를 한번 바라봐 주길 바란다. 그 땅이 당신에게 이야기를 걸어올 것이다. 수백 년을 품어온,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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