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동대문구 답십리 '숨겨진 묘자리' 명당 인증?! 발굴 조사 참여하고 '조상 덕' 제대로 보자!
- 2025년 4월 5일
- 4분 분량
서울에서 묘지가 41필지나 있었던 동네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 동대문구 답십리 859,941㎡의 잊혀진 풍경
1912년 답십리 완전 해부 · 논 79필지, 밭 244필지, 묘지 41필지가 말하는 삶과 죽음의 공존 · seoulheritage.org 데이터 기반 ·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가이드
목차
1장답십리, 이 이름이 품고 있는 100년 전의 무게
2장1912년 답십리 토지 데이터 전체 해부 — 세 종류의 지목이 만든 독특한 구성
3장밭 244필지, 논 79필지 — 답십리가 품었던 광활한 농경의 기억
4장묘지 41필지 146,509㎡ —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
5장김씨, 이씨, 한씨 — 답십리를 일군 세 성씨의 이야기
6장회기동과 비교하면 보이는 것 — 답십리만의 역사적 성격
7장동대문구 답십리에서 공사를 앞두고 있다면 지금 당장 알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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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십리, 이 이름이 품고 있는 100년 전의 무게

답십리. 지하철 5호선 답십리역, 답십리 파크자이, 재개발이 한창인 오래된 주택가. 동대문구 동쪽에 자리한 이 동네는 이름 자체가 한양 도성에서 십 리 되는 거리에 있다는 뜻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해요. 그런데 1912년 이 동네의 기록 데이터를 보면, 이름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seoulheritage.org에서 분석한 같은 동대문구 회기동 자료를 보면, 경희대 앞 그 익숙한 골목이 조선 왕실 창덕궁의 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국유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답십리는 그와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논과 밭과 함께 41필지의 묘지가 공존했던,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서 나란히 숨 쉬던 동네였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답십리라는 이름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예요. 동대문구에서 공사를 준비하고 있는 분이라면, 묘지 비율이 17%에 달하는 이 동네에서 왜 사전 조사가 특히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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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답십리 토지 데이터 전체 해부 — 세 종류의 지목이 만든 독특한 구성

전체
859,941㎡
435필지
밭
371,763㎡
244필지 · 43%
논
248,606㎡
79필지 · 29%
묘지
146,509㎡
41필지 · 17%
1912년 답십리 토지 구성 비율
밭 43%
논 29%
묘지 17%
기타 11%
이 시리즈 최고 기록
묘지 비율 17% — 이 시리즈에서 다룬 모든 동네 중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밭 244필지, 논 79필지, 묘지 41필지. 이 세 지목이 전체 435필지 859,941㎡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논과 밭을 합치면 전체의 약 72%가 농경지예요. 여기에 묘지 146,509㎡를 더하면 약 89%가 이 세 가지 지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답십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을이면서 동시에 돌아가신 분들이 잠드신 땅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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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244필지, 논 79필지 — 답십리가 품었던 광활한 농경의 기억

밭 244필지, 371,763㎡. 논 79필지, 248,606㎡. 두 숫자를 합치면 323필지, 620,369㎡로 축구장 약 86개를 이어붙인 면적이에요. 지금 답십리 어딘가의 아파트 단지 바로 그 자리에 100년 전 벼가 자라고 배추가 줄지어 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244개의 밭은 각각 다른 사람이나 가문이 경작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농사가 소수 대지주의 전유물이 아니라 마을 구성원 대다수의 생계 수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답십리에서는 한 가지가 더 있어요. 묘지와 인접한 농경지 지역에서는 묘역에서 이탈한 유물, 즉 제례에 사용했던 도자기나 금속 유물의 파편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지목 사이의 경계 지역이 특히 흥미로운 발굴 지점이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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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41필지 146,509㎡ —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

묘지 41필지, 146,509㎡. 이 숫자 앞에서 잠깐 멈춰 생각해보실 필요가 있어요. 41필지의 묘지가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무덤이 41개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필지 하나에 여러 기의 무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조선시대 묘지는 한 가문이 대대로 함께 묻히는 가문 묘역인 경우가 많았거든요. 41필지라면 수십에서 수백 기의 무덤이 답십리 언덕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네 땅의 6분의 1 가까이가 조상들이 잠든 공간이었어요. 묘지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부장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무덤에서는 당시 가장 좋은 물건들을 함께 묻었어요. 분청사기, 백자, 청동 제례 용구, 금속 장신구, 비단 의복의 흔적 같은 것들이 발견될 수 있어요. 41필지라는 규모라면 이런 부장품이 나올 수 있는 지점이 답십리 전역에 걸쳐 분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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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이씨, 한씨 — 답십리를 일군 세 성씨의 이야기
1912년 답십리의 토지 소유 기록에서 세 성씨가 두드러집니다.
김씨
이씨
한씨 — 이 시리즈 최초 등장
이 중에서 한씨가 특별히 눈에 띄어요. 이 시리즈를 통틀어 한씨가 주요 토지 소유 성씨로 등장한 것은 처음입니다. 한씨는 전국적으로 많지 않은 성씨예요.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한씨가 두드러진다는 건, 이 지역에 한씨 가문이 오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어요. 묘지 41필지라는 데이터와 연결해보면, 한씨 가문의 선산이 답십리 어딘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아래로 밭을 경작하며 대를 이어 살아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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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기동과 비교하면 보이는 것 — 답십리만의 역사적 성격

회기동 (1912년)
특징창덕궁 왕실 토지
외부 자본국유지 + 동척
성격왕실·제도 권력
예상 유물왕실+일제강점기
답십리 (1912년)
특징묘지 17% — 시리즈 최고
소유 구조김·이·한씨 중심
성격가문 공동체
예상 유물민중 생활+부장품
같은 동대문구 안에 있지만, 회기동과 답십리는 1912년 기준으로 전혀 다른 역사를 품고 있었습니다. 회기동에서는 왕실 관련 유물이나 일제강점기 특유의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반면, 답십리에서는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생활 유구와 가문 묘역 관련 유물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묘지 17%라는 답십리만의 특성은, 이 동네가 오랜 세대에 걸친 가문 공동체의 터전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
보존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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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 답십리에서 공사를 앞두고 있다면 지금 당장 알아야 할 것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건물 신축이나 대규모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 동네의 특수성을 반드시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답십리는 이 시리즈에서 다룬 모든 동네 중에서 묘지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에요. 전체 면적의 17%가 묘지였다는 사실은, 지금 답십리 어딘가에서 공사를 진행할 때 묘지였던 지역과 겹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뜻입니다. 묘지였던 지역에서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 문화재보호법 측면에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해요. 조선시대 무덤에서 나오는 부장품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공사 중 매장문화재를 발견하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최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 있어요. 답십리처럼 묘지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이 리스크가 더욱 현실적입니다. seoulheritage.org에서 발굴조사 비용 및 예산 FAQ, 법적 및 행정 FAQ, 공사 일정 FAQ를 먼저 확인하세요.
묘지와 인접했던 지역은 그 경계 부분에서도 유물이 나올 수 있어요. 해당 부지의 1912년 지목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답십리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1912년 답십리, 어느 가을날 이씨 집안 사람들이 언덕 선산에 올랐을 거예요.잡풀을 걷어내고 묘비를 닦으며 조상님께 절을 올리고, 내려오는 길에는 바로 아래 밭에서 익어가는 벼 이삭을 바라보았을 거예요. 저 멀리 한씨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김씨 아저씨는 논에서 마지막 벼를 거두고 있고.삶과 죽음이 한 언덕 위아래에 나란히 자리잡은 그 풍경이, 지금 답십리 어딘가의 아파트 단지 아래에 묘역 돌담 하나, 논두렁 흙 한 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이것이 답십리의 진짜 이름이고, 진짜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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