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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정문 앞, 그 땅의 112년 전 모습1912년 서대문구 대현동 국유지 12,614㎡의 기록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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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발굴조사 · 지표조사 · 대현동 역사

이화여대 정문 앞, 그 땅의 112년 전 모습1912년 서대문구 대현동 국유지 12,614㎡의 기록

지금은 대학가 카페와 서점이 늘어선 대현동.1912년 이 땅의 60.9%는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대지였습니다.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기준연도 1912년문화유산 발굴·지표조사seoulheritage.org 기반

전체 국유지

12,614㎡

8필지 총 면적

대지 (3필지)

7,676㎡

전체 약 60.9%

밭 (5필지)

4,938㎡

전체 약 39.1%


목 차

01이화여대 캠퍼스가 생기기 전, 이 땅엔 무엇이 있었나

021912년 대현동 국유지 8필지의 실체

03대지 7,676㎡ — 국가 건물이 서 있던 땅의 비밀

04밭 4,938㎡ — 대학가 골목 아래 농경지의 흔적

05대현동의 역사 타임라인 — 조선에서 근대까지

06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절차 완전 가이드

07서대문구 일대 발굴조사 성공 사례

08캠퍼스 아래 역사를 기억하는 일


01이화여대 캠퍼스가 생기기 전, 이 땅엔 무엇이 있었나

지금 당신이 걷는 그 캠퍼스 돌길 아래, 112년 전 누군가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서대문구 대현동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화여자대학교를 떠올립니다. 이화여대 정문에서 이어지는 이화여대길, 그 주변을 채운 카페와 맛집들, 그리고 젊은 활기가 넘치는 대학가의 풍경이 이 동네의 현재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 이화여대 캠퍼스가 들어서기 훨씬 전, 1912년의 대현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전문 기관 seoulheritage.org의 1912년 지적원도 기초조사에 따르면, 당시 대현동에는 총 8필지 12,614㎡의 국유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대지가 3필지 7,676㎡로 전체의 60.9%를 차지했고, 밭이 5필지 4,938㎡로 39.1%를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대지가 면적의 60%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1912년 당시 이 구역에 단순한 농촌 풍경이 아닌, 상당한 규모의 건물 시설이 들어서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국유 대지라는 점은 그 건물들이 관청, 교육 기관, 군사 시설 등 공공 목적의 국가 소유 건물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이화여대가 이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현동 국유지의 60.9%가 대지라는 사실은, 이 땅에 이미 112년 전 상당한 규모의 국가 건물이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그 건물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이 조사의 핵심입니다.


021912년 대현동 국유지 8필지의 실체

숫자는 언제나 가장 정직한 역사 증언자입니다. 1912년 대현동 국유지의 전체 구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목 구분

필지 수

면적

전체 비율

대지 (건물 부지)

3필지

7,676㎡

약 60.9%

밭 (농경지)

5필지

4,938㎡

약 39.1%

합계

8필지

12,614㎡

100%

대지 (건물 부지)7,676㎡ · 60.9%

밭 (농경지)4,938㎡ · 39.1%

이 구성에서 주목할 또 다른 포인트는 필지 수와 면적의 관계입니다. 대지는 3필지이지만 면적이 7,676㎡로 크고, 밭은 5필지이지만 면적이 4,938㎡로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즉, 대지는 필지당 평균 약 2,559㎡로 꽤 넓은 편이고, 밭은 필지당 평균 약 988㎡로 비교적 소규모입니다.

이 패턴은 이 지역의 토지 이용 방식을 추측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넓은 대지 3필지는 규모 있는 시설물이 들어선 단일 목적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소규모로 분산된 밭 5필지는 그 주변부를 채우던 농경 활동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03대지 7,676㎡ — 국가 건물이 서 있던 땅의 비밀

대현동 국유지 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단연 대지 3필지 7,676㎡입니다. 이 면적은 농구 코트 약 38개에 해당하는 크기로, 결코 작지 않은 규모입니다. 그리고 이 넓은 대지에 국가 소유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역사적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가능성 A

조선 말기 군사·관아 시설

서대문 일대는 한양 도성의 서쪽 관문 지역으로 군사·행정 시설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대현동의 넓은 국유 대지는 조선 말기 서대문 인근 군영(軍營)이나 관아의 부속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 B

근대 교육·선교 기관 연관 부지

1886년 이화학당(이화여대 전신)이 정동에 설립된 이후 서대문 일대로 교세가 확장되었습니다. 1912년 당시 이 국유 대지가 근대 교육 기관 설립과 연관된 부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 C

일제강점기 행정 시설

1912년은 일제강점 직후로, 조선총독부가 각지에 행정 시설을 재편하던 시기입니다. 이 국유 대지가 일제의 행정·경찰·교육 관련 시설 부지로 수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가능성 D

종교·사찰 관련 공간

서대문 인근에는 조선시대부터 여러 사찰과 종교 시설이 존재했습니다. 국유지로 관리된 종교 시설 부지의 가능성도 문화재 지표조사 과정에서 검토해야 할 항목입니다.

어떤 가능성이 맞는지는 오직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밝힐 수 있습니다. 건물 초석, 기단석, 배수로 유구, 기와 더미, 담장 기초 등 다양한 건물 관련 유구가 이 대지 아래에 잠들어 있을 수 있으며, 이것들이 어떤 시대, 어떤 용도의 건물이었는지 말해줄 것입니다.

넓은 국유 대지는 발굴조사에서 가장 정보 밀도가 높은 구역입니다.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반드시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초석 하나, 기와 파편 하나가 역사의 퍼즐 조각이 됩니다.


04밭 4,938㎡ — 대학가 골목 아래 농경지의 흔적

대지와 함께 대현동 국유지를 구성하는 밭 5필지 4,938㎡는 전체의 39.1%를 차지합니다. 지금의 이화여대 주변 상업 지역, 카페와 음식점이 가득한 그 골목들 아래에 조선 시대의 농경지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이 동네의 변화가 얼마나 극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서대문 일대의 밭은 조선 후기부터 도성 인근 주민들의 생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식량 공급지였습니다. 특히 대현동은 지형적으로 인왕산과 안산 사이의 완만한 구릉 지대에 위치해 있어, 배수가 잘 되는 비옥한 토양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밭들에서는 채소류와 잡곡 등이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경작 활동과 관련된 다양한 농기구 유물이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이 밭 구역은 주변 대지 구역과 함께 연계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밭과 인접한 대지에 건물이 있었다면, 그 건물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이 밭을 경작했을 가능성이 있고, 두 구역의 유물이 같은 시대·같은 생활권의 것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05대현동의 역사 타임라인 — 조선에서 근대까지

대현동(大峴洞)의 이름은 '큰 고개'에서 유래했습니다. 서대문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이 고개 지대는 조선 시대부터 한양 서쪽 관문의 주요 통행로였습니다. 이 지리적 위치가 대현동의 역사를 풍부하게 만들어온 핵심 요인입니다.

조선 시대

서대문 서쪽 관문 통행로 거점

대현동 일대는 한양 도성 서소문 밖 지역으로, 의주로(義州路)를 따라 중국으로 향하는 사신들의 행로가 지나던 곳이었습니다. 관아 시설과 여각(旅閣·여행자 숙소) 등이 이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886년

이화학당 설립 — 근대 교육의 시작

미국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정동에 이화학당을 설립합니다. 이후 서대문 일대로 교세가 확장되면서 대현동 지역의 토지 이용 변화가 시작됩니다.

1910~1912년

일제강점 직후 지적원도 작성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 전역의 토지를 측량·등록합니다. 대현동 국유지 8필지 12,614㎡가 이 시기 기록됩니다. 대지 7,676㎡의 존재는 이미 이 시기 상당한 건물 시설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1920년대

이화여전 대현동 캠퍼스 조성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정동에서 현재 대현동 위치로 이전하면서 대규모 캠퍼스가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1912년 국유지의 일부가 교육 기관 부지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대학가와 문화 공간으로 변모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가 문화 지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1912년, 그 이전부터 축적된 역사의 층위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06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절차 완전 가이드

대현동 국유지처럼 대지와 밭이 혼재하는 복합 지목 구역에서의 문화재 조사는, 각 지목의 성격에 맞춘 전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특히 대지 구역은 건물 유구 발굴 가능성이 높아 일반 농경지와는 다른 조사 방법이 적용됩니다.

조사 단계

방법

범위

대현동 특이사항

문화재 지표조사

육안·문헌·항공사진

전 구역

1910년대 경성 지도와 비교, 건물 기초 지표 흔적 탐색

표본조사

소규모 굴착 (2%)

약 252㎡

대지 구역 우선 실시, 기와·초석 잔존 여부 확인

시굴조사

트렌치 굴착 (10%)

약 1,261㎡

대지·밭 구역 경계부 집중 조사, 문화층 층위 파악

정밀발굴조사

전면 굴착

유적 확인 구역

건물 유구 확인 시 평면·입면 실측 기록화 필수

대현동 조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의 역사 문헌 교차 분석입니다. 1912년 지적원도 외에도 1910년대 조선총독부 측량 지형도, 1920~1930년대 경성 항공사진, 이화여전 관련 고문서 등을 함께 검토하면 대지 7,676㎡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상당 부분 추정이 가능합니다.

또한 인왕산과 안산의 지질 특성상 이 지역은 화강암 기반암이 비교적 얕은 깊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시굴조사 굴착 깊이 설계 시 암반 출현 가능성을 미리 고려해야 하며, 건물 기단부 유구가 예상보다 얕은 층위에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한 현장 답사가 아닙니다. 역사 문헌 조사, 고지도 분석, 항공사진 판독, 현장 표본 수집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복합 학술 작업입니다. 이 단계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이후 모든 조사의 정밀도를 결정합니다.


07서대문구 일대 발굴조사 성공 사례



성공 사례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발굴조사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는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형무소 시설의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옥사, 고문실, 사형장 등 관련 유구가 확인되고 기록화되었으며,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운영되며 연간 수십만 명의 시민이 찾는 역사 교육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근대 건축 유구의 발굴조사가 얼마나 강력한 역사 교육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성공 사례 — 경희궁지 발굴조사 (서대문구 인근)

서대문구 인근 종로구 경희궁 터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조선시대 궁궐 유구를 상당 부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고지도 분석을 통해 건물 배치를 먼저 추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굴조사와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한 방법론이 교과서적 사례로 꼽힙니다. 대현동 대지 구역 발굴에서도 이와 유사한 접근이 유효합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철저한 사전 조사가 발굴 성과를 결정했다는 점입니다. 지표조사에서 발견한 단서들을 바탕으로 시굴조사 트렌치 위치를 전략적으로 설계했고, 그 결과 최소한의 굴착으로 최대의 유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현동 국유지 조사에서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08캠퍼스 아래 역사를 기억하는 일

이화여대 캠퍼스는 지금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꿈을 키우는 공간입니다. 그 캠퍼스 아래, 그리고 주변 대현동 골목 곳곳 아래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국가가 관리하던 건물들이 서 있던 자리, 누군가 씨앗을 뿌리고 땀 흘리던 밭이었던 자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교육과 문화의 공간으로 바뀌어온 100년의 이야기.

seoulheritage.org의 1912년 서울 국유지 기초조사는 이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서대문구 대현동을 포함하여 서울 25개 구 전체의 기록을 정리함으로써, 개발과 보존의 기로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만약 대현동 일대에 개발 사업이나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를 먼저 실시하는 것이 현명한 첫 걸음입니다. 특히 대지 7,676㎡ 구역은 건물 유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공사 도중 유물이 출토되어 예상치 못한 공사 중단이 발생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사전 조사는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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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동의 그 밭에서 씨앗을 뿌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국가의 건물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들은 이 땅이 훗날 지식의 전당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요.알지 못했겠지만, 그들의 손이 닿았던 흙이지금 이 캠퍼스의 토대가 되었습니다.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 아닙니다.그것은 지금 이 땅 위에 서 있는 우리가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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