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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국유지 발굴조사 이야기

5월 25일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2일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대문구 편

1912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단 1필지, 서울에서 가장 짧은 장부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필지

전체 국유지 필지 · 시리즈 최소

1,804㎡

전체 국유지 면적

100%

밭이 차지한 비중

약 546평

밭 1필지의 크기

1912년 냉천동의 국유지 장부는 단 한 줄이었습니다. 밭, 1필지, 1,804㎡. 그게 전부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수백 필지짜리 장부를 수없이 넘겨봤지만, 한 줄짜리 장부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기록이 짧을수록, 질문은 길어집니다. 왜 하필 이 밭 하나만 나라의 것이었을까요.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독립문에서 안산 자락으로 오르는 길목, 찬 우물이 솟는다 하여 찰 랭(冷)에 샘 천(泉), 냉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입니다. 무악재 너머 의주로 큰길이 지나던 서대문 밖, 도성의 그림자가 닿을 듯 말 듯한 성저십리의 땅. 1912년 토지조사사업의 측량원이 이 동네를 다 걷고 나서 국유지 항목에 적어 넣은 것은, 딱 한 필지의 밭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한 줄짜리 기록을 붙들고, 그 안에 접혀 있는 이야기를 최대한 길게 펼쳐 보려 합니다.


목차

  1. 핵심 요약, 1912년 냉천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 현황표와 그래프로 보는 냉천동 국유지

  3. 한 줄짜리 장부가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해주는 이유

  4. 찬 우물의 동네, 냉천동은 어떤 땅이었을까?

  5. 546평의 밭 하나, 누가 무엇을 심었을까?

  6.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7.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절차 한눈에 보기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땅이 돌려준 역사

  9.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1핵심 요약, 1912년 냉천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는 국유지가 단 1필지, 총 1,804㎡ 있었습니다.

지목은 밭 1필지 1,804㎡로, 국유지 전체가 하나의 밭이었습니다.

즉, 냉천동은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서울의 동네 가운데 국유지 필지 수가 가장 적은 사례이며, 마을 땅의 사실상 전부가 민간 소유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이번 기록은 검산이 필요 없을 만큼 깔끔합니다. 전체 국유지 1필지 1,804㎡, 지목별 내역도 밭 1필지 1,804㎡. 숫자가 완전히 일치합니다. 다만 이 단출함을 시시하다고 넘기면 곤란합니다. 수백 필지의 국유지를 품은 동네와 단 한 필지뿐인 동네. 그 차이 자체가 두 동네의 역사가 걸어온 길이 전혀 달랐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2현황표와 그래프로 보는 냉천동 국유지

표로 만들면 역대급으로 짧은 표가 나옵니다. 하지만 시리즈의 원칙대로, 정확하게 기록해 둡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필지당 평균

1필지

1,804㎡

100%

1,804㎡

전체 국유지

1필지

1,804㎡

100%

1,804㎡

전체 국유지 면적과 지목별 면적이 1,804㎡로 완전히 일치하는 기록입니다.

냉천동 국유지 지목별 면적 비중

밭1,804㎡

100%

막대 하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을 가로지릅니다. 밭 100%. 논도, 대지도, 임야도, 분묘지도 없습니다. 참고로 비교하면 같은 시기 서초구 서초동의 국유지는 36필지 202,453㎡, 성동구 마장동은 23필지 141,174㎡였습니다. 냉천동의 1,804㎡는 서초동 국유지의 112분의 1 규모입니다. 서울 안에서도 나라 땅의 지도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달랐습니다.


3한 줄짜리 장부가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해주는 이유

국유지가 없다는 것은, 민간의 땅이 빼곡했다는 뜻

기록을 뒤집어 읽어 보겠습니다. 냉천동에 국유지가 한 필지뿐이었다는 말은, 나머지 땅 전부에 이미 주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집집마다, 밭뙈기마다 개인의 이름이 붙어 있어서 나라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냉천동의 위치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그림입니다. 냉천동은 서대문 밖, 도성에서 걸어서 한나절도 안 걸리는 성저십리의 동네였습니다. 도성 안에 미처 자리 잡지 못한 사람들, 도성을 드나들며 생계를 잇던 사람들이 성문 밖 가까운 언덕부터 차곡차곡 집을 짓고 밭을 일구었습니다. 의주로 큰길이 무악재를 넘어가는 길목이었으니 오가는 사람도, 붙어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민간의 삶이 촘촘하게 뿌리내린 동네. 그런 곳에서는 관유지가 대규모로 남아 있기 어렵습니다.

앞서 살펴본 동네들과 나란히 놓으면 대비가 선명해집니다. 서초동과 염곡동처럼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벌판에는 나라의 큰 농장이 자리 잡았고, 마장동처럼 목장이 있던 곳에는 나라의 산이 남았습니다. 반면 도성 코앞의 냉천동에서는 민간의 소유가 땅을 거의 다 덮어버렸습니다. 국유지의 많고 적음은 그 자체로, 그 동네가 나라의 시설이 있던 땅이었는지, 백성의 삶터였는지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입니다.

그래서 남은 한 필지가 더 궁금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질문은 더 날카로워집니다. 민간의 땅이 그렇게 빼곡했던 동네에서, 어떻게 이 밭 하나만 나라의 장부에 남았을까요. 우연히 남은 자투리였을까요, 아니면 남아야 할 이유가 있던 땅이었을까요. 기록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세워볼 수는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 이어가겠습니다.



4찬 우물의 동네, 냉천동은 어떤 땅이었을까?

동네 이름부터 다시 봅니다. 냉천, 차가운 샘. 안산 자락에서 솟아나는 물이 한여름에도 이가 시리게 차가워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집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찬 샘물은 그 자체로 동네의 보물이었습니다. 물맛 좋은 샘 주변으로는 어김없이 사람이 모이고 마을이 자랍니다. 빨래터가 생기고, 물을 길으러 나온 사람들의 아침 인사가 오가고, 샘가의 평상이 동네의 사랑방이 됩니다.

지형으로 보면 냉천동은 안산의 산자락이 도심 쪽으로 흘러내리는 비탈의 동네입니다. 너른 평지가 귀하니 큰 논이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대신 비탈을 깎아 앉힌 집들과, 집 사이사이 손바닥만 한 밭들이 층층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국유지 1필지의 지목이 논도 대지도 아닌 밭이라는 사실은, 이 동네의 지형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1,804㎡, 약 546평. 냉천동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작지 않은 밭입니다. 비탈 동네의 밭들이 보통 조각조각 나뉘어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546평이 한 덩어리로 남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 필지의 내력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5546평의 밭 하나, 누가 무엇을 심었을까?

이제 이 글의 심장으로 들어갑니다. 이 밭은 왜 나라의 것이었을까요.

첫 번째 시나리오는 관청에 딸린 경작지입니다. 도성 안팎의 관청들은 운영 경비를 대거나 부식을 조달하기 위해 부속 전답을 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성문 밖 가까운 곳의 밭 한 뙈기는 그런 용도로 딱 알맞은 규모입니다. 두 번째는 역둔토의 잔편입니다. 무악재를 넘는 의주로는 조선의 간선 도로였고, 큰길가에는 역과 원이 운영되었습니다. 그 운영을 받치던 전답의 한 조각이 세월에 깎이고 팔려나간 끝에, 마지막 한 필지로 남았을 가능성입니다. 세 번째는 소유자가 끊긴 땅입니다. 주인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거나 소유 관계가 증명되지 못한 땅이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국유로 정리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나리오가 맞든, 1912년이라는 시점의 의미는 같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전국의 소유권을 확정해 나갔고, 신고되지 못한 땅, 관에 딸려 있던 땅은 총독부가 관리하는 국유지로 편입되었습니다. 냉천동의 이 밭 한 필지도 그렇게 새 장부에 적혔습니다. 수백 필지가 넘어간 동네에 비하면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밭 한 뙈기에 기대어 살던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에게는 세상 전부가 바뀐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역사의 무게는 필지 수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국유지는 밭 1필지 1,804㎡가 전부였으며, 이는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서울의 동네 가운데 가장 적은 국유지 기록으로, 민간의 삶이 그만큼 빼곡했던 성저십리 동네의 역사를 역설적으로 증언합니다.


6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필지가 하나뿐인데 조사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기록이 단출할수록, 그 기록은 더 선명한 과녁이 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법률 제2074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합니다. 3만㎡ 이상의 사업 면적은 지표조사가 의무이고, 그보다 작은 사업이라도 유존 지역 여부나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따라 조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2026년 1월부터는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른 조사 기준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냉천동처럼 재개발 논의가 이어져 온 서대문 일대의 동네에서는 특히 실감 나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냉천동의 한 줄짜리 장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조사에 기여합니다. 하나는 그 한 필지 자체입니다. 위치가 특정되는 단 하나의 국유 밭. 관청 부속지였는지, 역둔토의 잔편이었는지에 따라 그 아래에서 나올 수 있는 유구의 성격이 달라지므로, 조사원들에게는 이력을 추적해 볼 가치가 충분한 지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머지 전부입니다. 국유지가 한 필지뿐이었다는 사실은 곧 동네 전체가 오래된 민간 생활권이었다는 뜻이고, 비탈에 층층이 앉았던 집터들 아래에는 온돌과 아궁이, 우물과 배수로, 백자와 옹기 조각 같은 생활 유구가 켜켜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안산 자락은 조선시대 도성 방어와 봉수의 산줄기였으니, 비탈 위쪽으로 갈수록 더 오래된 시대의 흔적이 겹쳐 있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짧은 장부는 빈약한 자료가 아니라, 문화재발굴기관의 조사원들이 냉천동이라는 동네의 성격을 단번에 파악하게 해주는 압축 파일입니다.



7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절차 한눈에 보기

문화유산 조사는 법이 정한 단계를 밟아 점점 깊이 들어가는 절차입니다. 냉천동에서 조사가 진행된다면 다음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문헌조사와 지표조사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옛 기록을 분석하고, 조사원이 지표면을 직접 걸으며 유물 산포 여부와 지형을 확인합니다. 땅을 파지 않는 단계로, 개발 사업의 첫 관문입니다.

표본조사

지표조사 결과 유존 가능성이 있는 구역에서, 사업 면적의 2% 이내를 선별해 굴착하여 문화층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시굴조사

유구의 분포 범위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사업 면적의 10% 이내에서 트렌치를 넣어 확인합니다. 냉천동이라면 옛 국유 밭 필지와 오래된 집터 밀집 구역이 관심 지점이 됩니다.

발굴조사

유구가 확인되면 전면 발굴로 전환합니다. 유구와 유물을 기록하고 수습하며, 조사 결과에 따라 보존 조치나 이전 복원이 결정됩니다.

보고서 작성과 활용

조사 성과는 보고서로 남아 학계와 시민에게 공유되고, 지역의 역사 콘텐츠로 다시 태어납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글도 그 활용의 한 형태입니다.


8실제 발굴 성공 사례, 땅이 돌려준 역사

작은 땅, 짧은 기록이라고 발견까지 작으란 법은 없습니다. 서울 도심의 세 장면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사례 1 · 동대문

야구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사시설

동대문운동장 부지를 공원으로 재개발하던 중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서울성곽의 일부와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하도감 터, 물길을 다스리던 이간수문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함성이 울리던 그라운드 아래에 조선의 국방 시스템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발견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옆 유구전시장으로 살아남아 지금도 시민을 맞고 있습니다. 도성의 문밖 동네라는 점에서, 서대문 밖 냉천동과 여러모로 닮은꼴의 사례입니다.

사례 2 ·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깨어난 백제의 왕성

송파구 풍납동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실시된 조사는 한국 고고학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흙벽 둔덕으로만 여겨지던 풍납토성이 조사 결과 한성백제의 도읍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대한 왕성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개발 직전의 땅에서 한 나라의 수도가 통째로 돌아온, 조사 제도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례 3 · 인사동

공사장 항아리에서 나온 세종시대의 금속활자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는 항아리 하나가 출토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고,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한글 활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항아리 하나가 묻혀 있던 자리는 몇 평도 되지 않았습니다. 발굴의 가치는 면적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밀도로 결정된다는 것을, 이 사례만큼 잘 보여주는 장면도 없습니다.

냉천동의 546평 밭 아래에, 그리고 그 곁의 오래된 비탈 마을 아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한 줄짜리 기록은 이미 우리에게 이 동네를 읽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9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단 1필지였으며, 면적은 1,804㎡였습니다.

1912년 냉천동 국유지의 지목은 무엇이었나요?

밭이었습니다. 밭 1필지 1,804㎡가 냉천동 국유지의 전부로, 논이나 대지, 임야는 국유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냉천동 국유지 1,804㎡는 어느 정도 크기인가요?

약 546평으로, 축구장 잔디 면적의 4분의 1 정도입니다. 같은 시기 서초구 서초동 국유지(202,453㎡)의 약 112분의 1 규모입니다.

국유지가 1필지뿐이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냉천동 땅의 사실상 전부가 민간 소유였다는 뜻입니다. 도성 가까운 성저십리 동네로서 오랜 세월 민간의 집과 밭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1912년의 지목과 필지 기록은 땅속 매장유산의 위치와 성격을 예측하는 기초자료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지표조사가 의무이며, 이러한 옛 기록 분석이 조사의 첫 단계가 됩니다.

1912년 서대문구 냉천동 국유지는 밭 1필지 1,804㎡, 시리즈에서 가장 짧은 장부였지만, 그 한 줄은 찬 샘가에 촘촘히 뿌리내렸던 민간의 삶과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가 들여다봐야 할 동네의 성격을 가장 압축적으로 담은 기록입니다.

한 줄의 장부

찬 샘물이 솟는 언덕 동네에


나라의 몫은 밭 한 뙈기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사람의 것이었다


물 긷는 새벽과 빨래터의 웃음


비탈에 층층이 앉은 지붕들



측량원의 붓이 지나간 자리에


단 한 줄, 1,804라는 숫자가 남았고



그 짧은 문장 속에


546평의 흙과


이름 없는 손들의 계절이 접혀 있다



긴 장부만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냉천동의 한 줄은 오늘도


누군가 펼쳐 읽어 주기를 기다린다

냉천동 일대 개발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00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함께합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미지 설명: 본문 표는 1912년 냉천동 국유지 현황으로, 밭 1필지 1,804㎡가 국유지의 전부임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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